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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96)화 (96/173)

96화

“코끼리 인형, 너지?”

테렌스의 물음에 이윽고 정적이 흘렀다.

수초 뒤 침묵을 깬 건 히끅, 하는 발레리의 딸꾹질 소리였다.

“아닌데요.”

생일 다음 날, 테렌스는 침실 앞에서 선물 상자를 발견했다. 열어보니 이스티아풍 스카프를 맨 코끼리 인형이 있었다.

그때 그 인형과 매우 흡사했다.

열 살 무렵, 이스티아로 여행을 다녀온 숙부가 얄궂게도 딱 하나 사 온 기념품 인형.

인형을 먼저 품에 안은 건 프리다였다. 어린 테렌스는 그걸 미치도록 빼앗고 싶었다. 고작 그걸 차지하겠다고 동생 앞에서 전력으로 힘을 다했다.

쌍둥이 남매는 인형을 가지고 악쓰며 줄다리기를 했다. 결국 인형은 찢어지고 말았다. 뒤로 우당탕 넘어진 프리다는 뒤통수가 깨졌고, 화가 난 황제는 테렌스의 뺨을 후려쳤다.

테렌스는 끝끝내 말하지 못했다. 사실 가지고 싶었던 건 코끼리 인형이 아니라, 프리다가 받는 사랑이었다고.

“난 코끼리 인형 얘기를 10여 년 간 아무한테도 꺼낸 적이 없어. 너 이외에는.”

“사람의 기억력은, 히끅. 완전하지 않아요.”

“…고맙다.”

“뭐가요.”

“정말… 기뻤어. 그 어떤 선물을 받았을 때보다.”

“그러니까, 히끅.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발레리는 열심히 시치미를 뗐다. 하지만 입꼬리가 자꾸 하늘로 치솟았다. 그걸 내리는 게 딸꾹질을 참는 것보다도 힘들었다.

테렌스는 발레리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달빛을 받은 크림색 가면이 은은히 빛났다. 그 아래 예쁜 입술은 분명한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여전히 너는 참 투명하구나. 테렌스는 얼굴 가득 미소 지었다.

“선물보다 기쁜 건, 네가 내 생각을 했다는 사실이다.”

“…히끅.”

“너도 내가 보고 싶었잖아, 그렇지?”

“하, 참… 히끅.”

테렌스는 깊은 보조개를 띄우며 손을 뻗었다. 발레리의 오른뺨은 갓 내온 찻주전자처럼 뜨끈해져 있었다.

정말이지 수정처럼 맑고 투명한 얼굴이었다. 온도마저 속마음을 고스란히 내비치고 있으니. 제 속을 숨기는 법이 없는, 밑도 끝도 없이 솔직한 표정. 거짓말엔 소질이 없는 그녀의 요망한 입술도, 테렌스는 미치도록 좋았다.

발레리는 제 볼에 와닿는 서늘한 손바닥이 그저 황홀했으나, 이내 정색하면서 떼어내 버렸다.

“이러지 마시죠, 히끅. 쓰레기처럼.”

“…쓰레기?”

“애인 삼고 싶은 분 있다면서요. 저한테 이러시면 안 되죠.”

곧 죽어도 본인인 줄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테렌스는 머리가 띵했다. 내가 고작 그런 놈으로밖에 안 보이는 건가.

“내가 그리 쉽게 변하는 사람으로 보이나?”

“…사람은 다 변해요, 히끅.”

“적어도 나는 아니야.”

테렌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피식 웃었다. 이 정도면 알아들었겠지 했는데, 발레리는 여전히 뾰로통한 얼굴이었다.

“…생일파티 때는 모른 척했으면서.”

“내가 인사하려고 하자마자 돌아선 건 너였는데.”

“제가 그랬어요?”

“…네가 날 싫어하게 된 줄 알고 잠도 못 잤다. 코끼리 인형 보기 전까진.”

테렌스는 그녀의 오른손을 살포시 쥐었다.

그리고 손등에 입을 맞췄다.

이제 둘은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발레리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의 입술이 닿은 자리에 맥이 뛰는 느낌이었다. 심장은 갈빗대를 부수고 튀어나올 것처럼 난리였다.

양손을 뻗어 테렌스의 두 귀를 막아버리고 싶었다. 창피했다. 이 거센 고동 소리가 전부 들릴 것만 같아서.

