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저와 함께 외출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이것이 발레리의 소원이었다. 프리다는 거의 질겁하듯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응? 발레리, 무슨 말이에요? 석실 밖으로 나가자는 뜻이에요?”
“네. 황녀님이 저랑 같이… 가주셨으면 하는 곳이 있어서요.”
“거기가 어딘데요?”
발레리는 시선을 비스듬히 내리깔았다.
아, 그곳이 어딘지 알면 얼마나 좋으리.
아직 두목은 의뢰인이 제시한 장소가 어디인지 알려주지 않았다.
일단 어렴풋이 기억나는 건…. 두목은 황녀를 데리고 프레이저 후작령의 메이벨 여관으로 오라고 했었다.
마력석 광산 근처에 있는 그 자그마한 여관 맞겠지. 의뢰인의 위치 또한 아마 거기서 멀진 않을 것으로 추정됐다. 황녀를 데리고 또 먼 거리를 이동하긴 어려울 테니까.
“프레이저 후작령이요.”
“으음, 되게 먼 곳이네요. 근데, 거기 갔다가 황성 돌아오려면 적어도 닷새는 걸리지 않아요?”
“네, 넉넉잡아 엿새 정도예요. 3월 중순쯤에 다녀오면… 여행 떠나시기 전에 넉넉하게 황궁에 도착하실 수 있을 거예요.”
“음…, 바깥 구경 같이 하자는 거죠? 남부 지역에 언젠가 가보고 싶긴 했는데.”
프리다는 한 점 티끌 없이 말간 얼굴로 말했다. 바깥에 나가자는 말을, 정말 순수한 의미의 나들이 제안으로 여기는 듯했다.
뭐, 틀린 말은 아니었다. 발레리는 프리다에게 바깥공기를 마음껏 쐬게 해 주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물론 바깥 구경도 하셔야죠. 근데 그보단… 황녀님을 꼭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어요.”
“날 만나고 싶어 한다고요? 누군데요…? 발레리가 아는 사람이에요?”
명확히 답할 수 없는 질문이 또 날아들었다.
그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르는 정체불명의 인간인데. 아는 정보라면 목소리가 꽤 기괴하고, 까마귀 두 마리가 그려진 인장을 쓴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황녀를 해치지 않겠다고 피의 맹세까지 한 사람이다.
“잘은 모르는 사람인데…. 저도 한 번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기도 해요.”
발레리가 애써 짜낸 대답은 이것뿐이었다.
만나고 싶은 건 사실이다. 의뢰인이 어떻게 생겨먹은 작자인지 그 면상을 한 번 보고 싶었다. 황녀를 왜 그렇게까지 데려오라 하는 건지도 궁금했다.
아마 얼굴을 보면 직접 질문할 기회가 있겠지.
“…….”
프리다는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이다.
결정이 내려지기 전에, 발레리는 얼른 덧붙였다.
“황녀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저랑 함께하실 거예요. 출발하는 날부터 돌아오는 날까지. 제가 목숨을 바쳐서라도 꼭 지켜드릴 거예요.”
발레리는 그러면서 속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제발 의뢰인 앞까지 동행해 주세요. 황녀님을 강제로 데려가고 싶지 않아요. 나한테 그럴 능력도 없고요.
근데 문제가 있어요. 거기가 어딘지도 모르고, 당신을 데려오라 한 사람이 누군지도 몰라요.
하지만 괜찮을 거예요. 내가 지켜줄 거고, 또 그 사람은 해치지 않는다고 했어요. 돌아오는 건 황녀님의 의사에 달려 있다고도 했고요.
‘휴, 정말 더럽게 설득력 없는 말이야. 아무리 언변이 좋아도, 이렇게 근거가 부족한 말을 과연 믿어 주시기나 할까.’
발레리는 관자놀이를 타고 흐른 땀을 장갑 낀 손등으로 슥슥 닦았다.
아직 대답은 듣지도 않았건만. 알싸한 좌절감이 뒷덜미를 쥐고 흔드는 느낌이다.
