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켄드릭은 미안함과 착잡함에 또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황녀님을 뵐 낯이 없습니다.”
“그럴 것까진 없어요. 난 경을 원망하진 않으니까. 아까도 말했듯이, 사람 마음이 뜻대로 되는 게 아니잖아요.”
“…송구합니다.”
“아니에요. 내 욕심이 과했어요. 난 가족들한테도, 백성들에게도 사랑을 이미 넘치도록 받고 있는데. 왜 당신한테까지 사랑을 받으려 했는지….”
프리다의 얼굴엔 자조의 미소가 어렸다.
켄드릭은 가슴 한쪽이 저릿해졌다.
분명 황녀는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말로는 괜찮다고 하지만, 본인의 욕심 탓이라고 하지만, 결국 원하는 걸 얻지 못했으니.
“켄드릭, 나 고백할 거 있어요. 오늘 연애 끝내는 기념으로.”
“…네, 말씀하십시오.”
“내가 연애는 하되 결혼은 하지 말자고 한 이유, 궁금하죠.”
“네, 궁금했습니다.”
프리다는 켄드릭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난 사실 정혼자가 있어요.”
“…예?”
켄드릭의 턱이 아래로 쿵 떨어졌다.
황녀에게 정혼자가 있었다니.
‘그럼 일흔일곱 번의 청혼을 모두 거절한 이유가, 정혼자 때문이었던 건가.’
“예상대로 많이 놀라네요. 다행이죠? 노처녀로 살다 죽을 운명은 아니라서.”
“누군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황녀님과 결혼하실 그분 말입니다.”
“아, 이름이 뭐였더라…. 잘 생각이 안 나네요.”
이름조차 가물가물할 정도라니.
정략결혼 상대인 걸까.
켄드릭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정략결혼이라면 상대방의 얼굴과 이름, 조건을 모두 아는 게 정상일 텐데. 배우자가 될 사람의 신상을 모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얼굴과 이름도 잘 모르는 사이에 정략결혼이 가능한 일입니까?”
“그러게요. 아마 얼굴은 결혼식 당일에나 알게 될 것 같아요. 거기 팔려 가기 전에 연애 한 번 해 보고 싶었어요. 좀 웃기죠?”
“아뇨, 전혀 웃기지 않습니다. 팔려간다는 건 무슨 말씀입니까.”
“내 의사와 상관없이 아주 오래전부터 정해진 결혼이에요. 백 년도 더 전에 던컨 황제가 날 팔아 치웠거든요. 대가는 톡톡하긴 했어요. 얼굴도 모르는 손녀를 팔아도 될 만큼.”
던컨. 한때 프리다가 죽도록 미워했던 이름이었다. 지금은 별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던컨 황제라면… 황녀님의 고조부 아닙니까?”
“맞아요. 아무튼 원치 않는 결혼에 내몰린 와중에 켄드릭이 눈에 들어왔어요. 내가 여태까지 본 남자 중에 가장 제 타입이었거든요. 볼수록 마음에 들기도 했고.”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결혼하기 전에, 한 번쯤은 자유연애가 하고 싶으셨던 걸까.’
켄드릭은 눈앞의 황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측은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자유롭지 못한 곳에 오랫동안 묶여 있던 황녀가 결혼조차 자유롭게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안타까워하는 그의 시선에 멋쩍어진 프리다는 콧잔등을 구기며 픽 웃었다.
“결혼 얘긴 이제 그만할까요? 내가 먼저 꺼내긴 했지만 계속하니까 입맛이 뚝 떨어지려고 하네.”
“네, 더 이상 이 주제는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비밀 잘 지켜줘요. 발레리한테도 말하면 안 돼요.”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우리 이제 식사해요. 다 식긴 했지만 검 휘두르려면 배는 채워야지.”
프리다는 씩씩하게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켄드릭 또한 숟가락을 집어 들고 그녀에게 담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침내 연인의 굴레를 벗어던진 두 사람은, 식어버린 음식을 천천히 입안으로 가져갔다.
“켄드릭, 근데 우리 아버지 만나서 안 좋은 일 있었어요? 왠지 그 이후에 기분이 안 좋아 보여서요.”
“아….”
“나도 큰 비밀 하나 터뜨렸는데, 켄드릭도 이야기해 주면 안 되나요? 우리 아버지랑 왜 독대하려고 했는지. 만나서 무슨 이야기했는지.”
프리다는 한층 친밀해진 태도로 켄드릭에게 물었다.
그녀는 내심 후련해하고 있었다.
켄드릭에게 쌓아 두었던 아쉬움과 숨겨 두었던 비밀의 일부를 털어놓고 나니, 인간적으로 그와 더 가까워진 느낌이 들어서.
