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95)화 (95/173)

95화

“처음 뵙겠소, 아가씨. 내 여동생의 의사를 대변해 주어서 참 고마운데, 그에 보답할 기회를 주시겠소?”

테렌스는 처음 듣는 어투로 발레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발레리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아가씨와 춤 한 곡 추고 싶은데.”

여전히 부드럽고 나지막한 목소리에, 발레리의 심장이 열렬히 반응했다.

모두의 시선이 발레리에게로 몰렸다. 춤을 안 춘다던 황태자가 갑자기 황녀의 대리인이라는 여자에게 접근해 손을 내밀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발레리의 시야에는 단 한 사람만이 들어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무의식중에 테렌스의 손을 잡았다.

음악이 시작됐다.

머릿속이 복잡한 와중에도, 오랜만에 마주하는 그의 모습에 발레리는 대책 없이 끌려 버렸다.

순백색 가면 아래 투명한 흰 피부. 잘 깎아놓은 턱선. 보조개를 가득 안고 휘어진 입매.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서늘한 체향에 점점 사고가 마비되고 있었다.

테렌스는 제게 단단히 미혹된 그녀의 귓가에 이렇게 속삭였다.

“그 목걸이 차고 온 건 알아봐 달라는 표시인가?”

“…….”

“켄드릭 경과 붙어 다니는 건 날 자극하려는 의도고?”

“…….”

“왜 대답이 없지.”

테렌스는 발레리가 연단에 올라서자마자 정체를 알아챘다. 프리다가 보냈다던 대리인이 누군가 했더니, 영락없이 발레리였다.

길고 곧은 그녀의 목선 아래 자리 잡은 백금 목걸이는, 몇 달 전 테렌스가 직접 주문한 것이었다.

“호호,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발레리는 목소리를 세 톤쯤 높여 대답했다.

그녀는 이제야 테렌스와 춤추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 참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그의 첫 춤 상대가 되어 있었다.

하, 나 왜 이러고 있지. 근데 이 인간 갑자기 왜 이래? 본체만체할 땐 언제고. 애인도 생겼다는 인간이.

“잡아뗄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아. 내 오른손도 안 건드리고 있으면서.”

“…….”

사실이었다. 춤을 시작한 이래 그녀는 테렌스의 오른손에 전혀 손대지 않고 있었다. 그가 오른손을 못 쓴다는 걸 아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말없이 지속된 춤이 막바지에 이르자, 테렌스는 다시 한번 발레리의 귓가에 입술을 댔다.

발레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부근에 난 솜털이 바짝 일어섰다.

“네게 할 말이 있어. 17번 발코니에서 기다리고 있겠다.”

이 말만 남기고 테렌스는 눈앞에서 홀연히 사라졌다.

정신을 차려 보니 다시 혼자였다.

어느덧 발레리에겐 두 개의 꼬리표가 붙어 있었다. 황녀의 대리인, 그리고 황태자의 첫 춤 상대.

발레리를 둘러싸고 여기저기서 떼 지어 웅성거렸다. 모두가 그녀의 정체를 궁금해했다. 저 여자 가면 한번 벗겨보고 싶다, 는 말이 들린 것도 같았다.

‘…이게 뭐야. 망할 놈의 황태자한테 또 홀려 가지고.’

맹세코 이렇게까지 주목받을 생각은 없었다. 머리 위로 따가운 조명이 내리쬐는 기분이었다.

불특정 다수의 시선이 버거워진 발레리는 고개를 푹 숙이며 출구 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번엔 또 다른 사람이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퀭한 눈, 빳빳하게 올려 세운 칼라. 가면을 벗겨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볼드윈 공작이었다.

“…아가씨, 나와도 한 곡 추시겠소?”

“아뇨, 좀 쉬고 싶네요.”

“황태자 전하와는 각별한 사이인가 보오. 내 딸까지 제치고 첫 춤 상대가 된 걸 보니까.”

“…아무 사이 아닙니다만.”

이 아저씬 또 왜 이래. 발레리는 예를 갖추는 것도 까맣게 잊고 퉁명스레 대꾸했다.

