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강소풍운 (1)
남경행 배가 장사를 출발했다.
관무평 일행은 거기서 내리고, 진우선과 만총은 배를 갈아타고 항주까지 갈 예정이었다.
“불편한 사람들과 남경까지는 같이 가야 하네.”
“어쩔 수 없지. 딱히 신경 쓰일 일만 없었으면 좋겠어.”
진우선의 목소리에서 무뚝뚝한 마음이 묻어났다.
남궁경과 관무평의 태도가 탐탁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관무평은 신경질적이기까지 했다.
“그래. 마주치지만 말자. 굳이 그런 사람들과 대화해서 뭐하겠어.”
만총이 진우선의 마음을 이해했다.
“총아. 근데 네 무공 말이야. 곰이 생각해보니까 초식의 형(形)이 예전과 좀 바뀌었더라. 이제는 혼원벽력창이라고 부르기 어렵겠던데?”
“새벽녘에 그걸 생각했구나!”
“그게 수련이지, 뭐.”
“하긴, 그게 너였지. 혁이가 네 소식 듣고 많이 감탄하면서, 너는 계속 수련하고 있을 거라서 자신도 멈출 수 없다고 하더라.”
“하하! 혁이답네.”
진우선은 우문혁도 조금 그리워졌다.
만총이 묵창을 손에 쥐고 몇 번 매만지다가 입을 열었다.
“천뢰신창(天雷神槍)이야.”
“오! 멋진데? 이름을 이미 지었었구나.”
“낙뢰창법을 더하면서 형이 바뀌니, 네 말대로 계속 혼원벽력창이라 할 수 없었지. 스승님께 예의가 아니기도 하고.”
“잘했어.”
진우선의 말에 만총이 담담하게 미소 지었다.
“배를 타니 실감이 나네. 스승님을 다시 뵐 수 있을 줄 몰랐어. 우리 집에서 머무실 땐 한시적으로 계신 거였거든.”
정무맹에서 떠난 탁무위가 만금전장의 빈객으로 머문 기간이 삼 년 정도였다.
만총은 그때 탁무위에게 창을 배웠다.
“넌 알고 있었겠구나.”
“일의 전말을 다 아는 건 아니었어.”
“그래도 내가 들은 탁 대협은 의기가 엄청 높으시더라. 네 모습 보면 기뻐하실 거야.”
“그래, 고맙다. 그러실 거야.”
만총이 아련한 눈빛으로 허공을 쳐다보았다. 옛 기억이 눈앞을 스치는 모양이었다.
“바람이나 쐬자.”
“그래.”
진우선과 만총이 갑판 위에 올랐다.
배는 동정호를 지나 장강에 접어 들고 있었다.
“여기 있었네요.”
두 사람이 난간에 기대어 가만히 바람을 즐기고 있을 때, 쾌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갈영이 다가오며 말하고 있었다.
“아까 일은 미안해요. 남궁 오라버니와 관 원주님이 좀 무례했네요.”
“좀 그렇더군요.”
“만 공자, 그래서 두 사람 떼어놓고 왔어요. 우리끼리는 괜찮았지 않나요?”
“글쎄요.”
제갈영이 사근거리며 다가왔지만, 만총은 퉁명스럽게 대꾸할 뿐이었다.
“에휴. 진짜 미안해요. 두 사람이 이번에 무도원에 들어갔는데, 벌써 신경이 곤두섰나 보더라고요. 이번 임무를 잘 수행해서 큰 실적을 올리고 싶은가 봐요.”
“그렇군요. 근데 저희와는 임무가 다르니 상관없을 거 같습니다.”
“하긴 목적지도 다르니까요.”
이제 만총 대신 진우선이 제갈영과 대화하고 있었다.
제갈영이 미안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사실 우리는 궁가장의 요청으로 강소삼정을 중재하러 가는 거예요. 근데 당주님이 공언하시길, 이제부터는 삼도원에서 임무를 수행할 때 실력과 실적을 철저하게 보겠다고 하셨어요. 가문이든 외부의 조력이든 능력껏 받아도 된다면서요.”
“원래 임무는 말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그렇긴 한데, 우리는 정무맹이니 괜찮지 않을까요? 그리고 진 대협인데요, 뭐.”
진우선이 의문을 가졌으나 제갈영은 대수롭지 않은지, 호칭도 필요에 따라 골라서 쓰며 대화를 이끌어나갔다.
“아무튼, 그래서 저들이 저렇게 날이 섰어요. 남궁 오라버니는 세가에서 도와주기로 했는데, 관 원주님은 그 정도로 지원해 줄 외부의 조력자가 없거든요. 근데 진 대협까지 마주치게 되니까 아예 공을 뺏길까 봐 더 초조했었나 봐요.”
