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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4/500)

4화

나는 문도환의 조언에 계획을 수정하기로 했다.

대학교 근처에 투룸을 구해서 시하와 함께 살 것이다.

그러면서 조금 생각해 보는 거지.

앞으로 뭐 하며 살 것인지.

성급하게 결정할 필요는 없었다.

이게 다 형 덕분이다.

사실 2억이라는 돈은 어떻게 보면 시간적 여유를 주는 돈이었다.

하지만 쓰는 것에 망설임이 있었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라는 게 클 것이다.

시하에게 물려줄 재산이라고 생각하면 더더욱 쓸 수 있는 돈이 아니다.

시하가 커서 나중에 결혼한다고 하면 집안에서 해 줄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아무것도 없지.’

그래서 지금 이 돈이 소중하다는 거다.

결혼식 비용만 4천만 원 정도고.

아파트 한 채 값은 억이 넘는다고 했을 때 어느 정도는 부모 쪽에서 지원을 해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건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해 주고 싶었다.

왜나면 이 돈은 부모님이 우리 둘에게 물려주신 거니까.

-토요일 오전.

“시하야. 여기 어때?”

“아아.”

나는 시하와 함께 앞에 있는 건물을 바라보았다.

강인대학교에 가까이 있으면서도 1층에 빈방이 있는 곳이었다.

전세 1억 2천.

방수 2개에 욕실 수 1개.

여기를 계약하는 데 고민을 참 많이 했었다.

시하의 교육을 위해 일단 술집에서 거리가 좀 되는 곳이어야 했다.

너무 가까우면 여기 와서 술 먹고 토하는 대학생을 자주 볼 수 있으니까.

그렇다고 너무 멀면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했다.

시하에게 지옥철을 겪게 할 수 없지.

조사해본 결과 어느 정도 정상(?)인 대학생들과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물론 이 정보는 공인중개사무소 대표님에게 들었다.

이 바닥을 잘 아시는 분이었다.

“자. 이제 근처 편의점에 가보자. 이삿짐센터에서 지금 열심히 정리하시고 계시니까 음료수도 갖다 줄 겸.”

“아아!”

시하가 자신에게 맞는 장난감 캐리어를 들고 앞장을 섰다.

이사는 이삿짐센터가 알아서 해주는데 시하가 아주 본격적으로 이사 패션을 보인다.

나는 웃으면서 시하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빵빵한 엉덩이를 실룩이며 걸어가는 모습이 귀엽다.

저 작달막한 다리로 보폭이 작은 것도 귀엽고.

“형아.”

시하가 뒤를 휙 하고 돌더니 나를 불렀다.

“응. 빨리 오라고?”

조금 더 뒷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나는 시하 옆에 나란히 섰다.

시하가 원했으니까.

“오늘은 말이야. 아주 시원한 주스를 살 거야. 시하가 좋아하는 초코우유도 살 거고.”

“아아.”

“그런데 시하야. 계속 캐리어 끌 수 있어? 힘들면 형아가 들어줄까?”

도리도리.

시하는 자신이 할 수 있다는 듯이 자기주장을 펼쳤다.

저러다 지치면 내가 끌면 되지.

문제가 있다면 시하도 안고, 캐리어도 끌어야 한다는 점일까?

우리는 저기 앞에 있는 편의점까지 걸어 들어갔다.

“어디 보자. 커피 음료를 살까? 아저씨와 정리 잘해 주는 아줌마 힘내라고. 시하는 어떤 거 먹고 싶어?”

“아아.”

시하가 초코우유를 고를 줄 알았는데 캐릭터로 되어 있는 음료를 골랐다.

무슨 음료 뚜껑 위에 장난감이 달려 있는지.

이미 자신은 저게 마음에 들었다는 듯이 캐리어를 팡팡 때렸다.

난타 좀 치는데?

나는 시하가 바라는 대로 음료를 골라서 손에 쥐여 주었다.

여러 음료를 산 뒤에 시하와 함께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 정리가 다 끝나는지 아저씨들이 땀을 닦고 있었다.

“음료 마시면서 하세요.”

“아아.”

이삿짐 아저씨들이 흐뭇하게 시하를 바라보았다.

우리 시하가 귀엽기는 하지.

“어이구. 고마워. 이런 거 안 갖다 줘도 되는데.”

“그래도 고생하시는데 음료 정도는 대접해 드려야죠.”

“이거 다 돈 받고 하는 건데. 뭐.”

“그래도요.”

“하하. 이거 가정교육을 잘 받았…….”

그렇게 말한 아저씨 옆에 청년이 옆구리를 푹 하고 찔렀다.

