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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87)화 (87/173)

87화

쿵쿵.

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프리다는 동작을 멈추고 종을 울렸다.

켄드릭이었다.

그는 기다란 무기 상자 두 개를 양팔로 받쳐 들고 석실 안으로 들어왔다.

“황녀님, 폐하께서 주문하신 검입니다.”

“아, 고마워요.”

“일단 두 자루만 가져왔습니다. 여분으로 세 자루가 더 있다고 하니 언제든 더 필요하면 말씀해 주십시오.”

“다섯 자루나 돼요? 그렇게 많이 주문할 필요는 없었는데.”

“다섯 자루 모두 각기 다른 장인이 만들었다고 합니다.”

켄드릭은 물건만 전달하고 바로 나갔다.

프리다는 연무장 바닥에 두 상자를 나란히 놓고 차례대로 열어 보았다.

첫 번째 상자에 있던 무기가 두 번째 상자에도 똑같이 담겨 있었다.

그림이라면 데칼코마니라고 해도 될 정도로 서로를 빼다 박은 검이었다. 각기 다른 장인이 만들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으니.

이를 지켜보던 발레리의 동공이 크게 벌어졌다.

‘뭐야, 저거 어젯밤에 황제 무기고에서 본 그 검이잖아. 그 다섯 자루 중에 두 자루 가져온 건가 보네.’

“황녀님, 혹시 그 검들 좀 봐도 될까요?”

“그래요.”

발레리는 프리다 곁에 앉아 두 검을 양손에 하나씩 쥐었다. 그녀는 눈을 부릅뜨고 둘 사이의 차이점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어젯밤엔 어두워서 못 본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자세히 보니 미세한 차이는 있었다. 칼자루 부분의 가죽 결이 조금 달랐고, 검집과 날밑에 박힌 사파이어 빛깔도 채도가 묘하게 달랐다.

자루 머리 부분에 찍힌 눈꽃 모양을 띤 여신의 인장 부분에도 차이가 있었다.

‘다섯 개 모두 장인들이 제작한 거라고 하니, 내가 찾는 그 보검은 아닐 텐데. 그건 600년도 더 된 거니까.’

문득 발레리의 머릿속에 하나의 가능성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다섯 자루 모두 ‘그 보검’의 복제품일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여신의 인장을 괜히 흉내 낸 건 아닐 테니까.

이것하고 똑같이 생겼으면서도, 오래된 검이 황궁 어딘가에 숨어 있지 않을까.

“흠, 다른 사람이 만든 건데 어떻게 이렇게 똑같을까요.”

“아마 같은 도면을 주고 제작시킨 거라, 모양에 차이는 없을 거예요. 소재에서 조금 차이가 날 뿐이겠죠.”

“지금 쓰시는 검도 이거랑 95퍼센트는 유사한 것 같은데. 근데 새 검들은 왜 자루 머리에 시에나 여신 인장이 있어요?”

무기를 눈앞에 가까이 대고 관찰하는 발레리를 보며, 프리다는 빙그레 웃었다.

“아아, 눈꽃 모양이 꽤 그럴듯하죠? 장인들이 원본을 따라 흉내만 낸 거예요.”

“원본? 그럼 진짜 인장이 새겨진 검이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응, 건국신화에 나오는 보검이에요. 여신께서 엘로이스 황제에게 하사하신. 그거랑 똑같이 만든 거예요.”

가려운 데를 바로 긁어 주는 시원한 대답이었다.

원하던 대답이 바로 나올 줄 알았다면 진작에 물어봤을 텐데.

괜한 의심을 피하겠답시고 무작정 황제의 무기고부터 뒤지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목표물 이야기에 발레리의 심박수가 급속도로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게 정말로 실제로 존재하는 검이었어요?”

“…그렇더라고요. 나도 알게 된 지는 얼마 안 됐어요. 신화라고는 하지만 실제 역사에 있었던 물건이니까요.”

“장인들은 그걸 어디서 보고 베껴 만든 거예요?”

“아버지께서 도면을 주면서 주문했을 거예요.”

“도면은 그 검을 실제로 보고 그린 거겠죠?”

“그렇겠죠.”

“그걸 어디서 보고 그려요?”

보검의 위치를 최대한 돌려서 물으려 했으나 발레리는 이런 쪽에 능하지 않았다.

흥분해서 번뜩거리는 눈빛 또한 감추지 못했다.

