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어느덧 다과회는 파장 무렵이 됐다.
발레리는 슬금슬금 온실 입구 쪽에 있는 덤불로 자리를 옮겼다.
귀족 영애들이 하나둘씩 온실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친한 무리끼리 모여 작게 수군거렸다.
“공녀님이 황태자비 자리를 포기한 게 아니었나 봐요.”
“전하께서 눈길도 안 줘서 상처받고 뛰쳐나왔다는 건 헛소문이었을까요?”
“그러니까요. 전하께서 무도회 땐 공녀님이랑 춤도 안 추시길래 진짜 그런가 보다 했는데…. 오늘은 웬걸, 공녀님밖에 안 보시네요.”
발레리는 점점 멀어지는 그들의 말소리에 쫑긋 귀를 기울였다.
자꾸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흠, 나 제보 잘못한 건가? 공녀랑 둘이 왜 저러는지 알 수가 없네.”
분명 프리다는 다과회가 테렌스의 결혼 상대를 물색하는 자리라고 했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테렌스는 정말 단 한 사람과의 대화에만 몰두했다.
그럼 그게 결혼을 염두에 둔 상대일 가능성이 클 것이다.
“…진짜 공녀랑 나중에 결혼이라도 하려고 마음먹은 건가.”
발레리는 곰곰이 과거를 되짚었다. 공녀는 한때 발레리를 불러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넌 모르겠지만, 우리 신분쯤 되면 남녀가 서로 좋아서 결혼하는 경우는 얼마 없어. 애정 문제야 나중에 서로 노력하면 될 일이니까.
어쩌면 테렌스도 비슷한 사고방식을 가졌을지도 몰랐다.
실제로 그런 말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근데, 그럴 거면 장인어른 될 사람의 비위는 왜 캐고 있는 거지? 장가갈 가문이라도 밀수는 용서 못 한다는 건가.”
생각할수록 의문투성이였다. 테렌스의 행동은 앞뒤가 잘 맞지 않았다.
발레리는 땅을 짚은 제 손가락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한참을 풀 속에 잠복해 있느라 흙이 잔뜩 묻어있었다.
“내 손에 반지 끼운다는 말은 그냥…. 별말 아니었겠지.”
잠결에 들어버린 그 말 때문에 며칠 심란했었다. 함께 밤을 보내는 사이가 됐으니 책임을 지겠답시고 또 버거운 제안을 할까 봐.
그런데 이젠 한시름 놓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어차피 반지를 주더라도 깊은 뜻은 없을 테니 말이다. 거추장스러운 귀금속 선물은 거절하면 그만이었다.
발레리는 테렌스와의 결혼을 상상한 적도 없었다. 연애를 시작하기 전에 ‘미래를 생각하지 말라’고 미리 못을 박기도 했다.
그런데….
이 상황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결혼은 내가 떠나고 나서 추진해도 되는 거 아닌가. 내가 이럴 자격 없는 거 아는데. 막상 다른 여자랑 붙어 있는 걸 보니까 기분 더럽네.”
***
불이 다 꺼진 황태자궁 침실.
발레리는 테렌스와 같은 이불을 덮은 채 눈을 말똥거렸다.
땀을 뺀 덕에 몸은 지쳤는데….
잠이 더럽게 안 온다.
사실 오늘은 같이 자는 날이 아니었다.
발레리는 통상적인 이틀 간격을 무시하고 불쑥 그를 찾아왔다. 아까 다과회에서 본 장면 때문이었다.
그냥 궁금했다. 이 인간이 무슨 생각으로 그 행사에 나갔는지. 왜 그 공녀랑 그렇게 딱 붙어서 귓속말을 주고받았는지. 공녀가 소매 안에 넣어준 그 물건은 또 뭔지.
하지만 막상 얼굴을 보니 그 주제를 꺼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다과회를 염탐한 사실을 인정하는 셈이 되니까. 나랑 결혼 같은 건 생각하지 말라고 했으면서, 그의 결혼 계획에 신경 쓰고 있다는 걸 들키게 되니까.
오늘도 테렌스는 참 한결같았다.
