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발레리는 확신했다. 4층에 분명 누군가가 있다. 잠들어 있는 황녀와 함께.
설마 황녀님한테 허튼짓하려는 거 아니겠지. 발레리는 손에 든 피리를 꽉 움켜쥐며 소리의 근원을 향해 달려갔다.
4층 복도 끝에 심상치 않은 문이 있었다. 이상한 보랏빛이 감돌았다. 발레리는 열쇠 꾸러미에서 가장 얇은 열쇠를 꺼내 문 틈새를 쓱 그어봤다. 안에 사람이 들어 있어서 그런지 잠겨 있진 않았다.
“네, 오늘은 가족분들을 보게 해드리겠습니다.”
뭐지. 남자는 혼잣말을 하는 듯했다. 답이 돌아오지 않는데 계속 중얼거리는 걸 보니.
아무튼 너 내가 얼굴 좀 보자.
콰쾅.
발레리는 문을 발로 차고 들어갔다. 과연 이곳은 침실이었다. 거대한 침대 위에 프리다가 이불을 덮은 채 곤히 자고 있었고, 은발을 치렁치렁 허리까지 늘어뜨린 남자가 그녀의 이마 위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남자는 제1 집행관 바일론. 오벨론의 오른팔이었다. 그는 대뜸 문을 걷어차고 들어온 발레리를 보고 아연실색했다.
“너, 넌 누구지?”
“알 바 없잖아요? 황녀님한테서 손 떼시죠.”
—삐이이이익.
발레리는 경고를 날린 뒤 곧장 피리를 불었다. 폐활량이 다할 때까지.
하지만 바일론은 이상하리만치 반응이 없었다. 침대맡에 무릎 꿇고 앉아있던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발레리를 향해 다가왔다.
“자네는 인간인가?”
“…아저씨 왜 안 자요?”
바일론이 그녀의 입술을 주시하며 점점 가까이 왔다. 새카만 망토가 그의 발치에서 사락거렸다. 발레리는 그의 진홍색 눈동자를 보며 뒷걸음질 쳤다. 왜 피리가 안 먹히지.
“자다니. 내가 왜 자야 하지?”
“그야 제가 피리를 불었으니—”
바일론은 손을 뻗어 피리를 가져가려 했다. 발레리는 얼른 그의 손아귀를 피했다.
결국 바일론은 망토 속에 감추고 있던 검을 빼 들었다. 검날이 자수정보다 약간 어두운 보랏빛이었다. 마력석을 갈아서 만든 듯한 형상이었다.
“애석하게도 난 소리를 듣지 못한다.”
“…아하.”
탁!
바일론이 검을 휘둘렀다. 발레리는 그것을 얼른 피리로 막아냈다. 나무 소재지만 여신의 피리라니까 이 정도는 잘 버텨주지 않을까, 하고 믿으며.
그런 기대가 무색하게도 피리에선 쩌저적,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부러지지는 않았으나 균열이 생겼다.
“아으, 빌린 물건인데…. 여신의 피리라고 금강불괴는 아닌가 보네. 아저씨, 근데 그 검으로 저 못 죽일걸요.”
“안다. 피리 부러뜨리려고 휘두른 거야. 넌 무단침입자니까 원칙대로 처리해 주지.”
바일론은 검을 집어넣은 뒤 그녀를 향해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그 표면에서 묘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발레리는 그것을 최대한 보지 않으려고 얼른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너야말로 왜 안 자는 거지?”
“저도 재워버리려고 한 거예요? 저기 있는 황녀님처럼?”
무단침입자는 무장해제 후 재워두는 게 원칙이었다. 무장해제를 하려고 보니, 발레리는 피리만 들고 있을 뿐 칼이나 활 등의 무기는 없었다.
최면이 답이었다. 그런데 그게 먹히지 않는다. 보통은 눈을 가리더라도 광선을 맞으면 그대로 잠드는데.
바일론의 고개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무장하지 않았으니 해제가 되지 않는 건 이해가 간다. 하지만 최면은 대체 왜?
문득 발레리는 왼손 약지에서 뜨끈한 기운이 퍼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 반지가 끼워진 부분이었다.
