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8화
“마력석 광산으로 발령 내고 싶을 정도야.”
“…그러진 말고요. 공과 사는 구분해야죠.”
“공사 구분이고 뭐고 난 저자가 눈에 안 띄었으면 좋겠다. 앞으로 저자와 술은 한 모금도 마시지 마.”
이렇게까지 솔직해도 되는 건가.
잔망스럽기까지 한 질투가 내겐 미친 듯이 사랑스럽다.
당장 껍질을 벗겨서 한 입 깨물어 버리고 싶을 만큼.
나는 얼른 그의 제복 단추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문득 궁금한 게 생겼다.
“알았으니까 쓸데없는 질투는 넣어둬요. 근데 내 방 앞엔 어떻게 찾아온 거예요?”
“프리다한테 들었어. 네가 저자와 밤에 술 약속이 있다고.”
“참 나, 그래서 나 언제 들어오나 기다렸던 거예요? 복도 괘종시계 옆에 숨어서?”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방문까지 따라온 걸 보고 바로 쫓아내려 했지만… 무슨 수작을 부릴지 일단 지켜봤지. 감히 네게 키스를 요구할 줄은 몰랐다.”
“…자고 갈 거죠?”
“아니, 안 잘 거야.”
뭐라고?
나는 단추를 풀다 말고 동작을 멈췄다.
새로운 장소에서 몸을 섞을 생각에 들떠 있었는데… 안 하겠다고?
“…그럼 더 늦기 전에 가요.”
어쩔 수 없지. 그 좋아하는 밤일조차 하기 싫을 정도로 속이 불편하다면. 이제 내 손은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다. 단추를 다시 채워야 하니까.
난 볼을 부풀리며 그의 얼굴을 불만스럽게 쳐다봤다. 이상하다. 양쪽 입꼬리가 매끈한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내 말은, 잠을 안 잘 거라고. 아침까지 널 안겠다는 뜻이다.”
내 입술이 곧장 뭉개졌다. 뜨거운 혀가 좌우를 오가며 내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교대로 쓸었다. 마치 누군가의 흔적을 닦아내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입안에 들어와서는 치열과 입천장, 혀 밑의 설소대까지 구석구석 훑고 문질렀다. 무슨 악어새도 아니고, 정말 내 입안을 청소라도 하려는 것 같았다. 웃음을 참으며 콧잔등을 구겼다.
작업이 끝났는지 테렌스는 이제 평소처럼 부드럽고 농밀한 입맞춤을 해 왔다. 혀를 깊이 얽으려는 찰나에 그가 갑자기 입술을 떼며 고개를 뒤로 물렸다. 나는 놀라서 굳었다. 혀를 입밖에 내민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갑자기 왜 그래요?”
혀를 얼른 집어넣으며 이유를 물었다. 그는 상기된 얼굴로 나와 이마를 맞댔다. 흥분해 있는 걸 보니 싫어서 뗀 건 아닐 텐데.
“약속해.”
“뭘요?”
“앞으로 평생 나랑만 입 맞추기로.”
“…당연한 소릴 하고 그래.”
그때 턱, 하고 그의 왼손이 쇄골 아랫부분에 얹혔다.
“여기도. 나만 만질 수 있게 해줘.”
나는 픽 웃으면서 내 제복 단추를 빠르게 끌렀다. 그는 충분한 틈새가 보이자마자 안에 손을 넣고 속옷을 끄집어 올렸다.
흐트러진 재킷 사이로 내 맨살이 드러났다. 테렌스는 정신없이 내 앞섶을 풀어헤치며 나를 침대 쪽으로 밀어 눕혔다.
몸이 포개졌다.
귓가와 목덜미, 빗장뼈에 뜨거운 입술이 차례로 닿았다 떨어졌다.
섬세한 손끝이 또 속살을 지분거렸다. 아직 닿지도 않은 부분이 둥글게 부풀며 그의 손길을 기대했다.
“여기도.”
촉, 하고 그가 선단에 입을 맞췄다. 이윽고 뜨끈한 혀끝이 단단해진 살덩이를 꾹 눌렀다.
“…내 거야.”
그가 작게 속삭이며 할짝댔다. 나랑 얘기하는 건지, 내 몸이랑 얘기하는 건지, 낮게 깔린 목소리가 색정적이었다.
나는 그의 뒷머리를 감싸 안으며 그의 입술을 내 몸에 더 밀착시켰다.
“그래. 다 자기 거야.”
역시 침대에 누우니 낯간지러운 애칭이 잘도 튀어나온다. 그는 손끝으로 내 복근을 간지럽히며 입으로 하는 짓에 몰두했다. 왼손이 점점 내려오고 얼마 안 가 모든 천이 풀려나갔다.
