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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58)화 (58/173)

58화

예상대로 발레리가 먼저 입술을 겹쳐왔다. 테렌스는 눈을 감았다. 감격과 흥분이 일시에 몰려들었다.

발레리는 살짝 벌어진 그의 입술 틈새를 집요하게 핥았다. 그리고 혼이라도 쏙 빼먹을 기세로 강하게 빨아들였다. 어서 그 붉고 뜨거운 무언가를 내놓으라는, 일종의 주문이었다.

테렌스는 그녀가 원하는 걸 바로 내주었다. 보드랍고 유연하게 그녀의 입안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타액으로 흥건해진 두 입술이 빈틈없이 맞붙었다. 그 사이로 한 쌍의 선홍색 살덩이가 제멋대로 뒤엉키며 서로를 적셨다.

꿀 같은 단물을 흘리는 발레리의 입안으로, 테렌스는 서서히 빠져들었다. 그녀에게 더 깊이 파고들고 싶다는, 거친 욕망이 속에서 들끓었다.

걷잡을 수 없는 격정의 불길이 두 사람을 에워쌌다.

발레리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그의 벌어진 가운 틈새로 손을 뻗었다. 단단하고 두툼한 근육 위로 굳은살 박인 손바닥이 미끄러져 내려갔다. 

테렌스는 그 까슬한 촉감에 전율하며 왼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아 당겼다. 발레리는 기다렸다는 듯 그의 허벅지 위에 앉아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발레리가 그의 목에서 팔을 거둬 갔다. 테렌스는 흠칫 놀라 눈을 떴다.

발레리는 본인의 상의 단추를 하나씩 풀고 있었다. 새까맸던 그녀의 눈동자는 어느새 잿빛으로 탁해져 있었다.

이렇게까지 과감한 모습이라니. 테렌스의 얼굴이 한층 발갛게 상기됐다.

발레리는 그의 반응이 재밌다는 듯 쿡 웃으며 입을 뗐다.

“한 손으로 풀기 어려울 것 같아서요.”

“전혀 아닌데.”

왼손을 척 뻗는 그의 입가에 느른한 미소가 배어들었다. 왼손만 쓰고 산지가 수개월이었다. 한 손으로 단추 푸는 건 아주 쉬운 축에 속했다. 명치부터 그 아래까지, 나머지 단추들은 테렌스의 손안에서 모두 풀려나갔다.

“잘하시네요.”

뭐 대단한 칭찬이라고. 그의 볼우물이 깊게 팼다.

테렌스는 열린 틈새로 드러난 그녀의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그 자리에 입술을 비비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아주 오래전부터 이러고 싶었다.

감격할 새도 없이 그녀의 뜨거운 체향이 그의 이성을 천천히 마비시켰다. 발레리는 정신을 못 차리는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후우─하고 숨결을 내뱉었다.

한껏 풀어헤친 발레리의 근위병 재킷 안으로는 가슴을 덮은 녹색 천 쪼가리가 보였다. 그 아래 또렷한 복근이 테렌스의 시각을 다분히 자극했다.

어느새 발레리는 그의 허리에 묶인 가운의 끈을 쥐고 있었다. 그녀는 기대감 가득한 눈망울로 테렌스를 지그시 바라봤다.

마치 선물상자 리본을 끄르기 직전의 어린아이 같았다.

발칙하고도 사랑스러운 그녀의 입술 위에 테렌스는 촉, 하고 도장을 찍었다. 그리고 이렇게 물었다.

“…또 외로워서 이러나?”

“아….”

“나와 이러고 있는 건…. 그걸 달랠 방법이고?”

버거운 질문이었다.

발레리는 테렌스의 직시를 피했다.

“그런 걸로 해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눈을 감았다.

꽉 닫힌 눈꺼풀 안으로, 많은 상념이 부초처럼 둥둥 떠다녔다.

아무것도 모르는 프리다의 말간 얼굴.

그리고 그녀를 데리고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질 자신의 모습.

그 뒤에 남겨질 테렌스의 얼굴은 어떤 모습일까.

발레리의 상상 속에서 그의 얼굴은 온통 새까맣게 칠해져 알아볼 수 없었다.

‘…만약에 황녀님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날 증오하게 되겠지. 어쩌면 그땐 진짜 날 죽이려고 할지도 모르겠네.’