‘뭐지? 왜 반지가….’
반지 위의 덮개가 끓는 주전자의 뚜껑처럼 들썩거리고 있었다. 그 안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솟구치려 하는 것 같았다.
처음 이 반지를 받았을 때, 보석을 감추고 있는 듯한 이 덮개를 몇 번 열어보려고 시도했다. 얼마나 귀한 보석이 박혀 있길래 이렇게 덮개까지 붙어 있나 해서.
하지만 아무리 힘을 줘도 안 되기에 그냥 포기했었다. 처음부터 이렇게 생겨 먹은 반지겠거니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 덮개가 지금 열리려고 한다. 발레리는 옳거니, 하고 덮개 위를 손끝으로 문질렀다.
반응이….
있다.
덮개가 움직인다.
—파아앗.
일순 조명탄을 터뜨린 것 같은 폭발적인 섬광이 일었다. 발레리는 팔꿈치로 시야를 가렸다. 마치 태양을 눈앞에서 쬐는 듯한 찬란한 눈부심이었다.
“으… 으흐억….”
고통에 찬 신음이 들렸다.
반지는 빛을 거의 토해내듯 발산하고 있었다. 발레리는 눈살을 종잇장처럼 구기면서도 시야를 확보하려 애썼다. 눈앞의 집행관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발레리는 왼손 약지를 앞으로 내밀며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반지가 발산하는 광채가 점점 약해졌다. 아무래도 머금고 있던 빛의 양에 제한이 있던 모양이다.
털썩.
바일론. 그가 바닥을 짚고 엎드렸다.
빛이 약해지니 그가 어떤 상태인지 드디어 형체가 잡혔다.
피부가 이상했다.
원래는 하얗고 매끈했던 그의 얼굴이, 가뭄이 든 땅처럼 칙칙한 색깔로 변하며 쩍쩍 갈라지고 있었다.
“흐…. 흐어어….”
다만 그는 아직 완전히 쓰러지지는 않았다. 가까스로 밭은 숨을 내쉬며 버티고 있을 뿐.
“아저씨, 피부 상하게 해서 미안한데 제가 한 거 아니에요. 반지가 그런 거예요? 알죠?”
따악.
엎드려 있는 바일론의 뒷덜미에서 찰진 파열음이 났다.
태양 빛을 맞아 약해진 상태에서 목 뒤 급소를 가격당한 그는 무참스럽게 바닥에 엎어진 채 사지를 늘어뜨렸다.
“이건 제가 한 거고요…. 아, 피리 완전히 부러졌네. 빌려준 사람한테 뭐라고 해야 하지.”
발레리의 두 손 위에는 아예 두 동강이 나버린 세이렌의 피리가 들려 있었다. 아마 적지 않은 금액을 배상해야 할 것이다.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것들을 자루에 넣었다.
반지는 안에 들었던 빛을 모두 방출했는지 더 이상 섬광을 뿜지 않았다.
덮개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 자리엔 고양이의 눈처럼 생긴 신비한 느낌의 샛노란 보석이 자리했다.
여신 시에나가 초대 황제 엘로이스에게 하사한 반지. 이것이 그 본모습이었다.
“으음….”
침대가 부스럭거렸다. 방금의 신음은 프리다의 입에서 나온 것이었다. 아마 방을 한가득 채운 눈부신 빛 때문에 수면을 방해당한 것 같았다.
발레리는 얼른 구출 목표를 향해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리고 그녀를 세차게 흔들어 깨웠다.
“황녀님, 일어나세요.”
“흐으응…?”
“얼른요. 우리 빨리 마왕 죽이러 가요.”
“…발레리? 나 아직 꿈속이에요?”
프리다가 힘겹게 눈을 떴다. 발레리는 그녀의 허리를 받쳐 몸을 일으킬 수 있도록 도왔다.
이불을 걷어 보니 황녀의 차림새가 이상했다. 상의는 진주가 주렁주렁 달린 새하얀 옷인데, 아랫단은 다 뜯어져 있었다. 하의는 그냥 가죽 바지였다.
“꿈 아니에요, 황녀님. 저 지금 황녀님 구출하러 온 거예요.”
