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황제가 무슨 그림을 걱정하는지 테렌스는 알고 있었다.
지하 석실은 황제가 수년간 철통처럼 지키던 딸의 독방이었다.
그 은밀한 공간에 젊은 남자 하나가 야심한 시간까지 머무른다는데, 아비 된 자로서 마음이 편치는 않을 터다.
그러나 테렌스는 여동생이 지금보다 더 심하게 통제받는 걸 원하지 않았다.
프리다의 일상은 이미 수감생활에 가까웠으니까.
문지기 수장 루퍼트가 프리다의 사생활을 일일이 황제에게 보고하는 것도 탐탁지 않았다.
특히 이번에는 추측성 보고였기에 심기가 더 불편했다.
전임자였던 로저 경은 그래도 정도를 지켰다. 직접 목격하거나 들은 것만 황제에게 전달했다.
테렌스는 한 번 목을 가다듬었다. 최대한 아버지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직언하기 위해.
“폐하, 프리다가 갇혀 지낸 지가 4년이 넘었습니다. 매일 보는 사람들이라곤 문지기 기사들뿐인데 외롭지 않겠습니까. 또래 친구가 생겼다고 여기면 어떠실지요.”
“흐음, 또래 친구라….”
“만일 그 이상의 관계라 해도, 그냥 두셨으면 합니다. 프리다는 이미 어엿한 성인이지 않습니까.”
황제는 체념한 듯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싹 마른 보랏빛 입술에선 무기력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나도 굳이 트집 잡을 생각은 없었다. 프리다가 남은 시간 동안 석실에서 행복하게 지낼 수만 있다면 그뿐이니. 신경은 쓰여도 일 잘하는 놈을 그런 이유로 면박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잘 생각하셨습니다.”
“드와이트의 아들이라면 나도 반대할 생각은 없다. 구혼하더라도 당장 받아 줄 수가 없어서 미안할 따름이지. 프리다가 얼른 묶인 몸에서 벗어나야….”
황제가 돌연 말을 멈췄다.
아들의 기색이 이상했다. 대화에 전혀 집중하지 않고 있었다.
테렌스는 초점 없는 눈으로 황제의 등 뒤편에 있는 무언가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황제는 고개를 돌려 뒤쪽을 확인했다.
아무것도 없었다.
“흠, 헛것이라도 보는 게냐.”
“아, 아닙니다. 계속 말씀하십시오.”
“그래. 사절단 말인데.”
또 다른 민감한 사안이 등장했다.
테렌스는 이마에 방울진 땀을 손바닥으로 쓱 닦아냈다.
듣는 귀가 한 쌍이 더 있다는 게 미치도록 신경 쓰였다.
“…네, 폐하.”
“석실 문지기 중에 지하세계 쪽으로 잘 아는 마법사나 기사가 있겠느냐.”
“기사들은 잘 모르겠으나 마법사 중엔 있을 겁니다. 관련 수업이 아카데미 일부 과정에 개설돼 있으니까요. 한데 무슨 연유로 물으십니까.”
황제는 차분히 본론을 꺼냈다.
“사제들 외에 마법사와 기사들도 사절단에 영입해 볼까 한다. 아무래도 전투가 있을 텐데 규모가 작더라도 지원군이 든든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쪽 머릿수의 두 배는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공격이 통하지는 않겠지만…. 사기를 위해서라도 말이다.”
“일단 알아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사안은 나중에 더 자세히 논의하심이 어떠실지요.”
테렌스는 주제를 얼른 매듭지으려 애썼다. 이보다 더 내밀한 얘기가 나오기 전에 화제를 어떻게든 전환해야 했다.
“흠, 알았다. 그건 그렇고 이브와는 잘 만나고 있느냐?”
“이브? 누굴…. 아, 볼드윈 공작가 영애 말입니까.”
이브는 에이바를 친근하게 부르는 이름이었다. 테렌스의 앞머리는 어느새 식은땀으로 척척해졌다.
어떻게든 민감한 사안은 넘겼는데, 더 버거운 화제가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옷장 속의 두 귀가 더더욱 신경 쓰였다.
