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영검전-139화 (139/225)

139.

#천하는 계속 흐른다 (4)

진우선은 이튿날 낮에 취월루 별채에서 사는 무화와 연이의 모습을 살펴본 뒤, 공야청의 집무실을 찾았다.

조사 내용을 보고하자 공야청이 말했다.

“수고했네. 효기의 인생이 참 순탄치 않은 것 같군.”

“그렇습니다. 그리고 주변에 물어보니, 한효기 선배는 취월루에서만 돈을 펑펑 쓰며 술을 마신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돈을 전하는 모양입니다.”

“그렇겠지. 서로 말을 안 하고 있을 뿐, 이미 연을 쌓았으니까 말이야. 허허.”

공야청이 웃음을 흘리더니, 차를 마시며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진우선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내가 이 일을 엄정하게 처리하면 좋겠는가? 아니면 의롭게 처리하면 좋겠는가? 자네의 의견을 한 번 듣고 싶군.”

“음, 알겠습니다. 그런데 말씀드리기에 앞서, 의롭게 처리한다는 게 정확히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

“의롭게 처리한다는 건, 인의(仁義)로 대한다는 말이네. 너무 법과 규칙으로만 다가가면 규율을 지킬 수 있으나, 마음을 얻기 어렵지 않겠나? 그래서 여러 의견을 들어보고 싶은 거라네.”

진우선은 이능운에게 들은 바가 있어, 공야청이 고심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각주님. 죄송한 말이지만, 의롭다면 이미 답이 정해져 있지 않겠습니까? 인의라는 게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런가? 왜?”

공야청이 심히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주어진 환경도 중요하지만, 어떤 뜻을 세우고 어떻게 나아가는지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뜻을 잘 세우면 힘들더라도 올바르게 나아갈 수 있고, 뜻을 잘못 세우면 금세 그르칠 수 있더군요. 제가 겪어보기로, 후에 올바른 사람은 뜻을 잘 세운 사람이었습니다.”

진우선은 정무맹에 오기 전과 생각이 다소 변해 있었다.

그때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노력하는 삶이 중요하다 여겼으나, 지금은 그걸로 충분하지 않음을 알았다.

“그렇군. 그럼 인의로 대하려면 뜻을 잘 보라는 말인가?”

“그보다는 인의라는 것이 일을 행한 후에 이루어지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먼저 사랑한 후에 인(仁)이지, 인이라 하여 사랑한 게 아니라 생각합니다. 또한, 먼저 선하여서 의(義)이지, 의라 하여 선하게 행하는 건 아닐 것 같습니다.”

“허허. 그럼 나는 억지로 짜내려 하고 있었군. 관념을 바꾸기 전에는 어려운 것이거늘.”

공야청이 허탈하여 웃음만 흘렸다.

“주제넘게 말씀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그건 아니네. 나야말로 느끼는 바가 많았어.”

공야청이 미소 지으며 진우선에게 물었다.

“우선 자네 말대로 이미 답이 정해져 있다면, 나는 아직 그 답을 잘 모르겠군. 자네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각주님, 제가 말해도 되는 일입니까?”

“당연하네. 너무 부담 갖지 말게. 결정은 내가 할 거니까.”

“여태까지 밝혀진 첩자들은 모두 숨을 거두었거나, 그렇게 될 거로 알고 있습니다. 맹의 규율은 엄정해야 하는 게 맞고, 그게 당연합니다. 하지만 한효기 선배는 이미 연을 쌓았지요. 저라면 첩자를 하옥한 뒤, 시간을 두고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제가 공 각주님이라면, 그들이 새로운 뜻으로 화합하는 걸 확인한 뒤에 옥중에서라도 혼인을 시키겠습니다. 그게 베풀 수 있는 온정이지 않겠습니까?”

“허허. 그렇군.”

공야청은 진우선의 말이 가슴에 퍽 와 닿는지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다만 반발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건 원래 당연하네. 모든 일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이니까. 하지만 일을 대함에 있어 후회가 없다면 충분하지.”

“알겠습니다.”

“우선. 이따가 나와 함께 취월루에 가도록 하세. 호위를 부탁하네. 두 사람을 만나봐야겠어.”

그날 밤이었다.

취월루의 별채에서는 어제처럼 한효기와 무화가 서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무화. 뭐가 그렇게 걱정돼?”

“몰라서 묻는 거예요? 알고서도 묻는 거예요?”

“내가 한바탕 싸우면 어떨까?”

“거기에 극경의 고수가 있다면서요. 이길 수 있겠어요?”

“내 도는 매섭지. 죽기 전까지 하늘을 절단할 거야.”

“피, 허세는!”

무화가 불퉁스럽게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그럼 오늘 낮에 안 도망치고 뭐 했어?”

“갈 곳이 있겠어요?”

“고향 있잖아.”

“가서 뭐하겠어요.”

“그랬구나.”

둘이 술잔을 나누며 근심을 흘렸다.

하지만 술을 마셔도 한효기는 답답한 마음을 풀 수 없었다.

무화는 저도 모르게 눈가가 촉촉해지는 걸 느꼈다.

“연이 불러올게요.”

바로 그때였다.

허공에서 난데없이 두 사람이 휙 나타났다.

“헛!”

“각주님!”

한효기가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그에 무화는 즉각 출수하려다가 멈췄다.

“진정들 하게. 싸우려고 온 게 아니니까.”

“여기는 어떻게 오셨습니까?”

