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화
아직 단추가 덜 풀린 아랫배로도 손이 쑥 들어왔다. 더 아래쪽에서 무언가가 잡히자 테렌스는 움찔 놀랐다.
“속옷도 벗어놓고 왔나?”
“네. 이러실 거 아니까요.”
마지막 단추가 뜯기듯이 풀렸다. 그새 그의 손끝은 습습한 열기 속으로 먹혀들어 갔다.
“흐으….”
나는 쾌감을 참지 못하고 허리를 비틀었다. 테렌스는 다급히 내 상태를 확인한 뒤 이마에 입을 맞췄다.
“상상 속의 너보다 반응이 좋은데.”
“하아, 그때 그냥 이렇게 했으면… 나 그냥 넘어갔을 것 같아요.”
“여기서 첫날 밤을 보낼 뻔한 건가.”
나는 시야 한쪽에 무언가가 불쑥 솟아있는 걸 발견했다. 이 남자도 참…… 나만큼이나 솔직한 몸을 가졌다.
“흐음, 여기서 상상 끝났어요?”
“그럴 리가. 멈추려고 했지만 네가 내 바지에다가 침을 흘렸지.”
“…아. 그 다음 상상은 뻔하네요.”
내가 바지 버클을 툭툭 건드리자 테렌스는 내 어깨를 잡고 멈춰 세웠다.
“…왜요?”
“그런 건 내 상상에 없었어. 여기 기대어 앉아.”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등받이에 의지해 눕듯이 앉았다. 그가 재킷 안에서 작은 플라스크를 꺼내 내 입에 물렸다. 쓰디쓴 푸른 약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입술이 겹쳐졌다. 그는 혀를 깊이 얽으며 약물을 나눠 마셨다. 우리는 젖은 촉수를 진득하게 비비며 서로의 입안에서 쓴맛을 빨아냈다.
내 호흡이 점점 불규칙해지자 그가 내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아래로 내려갔다. 뜨거운 입술이 아직도 꼿꼿이 서 있는 살점 하나를 베어 물었다.
“와, 그때 이런 상상도 했어요?”
테렌스는 말없이 혀끝을 날카롭게 세워 더 강한 자극을 줬다.
“아흐으.”
내가 비음을 흘리자 그는 조금 사악하게 웃었다. 젖은 살갗 위에 혀를 느릿느릿 돌리는 게 꼭 악마 같았다.
오랜 시간에 걸쳐 끈적한 타액이 내 몸 이곳저곳에 골고루 발렸다.
난 고개를 뒤로 젖히며 밭은 숨을 들이켰다. 이 남자가 일찍부터 날 얼마나 욕망했는지 새삼 깨달았다. 무릎 위에 자는 날 놓고 이렇게 불순한 상상을 하다니.
벌써 아랫배 깊은 곳에 열기가 단단히 뭉쳤다. 다리 사이가 참을 수 없이 간지러웠다.
“흐으, 그냥 하면 안 돼요?”
“상상했던 건 다 해보고.”
“대체 어디까지 상상했던 건데요?”
그가 바닥에 무릎을 꿇더니 내 허벅지를 양쪽으로 활짝 벌렸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종류의 입맞춤이 어딘가로 쏟아졌다.
“아으윽, 미치겠네.”
평소 근엄하게 다물려 있던 입술이 날 게걸스럽게 탐하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그의 목울대가 오르내리는 걸 내려다봤다. 일순 꼬리뼈에 벼락이 내리꽂히는 것 같은 느낌에 온몸이 파드득 떨렸다. 날카로운 자극이 저릿한 쾌감으로 변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그의 입속에서 굴려진 모든 부분이 땡땡하게 충혈되면서 촉각이 극도로 곤두섰다.
“흐윽…. 하, 테렌스….”
내 호명에 테렌스가 동작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의 입술이 야하게 번들거렸다.
“왜.”
“너무 야하잖아요. 그날 이런 상상까지 했다고요? 짐승이 아니긴 뭐가 아니야….”
“상상은 자유 아닌가? 너도 꽤 열렬히 반응하는 것 같은데.”
그는 날 안달 나게 하는 데 성공했다. 난 이렇게 발가벗겨 놓고, 본인은 빳빳한 제복 차림에 필요한 부분만 내놓고 있는 게 미치도록 야했다. 빨리 그가 내 빈 곳을 채우고 한바탕 휘저어 주었으면 했다.
“하아, 테렌스. 오늘은….”
“오늘은?”
“이렇게 해요.”
얼른 몸을 뒤집어 자세를 잡았다. 소파 쿠션을 꼭 끌어안고 엉덩이를 높이 치켜든 채 엎드렸다.
“……이건 얼굴을 못 보잖아.”