이 사람에게서 소중한 사람을 데려갈 날이 머지않았는데, 이 사람의 몸을 손에 넣고 싶어지다니.

아니, 진정 몸만 원하는 게 맞긴 한 건가.

‘나는 정말…. 양심 따윈 개나 줘버린 도둑이구나.’

추하게 뒤틀린 욕망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발레리.”

“네.”

“…우리가 하룻밤을 보낸다면, 무슨 사이가 되는 거지?”

눈을 감고 있는 그녀에게 테렌스는 처연한 얼굴로 물었다. 색소 옅은 눈동자가 조마조마 흔들리며 청순미를 더했다.

‘무슨 사이긴. 언젠간 남보다 못하게 되겠지. 그러니까 잠시 몸만 붙이자고. 다른 생각은 집어치우고.’

발레리는 대답 대신 테렌스의 뒤통수를 잡고 거칠게 입술을 부딪쳐왔다.

테렌스는 잠시 굳었다가 체념한 얼굴로 키스를 받아들였다.

그녀는 더 끈덕지게 감겨들었다. 테렌스는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 쥐고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그래, 발레리. 네가 내 몸부터 원한다면…. 나도 참지 않고 응해주겠다.’

발레리는 그와 입술을 붙인 채 정복 재킷을 벗어 바닥에 집어 던졌다.

재킷이 침대 옆에 툭,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테렌스에게서도 이성의 끈이 완전히 떨어져 나갔다.

테렌스는 그녀의 탄탄한 허리를 더듬으며 입술을 점점 아래쪽으로 옮겨갔다.

발레리는 저절로 터지는 탄성을 참지 않고 그대로 흘려보내며 그의 정염에 풀무질했다.

똑똑똑.

느닷없는 노크 소리가 정신없이 숨을 섞던 남녀에게 찬물을 끼얹었다.

“전하, 안에 계십니까? 황제 폐하 드십니다.”

반라로 얽혀있던 두 사람이 일제히 문 쪽을 바라봤다.

핏기가 싹 가셔서 새파래진 얼굴로.

순간 발레리는 테렌스의 가슴팍을 있는 힘껏 밀쳤다.

얼결에 뒤로 나자빠진 테렌스의 뒤통수가 침대 헤드보드에 꽈당 부딪혔다.

발레리는 눈을 굴려 도망칠 곳을 찾았다. 하지만 출구는 없었다.

그러던 그녀의 눈에 문 하나가 포착됐다.

발레리는 그쪽으로 전력 질주하더니 순식간에 문을 열고 들어가 앉았다.

테렌스가 잠옷을 보관할 때 쓰는 옷장이었다. 다행히 사람 하나가 들어가기에 충분한 공간이 있었다.

빙빙 도는 별 속에서 얼른 정신을 다잡은 테렌스는 옷장까지 한달음에 달려가 문을 굳게 닫고 그 앞을 막아섰다.

“드시라고 해라.”

테렌스의 명령에 침실 문이 바로 열렸다.

황제가 먼저 걸어 들어왔고, 레이븐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곁에 섰다. 나머지 보좌진은 침실 문 앞에서 대기했다.

“이 시간에 웬일로 집무실에 없기에 침실로 찾아와 봤다.”

“예, 폐하. 잠시 쉬고 있었습니다.”

“왜 거기 그러고 서 있느냐?”

“지금 막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황제는 테렌스의 옷차림을 위아래로 훑으며 혀를 끌끌 찼다.

“잠옷이 그게 뭐냐. 보기에 좀 망측스럽구나.”

“아….”

테렌스는 자신의 가슴팍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더니 레이븐을 죽일 듯 노려봤다.

평소에 입던 파자마를 어디론가 빼돌리고, 한참 치수가 작은 실크 가운으로 바꿔치기한 범인은 그였으니까.

레이븐은 천연덕스럽게 눈을 뛰룩뛰룩 굴렸다.

테렌스는 그를 계속 흘겨보며 황제를 침대 옆 테이블로 안내했다. 그 와중에 발레리의 상의가 눈에 띄자 얼른 발로 차서 침대 밑으로 밀어 넣었다.

방을 쭉 둘러보던 황제는 수프 그릇이 놓인 카트를 발견하곤 고개를 갸우뚱했다.