“구… 출?”
아직 프리다는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눈앞에 진짜 발레리가 찾아와 있다는 것을.
하도 발레리 꿈을 많이 꾸다 보니까 몽중몽 속에 들어와 있는 줄로만 알았다.
“네. 이번엔 납치도 아니고, 유괴도 아니고. 구해드리러 왔어요. 저랑 같이 황궁으로 돌아가요.”
“……!”
프리다는 불현듯 오른손을 뻗어 발레리의 얼굴을 만졌다. 동시에 왼손으로 제 얼굴을 꼬집었다.
고통이….
느껴진다.
와락. 프리다가 발레리의 어깨를 당겨 안았다. 꿈속에서보다 야윈 듯한, 그래도 아직은 건강해 보이는 몸이 생생히 만져진다.
지금 눈앞에 와 있는 사람은 발레리가 맞다.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꿈 아니죠? 정말 발레리 맞죠? 나 정말 구해주러 온 거예요?”
“아, 네네. 근데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요. 황녀님, 보검 어디 있는 줄 아세요?”
“보검? 보검…. 오벨론이 상자째 어디로 가져갔는데….”
“제가 저기 널브러진 아저씨 포함해서 네 명 재워놨거든요. 이제 그 마왕인지 뭔지 그놈 하나만 남았어요. 걔만 처리하면 돼요.”
“…용광로. 보검을 용광로에 던져 넣는다고 했어요.”
프리다는 문득 기억해 냈다. 마왕이 보검을 어떻게 처분한다고 했었는지.
“후, 그럼 그 용암 동굴에 들어가야 하는 건가.”
발레리는 아까 그 갈림길에서 봤던 검은 동굴을 떠올리며 프리다를 일으켜 세웠다.
두 여인은 손을 잡고 궁전을 빠져나왔다. 발레리에게 이끌려 뛰고 있는 프리다는 뭐가 좋은지 자꾸 헤실거렸다.
“발레리… 나 지금 진짜 너무 꿈같아서 믿을 수가 없어요.”
하지만 발레리는 프리다의 감상을 받아줄 여유가 없었다.
“황녀님, 저기 저 동굴 보이세요? 저 안에서 시뻘겋게 끓고 있는 거…. 일단 저기 들어가야 할 것 같아요.”
이들은 다시 갈림길로 돌아와 있었다. 발레리는 용암 동굴을 가리켰다. 용광로라기엔 너무나도 커 보였다. 정말 지옥의 입구 같았다.
“저, 저기 들어가야 한다고요?”
“보검 찾으러 가셔야죠. 무서우시면 저 혼자 가고요.”
“아니, 안 무서워. 얼른 가요.”
둘은 손을 잡고 동굴을 향해 전력 질주했다. 입구에 들어가기도 전에 뜨거운 기운이 훅 끼쳐 왔지만 겁나지 않았다.
이미 죽음, 혹은 그 비슷한 것의 직전까지 다녀온 둘이었다.
동굴 안은 정말 후텁지근했다. 내부는 불꽃으로 들끓고 있었고, 가장자리에는 도가니 속 쇳물 같은 시뻘건 물이 흘렀다.
이곳에 들어온 두 여인은 무슨 보호막이라도 입은 것처럼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다. 땀은 좀 났지만 죽을 만큼은 아닌, 딱 그 정도 더위였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해를 입힐 수 없는 지하세계의 불꽃이기에 그랬다.
만약 두 사람이 망자라면 고통에 신음했을 것이다. 이 동굴은 망자들의 형벌에 쓰이는 지옥불을 지니고 있었다.
“…정녕 이런 종류의 불꽃으로는 소멸시킬 수 없는 것인가.”
동굴 깊은 곳에서, 고뇌에 가득 찬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프리다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오벨론의 목소리다.
“발레리. 그 사람 목소리 맞아요.”
“네. 발소리 최대한 죽이세요.”
“응, 알았어요.”
발레리는 목걸이 덕에 인기척을 최소화할 수 있었으나 프리다는 아니었다. 조심해야 했다.
두 여인은 엉금엉금 기다시피 해서 오벨론의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접근했다.
저 멀리.
거대한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