“아흣…!”
어느 시점에서 말초신경이 정전기처럼 파박 튀었다.
“발레리.”
“흐으응… 네….”
입에서 콧소리가 나왔다. 그가 밀고 들어올 때마다 난 정말 의식 없이 괴상한 소리를 흘린다.
테렌스는 바지 뒷주머니에서 약병을 꺼내 내 입에 물려줬다. 쓰디쓴 물약이 입안을 잠식했다. 그는 내 입안에 고인 액체를 쪽 빨아들이며 딱 절반만큼을 가져가 삼켰다.
피임제를 소분해서 가지고 왔다니. 이 남자의 준비성은 정말 알아줘야 한다. 내 방엔 약이 없어서 오늘은 끝까지 못 갈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어쨌든 마음이 놓였다.
“…나 말고 아무도 몰랐으면 좋겠어.”
“……?”
“네가 이렇게 야한 몸이란 걸.”
그가 느릿느릿 움직이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혼잣말인 것 같기도 하고… 사실 자극에 집중하느라 뭐라고 하는지 잘 들어오지 않았다.
테렌스와 나는 침대를 벗어나 커피 테이블과 소파, 책상을 오가며 엎치락뒤치락 서로를 탐했다. 마지막에는 벽에 붙은 채 서서 그를 받아들였다. 사람의 탈을 쓴 짐승 두 마리라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기 직전에 침대로 돌아왔다. 우린 창가 쪽을 바라보며 모로 겹쳐 누웠다. 아직도 그는 내 몸에 찰싹 달라붙어 움직이고 있었다. 솔직히 나는 이제 지치기 시작했다.
졸려서 힘이 점점 빠진다. 나는 우리가 머물렀던 자리를 눈으로 훑었다. 가구와 카펫 위에 희끄무레한 얼룩들이 낭자했다. 저거 냄새도 날 텐데…. 아침에 방 치우러 오는 하녀가 보면 기함하지 않을까….
“테렌스….”
“응.”
“저기랑 저기… 이따가 닦고 가….”
난 잠에 먹혀든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창밖을 보니 하늘이 부옇게 밝아졌다. 우린 정말 밤을 새워서 붙어먹고 있었다.
“그 명령은 따르기 싫은데.”
“왜…? 황태자라 허드렛일은 싫어…?”
“아니. 하녀들도 알아야 하지 않겠나? 네게도 연인이 있다는 걸. 뒤처리는 하겠지만 자취는 남기고 가겠다.”
“…그러든가.”
난 지금이 몇 번째인지 속으로 세어 보다가 어슴푸레 잠에 빠졌다. 그는 내 뒷덜미에 입 맞추며 내 등에 가슴을 밀착했다.
“…그때 일 이후 라벤더궁 하녀들도 널 흠모한다더군. 잘생기고 몸도 좋고 잡일도 잘 돕는다며…. 요즘은 하녀들에게 무료로 검술을 가르쳐 준다지? 인기 관리는 좀 적당히 할 순 없나? 하녀들까지 경계하긴 싫어서.”
“…….”
“…자나? 내 베개송사 안 끝났는데.”
눈을 떴을 땐 해가 중천이었다.
지각인 줄 알고 발작하면서 일어났다. 헐레벌떡 서랍에서 새 속옷을 꺼내 입다가 오늘은 토요일이란 게 떠올랐다.
얼른 가구들을 확인했다. 커피 테이블은 깨끗이 닦여 있었다. 벽쪽 카펫에 떨어진 자국들도 가까이서 안 보면 모를 만큼 희미했다.
어…? 책상에 못 보던 게 있다. 작은 쪽지가 놓여 있었다.
「자기, 잘 잤나요? 시킨 대로 지난밤의 흔적은 처리하고 갑니다. 잠을 너무 뺏은 것 같아 깨우지는 않겠습니다. —당신의 비밀 연인」
“뭐야, 어울리지 않게 존대는….”
이걸 설마 누가 보진 않았겠지. 나는 얼른 화장대 옆에 세숫물이 받아져 있는지 확인했다.
……가득 채워져 있는 걸 보니 방에 하녀가 다녀간 모양이다. 그래, 그러고도 남을 시간이지.
나는 침대에 다시 앉아 내가 어떤 상태로 깨어났는지 떠올렸다. 잠결에 걷어찬 이불이 발끝에 걸려 있었던 것 같다. 당연히 몸엔 아무것도 안 입고 있었….
침대보에는 코를 댈 필요도 없이 남자 냄새가 확 풍겼다. 아으, 향수라도 하나 사둘 걸 그랬다.
