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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118)화 (118/173)

118화  

건국기념관 내부는 적막하고 캄캄했다.

발레리는 야광석 주머니를 꺼내 눈앞을 밝혔다.

그러자 밑으로 야광석 분말이 버슬버슬 떨어졌다.

“이건 가루가 너무 많이 나서 문제야. 매번 천으로 닦아내긴 하는데 왜 자꾸 남는 것 같지….”

발레리는 발아래 샛노란 가루를 툭툭 차서 흩어냈다.

유리병 안에 넣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 까탈스러운 광물은 공기에 직접 닿지 않으면 곧바로 빛을 잃었다. 그래서 매번 이렇게 공기가 통하는 망사 주머니에 넣고 다녀야 했다.

그녀는 크게 심호흡한 뒤 엘로이스 황제의 초상화 앞에 한 걸음씩 다가섰다.

빛이 아래에서 위로 비치니 엘로이스의 미소가 한층 위엄 있어 보였다.

발레리는 자루 속을 뒤적거렸다.

안에서 짤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손끝에 걸린 실을 쭉 끄집어냈다. 알 굵은 반지 열댓 개가 실에 꿰여 우르르 나왔다.

방금 황제의 침실 금고에서 꺼내 온 따끈따끈한 장물이었다.

발레리는 액자 테두리를 다시 쓸었다. 여전히 손잡이는 잡히지 않았다.

“이거 뭐 주문이라도 외워야 하나? 열려라, 참깨.”

그녀는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초상화 앞에 반지들을 달랑달랑 흔들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셀레스틴이 요구한 반지는 이 중에 없는 모양이었다.

“하, 황제 금고에 있던 반지란 반지는 다 갖고 왔는데.”

발레리는 초상화 액자 뒤를 또 들추어 봤다.

여전히 딱딱한 벽이었다.

“…다시 돌려놓으러 또 가야겠네. 가는 김에 잠자는 분들 손가락도 살펴봐야지.”

발레리는 곧바로 황제 부부의 침실 창문으로 다시 잠입했다.

그녀는 황제의 반지들을 금고 안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그리고 자세를 낮추어 잠자는 부부를 향해 슬금슬금 기어갔다.

‘손만 잠깐 보고 갈게요.’

황제와 황후는 모두 맨손으로 잠들어 있었다.

손만 맨손이 아니고 몸도 맨몸이었다. 이불로 중요한 부위는 모두 가려져 있었지만.

조금이라도 일찍 들어왔다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흑, 민망해…. 고작 반지 하나 찾자고 못 볼 꼴 다 보네.’

용무를 마친 발레리는 바퀴벌레처럼 썰썰 기어 창문 쪽으로 향했다.

“엘리엇.”

“…으음?”

황제 부부가 또 깨 버렸다.

발레리는 바닥과 한 몸이 된 것처럼 전신을 찰싹 붙이고 숨을 죽였다.

“테렌스가 이제야 에이바한테 관심을 보이더라고요. 난 사실 안 부를까 했었는데, 다과회 초청장도 직접 보내고.”

“…걔가?”

“공작은 우리랑 사돈 맺을 생각이 없어 보이긴 하지만…. 애들만 좋다고 하면 추진해 보는 건 어떨까요.”

“그래. 내년에 프리다가 일 마치고 돌아오면, 그때쯤부터 본격적으로 준비하면 될 것 같군.”

어둠 속에서 발레리는 눈알을 뒤룩뒤룩 굴렸다.

아하, 다과회 초청장을 직접 보내셨다?

본인 결혼 상대 물색하는 자리에, 공녀한테 나오라고 굳이 부르셨다?

그녀는 바닥에 붙어 있던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손등의 힘줄이 여러 갈래로 불거졌다.

‘하, 앞에선 사랑한다더니, 뒤에선 할 일 다 하는 양반이었네.’

황제 부부가 잠든 뒤, 발레리는 씁쓸함을 뒤로하고 창문을 빠져나왔다.

그다음 날 밤.

이번에 발레리는 중앙궁 서관에 있는 황후의 드레스룸을 찾았다.

묵직한 패물함이 무려 열 개였다.

그중 하나에는 오직 반지만 백 개 가까이 들어 있었다.

황후는 워낙 장신구가 많다 보니, 귀걸이와 반지, 팔찌, 목걸이, 브로치 등을 보관하는 패물함이 다 따로 있었다. 