“우리는 애초에 엮일 일도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요! 배만 같이 탔을 뿐인데.”
제갈영은 어느새 진우선의 편이 되어 대화를 풀어나가고 있었다.
“근데 제갈 소저는 말을 참 잘하시는군요.”
“칭찬 고마워요. 사실 제가 좀 그런 소리를 많이 들어요. 집에서도 혜도원에서도 제일 유쾌하거든요.”
제갈영이 싱긋 웃었다. 이만하면 어지간해선 미워하기 어려운 성격 같았다.
그녀가 두 걸음 더 다가오며 말했다.
얼굴이 석 자(약 90cm) 이내로 가까워졌다. 친한 친구에게서나 가능한 간격이었다.
“진 공자, 얼마 전에 할아버지 만났잖아요. 할아버지도 관 원주님에 대해 공명심이 강하지만, 남을 잘 무시하니 크게 되긴 어렵겠다고 하셨어요. 다만 실력이 있으니 쓰임이 있다고 그러셨죠.”
“할아버지요?”
“아! 모르셨구나. 아마 장로원에서 만나신 거 같아요. 제갈 노사님이라 불려요.”
“아!”
제갈영이 진우선의 입장에서 척척 설명했다.
제갈 노사는 제갈종도였다.
“그럼 남궁 공자도?”
“맞아요. 남궁 노사님의 손자죠. 그리고 무도원에는 용천월이라고, 용 노사님의 손자도 있어요. 그는 원주님과 실력이 비슷해요. 아마 그래서 관 원주님이 심적으로 더 예민하고 불안한지도 몰라요.”
“제갈 소저, 그런데 이렇게 다 말해도 됩니까?”
진우선이 다소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제갈영이 막무가내로 이야기를 쏟아내니 이래도 괜찮나 싶을 정도였다.
“뭐 어때요? 진 대협이 남도 아닌데요. 만 대협도 마찬가지고요.”
제갈영이 만총을 높여 부르며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만 대협. 혹시……”
“됐습니다.”
만총이 단박에 말을 자르자, 제갈영의 단아해 보이는 얼굴에 놀란 빛이 어렸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요?”
“날 데려가려는 거겠죠.”
“……에잇, 아깝다!”
“아까운 표정이 하나도 아닙니다.”
“아녜요. 당연히 아깝죠. 만 대협 같은 고수를 내당으로 데려가면 내 실적이잖아요. 진 대협은 이미 만상각에 속해 있으니 어쩔 수 없지만요.”
제갈영이 아쉬운 기색을 마구 흘렸지만 만총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진우선이 제갈영에게 말했다.
“제갈 소저는 작년에 만났을 때보다 대담해지셨군요.”
“능청스럽다는 거죠?”
“그렇게도 볼 수 있겠죠.”
“칭찬 고마워요. 부모님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라서 그래요.”
제갈영이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했다.
‘말로는 이기기 어렵겠구나.’
그때였다. 제갈영이 문득 서늘한 기운을 느꼈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보니, 선실로 가는 길목에서 남궁경이 무심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남궁 공자가 종전부터 제갈 소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진우선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음에도 그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남궁 오라버니는 밖에 나왔다 하면 저렇게 보네요. 사람이 참…….”
“익숙한가 보군요.”
“뭐, 나 좋아해서 그런 거죠. 근데 나는 간섭하고 구속하려는 사람 별론데.”
제갈영이 천연덕스럽게 말하더니, 진우선과 만총에게 작별을 고했다.
“아무튼, 이만 들어가 볼게요. 또 이야기 나눠요. 재밌었어요.”
제갈영이 휘 돌아서 선실로 들어가자, 남궁경이 진우선과 만총에게로 다가왔다.
“두 분은 영이와 나눈 이야기를 잊어버리시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대화도 삼가면 좋겠소. 영이는 나와 태중혼약을 한 사이니 말이오.”
“알겠습니다.”
진우선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남궁경이 그 말을 듣고서 선실로 돌아갔다.
만총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둘 다 참 제멋대로네.”
“그러게.”
***
이틀이 지났다.
배가 안경현에 잠시 멈춰 섰을 때,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승선했다. 족히 사오십 명은 되어 보였다.
제갈영과 남궁경, 관무평이 그들을 만나더니, 일제히 얼굴이 굳어졌다.
“엊그제도 무력충돌이 있었단 말이오?”