“안 보는 동안 내 마음은 더 선명해졌어.”

“…히끅.”

“너를 좋아해, 발레리.”

테렌스의 고백은 담담했다. 그리고 어느 때보다도 또렷했다.

그는 발레리의 턱끝을 살살 매만지며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갔다.

“내 몸뿐 아니라 마음도 원하는 거 알아.”

발레리의 눈꺼풀이 움찔움찔 감겼다. 귓가에 설탕시럽이 흘러드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훅 들어오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달아도 너무 달았다. 심장이 그 당도를 못 견디고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다 줄게. 내 연인이 된다면.”

이제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겠지.

말을 잃고 어물거리는 발레리의 입술에, 테렌스는 그대로 키스했다.

발레리의 눈은 이제 완전히 감겼다. 느슨히 벌어진 잇새로 따스한 감촉이 밀려들었다.

오랜만에 맛보는 그의 혀끝은 미치게 달았다.

발레리는 속으로 감탄했다. 그래, 이 맛이야. 사람한테서 어떻게 이런 맛이 날까. 이 느낌이 그리워서 몇 날 며칠을 끙끙 앓았는데.

테렌스의 목을 끌어안고 그녀는 정신없이 갈증을 해소했다.

그렇게 키스를 만끽하는 동안, 딸꾹질은 어느새 멈춰 있었다.

‘아, 잠깐만. 이거 아닌데.’

또 말려버렸다. 이런 기습 고백은 반칙이었다. 발레리는 도리질을 치며 테렌스의 가슴을 밀어냈다.

“잠깐만요.”

“…왜?”

“저도 할 말 있어요.”

“그래. 말해.”

“잠깐 떨어져서 들으세요.”

테렌스는 바로 반 발짝 물러섰다.

“저는 전하께서 좋아할 만한 사람이 아니에요.”

“…신분 때문에 이러나?”

“아뇨. 신분을 떠나서 그냥 좋아할 가치가 없다고요.”

느닷없는 자기 비하 발언이었다. 테렌스는 정색할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 깎아내리지 마. 그건 나에게도 모독이니까.”

“하, 그러니까. 저 나쁜 사람이라고요.”

너같이 투명한 악당도 있나. 테렌스의 한쪽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그가 지금껏 지켜봐 온 발레리는 그저 무해무독한 사람이었다. 말버릇이 다소 험하긴 해도.

“…그래도 상관없다면.”

“지금 보시는 제 모습이, 진짜 제가 아닐 수도 있어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테렌스는 이해할 수 없었다. 발레리는 내숭과는 거리가 먼 성격이었다. 언제나 속이 훤히 내비쳤고, 의뭉스러운 구석은 조금도 없었다.

“전 제 모습 다 못 보여드려요. 아무리 가까이 다가오셔도 말이에요.”

발레리는 계속해서 경고장을 날렸다. 테렌스는 여전히 뜨거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발레리는 그 눈빛을 거둬가라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발레리 로빈슨이 아니야. 당신 애인이 돼도, 난 진짜 정체를 밝힐 생각이 없다고. 그럼 당신이 말했던 그 껍데기 핥는 거, 그거나 마찬가지야.’

“아무튼 나 좋아하지 말아요. 다치기 싫으면.”

“…다쳐도 괜찮다면.”

“하아, 이러지 말라고요. 진짜 땅 치고 후회할 거라니까?”

“무슨 근거로.”

테렌스는 전혀 납득할 수 없다는 태도였다. 발레리는 목소리를 한 단계 끌어올렸다.

“그야 결말이 뻔하니까요. 신분으로 보나 인격으로 보나 저는 최악의 선택지예요. 나중엔 정말 지워버리고 싶은 인생의 오점이 될 거라고요.”

이쯤 되면 충분히 알아들었겠지. 발레리는 그가 단념하고 물러나길 기다렸다.

하지만 테렌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말은 가봐야 아는 거 아닌가? 난 이미 널 선택했어. 그 대가와 책임은 전부 내 몫이다.”

그러니까 그 대가와 책임을 왜 당신이 지냐고요. 죄는 내가 지을 건데.

테렌스는 발레리를 다시 끌어안으려 다가왔다. 발레리는 온 힘을 다해 그를 떼어냈다.