“잘 모르겠어요, 아버지가 관리하셔서. 그런데 발레리, 왜 이렇게 그 검에 관심이 많아요?”

“하하, 워낙 아름다운 무기다 보니 관심이 가네요.”

프리다의 낯빛이 살짝 어두워졌다. 오른손을 못 쓰게 된 혈육의 얼굴이 떠오른 탓이었다.

‘많이 위험한 물건인데…. 아버지께서 원래 위치에 제대로 돌려 두셨으려나 모르겠네.’

그사이 발레리는 또다시 생각에 잠겼다.

장인에게 보검의 도면을 그리도록 한 건 황제일 것이다. 당연히 보검 또한 황제의 통제 하에 놓여 있겠지.

어쩌면 정말 그의 침실 안 개인 금고에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보다 단서는 가까이 있었어. 황녀님이 매일 사용하는 검이 그 검을 베껴 만든 거였다니.’

발레리는 양손에 든 검을 다시 상자 안에 집어넣었다.

어떻게 생겼는지 알았으니, 이제 찾기만 하면 된다.

***

켄드릭이 일찍 퇴근하게 되면서, 요즘 프리다는 밤늦게까지 혼자서 검술 연습을 했다.

이젠 자세 교정이 거의 필요하지 않았기에 그 없이도 연습은 할 만했다.

혼자만의 수련은 조금 외로웠지만 좋은 점도 있었다.

검을 쉴 새 없이 휘두르며 땀을 빼다 보면, 복잡했던 마음이 조금씩 정리가 됐다.

‘미련을 버릴 때가 됐어. 이제 정리하는 게 맞겠지.’

사실 켄드릭과는 연인 사이라고 말하기엔 당당하지 못했다.

키스를 시도했던 그날 이후로 아무 접촉이 없었으니까.

포옹도 없었고, 손조차도 잡을 일이 없었다.

‘누가 켄드릭하고 무슨 사이냐고 물으면, 정말 이렇게밖에 할 말이 없어. 매일 밥 같이 먹는 사이라고.’

프리다는 잠들기 전 침대맡의 불을 끌 때마다 그와 깊은 사이가 되는 상상을 하곤 했었다.

하지만 상대방이 내켜 하지 않는 게 빤히 보이는 상황에서, 프리다는 그에게 더 접근할 의욕이 나지 않았다.

자존심까지 버리고 그의 품 안에 달려들긴 싫었다.

그리고 마침 금요일 저녁이었다.

발레리는 춤 연습을 마친 뒤 먼저 퇴근했고, 곧 있으면 켄드릭이 들어올 차례다.

프리다는 텅 빈 테이블에 한쪽 턱을 괴고 앉아 기다렸다.

그녀는 가만히 떠올렸다. 만약 켄드릭과의 관계가 지금과 반대라면 어떨까.

지금처럼 데면데면한 사이가 아니라, 정말 켄드릭과 너무 애틋해서 죽고 못 사는 사이였다면.

“…정말 좋아했어도 문제였겠다. 나야 좋은 추억 만들고 떠나면 되지만, 상대방은 영문도 모른 채 이별해야 하니까.”

진짜 연인사이였더라면, 이 만남은 그에게 상처로 남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현재 시점에서 남은 시간은 반 년에 불과했으니.

마침 켄드릭은 저녁 식사가 담긴 접시를 한가득 안고 들어왔다.

오늘의 메뉴는 포르치니 버섯과 안심스테이크.

‘와인 곁들이면 딱 좋을 메뉴겠지만, 난 전적이 있으니 안 들여보내겠지.’

켄드릭은 익숙한 동작으로 접시와 식기를 모두 세팅한 뒤 프리다의 맞은편에 앉았다.

아직 뜨끈하게 김이 오르는 음식을 앞에 두고, 프리다는 눈꼬리를 접으며 본론부터 꺼냈다.

“우리 연애 되게 지지부진한 거 알죠.”

“…그렇게 느끼고 계십니까.”

켄드릭은 양손에 들린 식기를 가만히 내려놓았다. 그의 녹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초장부터 이런 말이 나오니 적잖이 당황한 기색이었다.

“오래전부터 생각했던 거예요. 이런 허울뿐인 관계가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지.”

“아….”

켄드릭은 쇠망치에 얻어맞은 것처럼 얼얼한 표정으로 제 뒷덜미를 문질렀다.

