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9화
—으, 으악! 왜 이러십니까! 전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
—닥쳐. 잘라 버리기 전에 바지 치켜.
놈이 바지춤을 수습하자마자 목 뒤를 쳐서 기절시켰다. 밧줄로 팔다리도 꽁꽁 묶었다. 몸뚱이가 왜소한 놈이라 자루에 욱여넣긴 쉬웠다. 하녀들이 가져온 짐수레에 그놈을 자루째 싣고 들어와 라벤더궁 옆 헛간에 던져놨다.
그리고 테렌스에게 찾아가 놈의 혐의를 일러바쳤다. 참 공교롭게도, 조사 결과 놈의 정체는 황태자궁 하인이었다. 테렌스는 그를 바로 해고한 뒤 검찰관을 불러 기소 절차까지 밟아 줬다. 미행 자체로는 범죄가 성립이 안 돼서 강간 미수죄를 적용할 수밖에 없었다.
테렌스의 외압이 있으니 모든 게 일사천리였다. 재판이 무려 다음 날 열렸다. 놈은 그저 제인을 짝사랑했을 뿐이라고, 털끝도 안 건드렸다고 항변했지만 재판관은 방청석에 앉은 테렌스의 눈치를 보며 징역형을 선고했다. 고작 1년 형에 불과하긴 했지만…… 테렌스는 내 덕에 쓰레기를 하나 치웠다면서 미행 자체를 범죄로 규정하는 법을 도입하겠다고 약속했다.
하녀들은 이제야 한숨 돌렸다며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일이 깔끔히 마무리된 건 황태자 뒷배 덕이라고 차마 말할 순 없어서, 난 멋쩍게 웃기만 했다.
—발레리아나 경, 저희도 경처럼 강해지고 싶어요. 얼마든 낼 수 있으니 검술을 가르쳐 주시면 안 될까요?
—하하, 돈은 됐으니까 언제든 저 비번일 때 오세요.
—아유, 어떻게 공짜로 배우나요. 그것도 황궁 기사님한테.
—그럼 간식으로 주시든가요.
수업은 그제부터 시작했다. 하녀들은 평소 운동량이 꽤 되는 편이라 힘도 좋았고 동작도 곧잘 따라 했다. 기초 체력이 되니 과거의 황녀님보다 훨씬 가르치기 쉬웠다. 하녀들도 재미있어 했다.
언제나 내 주머니는 하녀들이 건넨 간식거리로 불룩했다. 하녀들 사이에서 인망이 두터워지자 기사 선배인 그레이 경은 날 놀렸다.
—아주 하녀들의 연인 납셨네. 평민 출신이라 급 맞춰서 노는 거냐? 원래 기사들은 귀족 출신인 시녀들하고 잘 어울려야 해. 시녀들한테 잘 비벼 보면 좋은 혼처라도 소개해 주지 않겠어?
충고랍시고 별 같잖은 소리를 해대길래 들은 척도 안 했다.
아무튼 그런 와중에 내가 웬 남자를 침실에 들여서 잠을 잤단 사실이 알려지게 됐다.
후, 이제 하녀들 사이에서 내 인기는 추락하려나…?
아니야, 그럴 리 없지. 다 큰 성인이 애인이랑 하룻밤 잔 게 뭐 대수라고.
대충 씻고 튜닉을 챙겨 입은 뒤 밖으로 나왔다. 밤새 흠씬 얻어맞은 것처럼 온몸이 욱신거렸다.
가장 후유증이 큰 건 아래쪽이었다. 사람 거시기가 왜 그렇게 쓸데없이 크지? 내 건강을 생각한다면 한 일주일은 금욕해야 할 것 같다.
계단을 내려가려고 발을 뻗는데 다리도 후들거렸다.
“아윽, 힘이 안 들어가네. 설마 내가 잠든 뒤에도 계속 해댔나…?”
테렌스의 얄미운 면상을 떠올리며 혼잣말을 하던 와중에, 2층 창가에서 하녀 네 명을 목격했다. 세 명은 내 검술 제자들이고, 한 명은 다람쥐를 닮은 이름 모를 하녀다. 그들은 자루걸레를 들고 수다를 떨고 있었다.
잠깐 망설이다가 내가 먼저 인사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앗, 발레리아나 경. 안녕하세요.”
“하하, 네.”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기분 탓이라고 애써 자위하며 네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봤다.
왼쪽부터 레티샤, 캐시, 제인, 그리고 다람쥐상 하녀. 오늘 내 방엔 누가 왔다 갔을까. 문제는… 네 명의 눈빛이 모두 음험했다. 하녀들은 복화술로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했네. 했어.’
“경, 궁금한 게 있어서 그런데, 그냥 물을게요.”
갈색 머리를 높이 올려 묶은 레티샤가 운을 뗐다. 나는 침을 삼켰다.
“…네.”
“켄드릭 경이에요? 아니면 게일 마법사님?”