“휴, 역시 황후라서 그런가. 웬만한 귀족부인들 패물함이랑은 차원이 다르네. 죄송한데 잠깐만 빌리고 갖다 놓겠습니다.”

발레리는 반지 패물함을 통째로 옆구리에 끼고 창문으로 빠져나왔다.

그렇게 다시 건국기념관으로 왔다.

그녀는 엘로이스 황제 초상화 앞에 경건한 자세로 섰다.

괜히 성호도 한번 그어 보았다.

이렇게 하면 그 셀레스틴이라는 사제가 좀 봐주지 않을까, 하는 헛된 희망을 품으며.

발레리는 목 뒤로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보란 듯이 액자 앞에 그 패물함을 활짝 열어 보였다.

급기야 반지를 하나하나 꺼내 액자 옆에 갖다 댔다. 손잡이가 달려 있었던 바로 그 자리에.

한 시간이 지나도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아, 여기 중에도 없는 거예요?”

발레리는 고개를 들어 엘로이스에게 물었다. 초상화 속 황제는 묵묵부답이었다.

이젠 그녀의 자신만만한 미소가 얄미워 보일 정도였다.

발레리는 한숨을 푹 내쉬며 엘로이스의 약지를 쳐다봤다.

“설마 당신이 끼고 있는 그거, 그거 가져오란 건 아니죠?”

발레리는 엘로이스의 눈을 원망스럽게 쏘아봤다.

초상화 속 입꼬리가 살짝 움직인 것도 같았다.

“그럼 어딨는지 알려주면 어디 덧나나. 그분들 침실, 이제 좀 그만 들어가고 싶단 말이에요!”

***

황제는 형식적인 것을 중요시했다. 특히 외적인 부분에서.

알현 시간에는 늘 찬란한 보관을 머리에 쓰고 손에는 왕홀을 들었다.

그래야 본인의 위엄이 제대로 선다고 생각했다.

이날은 저녁 늦게 알현이 잡혔다.

황제는 침실로 들어와 두 번째 금고의 자물쇠를 열었다.

그는 패물함 옆에 놓인 보관에 손을 뻗었다.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보관 옆에 놓인 패물함 주변에 은은한 빛 가루가 뿌려져 있었다.

아마 낮에 봤으면 발견하지 못했을, 아주 적은 양의 가루였다.

황제는 손끝으로 패물함 주변을 쓸어보았다.

약하게 빛나는 샛노란 물질이 묻어 나왔다.

“…이게 뭐지.”

수상한 기운을 느낀 황제는 패물함을 열어보았다. 

내용물은 전과 같았다. 하나하나 살펴봤지만 사라진 물건은 아무것도 없었다.

기시감이 들었다.

얼마 전에도 무기고에서 비슷한 일이 있었다.

사라진 물건은 하나도 없고, 누군가가 다녀갔다는 흔적만 남았던.

황후 또한 드레스룸 곳곳에서 이상한 가루가 미량 발견됐다는 보고를 받았다.

하녀들은 얼마 안 되는 그 가루를 작은 봉투 안에 담아 왔다.

황후는 미간을 좁히며 턱을 괴었다.

“…사라진 패물은 없었니?”

“네. 없었습니다, 폐하.”

황제와 황후는 각자 본인이 겪은 사실을 나누며 상의했다.

그리고 황궁 수석 마법사를 알현실로 불렀다.

마법사는 돋보기를 가지고 와서 그 가루의 면면을 들여다봤다.

지팡이로 그 위에 빛을 쬐어 보기도 했다.

그 끝에 나온 결론은 이랬다.

“야광석입니다.”

“야광석?”

“네, 폐하. 아시다시피 밤에 등불 대용으로 쓰기도 합니다만…. 굳기가 물러서 가루가 잘 떨어지는 편입니다.”

황제는 몇 달 전, 무기고에서 발견했던 반딧불이를 떠올렸다.

누군가 무기고에 침입했던 흔적을 발견한 날.

그날 이후 보초를 눈에 띄게 늘렸다.

그러나 무기고에 찾아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황궁 마법사들을 상대로 조사에 나섰으나 해당 사건에 연루됐다는 증거는 없었다.

한동안 잠잠해서 포기한 줄로만 알았다.

이제 그자의 손길은 침실의 금고까지 침범해 있었다.

‘…아직도 포기하지 않은 건가. 하지만 헛다리 짚고 있는 건 여전하군.’

***

드르륵.

“창문 안 잠그고 갔네.”