테렌스는 약간 불만스럽게 말했다. 내가 그에게 약을 먹이고 이별을 선언했던 날. 그는 처음으로 날 거칠게 안으며 뒤에서 괴롭혔다. 난 그게 은근히 좋았다.
“난 그 느낌 좋은데.”
“흠.”
“…아흑!”
그는 내가 원하는 대로 해 주었다. 침대 위에서 테렌스는 한 번도 내 요구를 저버린 적이 없다. 매일 밤 발품을 팔아서 이곳에 찾아오는 이유기도 하다.
나는 쿠션을 틀어쥐었다. 돌발성 자극에 눈앞에 별 수십 개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테렌스는 바짝 선 내 등근육을 살살 쓰다듬으며 템포를 조절했다.
천천히 울리는 젖은 물소리가 집무실을 가득 메웠다. 나는 소파 팔걸이를 앞니로 꽉 깨물었다. 너무 좋아서 욕설이 튀어나갈 것 같았다.
테렌스는 막다른 길을 한참 동안 들이받으며 내 뒷덜미에 잇자국을 남겼다.
……바로 지금. 서로의 욕망이 완전히 맞물렸다.
“흐읏…!”
“발레리….”
온몸의 근육에서 기운이 쑥 빠졌다. 뜨거운 무언가가 안쪽에 천천히 퍼져나갔다. 테렌스는 내 등에 가슴을 밀착한 채 한동안 그대로 있었다.
“왜 날이 갈수록 실력이 늘어요?”
나는 퍽 불만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테렌스는 내 입술에 쪽, 뽀뽀하며 이렇게 대답했다.
“항상 고민하니까. 어떻게 해야 네 몸이 더 즐거워할지.”
“…사랑해요.”
“한 번 더 하자는 거지?”
“한 번만 더 하게요?”
나는 기다렸다는 듯 그를 한 번 더 받아들였다. 집무실 소파는 이제 나와 그의 흔적으로 얼룩졌다.
우리는 침실로 자리를 옮겨서도 입술을 맞붙인 채 한 번 더 서로를 안았다.
테렌스는 내게 남은 본인의 흔적을 손수건으로 정성스레 닦아 주었다. 풀린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니 달이 아까와는 다른 자리에 걸려 있었다.
오늘도 우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 짓을 했다. 나는 내일 오전 아홉 시 수업이라 괜찮지만, 더 이른 시간부터 일해야 하는 테렌스의 체력이 걱정됐다.
“낮에 안 피곤해요? 매번 이 짓 하느라 늦게 자는 것 같아서.”
“아직 체력적인 무리는 없어. 너야말로 자다가 일찍 빠져나가는 거, 이제 그만하고 싶지 않나? 아침엔 조금이라도 더 자고 싶을 텐데.”
나는 여전히 그와 밀회를 즐긴 뒤 새벽에 창문으로 탈출하는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걸 그만하라고? 지금 장난하자는 건가.
“무슨 소리예요. 여기서 계속 퍼질러 자다가 황태자궁 하인한테 걸리기라도 하라고요?”
“아니. 나와 같은 침실을 쓰자는 거다. 합법적으로.”
그럼 그렇지.
이 주제가 왜 또 안 나오나 했다.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일으켜 앉았다.
“하아, 결혼이 그렇게 하고 싶어요?”
“해야 하니까. 한다면 너랑 하고 싶고. 부부가 되면 쉬는 날엔 밤낮없이 할 수도 있을 텐데.”
그는 덤덤한 말투로 대담한 유혹을 했다.
나는 잠시 입을 다물고 새삼 떠올렸다.
이 사람은 결혼이라는 걸 꼭 해야 하는 신분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실은 아니었다. 그는 언젠가 보위에 오를 황태자다.
아마 후사를 이으려면 정식으로 아내를 맞아들이고, 그 사이에서 자식을 봐야 하겠지.
하지만 내가 그 자리에 선다는 건….
조금은 다른 얘기였다.
“우리가 과연 축복받을 수 있을까요? 알다시피 난 근본이 없는데.”
“…넌 신분도 생겼고, 곧 작위도 받을 거다. 이제 그 표현은 네게 적용되지 않아.”
“일할 땐 깐깐하면서 이런 데서 현실감각이 없으시네. 기사 작위 받아도 평민은 평민이에요. 그런 걸로 없던 근본이 어떻게 생겨요?”
사그락.
테렌스의 얼굴이 또다시 불쑥 내 눈앞을 가렸다.
야하게 잘생긴 얼굴을 또 무기로 쓰려는 게 틀림없었다.
“다른 방법도 있어.”
“…뭔데요?”
코끝이 스칠 듯 가까워졌다.
설마 또 하려고 분위기 잡는 건 아니겠지…? 온몸이 뻐근해서 더는 무리인데….
나는 살짝 고개를 뒤로 뺐다.