“…이야기가 좀 깁니다.”
“나 들을 준비돼 있어요. 생각해 보니 매일 내 얘기만 조잘대느라, 켄드릭 얘기는 많이 못 들었던 것 같아서 미안하네요.”
프리다의 은근한 독촉에 켄드릭은 식사를 멈추고 망설였다.
‘말하다 보면 황제 폐하를 원망할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최대한 수위를 낮춰서 말씀드려야 하는 걸까.’
그는 한 번 목을 가다듬은 뒤 조심스럽게 이야기의 물꼬를 텄다.
10년 전 와이어 숲에서 발생한 대대적인 실종 사건.
두 형까지 그곳에서 실종되면서 불어닥친 가문의 비극.
숲을 둘러싼 진실을 덮어두고만 있던 황제에 대한 의문.
황제와의 독대 자리에서 지하세계로의 출정을 촉구했으나 단칼에 거절당한 일.
황제가 나름대로 준비하고 있다는 일에조차 합류하길 거부당했던 이야기까지.
“…많이 답답했겠어요. 아버지께서 그렇게 단호하게 나오시니까.”
프리다는 어렴풋이만 알고 있었던 켄드릭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게 되었다.
그녀는 켄드릭의 요청을 거부한 아버지의 마음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프레이저 후작가 막내아들만큼은 그런 험지로 보내고 싶지 않았을 테니까.
‘정말 껍데기뿐이었던 연인 관계를 떨쳐내니, 이렇게 진솔한 이야기까지 나누게 되는구나. 형들을 되찾으려는 희망 하나만 붙잡고 황궁에 들어온 사람이었다니.’
“황녀님, 전 아직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폐하를 끝끝내 설득할 수 없다면, 막막하지만 저 혼자라도 숲으로 갈 길을 찾을 겁니다.”
켄드릭의 결연한 얼굴에서는 굳센 의지가 엿보였다.
프리다는 테이블 위에 놓인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켄드릭, 그러지 않아도 돼요.”
“네?”
갑작스레 손이 잡히자 켄드릭은 놀랐는지 어깨를 움칫거렸다.
“경과 나는 생각보다 교집합이 크네요. 어쩌면 내가 도와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어떻게 말입니까?”
“아버지 고집이 워낙 세서 장담은 못 하지만, 만나서 이야기해 볼게요.”
“정, 정말입니까?”
뭐 어려운 일이라고. 프리다는 빙그레 웃으며 끄덕였다.
화등잔만 해진 켄드릭의 눈 속에 기대감이 내비쳤다.
“하지만 시간은 좀 걸릴 거예요. 내년은 돼야 하니까.”
“상관없습니다. 폐하께서 준비하시는 일에 합류할 수 있기만 하다면요. 정말,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 은혜는 어떻게 갚아야 할지….”
이젠 반대로 켄드릭이 프리다의 손을 잡았다.
그는 커다란 양손 안에 프리다의 손을 감싸 쥐고 연신 고개를 숙였다.
“켄드릭, 그렇게까지 고마워할 건 없어요.”
프리다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손에서 제 손을 빼냈다.
‘…어쩌면 이 사람, 내 전우가 될 수도 있겠어. 더 열심히 수련해야 할 이유가 하나 늘었네. 내가 성공해야 이 사람도 무사할 테니까.’
그녀는 최근에야 굳게 마음을 먹었다.
생일파티 내내 이어진 부모의 끈질긴 설득에 따라 보기로.
─프리다, 제발 신탁을 믿어 봐. 이 나라의 건국까지 예언하신 시에나 여신께서 거짓 말씀을 내리셨을 리는 없다.
─딸아, 네 성공은 운명에 정해진 일이다. 물론 우리가 계획한 시나리오대로 되진 않을 수 있어. 하지만 어떤 길로 가든, 너는 목표를 이루게 될 거다. 나는 아비로서 힘닿는 데까지 도울 거고.
이후 그녀는 검 자루를 잡을 때마다 되뇌었다.
나는 될 사람이라고. 그러니까 이제부터 미래를 낙관해 보자고.
불길한 꿈 같은 건 눈 딱 감고, 정말 개꿈으로 치부해 버리자고.
나만 잘하면 된다고.
‘그래, 할 수 있어. 이 사람도 이렇게까지 의지가 강한데. 나라고 처지를 비관하면서 주저앉을 순 없지.’
***
건국제 무술대회 결승전이 끝났다.
곧바로 황성 무투장 한가운데 시상대가 마련됐다.
1~3위를 차지한 출전자들은 각자의 자리에 서서 위용을 뽐냈다.
