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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157)화 (157/173)

외전 4화

제국 최초의 여자 기사가 된 이후 무려 첫 출근이란 걸 했다.

내 팔자에 기사라니. 일 년 전 병사로 징집된 날과는 전혀 다른 기분이었다.

암적색 기사 제복은 나와 잘 어울리는 편이었다. 채워야 할 단추가 많고 견장이 좀 무겁긴 했지만 그만큼 태가 났다. 거울을 보니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이 옷차림을 하고 라벤더궁 앞까지 다다르니 왠지 더 긴장이 됐다.

“후….”

한 번 심호흡하고 이마의 땀을 훔쳤다.

정문으로 한 발짝 들어서자마자 나랑 같은 옷을 입은 거대한 남자 하나가 앞을 가로막았다.

웬 놈이 첫날부터 텃세를 부리나 했는데, 켄드릭이었다.

“발레리, 기사 제복도 잘 어울리네? 앞으로 같이 열심히 일해 보자.”

“…네가 왜 여기 있어?”

정말 모를 일이었다. 승진에 눈먼 놈이 왜 여기 있는지.

기사로 복귀한다고 듣긴 했었다. 나는 당연히 얘가 제1 기사단에 복귀해서 중앙궁에서 일하고 있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라벤더궁이라니. 앞날을 생각한다면 라벤더궁이 썩 좋은 근무처는 아닐 텐데….

설마 나 때문인가.

“야, 너 내 친구라서 불이익받은 거지? 그래서 여기로 좌천된 거지?”

“좌천은 무슨… 내가 지망한 거야. 형님들도 살아 돌아온 마당에 총사령관 돼서 뭐 해. 너랑 같이 즐겁게 일하면 그만이지.”

씨익 웃으며 어깨를 으쓱대는 게, 그는 꼭 예전과 같았다.

괜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하, 진짜. 너는 밸도 없냐. 나 때문에 작위도 박탈당하고 탑에 갇혀 있었으면서.”

“…작위 돌려받은 지가 언젠데 그래. 피오르탑 생활은 나름대로 괜찮았어. 고위 귀족 전용 수용소라 그런지 조용하고 전망도 좋고 음식도 잘 나오던걸.”

아무리 그렇다 해도 수감생활이 편할 리 있었겠나. 다 내 마음 편하게 해주려고 하는 개소리였다.

내가 죽상을 짓자 켄드릭은 내 등짝을 팍팍 두들겼다. 기운이 어찌나 센지 아침으로 먹은 호밀빵이 거슬러 올라올 지경이었다.

“하하, 또 그 미안해하는 얼굴이네. 사과는 저번에 받은 걸로 됐어. 얼른 들어가자, 황녀님께서 기다리셔.”

켄드릭은 내 손을 잡아끌고 황녀님의 서재로 인도했다.

그곳에는 나와 함께 일할 새 동료들이 황녀님의 책상 앞에 일렬로 서 있었다.

음, 새 동료라고 하기엔 낯이 좀 익은 사람들이긴 했다.

기사 로저 경. 40대 초반. 일전에 석실 집사를 맡다가 휴직했던 사람이다. 얼마 전 라벤더궁 호위 병력을 통솔할 책임자로 임명됐다.

기사 그레이 경. 30대 중반. 황녀님의 마지막 대련 상대였다.

마법사 게일. 20대 초반. 잠시나마 내게 흥미를 보였던 사람이다. 솔직히 이 사람 얼굴 보자마자 흠칫했다. 별로 편한 사이는 아니니까.

세 사람은 나를 무슨 귀신 보듯 쳐다봤다. 놀랄 만도 했다. 황녀 유괴 혐의로 체포당했던 범죄자가, 황실 기사 제복을 입고 떡하니 나타났으니 말이다.

로저 경과 그레이 경, 게일은 차례로 입을 열고 한마디씩 했다.

“어, 그, 내가 아는 그 로빈슨 양 맞습니까? 어떻게 병사에서 기사가 된 건지….”

“아가씨 현상 수배 벽보 붙은 거 봤는데. 감옥에서 탈주해서 그런 거 아니었나?”

“로빈슨 양, 무죄로 풀려난 거죠?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 체포 당시에 전혀 유괴범 같지 않았다니까요.”

이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려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현상수배 벽보 떨어진 지가 언젠데.

내 곤란한 기색을 알아챈 황녀님이 나를 대신해 이들에게 해명했다.