아무래도 우리 형제를 가정 사정을 걱정해 주시는 거겠지.

그냥 편하게 말씀하셔도 되는데…….

확실히 아무것도 모르면서 저런 작은 배려를 해준다는 게 감사하는 한편.

‘나는 괜찮은데.’, ‘이런 배려는 안 해줘도 되는데.’라는 생각이 함께 들었다.

“하하. 인성이 아주 좋아. 내가 사장님이었으면 바로 고용했다.”

옆에 청년이 한숨을 쉬었다.

“이 힘든 일에 고용돼서 누가 좋아해요?”

“시끄러워, 임마. 나는 그래도 이 일에 자부심이 있다고. 이걸로 내 애들 다 먹여 살렸어. 왜 이래.”

“어휴. 음료나 먹고 짐이나 날라요. 응?”

시하가 캐리어를 툭 하고 놓더니 상자를 탁 하고 잡았다.

물론 무거우니 꼼짝도 안 한다.

그 모습을 보며 우리는 미소를 지었다.

“우리 시하 이거 도와주려고 하는 거야? 정말 착하네.”

“으하하. 이거 형제들의 인성이 장난 아니구만. 좋아. 둘 다 고용하지.”

“그만하시고 이제 마무리하죠. 거의 다 끝났구만. 저기 시하야. 그거 빈 통이야. 지지야. 지지.”

“아아.”

당연히 시하는 못 알아들었다.

하지만 지지라는 말은 알아들었는지 손을 떼고 나에게 쪼르르 달려와 보여준다.

거멓게 된 손이 보였다.

“형아.”

“그래. 닦아줄게. 잠시만.”

나는 시하가 내려놓은 장난감 캐리어를 열었다.

안에는 아끼는 각티슈와 물티슈가 함께 있었다.

나는 물티슈를 빼서 시하의 손을 닦았다.

“지지야. 지지.”

“아아.”

“자. 깨끗해졌지?”

“아아.”

시하가 손을 탁탁 털었다.

그러고는 문으로 쪼르르 가버렸다.

“시하야. 같이 가.”

나는 캐리어를 닫고 따라갔다.

우리의 새 보금자리로.

***

강인대학교 51호관.

현재 나는 국문과에 와 있었다.

시하는 잠시 문도환에게 맡기고 왔다.

눈앞에 학과장인 교수님의 이름이 보였다.

[교수 김호섭]

나는 문을 두드렸다.

똑똑.

“들어오세요.”

교수님의 인자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어서 와. 기다리고 있었어. 앉아.”

“네.”

나는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김호섭이 앉으며 포트에 물을 끓였다.

“커피 좋아하나? 아니면 차?”

“커피로 부탁드립니다.”

“부모님의 부고 소식은 들었어. 하필 그때 내가 다른 일이 있어서 가질 못했네.”

“괜찮습니다. 저한테도 갑자기 일어난 일이어서 여러 사람에게 연락 못 했습니다.”

“정신없을 만하지. 시혁이 네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건데.”

“네…….”

나는 커피를 끓이고 있는 김호섭을 보았다.

성균관대학교 출신.

연구과제는 현대소설, 문학비평, 지역문학 등으로 기억한다.

언제나 자기 연구과제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을 말씀하셔서 기억하고 있다.

현재 학과장을 하시고 계시며, 내게 장학 사정관을 추천해 주실 분이다.

“이야기는 들었다. 1학기는 일단 무료고 2학기는 어떻게 될지 모르니 장학 사정관 추천 장학생 전형으로 장학금을 받고 싶다고.”

“네. 아무래도 성적이 떨어지고 과탑 유지는 못 할 거 같아서요.”

“나도 자식이 있어서 알아. 그건 걱정하지 마. 추천해줄 테니까.”

“감사합니다.”

“가족관계증명서도 필요하니 떼 오고.”

“네.”

김호섭은 다 끓인 커피를 내 앞에 놓았다.

“과탑에 들었으니 교외 장학금도 받을 거야. 사실 이번에 생긴 장학금이거든. 이게.”

“저도 처음 들었어요.”

“이건 등록금에서 제외하는 게 아니라 현금으로 주는 거야. 상위 3명.”

“어떻게 그럴 수 있죠?”

“왜냐면 이건 너희 선배들이 우리 학과에 기부한 거니까. 물론 잘 버는 선배들이 기부금을 보내는 거긴 하지만. 그래서 학교 돈이 아니니 너희들에게 현금으로 주는 거고.”

“아.”

“금액은 100만 원이다.”

성적 잘 나왔다고 100만 원을 받는 거면 상당히 큰돈이었다.