시상은 테렌스가 도맡았다.
그는 전투를 치르느라 피투성이가 된 수상자들에게 트로피를 전달했다.
감격해 하는 그들에게 테렌스는 월계관을 씌워주고, 어깨를 두드리며 덕담까지 건넸다.
일정을 마치자마자 테렌스는 백마 캐런을 타고 중앙궁으로 향했다.
황제의 급한 호출이 있었기 때문이다.
“부르셨습니까, 폐…아버지.”
“어, 왔구나. 거기 앉아라.”
서재 책상에서 일을 보고 있던 황제는 소파로 자리를 옮겨 아들과 마주 앉았다.
“결승전에선 누가 이겼지?”
“…탈바르가 우승했습니다.”
“아, 그 해적 출신?”
“네, 탈바르에게 용무가 있으신 겁니까?”
용건을 묻는 테렌스에게, 황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가슴팍에서 손바닥만 한 종이봉투를 꺼내 아들에게 내밀었다.
테렌스는 그것을 받아 열어보고 흠칫 놀랐다.
엄지손톱만 한 벌레 한 마리의 사체가 들어 있었다.
“웬 벌레입니까?”
“반딧불이다.”
“…반딧불이는 왜 채집하셨습니까.”
“채집한 게 아니야. 내 개인 무기고에서 나온 거야.”
“이게 왜 무기고에서…?”
테렌스는 의아한 기색으로 황제에게 되물었다.
반딧불이는 보통 황궁 남문 근처에 있는 호숫가에 서식했다. 중앙궁 근처에도 간혹 몇 마리가 등장하기는 했지만 극소수에 불과했다.
게다가 황제의 무기고는 창문 하나 없는 구조였다. 대개 문이 닫혀 있기도 했고. 반딧불이가 자연적으로 들어갈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시종장에게 무기고 열쇠를 주면서, 석실 집사한테 보검 두 자루를 들려 보내라고 지시했었어. 근데 문을 열어보니 웬 반딧불이 한 마리가 날아다니고 있었다지 뭐냐.”
“…아.”
“차라리 바퀴벌레였으면 그러려니 했겠는데, 웬 놈의 반딧불이가 들어간 건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테렌스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혹시 사라진 물건이 있었습니까?”
“아니, 이번에도 없었다. 저번에 보초가 쓰러져 있었던 그때처럼 말이다.”
“시종장 외에 다른 누가 출입했던 건 아닌지요.”
“그 무기고 열쇠는 나한테밖에 없다. 누군가가 자물쇠를 따고 무단 침입한 게 아닌가 싶어. 아무것도 안 없어진 건, 찾고 있는 물건이 없어서였겠지.”
황제는 엄지손톱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가 불안할 때마다 보이는 습관이었다.
“…아무래도 그자가 황궁에 쥐새끼를 심어둔 것 같다.”
“혹시 밤중에 마기가 느껴졌답니까?”
“아니, 그날 근무하던 당직 마법사는 전혀 못 느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자의 짓이라고 단정할 순 없는 거 아닙니까.”
“뭐 여러 가능성이 있겠지만… 그자가 직접 나서지 않고 인간을 고용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테렌스는 황제의 추론에 수긍했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들은 햇빛 아래선 활동을 못 하는 데다 마기까지 뿜으니 말입니다. 인간을 보내는 게 안전한 선택지인 것 같긴 합니다.”
“여전히 우릴 못 믿고 있는 것 같아. 신부와 예물은 약속한 날짜에 눈앞에 대령해 드리겠다고 그렇게 말했는데도 말이다.”
황제는 어둑해진 창밖 하늘을 흘기며 주먹을 꽉 쥐었다.
‘꽁꽁 숨은 신부를 못 찾겠으니, 예물이라도 가져가겠다 이건가.’
그래도 다행인 점은 있었다.
황제의 무기고는 그자가 찾는 물건의 소재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흠, 그래도 애먼 곳을 뒤지는 걸 보니 위치는 전혀 모르는 모양이다.”
“…그래도 침입자가 누군지는 가려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그래야지. 그 자물쇠를 인력으로 따려면 보통 솜씨가 아니어야 할 텐데… 아무래도 마법으로 풀지 않았을까 싶다. 보초들이 기억을 못하는 건 최면에 걸려서인 것 같고.”
“범인은 내부자일 수 있습니다. 황궁 마법사들부터 조사해 보심이 어떠실지요.”
날카롭게 빛나는 아들의 시선을 응시하며, 황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중앙궁 소속 마법사들 하나씩 불러 진술 받고 있다. 일단 무기고에는 마법사 보초까지 세우려 해. 어차피 범인은 현장에 다시 오게 마련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