“뭐가요?”
이게 무슨 질문이지? 설마 내가 지난밤에 누구랑 잤는지 묻는 건가?
“…아, 아니에요. 그럼 저흰 이만 청소하러 가 볼게요.”
내가 어물거리는 사이에 하녀들은 각자가 맡은 구역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아니 사람이 질문을 할 거면 끝까지 해야지…. 그렇게 이름 두 개만 들이밀면 어떻게 대답을 하느냔 말이다.
아오…! 둘 다 아니라고 이 인간들아!
***
“경하고 제가… 잤다는 소문이 돌더라고요.”
“푸웁.”
게일의 얼굴에 무수한 물방울이 난사됐다. 전부 내 입에서 튀어 나간 거다.
왜 하필이면 분수대에서 물 마시는 사람한테 그런 소릴 하냐고요, 이 미친 마법사 새끼야.
물이 코로도 빠져나왔는지 코까지 매웠다. 아우, 쓰라려.
게일은 침착하게 로브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제 얼굴을 닦아냈다. 나는 옷소매로 코밑에 흐른 물을 슥슥 훔치며 주변을 살폈다.
지금 라벤더궁 앞뜰에는 우리 둘뿐.
“물 뿜어서 미안해요. 게일 님, 그 소문 어디서 들었어요?”
“며칠 전에 로저 경한테서요. 너무 조심스럽게 돌려 물으셔서 처음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다니까요.”
“하, 진짜…. 로저 경은 또 어디서 들었대요?”
“음, 이름이 뭐더라. 설치류 닮은 하녀였는데. 아무튼 로저 경이 알 정도면 아마 라벤더궁 사람들은 다 알지 않을까요. 아마 지금쯤이면 황녀님 귀에도 들어갔을 거예요.”
“…….”
내 침실에 다녀간 범인은 그 다람쥐상 하녀였나 보다.
하녀들의 소문 전파력은 과연 알아줄 만했다.
테렌스 그 인간이 내 방에 다녀간 지 고작 사흘이 지났다. 겨우 3일 만에 건물에 소문이 쫙 돌아버리다니. 하하하. 이젠 내 머리가 돌아버릴 차례인가 보다.
“그, 저기… 발레리 경. 왜 그런 소문이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미안해요. 제가 괜히 경한테 치근거려서 폐를 끼친 것 같아요. 데이트 한 번 못한 사이에 이렇게 돼서 정말 유감이에요.”
“아, 게일 님이 사과하실 필요는 없어요. 그 소문 저 때문에 난 거예요. 제가 애인을 방에 들였는데, 그 흔적을 하녀들이 보고 오해한 것 같아요.”
“…애인 있어요?”
“네.”
애인이 있다는 사실 자체는 숨길 필요가 없긴 했다. 방에 자취를 남기고 가겠다는 테렌스의 말에 개의치 않았던 이유다. 솔직히 말하면, 이젠 애인이 누군지 밝혀도 상관없을 것 같기도 하다.
왜냐면 아무도 안 믿을 테니까. 세상에 어떤 광인이 믿겠는가…. 하급 기사까지 신분이 수직상승했어도 나는 여전히 테렌스와 비빌 급이 아니었다.
그나저나 왜 하필이면 켄드릭이 아니라 게일하고 소문이 난 건지 모르겠다. 쪽지가 존댓말로 쓰여 있어서인가…? 지금 라벤더궁에서 내게 존대하는 동료는 게일뿐이긴 하다. 로저 경과 그레이 경은 날 후배로 대하며 말을 놓기 시작했으니까.
“…경에게 그새 애인이 생겼다니 그것도 유감이네요. 지금 저 또 차인 거 맞죠?”
“예? 차이다뇨? 게일 님 저 좋아해요?”
“음, 그렇게 물어보시면 전 어떻게 답해야 할까요. 이전에 석실에서 일할 때… 그때처럼 경솔해 보이기 싫어서 이번엔 좀 시간을 좀 들이려고 했어요.”
초여름 햇살이 참 무심하도록 쨍했다. 나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게일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쭈뼛쭈뼛 시선을 피하며 얼굴을 붉히는 게… 생각해 보니 내게 말을 걸 때마다 늘 이런 표정이었던 것 같다.
이제야 깨달았다. 나 새끼는 눈치가 정말 더럽게 없구나. 정말 이 앳된 빨간 머리 마법사가 날 보려고 30분씩 일찍 나오는 게 사실이었구나.
차라리 켄드릭 놈이 나보다 눈치가 나은 편이구나.
“아하하… 게일 님은 제가 왜 좋으실까요?”
“그, 그 이유를 일일이 다 말씀드려야 하나요?”
“말하기 싫으시면 말고요.”
“아, 아니에요. 처음에는 외모 보고 반했어요. 키도 크고 늘씬한데 근육까지 붙어있으니까 너무 멋있어서요. 같이 일하면서부터는 이야기 나눌수록 성격도 유쾌하시고, 친절하시고, 또….”
