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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124)화 (124/173)

124화  

일흔두 번째 대련. 

프리다의 마지막 상대는 그레이 경이었다. 

이날 대련은 황제 부부와 테렌스가 석실로 찾아온 가운데 이뤄졌다.

연무장 한가운데 선 프리다는 패배할 각오를 했다.

부모님과 오라비가 빤히 관전하고 있는 상황에서 꼼수를 쓸 순 없었다.

철문이 열리고 그레이 경이 들어왔다. 귀밑까지 오는 갈색 단발머리를 한 기사였다.

그의 판판한 흉곽이 한 번 크게 오르내렸다. 꽤 각오하고 나온 표정이었다.

프리다는 연무장에 들어온 그레이와 목검을 맞대고 인사했다.

“마지막이니까 최선을 다할 거예요. 내 부모님 앞이라고 봐주지 말고, 경도 본실력으로 해 줘요.”

“…하하, 여부가 있겠습니까. 정정당당하게 임하겠습니다.”

둘은 거리를 벌려 섰다.

삐익—

발레리가 분 호루라기 소리에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프리다는 처음부터 바닥에 푹 주저앉는 느낌으로 자세를 낮췄다. 

황녀가 느닷없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레이는 당황했다.

그레이는 고개를 내리고 뒤로 주춤거리며 프리다를 찾았다. 프리다는 전진과 후진을 반복하며 목검을 정신없이 부딪쳐 왔다.

황녀의 움직임은 변칙적이었다. 아래에서 위로 뚫고 올라오는 찌르기 동작이 계속됐다.

그레이는 이렇게 체구가 작은 적을 상대해 본 적이 없었다. 이 낯선 각도에서 들어오는 공격은 어떻게 막아야 하지, 고민하던 도중 프리다의 검 끝이 턱밑에 훅 다가왔다.

와, 방금 뭐야. 그레이는 고개를 뒤로 빼며 자세를 바로 고쳤다.

프리다는 그 찰나에 상대방의 약점을 포착했다. 긴장해서 그런 걸까. 관절의 움직임이 어딘가 뻣뻣했다.

두 사람은 탐색전을 벌이며 대치했다. 그레이의 동작은 강하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약하거나 느리지도 않았다. 문지기들 중에선 체격도, 실력도 다 평균치였다. 능력치가 모두 균형 잡혀 있어 더 파악하기 어려웠다.

프리다는 전신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아, 어디를 공략해야 자세가 무너질까. 관절이 부자연스럽게 꺾이도록 하면 좋을 것 같은데.

짙푸른 눈동자가 상대방을 얼른 훑어 내렸다. 허벅지? 그래, 허벅지 쪽을 찔러 볼까.

프리다는 눈을 부릅떴다. 그녀는 자세를 다시 세워 타점을 높이 잡았다. 그레이 또한 휘두르는 각도를 올려 방어했다.

그사이 아래 공간이 살짝 비었다. 프리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점프를 하는 척 무릎을 잠깐 튕겼다가 그레이의 왼쪽 허벅지를 그대로 파고들었다.

“허억!”

찌르르한 통증에 그레이는 얼굴을 구겼다.

동시에 그는 황제와 황후, 황태자의 시선을 의식했다. 특히 황후의 조마조마한 눈빛 때문인지 아랫배에 긴장이 잔뜩 들어갔다.

프리다는 쉴 틈을 주지 않았다. 그의 팔꿈치 안쪽, 그러니까 힘줄이 있는 부분을 휙 후려쳤다.

왜 이런 데를 치시지? 그레이는 팔꿈치를 타고 오르는 저릿한 감각에 미간을 구겼다.

그 와중에 프리다는 벌새처럼 시야를 어지럽히며 목검을 윙윙 저었다. 그걸 받아치다 보니 눈앞이 빙 도는 것 같이 현기증이 일었다.

균형이 조금씩 깨졌다. 프리다는 그의 방어 자세가 흐트러졌음을 감지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점점 더 거세게 몰아쳤다.

그레이의 왼쪽 다리가 비척거린다. 프리다는 타점을 왼쪽으로 확 옮겼다. 그레이는 본능적으로 그쪽을 향해 몸을 틀었다가 아찔한 위기감을 느꼈다.