게다가 가장 큰 문제가 남아있었다. 황녀가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황제와 황후라는 큰 산을 넘어야 한다.
그래도 일단 당사자인 황녀의 동의부터 구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럴 수 없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지만.
발레리가 반쯤 포기한 것과 달리, 프리다는 솔깃한 제안으로 받아들였다.
스승을 향한 프리다의 믿음은 맹목적인 것에 가까웠다.
열 달 가까운 시간 동안 발레리의 가르침과 격려, 동기부여는 프리다에게 건강과 용기를 주었다.
자존감 또한 충만하게 불어넣었다.
신뢰는 차곡차곡 쌓여 철통처럼 굳건해졌다.
프리다에게 발레리는 구원자나 다름이 없었다.
그녀가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프리다는 이렇게 생각했었다.
‘아무래도 난 안 될 거야…. 나 하나 때문에 나라 전체가 암흑에 덮이느니, 그냥 잠자코 있다가 마왕비로 팔려가는 편이 낫겠지.’
극단적인 생각이 치달은 적도 있었다.
차라리 죽어서 지하세계에 간다면, 그게 덜 억울하지 않을까.
산 채로 지하에 갇히는 건 이미 충분히 해왔는데.
남은 여생도 햇빛도 못 받으면서 그렇게 살고 싶진 않았다.
꽤 오래 지속된 비관적인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놓은 게 발레리였다.
스승의 말대로 따르니 일상이 변했고, 습관이 변했고, 몸이 변했고….
그리고 운명도 변한 것 같았다.
잃어버린 웃음과 건강을 되찾았다.
발레리가 뭘 하자고 하든, 프리다는 따를 준비가 돼 있었다.
설령 그것이 위험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그리고 지금 발레리는 외출을 제안하고 있다.
언젠간 꼭 가보고 싶었던 남부 프레이저 후작령이다. 켄드릭은 그곳의 자연 경관이 참 좋다고 자랑했었다.
이름 모를 누군가가 자신을 만나고 싶다고 하는 건 별문제가 없었다. 흔히 듣던 말이었다. 모두가 저를 만나고 싶어 했으니.
열아홉 살 때까지 만인의 연인으로 지내온 황녀였다. 제국의 보배인 황녀를 만날 수 있다면 버선발로도 구만 리를 뛰쳐나올 수 있는 게 칼레바니아 백성들이었다.
하지만 프리다는 이내 회의감에 빠져들었다.
발레리가 지켜준다고 해도, 마왕 수하의 집행관들이 과연 날 가만히 둘까. 죽은 사람의 영혼을 다루는 자들이다. 만약 변장을 해서 모습을 바꾸더라도 정체를 알아볼 것이다.
‘5년 전 밤에 창가에 찾아왔던 것처럼, 갑자기 그자들이 나를 습격해 데려가려고 하면 어떡하지.’
프리다는 계속해서 생각했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보검을 가지고 가면 되지 않을까. 나를 함부로 데려가려 한다면, 직접 그들과 맞서 싸우면 되니까.’
발레리는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겠지만, 얘가 곁에서 날 응원해 준다면 무섭지 않을 것 같아.
‘…그리고, 부모님의 허락도 필요하겠지.’
아무리 프리다가 나갈 의사가 충만하다 하더라도 황제 부부의 허락 없이는 석실에서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철문 앞의 문지기들을 넘을 방법은 부모님의 허락 한 마디뿐일 테니까.
생각 정리가 끝났다.
프리다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나는 좋아요, 발레리. 일단 아버지께 여쭤볼게요. 나도 그날이 오기 전에 한 번쯤은 나가고 싶었어요.”
발레리는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까만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방금 들은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발레리가 말했듯이, 나는 충분히 강해졌으니까요.”
그리고 난 운명을 타고났으니까요.
밖에 좀 나갔다 온다 한들, 무슨 일 있겠어요?
나는 왠지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아.
발레리와 함께한다면.
***
프리다는 이틀 뒤인 토요일에 황제 부부를 또다시 석실로 초대했다.