한 걸음 밀려난 테렌스는 그녀를 망연히 응시했다. 연푸른 눈동자가 위태롭게 떨렸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발레리는 고개를 숙였다. 머릿속에서 혼잣말이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당신 여동생을 밖으로 빼돌렸다가 무사히 귀환시키더라도, 당신을 속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죽어도 입 밖에 못 낼 말이었다. 그 대신에 눈물이 벌컥 터져 나왔다.

발레리의 가면 밑으로 눈물이 소나기처럼 주룩주룩 쏟아졌다.

“발레리, 왜 우는 거지? 내가 널 좋아한다는데. 너도 같은 마음인 것 같은데. 네가 자꾸 그러면 나도… 하, 울고 싶어지잖아….”

테렌스의 가면 밑으로도 물방울이 뚝뚝 흘렀다.

또 울려 버렸다. 죄 없는 이 남자를.

그는 가면을 확 벗어 버렸다. 젖은 눈가가 온통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발레리. 이제 그만 밀어내. 내게 끌리잖아. 내 연인이 되고 싶잖아.”

테렌스는 두 뺨을 흥건히 적신 채로 애절하게 미소했다. 그녀가 좋아하는 보조개를 한가득 담아서.

“전 그럴 자격이 없어요.”

“난 그런 자격 같은 거 둔 적 없어.”

“아니 대체… 내가 왜 좋아? 이렇게까지 나한테 매달릴 이유가 있어요? 내가 뭐 어디가 잘났다고?”

“너니까. 그냥 너라서 좋아. 갖다 댈 이유는 많지만 굳이 열거하고 싶지 않아.”

테렌스는 웃었다. 눈물을 주렁주렁 매달고도 그저 좋다고 웃었다. 드세게 따져 묻는 그녀에게 정말 바보처럼 웃어주었다.

“…….”

이렇게 웃을 줄도 아는 사람이구나. 우는 모습조차 너무 예뻤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애써 세워둔 벽이 자꾸 위태롭게 흔들렸다. 날카롭게 뚫고 들어오는 그의 진심에.

“그냥 솔직히 말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발레리는 한숨을 삼켰다.

이제 경고장을 모두 소진했다.

그녀에겐 양심만 있는 게 아니었다. 욕심이 들끓는 반대편에서는 온갖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었다. 잠깐이라도 그의 곁에 있을 방법을 탐색하느라 분주했다.

이 남자를 가지고 싶었다. 품에 안고 싶었다. 주어진 시간이 짧고, 결말이 하나뿐이라고 하더라도.

발레리는 서서히 결론에 도달했다.

‘나중에 가면, 나랑 연인이었던 기억은 분명 상처가 되겠지. 모조리 삭제해 버리고 싶을 거야.’

‘…그렇다면 나와의 기억을 지워주면 되지 않을까. 앞으로 황궁에서 남은 시간은 딱 반년이니까.’

시중에는 트라우마나 상사병 치료용으로 쓰이는 마법약이 존재했다. 마음에 상처를 남긴 기억의 일부를 희미하게 지워주는.

물론 어마무시하게 비싼 약이었다. 정기적으로 공인 치료 마법사에게 진료를 받아야 했고, 처방전까지 필요했다.

‘몇 달 치 월급은 털어야겠지만… 그래도 반년짜리 약은 구하기 어렵지 않을 거야.’

“전하, 그럼 세 가지 약속만 지켜 주세요.”

“끝내자는 말만 아니면 뭐든.”

발레리가 드디어 협상을 제의했다. 테렌스는 그녀의 말에 청각을 곤두세웠다.

“나와의 관계는 비밀에 부치기.”

“그건 당연한 일이고.”

“미래는 생각하지 말기. 이를테면 결혼이라든가.”

“…계속 말해봐.”

“내가 헤어지자고 하면, 술 한잔 짠 하고 미련 없이 보내주기.”

물론 이별주에는 약을 탈 예정이었다.

어차피 파국은 찾아온다. 발레리는 이 남자의 기억에 오점으로 남기 싫었다. 함께했던 기억은 혼자만 간직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대체 왜 그딴 약속을 해야 하지?”

“그럼 나도 안 할 거야. 고백.”

“뭐?”

고백이란 말에, 테렌스의 눈이 번쩍 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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