이대로 가다간 넘어진다.

“어어….”

털썩.

엉덩이에 바닥이 쿵 닿았다. 얼결에 바닥을 짚느라 목검도 땅에 닿아 버렸다.

프리다는 얼른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레이는 잠시 멍해 있다가 황녀의 손을 붙잡고 바닥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진 것… 같았다. 황녀에게.

프리다는 의기양양한 기분을 최대한 억누르며 인자하게 미소했다. 그레이는 얼이 빠져서 뒷머리를 긁었다.

“그레이 경, 긴장했을 텐데 고생했어요.”

“아하하…. 아닙니다. 황녀님 실력에 정말 놀랐습니다.”

대련이 끝나기 무섭게 황제와 황후는 연무장으로 달려가 딸을 깊이 끌어안았다.

“우리 멋진 딸, 너무 자랑스러워….”

“프리다, 네가 정말 해냈구나.”

프리다는 부모의 격렬한 포옹과 입맞춤을 받으며 찡긋 웃었다. 연무장에 뒤따라 들어간 테렌스도 그녀의 등을 팍팍 두들기며 격려했다.

황제는 감격에 겨워 눈물까지 흘렸다. 그는 손수건을 꺼내 젖은 뺨을 훔치며 발레리에게 와 악수를 청했다.

“로빈슨 양, 내 조만간 만찬에 초대하겠네. 어떤 보상을 내릴지 기대해도 좋네.”

발레리는 진땀을 흘리며 악수를 받았다.

“예? 아, 별걸요. 안 그러셔도 되는데….”

뒤따라 다가온 황후는 아예 발레리를 품에 끌어안아 버렸다. 예기치 못한 따스한 포옹에 발레리는 돌처럼 굳었다.

“로빈슨 양, 너무 고마워서 어쩌죠. 날 닮아서 운동신경이 하나도 없었던 아이인데, 어떻게 이렇게 실력을 키워놨는지…. 내가 꼭 보답할게요.”

“아, 아뇨, 말씀만으로 고맙습니다….”

발레리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황후의 등을 살짝 끌어안았다. 왼손에는 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아직까지 빠지지 않는 반지를 가리려면 어쩔 수 없었다.

테렌스는 흡족해하며 이 광경을 지켜봤다.

황제 부부에게 둘러싸인 발레리는 얼떨떨한 기색은 있지만 분명 웃는 얼굴이다.

발레리는 프리다의 스승으로서 맡은 바 직분을 기대 이상으로 수행했다. 노고를 격려 받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연인이 부모에게 인정받고 있다. 발레리를 보는 황제 부부의 시각은 긍정적일 것이다. 허약하고 부실하던 아이를 짧은 시간 만에 어엿한 검사로 만들어놨으니.

조금씩 희망이 커진다. 이렇게 가다 보면 언젠간 교제 사실을 밝힐 수 있지 않을까. 그녀와의 관계를 알게 된다면 놀라기야 하겠으나, 굳이 반대할 만한 사유는….

‘그래, 아무래도 신분이 걸림돌이겠지.’

이렇게 발레리가 제시한 연애 조건들은 조금씩 의미를 잃어가고 있었다.

완전한 비밀 연애도 아니었다. 레이븐과 에이바가 교제 사실을 알고 있다.

미래가 아예 없는 관계도 아니었다. 발레리의 손에는 이미 반지가 끼워져 있다. 일단은 사랑의 징표로 끼워둔 것이지만 언젠간 그 의미를 말할 계획이다.

그 반지에는 청혼의 뜻이 담겨 있다고.

무엇보다 발레리는 헤어지자고 말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녀와의 밤은 보글보글 끓는 초콜릿 퐁듀처럼 언제나 뜨겁고 달콤했다.

다만 테렌스는 이따금 불안할 때가 있었다.

가끔, 아주 가끔 발레리는 허무에 잠긴 듯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럴 때마다 테렌스는 그녀를 끌어안고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아직 발레리는 한 번도 그 말을 돌려준 적이 없었다.

—고마워요….

반응을 안 하진 않았다. 매번 고맙다며 희미하게 웃을 뿐.

테렌스는 고맙다는 말이 슬프게 들릴 수도 있다는 걸 깨닫고 있었다.