쪽지를 못 봤더라도 내가 자는 꼴만 보고 알 수 있었을 것 같다. 내가 지난밤에 웬 남자랑 질펀하게 뒹굴었다는 사실을.
잠들 때쯤 테렌스가 라벤더궁 하녀들 얘기를 한 게 얼핏 생각났다. 아마도 하녀들에게 내가 연인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었던 것 같다.
그의 말대로 나는 하녀들에게 인기가 좀 있는 편이었다.
사실을 고백하자면 나는 그 인기를 상당히 즐기고 있었다.
내가 라벤더궁에 부임하자마자 하녀들은 내 외모에 주목했다. 남자치곤 꽤 곱상해서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녀들은 내가 여자란 사실이 알려진 뒤에도 흥미를 거두지 않았다.
—어쩜, 여자 몸이 이렇게 단단하고 잘빠졌어요? 어깨 만져 봐도 돼요?
—나는 팔뚝도 만져 볼래. 아으, 너무 좋다. 운동을 얼마나 해야 이렇게 될 수 있는 거예요?
—우리 발레리아나 경은 웃는 얼굴도 깜찍하잖아. 황녀 전하께서 검술 선생으로 콕 찍은 이유가 있다니까! 자, 이거 먹어요. 호두 듬뿍 넣어서 만든 토피 사탕이야.
다른 기사들과 달리 평민 출신이다 보니—사실은 그보다 못한 거지 출신이지만— 하녀들은 내게 편하게 잘 대해 주었다.
나는 라벤더궁에 얹혀사는 객식구이기에 하녀들과 마주칠 일이 많기도 했다. 특히 가득 찬 양동이나 탑처럼 쌓인 수건을 들어 주면 정말 좋아했다.
얼마 전에는 황녀님과 검술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데, 하녀 세 명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은화 몇 닢을 건넸다. 얼핏 이름을 기억하기로는 레티샤와 캐시, 제인이었다.
—발레리아나 경, 우리한테도 검술을 가르쳐 주면 안 되나요? 한 달 수강료로 이 정도는 낼 수 있을 것 같은데….
—검술을 배우고 싶다고요? 갑자기 왜요?
—제인이 밤에 퇴근할 때마다 이상한 놈이 자꾸 따라붙어서… 저희가 같이 혼내주고 싶어요.
하녀 레티샤가 옆에 선 제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손에 받아든 은화는 다시 그들에게 넘겨주었다. 이건 검술을 가르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었다.
—제인.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치안대에 신고하러 가시죠. 제가 증인이 돼 드릴게요.
—치안대에는 이미 찾아갔었어요. 하지만 제가 뭘 당한 게 아니면 처벌이 안 된다고 해서….
제인은 급기야 훌쩍이기 시작했다. 벌벌 떨리는 손으로 눈물을 훔치는 모습이 가슴이 쓰라릴 정도로 안타까웠다.
분통이 터졌다. 미친놈한테 뒤를 밟히고 있는데 뭘 당하기 전까지는 신고조차 안 먹힌다고? 그럼 이 하녀가 느끼는 두려움과 정신적인 피해는 어쩔 건데? 범죄를 예방할 의지조차 없으면 치안대가 이 나라에 왜 있는 거지?
—그렇다면 어쩔 수 없네요. 제가 직접 혼내줄게요.
내 특기를 발휘할 날이 왔다. 도적단에서 미행 기술을 괜히 익힌 게 아니다.
그날 제인에게는 일부러 늦게 퇴근하라고 당부했다. 밤이 들자 나는 제인을 멀찍이서 따라붙었다. 황궁 문밖으로 나가니 하녀들의 말대로 제인의 뒤를 쫓는 쥐새끼가 하나 포착됐다. 그러니까 그 쥐새끼가 제인을 따라가고, 내가 그 쥐새끼를 쫓는 모양이 됐다.
뒤를 밟다 보니 제인은 행인이 여럿 있는 넓은 길로만 걷고 있었다. 목적지를 대충 가늠했을 때 지름길이 따로 있을 텐데도 말이다. 아마 스스로를 지키는 방법은 이런 길밖에 없었겠지. 착잡했다.
제인이 인적 드문 골목길로 들어서자, 쥐새끼는 바지 앞섶을 풀더니 제 물건을 혼자 흔들기 시작했다. 이대로 보고 있다간 눈이 썩을 것 같아서 바로 뒤를 급습해 검으로 제압했다. 정말이지 시시한 놈이었다. 단검 한 자루조차 들고 있지 않았다. 아마 장검에 방패까지 들고 있었어도 내가 가뿐히 이겼을 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