“침대에서 식사하고 있었느냐? 그것도 두 그릇씩이나.”

“배가 좀 고팠습니다. 그런데 어인 일이십니까, 폐하.”

“어어. 프리다가 갑자기 날 석실로 불러서 말이다.”

프리다가 황제를 석실로 호출하다니.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

평소 황제는 의전 때문에 동선이 자유롭지 못했다.

그나마 석실을 찾아갈 만한 시간은 공무가 적고 사람을 최대한 물릴 수 있는 주말뿐이었다.

“이렇게 갑자기 말입니까?”

“그래. 루퍼트 말로는 오늘 밤 프리다가 나더러 찾아오라 했다는데. 혹시 석실에 무슨 일 있느냐? 그 검술 선생 아가씨한테 따로 들은 말이라도….”

“별다른 사항은 없었습니다.”

“흠, 뭐지. 긴히 할 말이 있는 건가. 옛날처럼 석실에서 빼내 달라고 또 울고불고할까 봐 겁나는군.”

“그때의 프리다가 아닙니다. 어느 때보다도 준비돼 있으니,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황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앉았다.

테렌스도 맞은편에 자리했다. 지끈거리는 뒤통수를 문지르니 작은 혹이 만져졌다.

“그래, 다행이구나. 난 또 뭐가 있는 줄 알았지. 그런데 아들아, 입술이 왜 그렇게 부어 있느냐? 턱은 왜 빨갛고?”

“아, 그게….”

입술이 왜 부어있냐니. 자초지종을 설명했다간 큰일 날 질문이었다.

보다 못한 레이븐이 냉큼 끼어들었다.

“아, 알레르기인가 봅니다. 가끔 뭘 잘못 잡수면 이렇게 부으십니다.”

레이븐이 테렌스에게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테렌스도 눈썹을 까딱이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쯧쯧, 건국제가 얼마 안 남은 시점에 알레르기가 무어냐. 네가 맡은 일도 적지 않은데 건강관리 잘해야지.”

“네, 명심하겠습니다.”

테렌스는 아버지의 잔소리에 말대꾸하는 법이 없었다.

황제는 모범적으로 장성한 아들내미를 흡족하게 쳐다보다 레이븐을 향해 나가라고 손짓했다.

바로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침실엔 이제 아버지와 아들만 남았다.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누군가를 제외한다면.

테렌스는 불안했다. 레이븐까지 내보낼 정도면 황제가 꽤나 민감한 사안을 얘기하려는 것 같아서.

그는 황제의 등 뒤편으로 보이는 옷장에 자꾸 시선을 빼앗기고 있었다.

“…루퍼트에게 전해 들은 말인데.”

“예, 말씀하시지요.”

답변을 기다리는 테렌스의 뒷덜미로 땀 한 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어쩌면 프리다의 일흔여덟 번째 구혼자가 나타날지도 모르겠구나.”

“…예?”

끝난 줄만 알았던 청혼 행렬에 새로운 대기자가 등장했다는 소식이었다.

“프리다에게 너무 젊은 놈을 붙여준 게 화근인 것 같다.”

“붙이다니요. 누구기에 그러십니까?”

황제는 수심 가득한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드와이트의 막내아들이다.”

“켄드릭 경 말씀입니까.”

“그래. 그자가 한 번 석실에 들어가면…. 밤이 깊을 때까지 한참을 안 나온다더구나.”

황제 엘리엇의 목소리는 탄식에 가까웠다.

테렌스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평소와 같은 무표정으로.

“후, 로저 경이 집사였을 땐 이런 일이 없었는데. 아무래도 너무 젊고 잘생긴 놈을 데려다 놓으니 프리다도 현혹되는 게 아닌가 싶다.”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테렌스는 제 뒤통수에 툭 불거진 혹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아들의 무미건조한 대꾸에 황제는 미간을 살짝 좁혔다.

“그럼 그자가 별다른 이유도 없이 그런다는 게냐.”

“폐하, 켄드릭 경이 석실에서 늦게 나오는 건 검술 연습 때문입니다. 프리다도 그랬습니다. 자세 교정하는 데 도움받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걸 곧이곧대로 알아듣는 너도 참 너답구나. 아무리 그래도 혈기왕성한 20대 남녀가 아니더냐. 한 공간에 두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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