“그렇소. 관 원주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염성방과 사자검문이 세 번째로 충돌한 거요. 이미 양측의 무인들 수십이 숨을 거두었는데, 엊그제는 이름 높은 빈객들마저 크게 다치거나, 숨을 거두었소. 이제 일촉즉발의 상황이나 다름없소.”
남궁세가의 무인들을 이끌고 온 중년인, 남궁지철이 긴급히 상황을 전했다.
“빈객들의 이름도 알고 계시오?”
“당연하오. 염성방은 칠광수영(七光手影)과 철기신편(鐵機神鞭) 두 사람이 숨을 거두었고, 사자검문은 소검랑(少劍郞)과 철검무영(鐵劍無影)이 세상을 떠났소.”
“헛-!”
관무평이 급히 숨을 들이마셨다.
숨을 거둔 네 빈객의 위명이 자자한 까닭이었다.
특히 철기신편이나 철검무영은 관무평 그조차도 함부로 승리를 자신할 수 없는 고수였다.
“숙부님. 그럼 궁가장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경아. 궁가장도 어쩔 수 없이 강경책을 꺼내 들었다. 강호 전역으로 물자를 공급해야 하는데, 한 달 치 비축을 다 썼다더구나. 그래서 이제는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되었지.”
“상황이 심히 복잡해졌군요. 염성방과 사자검문 둘 사이의 일로 끝나기를 바랐는데 말입니다.”
“다들 그리 생각했을 거다. 사자검문이 염성방에게 물건을 안 건네면서 시작된 일이니, 그들끼리 해결해야 마땅하지. 한데 강소삼정이 다 휘몰려버렸어.”
이 사건은 달포 전쯤부터 벌어졌다.
당시 사도련주의 기세가 등등하던 때라, 소주에 위치한 사자검문이 염성방에 억지를 부렸다. 기존보다 물류비 등을 훨씬 높여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에 염성방이 상행을 못 나가기 시작했고, 궁가장마저 난처한 상황으로 몰렸다.
이는 염성방이 사도련에 속한 사자검문과도 거래하고, 정무맹에 속한 궁가장과도 거래한 까닭이었다.
염성방은 강소성의 중간자로서 크게 사업하고 있었는데, 막혀버린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든 해결하고자 했다. 하지만 사자검문에서 요구하는 비용이 갈수록 커지다 보니, 무력충돌까지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일련의 상황을 깊이 생각하던 관무평이 심각한 표정으로 남궁지철에게 말했다.
“남궁 대주, 일단 얼른 가봐야겠소. 자칫하다간 궁가장도 싸움에 말려들 텐데, 그럼 우리 정무맹은 강소삼정을 중재하기는커녕 강소성에서 검을 휘두르게 될지도 모르겠소.”
“맞소이다. 관 원주가 우려하는 바를 우리도 생각했소. 부디 궁가장이 싸움에 휘말려 들기 전에 도착해야 하오. 하루 이틀만 아무 일도 없었으면 좋겠구려.”
***
다음 날 새벽이었다.
“꺄악-!”
염성방의 한 건물에서 소름 끼치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무슨 일이냐?”
“저, 저기…….”
총관이 급히 달려와 묻자, 시녀가 사색이 된 표정으로 부서진 침상 옆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피를 잔뜩 흘린 채 널브러져 있는 시체 하나가 있었다.
“소방주님!”
“헉!”
총관이 바로 달려가 시체를 안았다.
“뭐하냐? 방주님 모셔오지 않고!”
혼비백산하여 주저앉아있던 시녀와 하인들이 총관의 불호령에 퍼뜩 움직였다.
“소방주님! 소방주님! 안됩니다-!”
총관이 마구 울먹이며 소방주를 살폈다. 하지만 소방주의 주검은 싸늘하기만 했다.
바로 그때였다.
염성방주 차재강이 부리나케 들어와 아들 차청문을 끌어안았다.
“이게… 이게 어찌된 일이야-!”
“소방주님을 깨우러 들어왔더니 여기에……이렇게 계셨어요.”
시비가 울먹이며 간신히 말했다.
“그게 말이 돼-!”
그때였다.
차재강에게 시신을 내어준 총관이 그의 손에 쥐어진 무언가를 발견했다.
“방주님. 손을 보십시오!”
“손?”
차재강이 얼른 총관의 말대로 확인했다.
그러자 작은 막대기처럼 생긴 인장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얼른 꺼내어 확인하자, 위쪽에 새겨진 세 글자가 보였다.
-만상각
염성방주가 극노하여 피를 토하듯이 외쳤다.
“정무맹 만상각? 내 이놈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