공작은 그녀의 전신을 훑어 내리며 가까이 다가왔다.

“이스티아 출신이오?”

“아뇨, 칼레바니아 토종인데요.”

“남부 억양이 약간 섞였는데. 프레이저 후작령 출신인가?”

정확히 들어맞는 추측이었다.

공작은 제 턱수염을 만지작댔다. 그의 손등 위 흉터가 똑똑히 보였다. 가까이서 보니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발레리 자신의 어린 시절 치열이 그대로 박혀 있었다.

“그 시꺼먼 눈동자, 어디서 본 것 같소만.”

공작은 발레리의 손을 휙 낚아채더니 손가락 마디마디를 더듬었다.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발레리는 소스라치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 미친 변태 새끼. 남의 손 갖고 뭐 하는 짓이야.

“손마디가 굵고 굳은살이 많군. 궂은일깨나 한 것 같은데. 아니면 검을 잡았나?”

공작은 발레리를 조용히 몰아세웠다. 뱀이 설설 기어가듯 으스스한 목소리로.

“그렇게 숄로 가려도, 온몸이 근육질인 건 대충 보이고.”

“…외모 품평 좀 그만하실래요? 불쾌해지려고 하네요.”

“난 한 번 본 사람은 무조건 기억해.”

“저기요, 초면이라니까요?”

발레리는 신경질적으로 대꾸했으나 공작은 전혀 믿는 기색이 아니었다.

“…너, 내 딸 만난 적 있지?”

“…….”

애초에 답이 정해진 질문이었다. 공작은 이미 그녀를 알아보고 있었다.

발레리는 등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오한이 들었다.

사람 눈썰미가 이렇게 무서울 수 있나. 공녀의 방문 앞에서 잠깐 봤다고 그걸 기억하다니. 그땐 차림새도 지금과는 딴판이었다.

“근데 말이야. 그전에도 널 본 것 같단 말이지. 나이가 어떻게 되나?”

“여기까지 하시죠. 호구조사 하러 온 건 아니실 테고.”

“말투가 상스러워. 평민 주제에 어찌 황녀의 대리인에, 황태자의 첫 춤 상대까지 됐는지 알 수가 없군.”

발레리는 그의 발언에 대꾸할 의향이 전혀 없었다.

내가 평민이면 뭐 어쩔 건데. 애초에 평민조차 못 되는 신분이지만. 발레리는 공작을 흰 눈으로 흘기며 그에게서 도망치듯 벗어났다.

동시에 숨이 턱 막혀왔다. 저 손에 목이 졸리던 기억이 또다시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짧은 인생에 가장 악몽 같았던 기억을 꼽자면 딱 그때였다.

발레리는 벽을 짚고 심호흡했다. 별 같잖은 놈한테 정체를 들켜버리다니. 먹은 것도 없건만 시큼한 토기가 부글부글 올라왔다.

마침 켄드릭은 여러 귀족 영애들의 플러팅을 뿌리치며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발레리,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아니. 괜찮아.”

“…황태자랑은 춤 왜 췄어? 주목받는 거 걱정했으면서.”

켄드릭은 퍽 불만스러운 투로 물었다.

그냥 나도 모르게 홀려 버렸어. 발레리는 변명을 하려다 입을 꾹 닫았다.

춤판에서 한창 인기를 끌기 시작한 켄드릭과 붙어 있으니 또다시 이목이 쏠리는 게 느껴졌다.

발레리는 별안간 가슴이 갑갑해졌다. 도무지 이 무도회를 즐길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이 공간의 공기를 더 이상 들이마시기가 싫었다.

“…배 안 고파? 저녁 먹으러 가자.”

켄드릭은 발레리를 데리고 만찬장으로 가려 했다. 얘가 표정이 안 좋은 건 허기져서겠지, 라고 생각하며.

발레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 바람 좀 쐬고 싶어.”

“그럼 같이 가. 물 좀 갖다 줄까?”

