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발레리는 숲 중심부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프리다의 결혼 사절단이 길을 닦아놓은 흔적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처음에 풀을 검으로 일일이 베어내다가, 힘이 들었는지 마법을 이용해 아예 뿌리째 태워버렸다.
일전에 발레리는 이 숲에 와 본 적이 있기도 했다. 10년이 더 넘었기에 길이 기억나진 않았으나 적어도 낯설지는 않았다.
어둠 속에서 숲속을 거닐다 보니 생각나는 인물이 있었다.
열두 살 때, 이곳에서 처음 만났던 꼬마 남자아이.
“…켄드릭. 넌 아직도 갇혀 있으려나. 너한테 사죄할 기회가 오긴 할까.”
며칠 전, 발레리는 간수에게 그의 소식을 알아봐 달라고 했었다. 간수는 곧바로 수소문해서 켄드릭의 근황을 알려 주었다.
프레이저 후작가 막내아들이 황궁 인근 피오르탑에 갇혀 있다고.
곧 기사 작위가 박탈된다고.
“나 때문에 출셋길도 막히고…. 나중에 몰래라도 찾아가서 사죄해야지. 어차피 용서받진 못하겠지만….”
혼잣말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숲 중심부였다.
어둠 속에서 발레리는 아공간이 어느 부근쯤에서 열릴지 가늠하기 시작했다.
우선 발아래 촉각을 날카롭게 곤두세웠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맨발로 서 있는 것처럼.
그러고 있자니 어딘가에서 불규칙한 진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불과 몇 걸음 떨어진 자리에서 곧 열릴 것이다. 지옥불을 풀무질하는 숨구멍이.
밤눈이 밝은 발레리는 바닥 이곳저곳을 돌아보며, 어디에 균열이 생기는지 살폈다.
아, 저기다.
흙바닥에 작은 소용돌이가 일어나면서 점점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안이 점점 드러났다. 어느새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등장해 있었다.
“…와, 밤에 여기 오면 안 되는 이유가 있었네.”
발레리는 미끈거리는 계단을 천천히 타고 내려갔다.
꽤 딱딱한 신발을 신었는데도, 발을 내딛는 소리는 전혀 나지 않았다. 인기척을 감추는 목걸이를 한 덕이었다.
휴.
솔직히 긴장된다.
하지만 황녀님을 데리고 나올 수 있다면야 못할 게 뭐가 있겠나.
죽기 직전까지 갔다가 살아 돌아왔는데 이까짓 게 뭐 대수라고.
여차하면 다 피리로 잠재워 버리지 뭐.
반지는 무슨 쓸모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발레리는 스스로의 용기를 북돋우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중간쯤부터는 기괴망측한 문양의 붉은 벽면을 보고 진저리를 쳤다.
“…으억, 벽이 뭐 이렇게 생겼어. 마왕이 누군지는 몰라도 미적 감각은 꽝이네.”
검은 촛대 위의 보라색 불빛도 소름 끼쳤다.
팔뚝에 닭 껍질 같은 닭살이 돋았다. 마치 테렌스를 따라 처음 지하 석실에 내려갔을 때처럼.
계단이 끝나간다.
방청석이 없는 법정처럼, 어두침침하고 거대한 실내 공간이 나왔다.
발레리는 두리번거리며 인적을 살폈다.
지하세계에 대해 잘 모르는 그녀는, 최고 집행관 오벨론 밑에 몇 명의 집행관이 있는지조차 몰랐다.
“뭐야. 사람이 왜 없어.”
법정의 맨 앞자리에는 성좌 같은 의자가 다섯 개나 놓여 있었다.
가운데가 가장 높은 좌석이 위치하고, 양옆에 의자가 두 개씩 더 놓였다.
“…집행관이 다섯 명인가 보네. 마물 5형제인가.”
발레리는 텅 빈 공간을 한참 동안 서성거렸다.
하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황녀님은 대체 어디 계시는 거지.”
그래서 의자가 있는 쪽의 뒤편으로 가보기로 했다.
문이 하나 있었다.
달칵.
다행히 잠겨 있진 않았다.