“그래. 저번에 네가 이브 손을 잡고 중앙궁까지 데려다줬다고 하던데.”
황제의 말에 테렌스의 안색은 회백색으로 탁해졌다.
중앙궁은 규모가 큰 만큼 보는 눈도 많았다.
얼마 전 테렌스는 와인에 취한 에이바를 중앙궁까지 부축해 바래다주었다. 그 장면이 누군가에게 목격됐고, 황제의 귀에까지 들어간 모양이었다.
사실 테렌스가 잡은 건 에이바의 손이 아니고 팔목이었다.
취했답시고 자꾸 팔뚝에 몸을 밀착하는 게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잡은 것뿐인데, 결국 그게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이브가 참 싹싹하고 귀염성도 있지. 빨리 맺어지고 싶겠지만 너무 조급해하진 말거라. 내년 거사 전까진 국혼 추진이 어렵다는 걸 알지 않느냐.”
“국혼이라뇨, 당치도 않은…. 아앗!”
테렌스가 갑자기 왼손으로 머리통을 움켜쥐고 신음했다. 동작은 부자연스러웠지만, 아비의 걱정을 유발하기엔 충분했다.
“왜 그러느냐, 테렌스. 어디가 안 좋으냐?”
“두통이 와서 조금 쉬고 싶습니다.”
“흠, 이만 가볼 테니 일찍 자거라. 난 빨리 황후랑 저녁 먹고 우리 예쁜 딸 보러 가야겠다.”
“예. 내일 오전 각료회의 때 뵙겠습니다.”
테렌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황제를 속히 배웅하기 위해서다.
황제는 문밖으로 나서며 고개를 갸웃했다.
오랜만에 아들놈 방에 찾아왔는데 괜히 불청객이 된 기분이 들었다.
‘원래 살가운 녀석은 아니었다만…. 몸이 시원찮아 그런지 전혀 반기는 기색이 없군.’
황제는 문 앞에서 기다리던 보좌진을 거느리고 황태자궁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쿵. 드디어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그제야 발레리가 옷장 문을 발로 툭 걷어차고 바깥으로 나왔다.
“어우, 찌그러져 있느라 허리에 쥐 나는 줄 알았네. 그 에이반지 뭐시긴지 하는 공녀님이랑 그렇고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발레리는 허리를 활꼴로 휘며 기지개를 켰다. 알싸한 근육통에 에구구, 하고 절로 앓는 소리가 났다.
“이제 다시 내게 공대하기로 한 건가.”
“…제가 언제 하대한 적이 있나요? 전 그런 기억이 없는데.”
그녀는 자신의 만행을 능청스럽게 덮으려 했다.
그런 모습조차 테렌스의 눈에는 그저 귀엽기만 했다. 눈을 흘기면서도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어쩔 수가 없었다.
발레리의 갑작스러운 반말은 충격적이긴 했으나 거슬리진 않았다.
오히려 솔직하고 자연스러운 느낌이라 반갑기까지 했다. 물론 거기에 적응하는 건 별개의 문제겠지만.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다. 공녀가 술에 취해 있어서 팔목을 잡고 부축했을 뿐. 다른 오해는 하지 말았으면 한다.”
테렌스가 곤란한 기색으로 해명했다. 발레리는 대놓고 코웃음을 쳤다.
“뭘 굳이 변명을 하세요? 손을 잡든 어딜 잡든 아무 상관없는데. 원하시는 대로 공녀랑 계속 만나세요.”
“…원한 적 없어.”
“앞으로 원하시게 될 수도 있잖아요?”
테렌스는 발레리의 언행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정말 이 아이는 에이바의 존재가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 건가.
“…왜 내게 다른 여자를 만나라 하는 거지? 방금 내게 먼저 입 맞췄으면서.”
“흠, 제가 그랬나요? 기억이 잘 안 나는데요.”
다급하게 키스할 땐 언제고, 지금은 무심하게 딴청을 피우는 그녀.
절로 한숨이 나왔다.
아무래도 황제가 들이닥치기 직전의 끈적한 분위기는 수명을 다한 듯했다.