“아니, 됐어. 나 신경 쓰지 말고 너 아는 사람들이랑 식사해.”

식사 예절을 열심히 익힌 게 무색하게도, 발레리는 아무것도 입에 넣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켄드릭을 뒤로 한 채 비척비척 로비로 걸어 나갔다. 지금 당장 토를 쏟아내야 할 것 같았다. 화장실이 대체 어디지. 저건가.

발레리는 저 멀리 구석에 있는 작은 문을 향해 한달음에 달려갔다. 안타깝게도 화장실이 아니라 협소한 발코니였다. 하지만 이미 토기는 한계에 이르렀다.

그녀는 결국 난간 밖으로 상체를 내밀고 풀덤불에 얼굴을 처박았다. 건물이 1층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속 깊은 곳에서부터 구역질이 울컥 올라오는 그 순간.

“왜 그러지? 어디가 안 좋은가?”

곁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으헝?”

때아닌 인기척에 발레리는 입가를 쓱 문지르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발코니에는 한 사람이 더 있었다.

순백색 가면. 빠삭하게 차려입은 제복.

테렌스였다.

뒤를 돌아보니 방금 나온 문 위에 ‘17’이라는 숫자가 쓰여 있었다.

***

테렌스의 얼굴을 보자마자 메스꺼움은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인간 청량제야 뭐야….’

사실 발레리는 그를 바람맞히고 싶었다. 애인도 생겼다는 작자가, 굳이 불러서 무슨 할 말이 있나 싶었다.

하지만 얼결에 약속 장소에 와버린 걸 어쩔 수 없었다. 발레리는 난간에 기대어 그와 나란히 섰다.

둘은 프리다의 서신 이야기부터 나누었다. 테렌스는 대충 내용을 짐작하고 있었다고 했다. 대리인으로 누가 나올지는 전혀 몰랐다면서도. 

“…찬성하시는 거예요? 황녀님 여행 가시는 거.”

발레리가 그의 가면 쓴 옆모습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래, 여행이라면 여행이겠지. 테렌스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프리다의 서신 내용이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찬성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프리다의 선택이기도 하고.”

“…애인 생긴 거 축하드려요.”

대뜸 이게 무슨 소리지. 테렌스는 미간을 구기며 발레리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애인이라니.”

“누가 그러던데요. 결혼 계획 물어보니까 애인 있다고 대답하셨다고.”

“내가?”

테렌스는 그런 말을 한 기억이 없었다. 스물다섯이 되니 결혼 계획 질문은 하루에도 두세 번씩 받았다. 그럴 때마다 늘 ‘없다’고 일관했었다.

“아무튼, 애인 생기셨으면… 우리 완전히 정리된 거 맞죠?”

발레리는 최대한 태연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참에 애매한 관계를 확인 사살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마 ‘그래’라고 대답하겠지.

발레리는 긴장 속에서 테렌스의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왜일까. 벌써부터 가슴이 가뭄 진 땅처럼 쩍쩍 갈라지는 것 같았다.

테렌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발레리가 대체 어디서 무슨 소릴 듣고 온 건지.

그는 좀 더 과거의 기억을 더듬었다. 이스티아 4왕자가 떠올랐다. 제 여동생을 만나 보라고 끈질기게 요구하기에 마음에 둔 여인이 있다고 거절했었다.

‘하르만을 만난 건가. 서로 언어가 다르니 곡해했을 수도 있겠지.’

“애인 없어. 애인이 돼줬으면 하는 사람은 있지만.”

테렌스의 대답에 발레리는 도장 찍듯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어찌 됐건 누군가를 마음에 뒀다는 말이었다.

“뭐 그거나 그거나죠. 무려 황태자 애인인데 누가 안 되고 싶겠어요. 근데 왜 부르신 거예요? 할 말 있다고 하셨잖아요.”

발레리는 얼른 화제를 전환했다. 관계의 마침표를 찍었으니, 빨리 그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 앞에서 눈시울이 화끈해지기 전에.

테렌스는 곧바로 용건을 꺼냈다.

“코끼리 인형, 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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