“이제 로빈슨 양이 아니라 발레리아나 경이에요. 내 전속 기사로 특별 채용했어요. 게일 말대로 유괴 혐의는 완전히 벗겨진 게 맞아요. 기사로 채용한 건… 내가 마왕의 목을 치고 돌아온 건 발레리의 가르침 덕이니까, 그 공로를 높이 산 거예요.”

황녀님은 내가 본인을 구출했다는 사실을 숨겨 주셨다. 내가 공개 거부 의사를 분명히 밝혔기 때문이다. 유괴범이자 납치 미수범 주제에 영웅으로 이름을 떨치고 싶진 않았다.

세 사람은 설명을 완전히 납득한 것 같진 않았으나 날 예전처럼 그냥저냥 잘 대해 주었다.

서임식은 사제 한 명과 켄드릭, 나머지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치러졌다. 일전에 켄드릭이 석실에서 하는 걸 본 적이 있는 덕에 엇비슷하게 따라 할 수 있었다.

나는 황녀님 앞에 무릎을 꿇고 검을 바쳤다. 황녀님은 검을 들고 그 끝을 내 양어깨와 머리에 차례로 갖다 댔다.

전날 밤새워 외운 충성 서약을 읊다가 나는 펑펑 울어버렸다. 어느 부분에서 눈물이 터졌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서임식을 마친 뒤, 황녀님은 선물이 있다며 내 손을 잡고 라벤더궁 3층으로 올라갔다.

도착한 곳은 널따란 독방이었다. 남쪽으로 큰 창이 나 있는 데다 고급스러운 원목 가구까지 완벽히 갖춰져 있었다.

“황녀님, 선물이 너무 과한 것 같은데요.”

“내 전속 기사인데, 계속 여관 신세를 지게 할 순 없잖아요. 그리고 이미 예전부터 계획하고 있던 일인걸요. 친구랑 한집에 살면 좋잖아요.”

나는 혼자 남아 방을 둘러보았다.

침대가 채플에서 쓰던 것보다 두 배는 컸다. 흰 침구에선 마른 햇살 냄새가 났다. 난 그 위를 데굴데굴 구르며 소리 없이 기쁨을 만끽했다. 아마 내 인생에서 가장 큰 호사를 누리는 순간이 아닐까 생각했다.

황궁 안에 이런 번듯한 공간이 내 개인 침실로 주어지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나는 먼지가 흩날리도록 이불 위에서 뒹굴거렸다. 그러다 뚝 멈춰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잊어서는 안 될 일이 떠올랐다.

죽은 단원들의 장례식이 얼마 후 치러진다.

얼마 전 황제는 두목에게 흩어진 단원들을 최대한 불러 모으라고 했다. 아마 정보조직을 꽤 크게 만들려는 심산인 것 같았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미 여럿이 나라를 떠났고, 절반은 죽어버렸으니까.

자초지종을 들은 황제는 프레이저 후작에게 서신을 보냈다.

후작령 남쪽의 플라타너스 숲속에 다 타고 재만 남은 오두막이 있다고. 그 잔해를 정리한 뒤 그 자리에 스무 명의 묘를 세워 달라고.

불탄 오두막 속의 시신이 온전할 리 없었다.

그래도 묘가 만들어진다면 넋이나마 추모할 수 있겠지.

나는 조용히 눈을 감고 떠나간 동료들을 생각했다.

***

테렌스는 관련 보고가 올라올 때마다 내게 전달해 주었다.

베갯머리에서 죽은 동료들 이야기를 전해 듣자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테렌스는 손수건으로 내 젖은 얼굴을 싹싹 닦아내고 코도 풀게 해 줬다.

“그래도 사람 유골로 보이는 게 몇 점 발견됐다고 한다. 황실에서 보낸 인력과 후작가의 가신들이 현장을 함께 수습하고 있어. 묘비도 제작에 들어갔으니, 다음 주면 장례식을 엄수할 수 있을 거다.”

“폐하께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 죽은 동료들까지 이렇게 챙겨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장인께서 알아보고 있다고 하셨다. 네 동료들의 살해를 의뢰한 자가 누구인지, 나도 힘닿는 대로 알아보려 해.”

난 알아볼 것도 없이 볼드윈 공작이나 그 패거리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죽임을 당할 만큼 원한을 산 집단은 그쪽밖에 없었으니까.

“고마워요. 근데 장인이라뇨? 누구 말하는 거예요?”