발레리의 눈에서 작열하던 불씨는 옷장 안에서 모두 사그라졌다.
테렌스는 여전히 지끈지끈한 뒤통수를 부여잡았다.
이제 뒷수습만이 남았다.
“…발레리.”
“네.”
“방금 내가 황제 폐하와 나눈 이야기는 못 들은 걸로 해줬으면 좋겠다.”
“꽁으로요?”
발레리는 그를 향해 한쪽 손바닥을 쫙 펴 내밀었다.
그녀가 탄탄한 어깨와 늘씬한 허리를 훤히 드러낸 채 가까이 다가왔다.
테렌스의 목울대가 한차례 꿀렁 움직였다.
“무슨 대가를 원하는 거지.”
“…장난이에요. 궁금한 거 몇 가지만 여쭤도 돼요?”
“답변할 수 있는 것만 답변하겠다.”
테렌스는 긴장해서 목이 빠작빠작 타들어 갔다.
상체를 대부분 드러낸 발레리는 그 어느 때보다 유혹적인 자태였다. 본인은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지만.
그런 그녀의 물음표 세례를 칼같이 잘라낼 자신이 없었다.
“내년 거사는 뭐고 사절단은 뭐예요? 사절단은 외국으로 보내는 사람들일 텐데…. 기사랑 마법사들을 파견해서 전투를 시킨다는 거면, 그냥 전쟁하자는 거 아니에요?”
“…….”
“그 사람들이 지하세계를 잘 알아야 할 이유는 뭐예요? 뭐 단체로 와이어 숲 탐험이라도 간대요? 거기 아무도 못 들어간 지 오래됐잖아요.”
생각보다 날카로운 질문이 들어왔다. 그것도 여러 개씩이나.
테렌스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한 뒤 입을 열었다.
“…이것 한 가지만 말해주겠다.”
“네.”
“폐하께서 말씀하신 전투는…. 다른 나라와 벌이는 게 아니야. 칼레바니아는 타국에 선전포고할 계획이 없다.”
하지만 발레리의 머리 위에 떠있는 물음표는 전혀 걷히지 않았다. 오히려 몇 개가 더 늘어났다.
“기사랑 마법사들이 사절단으로 가서 깽판을 치는데, 그걸 선전포고로 안 받아들이는 나라도 있어요?”
“깽판…. 말하자면 깽판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정말 전쟁을 일으키려는 의도는 없다. 만일 진짜 그러려 했다면 지금보다 병력을 더 징발하고 마력석 수출을 중단했을 테니까.”
하긴 그의 말이 맞았다. 칼레바니아의 병사 모집 규모는 예년과 같았고, 무기 강화 재료인 마력석의 수출은 평소 규모대로 이뤄지고 있었다.
“흠, 알겠어요. 그럼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여쭤볼게요.”
“…그래.”
계속된 추궁에 테렌스는 마른 입술을 축였다.
이번엔 무슨 질문이 나올까. 그는 발레리의 입 모양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본인의 매력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뭐?”
영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테렌스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그대로 멈췄다. 당장 목청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물론 발레리도 그에게 뾰족한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정말 가볍게 던진 질문이었으니까.
“지금 생각 안 나면 다음에 천천히 말씀 주세요. 아까는 갑자기 밀쳐서 죄송하고요…. 머리가 아프시다니 오늘 자 보고는 금요일에 할게요. 그럼 전 이만.”
발레리는 테렌스의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 군복 상의를 꺼내 몸에 걸쳤다.
그녀는 테렌스가 굳게 잠가둔 출입문을 능숙하게 척척 연 뒤 순식간에 침실을 빠져나갔다.
테렌스는 한참 동안 한자리에 뿌리내린 듯 서 있었다.
“…그렇게 어필했는데, 아직도 부족한 건가. 뭘 얼마나 더 보여줘야 하는 거지.”
오늘 침대에서 벌어진 일을 미루어 짐작건대, 발레리가 그에게 원하는 건 단 하나뿐이었다.
“정말 네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은…. 그 길밖에 없는 걸까.”
테렌스는 느슨해진 가운을 다시 여미며 번뇌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