폭이 꽤 넓은 복도가 나왔다. 벽면에는 아까 봤던 검은 촛대들이 꽂혀 있고, 조명은 여전히 괴이한 보라색이다.
어, 드디어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웅얼웅얼. 여러 높낮이가 섞인 말소리였다.
발레리는 소리가 들리는 문에 귀를 댔다. 문 표면에는 뭐라 뭐라 쓰여 있는 것 같지만 생전 처음 보는 문자라 해독할 수 없었다.
“헤슬론, 이번 주 재판 일정이다.”
“…하아, 저번 주보다 더 빡세네. 왜 인간들은 이런 놈들을 살아있을 때 못 잡아서 우릴 힘들게 하는 걸까.”
“젤론, 이번 주도 9번 지옥 미어터질 테니까 불 좀 키워 놔. 요즘은 애들 노리는 새끼들이 왜 이렇게 많은 건지….”
누군가가 대화하고 있었다. 한 명도 아니고…. 아마 세 명인 것 같다. 남자 하나, 여자 둘.
듣자 하니 죽은 죄인들의 처벌을 담당하는 집행관들이 맞는 듯했다.
발레리는 피리를 꺼냈다.
이게 인간이 아닌 자들에게 과연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녀는 숨을 최대한 들이마시고 피리 안에 쏟아냈다.
—삐이이이이익.
“…방금 무슨 소리야?”
“스텔론, 너 주전자에 차 끓여 놓고 불 안 껐냐?”
“아… 그런가? 확인하고 올게.”
발레리는 헉, 소리를 내며 복도 구석의 사각지대 쪽으로 몸을 숨겼다.
뭐야, 이 피리 안 통하는 거야? 역시 인간이 아니라서 그런가…? 인간들은 멀리서 살살 불어도 픽픽 쓰러지는데….
달칵.
온갖 생각이 교차하는 순간 문이 열렸다. 까만 단발머리를 한 흰 피부의 여성이 걸어 나왔다. 제2 집행관 스텔론이었다.
발레리는 뒤에서 그녀를 지켜보며 동태를 살폈다.
어, 걸음걸이가 점점 느려진다. 그러다 한쪽 관자놀이를 짚으면서 비틀거린다.
“아흑, 갑자기 왜 이렇게 졸린 거야. 그래도 어제 다섯 시간은 잤는데….”
통하는 게 맞았다. 다만 효과가 즉각적이지 않을 뿐이었다.
그럼 한번 가까이 가서 불어볼까.
발레리는 스텔론의 등 뒤로 조심조심 다가가 바짝 붙었다. 목걸이 덕인지 발소리가 전혀 나지 않았다.
—삐이이익.
발레리는 그녀의 귓가에 대고 피리를 살짝 불었다. 결정타였다. 스텔론은 비틀거리며 벽을 짚고 눈을 감았다.
목치기 하기 좋은 타이밍이다. 생긴 건 인간이랑 똑같이 생겼으니까, 아마 혈 자리도 비슷한 데 있겠지.
빠악.
급소에 정확히 명중했다. 스텔론은 그 자리에서 바닥에 고꾸라졌다.
발레리는 손안에 든 피리를 내려다보며 눈을 비볐다.
“와, 이거 먹힌다고? 나 시험 삼아 써 본 건데….”
집행관들에게는 인간계 무기가 통하지 않는다고 했었다.
생각해 보니 이건 여신 세이렌의 피리다. 인간계의 것도 아니고, 무기도 아니다. 그래서 먹힌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 황녀님께 보검이 있다면 나한텐 이 피리가 있어.”
발레리는 자신감을 가지고 스텔론의 몸을 번쩍 들어서 복도 구석의 이름 모를 조각상 뒤로 옮겨 놨다.
도적답게 주머니도 열심히 뒤졌다. 별건 없고 보라색 재킷 주머니 안에 열쇠가 하나 있었다. 아마 방문 열쇠인 것 같기도 했다.
이제 저 회의실 같은 공간에는 두 명의 집행관이 남아있을 것이다.
한 명을 처치하니 의기양양해졌다. 그냥 문 당당하게 열고 들어가서 피리를 무기로 싸워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발레리는 한쪽 입꼬리를 씩 올리며 문고리를 비틀었다.