***

그렇게 해서 프리다는 문지기 기사 일흔두 명 가운데 스물여덟 명을 상대로 승리를 거뒀다.

열 명을 이기는 게 목표였으니 달성률은 무려 280퍼센트였다.

물론 떳떳하지 못한 승리가 절반을 넘었지만 상관없었다. 프리다는 저 자신의 발전에 나름대로 만족했다.

일흔두 번의 대련은 영양가가 풍부했다. 여러 유형의 기사들과 겨루면서 제게 부족한 점들을 많이 파악했다.

황제 부부와 테렌스가 떠난 뒤, 발레리는 향후 계획을 이렇게 설명했다.

“이번 달부턴 저랑 같이 약점 보완하기로 해요. 이미 갖고 계신 강점은 더 키우고요. 더 발전하실 여지 많이 남아 있는 거 아시죠?”

발레리는 정말 의욕을 불어넣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응, 그래요!’ 하고 대답하는 프리다의 가슴에서 열정의 불꽃이 화르륵 타올랐다.

일정을 모두 마친 발레리는 연무장 바닥을 정리한 뒤 퇴근할 채비를 했다.

프리다는 그녀를 냉큼 불러 세웠다.

“발레리, 왜 그냥 가려고 해요?”

“네? 하실 말씀 남았어요?”

“응, 소원 말해 주고 가야죠. 나 열 명 이긴 지 꽤 됐잖아요.”

“아아, 내일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원하신다면 지금 할게요.”

프리다가 고개를 끄덕이자 발레리는 소파 쪽을 가리켰다.

“저기 앉아서 들어 주시겠어요?”

프리다는 얼른 그쪽으로 달려가 자리에 풀썩 앉았다.

발레리의 소원이 뭔지 빨리 듣고 싶었다.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끌 만한 이야기라면 생각보다 꽤 큰 것 같았다.

얼마나 큰 소원이든 상관없었다. 제 스승이자 은인이자 친구였다. 무슨 말을 하든 들어줄 용의가 있었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수준의 일이라면.

발레리는 프리다에 앞에 정중히 무릎을 꿇었다.

프리다는 깜짝 놀랐다.

“으응? 발레리, 왜 갑자기 무릎을 꿇어요? 설마… 청혼이라도 하려는 거예요?”

발레리는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청혼을 얼마나 많이 받아 봤으면 이런 반응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뭐, 황녀님 같은 분이라면 평생 모시고 살라고 해도 기꺼이 그러겠지만.’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흐음, 아쉽네. 난 발레리랑 남은 일생 동안 같이 살 마음 있는데.”

프리다는 장난스레 히죽거렸다.

반면 발레리의 얼굴은 점점 진지하게 굳어졌다. 이제 정말로 본론을 꺼내야 한다.

“황녀님.”

“응, 말해요.”

“여기까지 따라와 주셔서 감사해요. 매일 밤에, 그리고 주말까지도 혼자서 엄청나게 연습하신 거 알고 있어요. 식사량도 많이 늘려 주셨고, 컨디션 관리도 철저히 하셨어요. 그런 하루하루가 모여서 이 정도까지 발전하신 거고요.”

“뭐예요…. 발레리, 오늘부로 그만두려고 밑밥 까는 거예요?”

걱정 가득한 프리다의 질문에 발레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끝까지 들어 주세요.”

“휴, 다행이다. 응, 알았어요.”

“저는 황녀님께서 충분히 강해지셨다고 생각해요. 엄밀히 말하자면…, 이미 강한 분이셨어요. 저는 내면의 힘을 바깥으로 끄집어내는 과정을 조금 도와드렸을 뿐이고요.”

프리다는 그녀의 말을 잠자코 들었다.

이렇게 차분한 어조로 말하는 발레리의 모습은 조금 낯설기도 했다.

그만큼 오래 준비해온 말이겠지.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는 걸까. 프리다는 토끼처럼 귀를 더 쫑긋 세웠다.

“서론이 길었죠? 그래서 제가 황녀님께 바라는 것은….”

“응.”

“다음 달 말, 그러니까 여행 떠나시기 전에요.”

“…음?”

“저와 함께 외출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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