그는 끝끝내 다가와 이마를 마주 댔다. 숨결이 아직도 뜨거웠다.
“선후 관계… 뒤집어볼 생각 있나?”
“선후 관계?”
내가 되묻자 테렌스는 잠시 고개를 들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긴장한 것 같았다. 뜸을 들이는 걸 보니 또 머릿속에서 말을 고르는 모양이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나는 그의 입모양만 물끄러미 응시했다.
“…아이를 먼저 가질 의향이 있는지 묻는 거다.”
아이?
내가 뭘 잘못 들은 건가?
애부터 낳자고?
너랑 나랑 다시 만난 지 2주 됐는데?
철썩.
나는 그의 가슴 한복판을 힘껏 내리쳤다. 찰진 파열음이 났다. 상아색 살갗에 시뻘건 자국이 남았다. 정확히 내 손바닥 모양으로.
“미쳤어? 내가 애인데 무슨 애를 낳아요!”
“…애라니. 스물셋은 법적으로 성인이다.”
테렌스가 맞은 부위를 쓱쓱 문지르며 말했다. 꽤 쓰라릴 텐데도 태연한 얼굴이었다.
“아니, 내 말은…. 내가 신체적으로는 성인이어도 아직 정신적으로는 덜 큰 인간이란 뜻이에요. 하아, 그렇게 큰일을 어떻게 감당하냐고요.”
“그래, 큰일이지. 큰일인 만큼 많이 고민하고 꺼낸 얘기다. 결정하기 전에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가져 보자. 아직 우린 젊으니까.”
테렌스가 꽤 무거운 어투로 이야기했다. 희미해진 기름등 속에서도 절절한 눈빛이 느껴졌다. 곧이어 그의 왼손이 내 손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러고 보니 재회하고 나서 그는 줄곧 내 안쪽 깊은 곳에만 사정했다. 약을 먹으니 별문제는 없겠지만…. 날 파고드는 그의 몸짓 하나하나에 다 의도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요망한 남자가 있나.
“하으, 그건 내일부터 생각할게요.”
난 그의 손을 뿌리친 뒤 얼른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온몸의 기력이 쇠한 상태로 복잡한 고민을 하고 싶지 않았다.
***
일단 지금 내가 처한 상황부터 간략히 얘기해야겠다.
나는 이제 신분 없는 무연고자가 아니게 됐다.
두목 피어스는 황제 밑으로 들어간 뒤 평민 신분을 새로 하사받았다. 새 이름이 뭐랬더라. 필립 모건이었나?
아, 아니다. 지금 보니 필리스 모건이다.
황제는 나를 두목의 양녀로 입적시켰다. 내게 처음으로 진짜 신분과 성이 생긴 것이다.
새 신분증명서는 일주일 전에 황녀님 편으로 전달받았다. 두목의 새 이름 밑에 내 이름이 정자체로 쓰여 있었다.
「발레리아나 모건」
이름이 좀 더 길어졌다.
나의 새 이름 ‘발레리아나’로 말할 것 같으면….
쥐오줌풀이라고도 불리는 잡초 이름이다.
쥐오줌풀. 어릴 적 숲속에서 심심찮게 봤던 식물이다. 이름처럼 냄새가 지독하다. 그 뿌리가 숙면에 좋다고 해서 단원들이 가끔 차로 우려먹었던 기억이 난다.
나도 잠이 안 올 때 몇 모금 얻어 마셔봤는데…. 냄새뿐 아니라 맛도 뭐라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구렸다. 나는 비위가 꽤 좋은 편인데도.
솔직히 좋은 이름이라고 하긴 어려웠다.
그래도 황제 폐하께서 친히 하사하신 이름이니 어쩌겠나. 황송하게 받을 수밖에.
황녀님은 나의 새 이름을 꽤 마음에 들어 했다.
“발레리아나? 원래 이름하고 비슷하면서도 예쁘네요. 우리 아버지가 나름대로 신경 써서 지어주셨나 봐요.”
“…하하, 네.”
과연 그럴까요. 그냥 제 이름하고 비슷한 잡초명을 갖다 붙이신 것 같은데.
“이제 신분도 생겼으니까 내일부터 여기로 출근하면 되겠어요. 이제부터 모건 양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아뇨, 황녀님. 부르던 대로 불러 주세요.”
진짜 성이나 가짜 성이나, 내 이름 뒤에는 뭐가 붙어도 어색했다. 그래도 모건이 로빈슨보다 나은 점은 있었다. 철자 쓰기가 비교적 쉬웠다.
황녀님은 일전에 공언한 대로 나를 호위 기사로 특별 채용했다.
얼떨결에 또 역사를 쓰고 말았다.
제국 최초의 여자 병사에 이어 최초의 여자 기사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