활짝. 문이 열렸다.
자, 그럼 이제 덤벼 보실….
—드르렁.
기다란 타원형 테이블 위에, 남은 집행관 둘이 마주 앉아서 사이좋게 엎드려 자고 있었다.
집행관들과 검술을 겨뤄 볼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포니테일을 높이 묶은 여자 집행관과, 더벅머리 남자 집행관은 각자의 앞에 놓인 재판 일정표 위에 침을 흘리며 곯아떨어졌다.
발레리는 그들의 취침하는 모습을 허무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삐이이익.
좀 더 오랫동안 잘 자라고, 발레리는 피리로 자장가 2절을 불어 주었다.
‘세이렌 여신님. 이거 인외 존재한테도 꽤 잘 먹히네요…. 피리 생긴 것만 가지고 효과 의심했던 거 죄송합니다.’
발레리는 숙면 중인 집행관들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섰다.
그녀는 날카로운 눈썰미로 헤슬론의 허리춤에 달린 열쇠 뭉치를 발견했다. 얼른 떼어내 자루 안에 담았다.
“…이분이 마스터키 관리자신가 보네. 쓰고 나서 잘 두고 갈게요.”
복도에 나 있는 방은 딱 네 개였다. 왼쪽에 두 개. 오른쪽에 두 개. 헤슬론의 허리에 달려 있던 열쇠로 모두 열 수 있었다.
모두 평범한 침실이었다. 하지만 발레리의 구출 목표인 황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집행관은 총 다섯일 텐데. 아직 잠재우지 못한 나머지 두 명은 어딜 갔는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발레리는 결국 다시 복도로 나갔다. 조각상이 있는 곳에서 왼쪽으로 꺾으니, 커다란 문 하나가 보였다.
끼이익.
잠겨 있지는 않다.
문 틈새를 지켜보던 발레리는 깜짝 놀랐다.
처음 보는 어두운 숲속이었다. 입구를 중심으로 두 가지 갈림길이 나 있었다. 왼쪽 끝에는 검푸른 빛이 나는 대리석 궁전이 보였다. 오른쪽 끝에는 무시무시하게 큰 동굴이 있는데 그 입구에서 용암이 끓어오르는 듯 살벌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오른쪽은 아마 지옥 입구인 것 같기도 하고. 황녀님은 살아 계시니까 지옥에 처넣진 못했을 거야. 난 왼쪽으로 간다.”
발레리는 대리석 궁전을 향해 전력으로 질주했다. 입구에 다다르니 궁전이 제대로 보였다. 정말 갓 지어진 것 같은 미끈한 건물이었다. 창문도 하나 없고 음침해 보이는 게 취향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헤슬론의 열쇠 꾸러미에서 이곳의 입구에 맞을 만큼 큰 것을 딱 하나 골랐다.
“내가 문 따는 거 하나만큼은 우리 두목만큼 잘하지. 하물며 락픽도 아니고 열쇠로 따는 건 눈 감고도 해.”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온 발레리는 정말 두려울 게 없었다.
철컥 소리와 함께 대리석 궁전의 문이 열렸다.
4층 높이는 되려나. 황태자궁보다는 규모가 약간 작은 듯했다. 이걸 어느 세월에 다 뒤지냐고 생각하다가, 일단은 부딪혀 보기로 했다.
황녀는 잠들어 있을 것이다. 1층에 침실이 있는 경우는 잘 없으니 2층부터 수색을 시작했다.
그녀는 로비 벽면에서 검은 촛대를 뽑아들고 빨빨거리며 문이란 문은 족족 다 열어보았다. 지어진 지 얼마 안 돼서 그러는지, 모두 텅 빈 음침한 방이었다.
3층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이제 꼭대기 층인 4층과 맨 아래층인 1층이 남을 텐데.
발레리는 4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멈춰 서서 귀를 쫑긋 세웠다. 무슨 소리가 나지 않을까 해서.
음?
사람 말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보면 볼수록 초상화보다 아름다워. 아가씨, 이번엔 어떤 꿈을 꾸게 해 드릴까요.”
뱀이 기어가듯 섬뜩하고 차가운 느낌의 남자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