그의 태도를 보며 프리다는 심드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심하게 군 건 본인인데, 내가 이렇게 나올 줄 예상도 못했던 건가.’

“저는 황녀님께 충성할 겁니다. 약속한 시한까지….”

“아니.”

“네?”

“내가 바랐던 게 고작 충성이었다고 생각해요?”

“…….”

또다시 할 말을 잃은 켄드릭은 마른침을 삼켰다.

직선으로 따갑게 와닿는 프리다의 시선을 애써 피하며.

“사실 나, 내 매력에 자신 있었어요. 여태까지 내 외모를 보고 반하지 않는 남자는 없었거든요. 초상화만 보고 청혼한 사람들만 수십 명이고.”

“…황녀님께선 아름다우시니까요.”

“반하지는 않더라도, 내 곁에서 날 지켜보다 보면 켄드릭도 나한테 마음을 갖지 않을까 싶었어요.”

“전 황녀님을 좋은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아하지는 않잖아요. 솔직히.”

프리다는 비소를 머금고 딱 잘라 말했다.

켄드릭은 사색이 되어 식은땀을 흘렸다. 정곡을 찌르는 발언이었다. 적당히 둘러댈 말조차 찾을 수 없었다.

“황녀님, 저는….”

“문득 생각이 든 건데. 켄드릭이 날 진심으로 좋아하게 되면, 그것도 문제가 되겠더라고요.”

“네?”

“진지하게 연애하다가 예정대로 내년 봄에 헤어지면, 남은 사람이 많이 아플 테니까.”

켄드릭은 눈앞이 아득해졌다.

여전히 받아칠 말은 생각나지 않았다.

“나 하나 좋자고 계약연애란 걸 제안한 나도 참 우스워요. 어차피 마음은 사람 인력으로 되는 게 아닌데. 그쵸?”

“…황녀님의 제안에 응한 사람은 접니다.”

“뭐, 수락할 수밖에 없었겠죠. 우리는 상하 관계고, 경이 나한테 바라는 것도 있었을 거고.”

프리다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녀는 제 상황을 냉정하게 보고 있을 뿐 아니라, 켄드릭의 의중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켄드릭은 열없이 고개를 숙였다.

대화의 공백이 이어졌다. 둘 앞에 놓인 음식은 점차 온기를 잃어갔다.

눈앞의 여인은 흔쾌히 황제를 독대할 기회를 주었고, 가면무도회를 열어 달라는 부탁 또한 들어주었다.

그런 프리다에게 켄드릭은 보답할 길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막연하게 잘 해드려야지, 하는 다짐만 했을 뿐.

“황녀님, 제게 원하시는 게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기꺼이 하겠습니다.”

“아니, 억지로 보답하려고 하지 말아요. 그럴수록 내가 비참해질 것 같아.”

프리다의 어투는 점점 차갑게 식어갔다.

켄드릭은 이제야 실감했다. 허울뿐인 연애가 지속되는 동안, 프리다의 인내심이 점점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는 것을.

둘은 검술과 일상 이야기를 나누며 점점 친밀해지긴 했다. 그러나 프리다가 원하던 로맨틱한 분위기나 이성적인 접촉은 전혀 없었다.

켄드릭은 황녀가 바라는 걸 줄 수 없었다.

일찍이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사회생활에는 능할지 몰라도 그는 연기력이 부족했다.

황녀의 충직한 기사가 될지언정, 달콤한 연인으로서 입안의 혀처럼 굴긴 어려웠다.

켄드릭은 잔뜩 복잡해진 속을 정리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황녀님과의 관계가 이렇게 끝나는 건가. 황제 폐하를 어떻게든 다시 한번 뵙고 싶었는데.’

“억지 아닙니다. 저도 황녀님께 받은 은혜만큼 갚아 드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를 또 만나고 싶다면, 한 번 더 부탁해 볼 수 있어요.”

독심술이라도 부리는 건지. 프리다는 켄드릭이 원하는 바를 콕 짚어 얘기했다.

“…염치도 없이 어떻게 그럽니까.”

“굳이 연인 사이가 아니어도 부탁은 할 수 있는 거잖아요. 지금처럼 친구 사이에도 가능한 거니까.”

프리다는 눈매를 휘며 입꼬리를 올렸다. 기다란 금빛 속눈썹이 희미하게 젖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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