부부는 딸과 함께 오붓한 만찬을 든 뒤, 촉촉한 파운드케이크와 함께 허브차를 마셨다.
요즘 황제 부부는 프리다가 부르면 다른 일을 제쳐두고서라도 석실로 달려왔다.
딸이 지하세계로 출정하기 전 최대한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었다.
프리다는 테렌스도 불렀지만, 그는 급히 처리할 일이 있다며 주말에 찾아오겠다고 했다.
“어머니, 아버지. 저 출정하기 전에 두 가지만 부탁드리고 싶어요.”
황제는 찻잔에서 입술을 떼며 둥글둥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그래, 프리다. 무슨 부탁이니.”
지금 황제의 기분은 무슨 부탁이든 들어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황후 또한 딸의 말을 반겼다.
“흐음, 우리 딸이 또 무슨 부탁이 있을까?”
프리다는 목을 가다듬은 뒤 첫 번째 부탁을 입에 올렸다.
“와이어 숲으로 출정하는 사절단에 기사 한 명 추가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음… 기사? 누굴 말하는 것이냐.”
“켄드릭 프레이저 경이요.”
황제는 포크 모서리로 케이크 조각을 잘라내다가 동작을 멈췄다.
“프리다. 그자와는 이미 이야기가 끝났어. 후작가 마지막 아들까지 그곳에—”
“아버지, 저 못 믿으세요? 맨날 저한테 저 자신을 믿으라고 하시면서.”
프리다는 아비의 말을 잘라먹었다.
“아니, 너를 못 믿는 게 아니고….”
“저 오벨론 물리칠 자신 있어요. 그럼 그 집 실종된 아들들 다 무사히 돌아올 수 있잖아요. 그리고…. 켄드릭 경이 석실 집사로서 절 얼마나 챙겨줬는지 아실 거고요.”
“…후우, 프리다. 내가 아니라 후작이 반대할까 봐 그런다.”
“그럼 아버지는 반대 안 하시는 거네요.”
“어차피 가더라도 켄드릭 경이 할 수 있는 건 없지 않느냐. 예도 서면서 검을 치켜드는 것밖에는….”
“그건 다른 기사들도 마찬가지잖아요. 저 말고 오벨론을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거기에 딱 한 명 더 끼워주는 거, 그렇게 어려운 거예요?”
황제는 마지못해 승낙했다.
굳이 그자와 같이 가고 싶다는데, 프리다의 고집을 꺾을 순 없었다.
어차피 프레이저 후작의 허락이 관건인 일이었다.
문제는 프리다가 그다음으로 내민 부탁이었다.
“아버지. 저 정말 강해졌어요. 저번에 보셨다시피.”
“…그래, 알지. 우리 딸이 엄청나게 강해졌다는 거.”
“외출을 하고 싶어요. 다음 달 중순쯤에요.”
“…프리다. 출정하기 전에 밖으로 나가겠다는 얘기니? 대체 어디로?”
황후는 미지근히 식은 차를 내려놓으며 걱정스레 물었다.
“네, 남부 프레이저 후작령이요. 발레리가 호위로 동행하기로 했어요. 닷새에서 엿새 정도면 황궁으로 돌아올 거예요.”
프리다는 제 계획을 설명했다.
3월 중순에 딱 6일만 외출하게 해 달라. 발레리가 밤낮없이 저를 지킬 거고, 보검을 들고 나갈 테니 집행관들이 오더라도 즉각 대응할 수 있다.
딸의 말을 가만히 듣던 황제와 황후는 불안한 시선을 교차했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프리다는 설득을 이어갔다.
“출정하기 전에 바깥공기 실컷 마셔보고 싶어요. 발레리 믿으시잖아요. 절 이렇게 강하게 만들어 준 사람이고, 실제로 강한 사람이기도 하고요.”
“…프리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여자 둘이서 그리 먼 곳에 간다는 거야.”
“어머니, 필요하면 호위를 더 붙여주셔도 되는 거잖아요. 호위가 많이 따라다닐수록 제게 시선이 쏠리긴 하겠지만요…. 제발 한 번만 내보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