“필리스 모건 씨. 네 양부 아닌가?”

테렌스는 자꾸 이렇게 간접적으로 결혼을 언급했다.

아주 진저리가 났다. 두목한테 장인이라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아으, 왜 또 이래요! 설마 두목한테 장인이라고 부른 거 아니죠?”

“…아직 너와의 관계를 얘기하진 않았어. 그래서인지 내 호의를 좀 불편해하시는 것 같더군.”

“당연하죠. 당신이 우리한테 잘해줄 이유가 뭐 있다고.”

테렌스는 말없이 내 얼굴에 남은 눈물 자국을 지웠다. 창가로 스민 달빛이 그의 옆얼굴을 은연히 비추었다. 그 한가운데 볼우물이 또 깊이 패었다.

“잘해 드려야지. 널 이렇게 키워 주시고, 내 곁으로 보내 주신 분인데.”

참 예쁘게도 웃는다. 나는 그의 미소를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낮에도 이 미소를 볼 수 있다면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처음으로 그와 가족이 된 모습을 상상했다.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아마 둘 다 감수해야 할 일은 많겠지만.

***

이쯤에서 두목 얘길 안 할 수 없을 것 같다.

두목의 원래 신분, 그러니까 피어스 밀러는 사형 집행과 함께 죽은 것으로 처리됐다.

황제는 그걸 증명한답시고 어디서 났는지 모를 시신에 수염을 덕지덕지 붙인 뒤 황궁 밖에 전시해 두었다.

난 수많은 인파를 헤치고 황궁 동문 밖에 걸린 그 모가지를 구경했다. 하마터면 까무러칠 뻔했다. 제법 두목과 비슷한 형상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두목이 멀쩡히 살아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황궁에 돌아온 당일 밤에 테렌스가 말해 주었으니까.

그에게 부탁해 얼마 전 황태자궁 후원에서 두목과 상봉했다.

처음엔 못 알아볼 뻔했다. 무슨 탈모 형벌이라도 받은 건지, 수염과 머리털이 빡빡 깎여 있었다. 덥수룩한 수염과 풍성한 고수머리가 한 올도 없이 사라지니 그냥 다른 사람이었다. 현상 수배지를 뒤통수에 붙이고 다녀도 못 잡아낼 것 같았다.

두목을 다시 봐서 반갑긴 했지만 원망이 앞선 나머지 모난 말부터 튀어 나갔다.

“필리스 모건 씨. 그동안 두 다리 잘 뻗고 주무셨나요? 살다 살다 두목을 황궁에서 보는 날이 다 오네요.”

두목은 아무 말 없이 날 끌어안고 울먹였다.

“으흐흑….”

“어떻게 마왕한테 그런 의뢰를 받을 생각을 했어요? 제정신이에요? 나 진짜 두목 안 보려고 했어요. 어차피 내가 죽었으면 볼 일도 없었겠지만.”

“미안하다….”

“황녀님께 사죄는 하셨나요.”

“…라벤더궁에는 진작에 다녀왔지. 도리어 내게 고맙다 하시더라. 널 황궁으로 보내준 은인이라면서.”

“근데 대체 두목을 누가 신고한 거예요? 루카스랑 케빈은 나한테 아무 말 없었는데.”

알고 보니 제 발로 감옥에 들어온 거란다. 신고는 단원들에게 시켜서 현상금을 타 가게 했고, 그 돈으로 일부 단원들이 해외로 망명해 정착했단다.

정말 두목다운 처사였다. 최후의 순간에도 자신이 희생하는 대안이 있었다.

“나는 지금 황제 폐하 밑에서 일하고 있어. 새로 만들 직속 정보조직을 내게 꾸리라고 하셨다. 루카스랑 케빈, 콜린에게도 연통을 넣었으니 곧 합류할 거야.”

“뭐라고요? 황제가 두목한테 일을 맡겼다고요? 그분이 왜요?”

난 황제가 제정신인가 싶었다. 솔직히 두목을 석방한 것도 이해가 안 갔다. 두목이 치밀하고 수완 좋은 거야 나도 알지만 직접 데려다 쓸 만한 동기가 있는지가 의문이었다.

내겐 양부이자 두목일지 몰라도 황제에겐 딸의 납치 의뢰를 받았던 악인이다. 원수나 다름없는 인물을 고용할 생각을 하다니, 필시 범인은 아닌 모양이다. 나름대로의 이용 가치가 있다고 판단해서 채용한 거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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