창문 여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창가로 달려와 꽉 안아줬다. 강아지가 주인 반기듯이.
예고 없이 불쑥 찾아오니 더 기뻐하는 게 보였다. 입가에 걸린 보조개가 평소보다 더 깊었고, 따스한 눈빛에서는 애틋함이 묻어났다.
그 귀여움에 또 혹했다. 결과는 지금과 같았다. 한참의 유희 끝에 그는 홀딱 벗고 곁에 잠들어 있다.
‘내년 이맘때쯤엔 공녀가 이 자리에 누우려나.’
그 장면을 머릿속에 그려보고 있자니 절로 주먹이 불끈거린다. 폭력적인 충동이 들끓었다. 침대를 쾅 때려서 산산조각 내버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아으, 열받아. 공녀한텐 별 감정 없었는데 왜 자꾸 이러지.’
발레리는 고개를 돌렸다.
테렌스의 눈 감은 옆모습이 보인다.
콧대는 왜 저리 높고, 속눈썹은 왜 저리 긴지.
더 오래 보고 싶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하면 조바심이 난다.
다른 누가 이 자리에 누워 저 옆모습을 본다고 생각하니, 울화통이 터져 죽겠다.
매번 뜨거워서 데일 지경인 이 잠자리엔….
나만 눕고 싶다.
발레리는 도리질을 쳤다. 생각할수록 되지도 않는 독점욕이었다.
어차피 이 사람 기억 속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떠나면 이 사람은 다른 여자와 행복해야 한다.
그래, 그래야 맞을 텐데….
왜 이마에서 자꾸 뜨신 김이 모락모락 솟아오를까.
“발레리.”
스스로 판 구덩이 속에서 불쾌감을 맛보던 도중, 테렌스가 이름을 불러왔다.
“뭐야, 아직 안 잤어요?”
“모레 밤에 약속이 생겨서 그런데…. 그다음 날에 와줄 수 있나?”
한밤중에 무슨 약속이람.
어차피 발레리가 침실에 찾아오는 건 밤 열한 시 이후였다. 꽤나 야심한 시간에 누굴 만나러 간다는 거였다.
“야밤에 누굴 만나는데요?”
“중요한 제보를 받을 게 좀 있어서. 그날 몫까지 다음 날 안아주겠다.”
제보, 그래. 제보….
일 때문이라는 소리다.
뭐, 내가 모르는 사안일 수도 있겠지. 이 사람이 제보를 한두 번 받는 것도 아닐 테고.
“네, 그러시든가요.”
“고마워. 이해해 줘서.”
쪽.
볼에 쫀득한 뽀뽀가 와 닿았다.
내일하고 모레. 이틀을 건너뛴다면 사흘 후에나 만날 수 있다는 건데.
하, 안 되겠다.
발레리는 목 끝까지 올라온 경고를 내뱉기로 작정했다.
“그 저기, 있잖아요.”
“음?”
“나랑 만날 때만큼은, 나한테만 충실하면 안 돼요?”
이불이 크게 바스락거렸다. 테렌스가 그녀 쪽으로 돌아눕는 소리였다.
“…내가 안 충실해 보이나?”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 어…. 사귀는 동안에는 서로만 바라봤으면 좋겠다 이거죠. 다른 계획은 조금만 뒤로 미루고요.”
“다른 계획이라니.”
테렌스는 급기야 상체를 세우고 앉았다.
발레리의 심기가 불편함을 감지해서다. 다만 무엇 때문에 심사가 뒤틀렸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으, 몰라요! 그냥 잘 사귀자고요.”
발레리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빈속에 술을 들이켠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렸다.
‘어떻게 말해. 너 결혼은 딴 여자랑 할 거 아는데, 나 만나는 동안에는 계획하지 말라고. 다른 여자랑 붙어먹는 꼴은 상상만 해도 분통 터진다고.’
“푸훗, 발레리.”
“…왜요.”
“내가 그렇게 좋나?”
능글능글 웃는 소리가 들렸다.
발레리는 덮어썼던 이불을 확 걷어냈다.