“또?”
“까만 눈이 정말 예뻐요.”
게일이 내 눈을 말긋말긋 올려다보며 미소했다. 민망하니까 그만 말하라고 하려다가, 그냥 놔뒀다. 외모 칭찬이 오랜만이라 끝까지 듣고 싶었다.
“짧은 머리도 잘 어울렸는데 지금처럼 단발에 반묶음 한 것도 귀엽고요. 이제 보니까 입술도 도톰해서 키스하고 싶… 아, 아니 제가 무슨 말을….”
바스락.
분명 무슨 소리가 들렸다. 나는 촉각을 곤두세우며 소리의 근원을 찾았다. 아, 저기인 것 같다. 분수대에서 다섯 걸음 뒤에 있는 풀숲.
토끼. 제발 토끼여라.
나는 얼른 그 뒤편으로 달려가서 기척을 확인했다.
빌어먹을.
동물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하나도 아니고 둘이다. 정원사 트레버와 하녀 캐시가 쭈그려 앉아있었다.
“캐시, 트레버. 여기서 뭐 해요?”
“엿들어서 미안해요. 축하해요, 발레리아나 경!”
캐시는 얼굴이 홍당무처럼 익어서 건물 안으로 쪼르르 도망갔다. 그녀와 함께 앉아있던 정원사 트레버는 잔디에 떨어진 가위를 집어 들며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저기, 트레버. 캐시가 왜 축하한다고 하는 거예요? 어디서부터 들었길래요?”
“허허허, ‘게일 님은 제가 왜 좋으실까요?’부터 들었지. 거, 발레리아나 경, 다 좋은데… 황녀님 앞에서는 그런 염장 지르지 말아요. 25년째 혼자이신 분이 얼마나 부럽겠수?”
“아니에요, 트레버. 뭘 들었든 아니에요. 저 게일 님이랑 안 사귄다고요.”
“아이고, 됐네요. 기사랑 마법사는 맨날 싸워대는 줄만 알았는데 이런 일도 있네. 나도 축하합니다. 음, 뒤뜰에 가봐야겠다 난!”
트레버는 손에 든 가위를 철컹거리며 라벤더궁 뒤편으로 사라졌다. 나와 게일은 한참을 한 자리에 서 있었다.
지금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일까….
나와 게일의 무근거 열애설은 그때부터 본격화됐다.
***
다음날 출근하자마자 황녀님께 이런 질문을 받았다.
“발레리, 게일이랑 바람피웠어요?”
그래. 이러실 줄 알고 아주 깔끔한 대답을 준비했지.
“하하, 그럴 리가요. 지엄하신 황태자 전하를 두고 어떻게 그런 후안무치한 짓을 벌이겠어요. 무엇을 들으셨든 모두 거짓부렁이에요.”
“흠, 그런 것치곤 증언들이 너무 자세하던데요. 트레버 말로는 앞뜰에서 키스 직전까지 갔다고 그러던데. 오빠랑은 후문에서 키스하고, 게일이랑은 정문에서 하는 건가요?”
이건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키스 직전? 게일하고 나는 그 흔한 악수조차 해본 적이 없는 사이다. 그러니까 손가락조차 닿은 적이 없다고.
키스 얘기는 대체 왜 나왔을까. 게일이 내 입술이 어쩌고저쩌고하는 순간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긴 했는데.
기가 막혀서 벙벙해 있으니 황녀님은 재밌다는 듯 쿡쿡 웃었다.
오라버니의 애인이 바람을 피웠다는 소문에 왜 즐거워 보이시는 거죠…? 혈육을 배신한 자에게 화를 내는 게 정상 아닌가요…?
“발레리, 왜 그렇게 살벌한 눈으로 쳐다봐요? 무섭게….”
“웃으실 일 아니에요. 맹세코 전 그런 적이 없어요. 그 마법사하고는 아무 사이 아니에요. 정말 억울해요.”
“에이, 재미없게 왜 그래요. 그냥 콱 한번 바람피워 보면 어때요? 오빠가 울고불고하는 거 한번 보고 싶다….”
아무래도 황녀님은 테렌스에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는 게 틀림없다. 혈육이 울고불고하는 모습이 왜 보고 싶은 건지 알 수가 없다. 내가 혈육이랄 게 없어서 이해하지 못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하윽, 황녀님. 제발 믿어주세요. 제 방에 테렌스가 뭘 놓고 갔는데 하녀들이 그걸 게일이 남긴 걸로 착각해서 그런 거예요.”
나는 두 손을 모아 읍소했다. 억울해서 진짜 눈물이 다 난다. 황녀님은 울먹이는 날 툭툭 두드리며 위로해 주셨다.
“알아요, 발레리가 그런 짓 할 위인은 못 되는 거. 진심으로 해명한다면 다들 믿어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