아무것도 안 하고 받는 거니까.

나는 조금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 이렇게 잘 벌어서 학교 후배들을 위해 기부하는 선배가 있구나 싶었다.

“신기하네요. 대체 얼마나 벌기에 이렇게 많은 금액이.”

“한 명에게만 들어온 건 아니지.”

한 명에게든 아니든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 같았다.

상위 3명이면 4학년 합쳐서 12명이라는 소린데.

1200만 원이 나가는 거다.

이 밖에도 학생들을 위해 다른 곳에도 쓰일 거고.

“뭐. 그중에 엄청 잘 버는 놈이 있긴 하지만. 그런 이야기는 제쳐두고.”

저는 그 얘기가 너무 궁금한데요.

“이런 장학금 이야기를 하려고 부른 건 아니고. 겸사겸사 불렀지.”

장학금 말고 학과장님이랑 할 이야기가 있었나?

“크흠. 자택 근무를 생각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아…….”

“도환이가 말해 주더라. 혹시 좋은 알바 자리 없냐고.”

“형도 참 뭘 그런 것까지 물어보고. 교수님. 제가 알아서 할게요. 저 생각보다 능력 있는 놈이거든요. 그래서 제가 시하 키우려고 결심한 거고요.”

“능력은 모르겠고. 확실히 결단력은 있는 것 같더라. 그러니까 애 키울 생각을 하지.”

“하하.”

“내가 2년 동안 좋게 보기도 했어. 여기 입학할 당시에 면접 기억하지?”

“아…. 그거 아직도 기억하고 계셨어요?”

“당연하지. 그 정도로 자신감 있게 말하는 놈은 처음 봤다.”

입학 당시 면접관이 김호섭이었다.

그날 김호섭의 질문은 아주 간단했다.

대학교에서 자주 묻는 질문.

왜 우리 과에 지원했냐?

그 당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제 성적으로 갈 수 있는 가장 괜찮은 학과라서입니다. 아버지가 다녔던 학과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열심히 공부해 1, 2학년 때 학점 엄청 따고 3, 4학년 때 여유롭게 취업 준비를 하고 싶습니다.」

「굉장히 꿈도 낭만도 없는 답변이야. 다들 면접을 이렇게 준비 안 하던데?」

「다들 말은 하지 않았지 거창한 이유는 없을 겁니다. 혹시 지금 한 말 영어로 해 볼까요? 이거는 조금 자신 있는데.」

「자네 여기가 국문과인 건 알지?」

그 당시에 대학 첫 면접이라 긴장해서 뇌를 거치지 않고 답변이 나왔다.

나중에 집에 가서 이불을 팡팡 걷어찼었지.

설마 김호섭이 그런 것까지 기억할 줄은 몰랐다.

“부끄럽네요.”

“나는 굉장히 인상적이었어. 나중에 왜 영어를 자신 있게 말하는지 알게 되었지만.”

김호섭이 아이패드를 꺼내더니 어떤 파일을 보여 주었다.

“혹시 아버지와 같은 길을 갈 생각은 없나? 내가 연결해 줄 수 있는 자택 근무 알바는 이 정돈데?”

“그러면 저야 정말 고맙죠.”

나는 김호섭에게 받은 패드를 보았다.

영어로 된 자기계발서 같은 느낌이었다.

번역할 출판사의 이름은 KI 미디어.

영어로 되어 있는 책은 원고지 200자 기준으로 20매에서 끊어져 있었다.

“어?”

김호섭이 말했다.

“그건 샘플이지. 내가 파일을 보내줄 테니 번역해서 출판사에 메일을 보내면 될 거다. 그러면 거기서 판단하겠지. 나야 그냥 연결해 주는 거니까 너무 고마워하지 말고.”

“아니요. 이 정도만 해 주셔도 충분하죠. 감사합니다. 학과장님.”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네가 열심히 해서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거지. 다 네가 잘해서 그런 거야.”

“그런 것치고는 친구가 별로 없는데요.”

“그건 네가 학점을 다 쓸어 넣으며 2년을 보냈으니까 그런 거고. 이건 뭐 24시간 청소하는 청소기도 아니고.”

“어쨌든 감사합니다!”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고 난 뒤, 방을 나서려고 했다.

“거 아이패드는 주고 가야지! 그거 해외 직구로 구한 건데.”

“아, 맞다!”

나는 살짝 아쉬움을 담아 패드를 주었다.

김호섭은 정말 소중하다는 듯이 패드를 잽싸게 낚아챘다.

확실히 저거 비싼 거였지?

그러면 소중히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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