“그럼 좋으니까 이러지. 싫으면 이러겠냐?”
흥분하면 반말을 찍 내뱉는 습관.
테렌스는 그조차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는 왼손을 뻗어 발레리의 붉은 뺨을 꾹꾹 눌렀다.
“…네 고백을 또 듣게 돼서 기쁜데. 조금 속상하군.”
“왜요?”
“날 좀 못 믿는다는 느낌이라.”
일단 그가 파악한 발레리의 뉘앙스는 그랬다.
다른 계획이 무엇을 지칭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여자한테 눈 돌리지 말라는 메시지로 해석됐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을 텐데.
“못 믿는 것까진 아니에요. 언제나 진심으로 대해주시는 거 알아요.”
발레리는 홧홧해진 얼굴로 애먼 천장만 쳐다봤다.
테렌스는 고개를 내려 발레리와 이마를 맞댔다.
“…불안해하지 마.”
“아 그, 불안한 것까진 아니고….”
그의 입술이 콧잔등에 폭, 내려앉았다가 떨어졌다.
두 사람의 시선이 한없이 가까운 거리에서 맞닿았다.
서로를 향한 눈 맞춤은 점점 더 깊어졌다.
테렌스의 연한 푸른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눈빛을 발산했다.
그의 목울대가 눈에 띄게 불거졌다.
“사랑해.”
뭐?
발레리의 새카만 동공이 홍채를 잡아먹을 듯 뻥 뚫어졌다.
시각부터 청각, 촉각, 그리고 미각까지. 일순 모든 감각이 마비됐다.
‘나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심장이 철렁, 하고 내려앉았다가 갈빗대를 다 부숴놓을 것처럼 고동치기 시작했다.
처음 입맞춤을 나누었던 그 축제날의 밤처럼.
아니, 어쩌면 그날보다 더.
“…많이 놀랐나? 모르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산송장처럼 뻣뻣이 굳은 발레리를, 테렌스는 근심스럽게 내려다봤다.
본인의 발언이 어떤 파장을 불러왔는지 이제야 깨달은 듯했다.
“그, 아니. 어….”
눈앞이 하얘졌다.
쇠망치로 정수리를 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광광 울렸다.
할 말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일단 확실한 게 하나 있다면….
기쁨과 슬픔의 파도가 양쪽에서 동시에 밀려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가볍게 말한 건 아니야. 그냥 내가 느끼는 바를 그대로 말한 거다. 이 말 말고는 내가 너한테 느끼는 감정을 표현할 방법이 없었어. 그…. 좋아한다는 말로는 한참 모자라서 다른 말을 찾다 보니까…. 정말 그 단어 하나밖엔 안 떠올라서….”
당황했나 보다. 말이 많아진 걸 보니.
테렌스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덧붙였다.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 네가 들을 준비가 안 됐을 거라고는 생각 못했어. 난 그저 네가 내 진심을 안다고 하기에…. 하, 왜 네 앞에선 자꾸 속마음을 다 꺼내놓게 되는지….”
발레리는 눈을 감았다.
이 장황한 변명을 듣고 있는 난 지금 기쁜 걸까.
아니면 슬픈 걸까.
고요한 가운데 그녀는 귀를 기울였다. 양쪽의 파도가 각각 어떤 세기로 밀려오는지 알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나는 어떤 쪽의 파도에 휩쓸리고 싶은 걸까.
“알아, 테렌스.”
“…발레리.”
“어떻게 몰라. 당신 눈 속에 훤히 다 비치는데.”
이 품에 안길 때마다 생각했었어.
당신이 나에게 쏟아내는 모든 배려심, 입에서 탄성이 나오게 하는 그 섬세한 움직임.
방금 말한 그 단어가 아니면 설명할 길이 없더라.
“…선물 남아 있어요?”
발레리는 테렌스의 뒷덜미를 살살 주무르며 천천히 당겼다.
“얼마든지.”
두 입술이 조용히 맞물렸다.
따뜻한 것들이 한데 모여 부드럽게 뒤엉켰다.
고요한 창밖엔 첫눈이 흩날렸다.
밤이 하얗게 깊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