발레리는 차가운 창문턱에 걸터앉아 긴 다리를 하나하나 방 안으로 들였다.

이곳은 황태자궁 2층, 테렌스의 침실이었다.

테렌스는 예고했던 대로 외출하고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발레리는 주인 없는 방에 몰래 들어왔다.

도둑처럼.

“아흑, 추워.”

발레리의 코와 귀, 뺨은 모두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일 년의 마지막 달이 시작되니 칼바람이 더 매서워졌다.

창문 틈을 꽉 닫은 그녀는 연신 맨손을 비볐다.

오늘 발레리는 담판을 짓고 싶었다.

테렌스가 다과회에 볼드윈 공녀를 왜 초청했는지. 그리고 무슨 말을 그렇게 은밀하게 주고받았는지. 공녀와 가까이 지낼 거면 공작의 뒤는 왜 캐고 있는지.

“기다리다 보면 들어오겠지. 근데 다짜고짜 다과회 얘기부터 하면 좀 이상하려나? 그냥 어디 지나가면서 들은 말이라고 둘러대야겠다.”

선득한 추위에 아직도 온몸이 떨렸다.

벽난로를 켤까, 하다가 말았다.

대신 그녀는 방향을 틀어 책상 쪽으로 향했다.

딱딱한 의자에 앉아 기름등에 불을 붙이니 엄청난 서류 더미가 보였다.

“요즘 바쁘다고 했었는데. 침실에도 일을 가지고 와서 하네.”

숫자가 많이 쓰인 걸 보니 예산 관련 서류인 듯했다.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서류를 대충대충 넘기다 보니, 뭔가 이질적인 재질의 작은 종이 한 장이 꽂혀 있는 게 보였다.

연한 분홍색 쪽지에 무언가가 쓰여 있다. 필체는 아주 아기자기했다.

“뭐야, 이거.”

발레리는 쪽지를 쓱 뽑아서 눈앞에 가까이 댔다.

그녀는 눈을 부릅뜨고 한 글자 한 글자를 읽어 내려갔다.

「12월 2일 자정. 클리포드 스트리트 86번지의 ‘베스타 틸리스’, 밀실이 있는 술집이에요. 내 가명인 ‘아델라’를 대면 안내해 줄 거예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당신의 아름다운 비밀 요원」

“아름다운, 비밀, 요원…?”

발레리는 눈을 의심하며 쪽지 내용을 다시 정독했다.

필체나 어투로 봐서 남자일 확률은 아주 낮아 보였다.

“하하, 그래…. 날짜는 일단 오늘이고.”

밀실이 있는 술집이면, 보통 귀족이나 부유한 상인들이 유흥을 즐길 때 애용한다고 들었다.

말이 좋아서 유흥이지. 그냥 망나니들이 더럽게 노는 곳이라고 보면 된다.

테렌스가 그런 곳에 찾아간다고?

일단 상상이 안 된다.

“제보를 받으려면 저번처럼 아예 술집 하나를 전세 내면 되지. 굳이 이런 찝찝한 영업장에 찾아갈 건 뭐야? 근데 아무리 봐도 이 글씨체 낯이 익은데.”

이 귀엽고 깜찍한 글씨체를 어디서 봤는지 기억을 되짚어 보다가….

아무래도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씨체고 나발이고 일단 가서 뭘 하고 있는지 확인해야겠어. 앞에선 사랑한다면서 뒤에선 누굴 만나고 다니는지.”

발레리는 화려한 벽시계로 눈을 돌렸다.

자정까지 남은 시간은 25분이었다.

***

“아델라.”

연미복을 차려입은 술집 종업원은 발레리를 멀뚱히 쳐다봤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웬 허름한 복장의 인간이 특별 대우 손님의 암호를 대고 있으니.

“…음, 아델라를 찾으시는 분은 이미 들어가셨습니다만.”

“한 명 더 있어요. 그게 저예요.”

발레리는 이글이글 타는 눈으로 종업원을 쏘아봤다.

안 들여보내 주기만 해봐. 허리춤의 검으로 손이 가려는 걸 가까스로 참았다.

종업원은 몇 시간 전의 기억을 더듬었다. 손님은 아델라, 라는 이름을 대면 들여보내라고 하긴 했었다. 그게 몇 명이라는 언급은 없었다.

그는 발레리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며 진땀을 흘렸다. 상당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좀 수상하긴 하지만 일단 들여보내야 신상에 탈이 없을 것 같았다.

“…따라오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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