“둘이 같은 고민을 하고 있더군. 그래서 자수를 권하러 왔네. 정상을 참작해주려고.”

“……!”

한효기와 무화는 심장이 멎은 듯이 숨소리 하나 내지도 못했다.

공야청은 이미 자신들의 대화를 다 들은 모양이었다.

“효기, 자네 운명은 왜 이리 기구한가.”

“각주님…….”

“일단 하나만 확인하지. 연이라는 아이가 두 사람의 딸이 맞는가?”

“아……!”

무화가 탄식을 흘리며 주저앉았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독기 서린 눈이 아니구나!’

공야청은 무화가 공격을 하거나, 적어도 표독한 기세는 보일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마음이 찡했다.

“허허. 대답을 들은 거 같군. 자수하겠는가?”

“네.”

***

며칠이 흐른 어느 날.

천도관에서 정무맹주 탁신과 내당주 냉군상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냉 당주, 공사다망하여 얼굴 보기가 쉽지 않군.”

“그간 인사 개편을 마무리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수고 많았네. 이제 다들 기회를 얻었다 여기겠군.”

“때를 기다리며 우리와 뜻을 모았던 이들이니, 매우 기뻐할 겁니다.”

탁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정회의 무인들에게 이제 많은 자리가 주어진 까닭이었다.

“그들에게 차별 없이 두루 기회가 주어지도록 힘써주게. 맹을 진정으로 생각해온 이들이니, 열과 성을 다할 걸세.”

“당연합니다. 그들은 각자의 영달을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할 겁니다. 그간 몸이 근질거렸는지, 임무를 내리자마자 출발한 이들도 있더군요.”

“다들 여태 힘을 죽이고 있었으니까.”

“전 맹주님과 공 각주는 강호에 뜻을 펼치는 데 소극적이어서 더 그랬습니다.”

탁신과 냉군상은 그 점을 즉시 개선하여, 적극적으로 강호의 대소사를 살피기 시작한 참이었다.

또한, 그래야만 정무맹의 무인들에게 출세할 기회가 많이 주어지리라.

“하지만 상을 과하게 주어선 안 돼.”

“당연합니다. 실력이 있더라도 공과 과는 철저해야지요. 대신 도의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는 사적인 도움을 받는 것도 능력으로 볼 것입니다.”

“그렇게 하게. 사도련과 천마교 모두가 우리의 적이니 돕는 손길이 많을수록 좋아. 그동안 한 칼로 두 도적을 감당하느라, 너무나 큰 피해를 봤어.”

그들은 독고월 맹주 시절의 방침들과 노선을 크게 바꾸고 있었다.

그러면서 만상각의 동향도 평하기 시작했다.

“공 각주는 요즘 내실을 다지려 하더군. 수하들을 챙기기 시작했어.”

“한효기 말씀이시군요. 사실 공 각주는 원래 그럴 사람이었습니다. 저번에도 마지못한 척 탁 공자를 도왔지요. 그는 의로운 면이 있어서 피해를 감당하는 수고를 많이 합니다.”

냉군상이 보기에 공야청은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여태껏 정무맹에 인적 물적 손실이 상당히 쌓인 것도 공야청의 태도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는 생각이었다.

“뭐, 그리 타고난 걸 어쩌겠나? 그래서 전 맹주와 뜻을 함께할 수 있었겠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무맹을 위해서도 그런 사람은 꼭 필요합니다. 다만 모든 대소사를 맡길 수 없을 뿐이죠.”

“그렇지.”

탁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의미에서 만상각은 여태까지와 같이 지원할 거라네. 이번에 부임한 하 당주에게 그리 전하게.”

“잘 알겠습니다. 하산기 신금당주는 계산이 철저한 편이라 믿고 맡기셔도 됩니다. 그리고 만상각의 일을 다 가져오기에는 아직 내당의 역량이 부족합니다.”

“삼도원에 인원을 그리 충원했는데도 말인가? 진우선을 제외하곤 비슷할 만도 한데.”

삼도원은 내당에 새로 들어선 내도원, 혜도원, 무도원을 통칭하는 말이었다.

“자리를 만든 거지, 사람을 만든 게 아니지 않습니까? 사실 금청청과 이능운이 문무에서는 물론이고, 조직을 이끌어가는 능력도 탁월합니다. 삼도원은 아직 그게 안 됩니다. 제가 계속 살펴볼 수도 없는 노릇이구요.”

“그 정도를 바란다면 자네가 직접 키우게. 우리는 이제 시작이야.”

탁신은 슬쩍 웃으며, 언젠가 냉군상에게 들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내당의 성장보다 중요한 것은, 맹주님의 무공입니다. 맹주님도 무극지경에 오르셔야 합니다. 이미 사도련주를 겪어봐서 아시겠지만, 최소한 무극지경이 아니고선 어렵습니다.”

“그렇겠지.”

탁신이 얼굴을 굳히며 대답했다.

냉군상은 여전히 냉정한 목소리로 대화를 이었다.

“그리고 남경의 궁가장에서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강소삼정이 이권 다툼을 벌이는 모양입니다.”

강소삼정(江蘇三鼎)은 궁가장과 사자검문과 염성방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들은 강소성의 비옥한 평원과 장강, 대운하 등을 기반으로 하여 농업과 상업에서 큰 부를 구축하며 일어난 문파들이었다.

“이번에는 이권 다툼이 크게 일어난 모양이군. 우리에게 중재를 요청했을 정도로 말이야.”

“그렇습니다.”

“알겠네. 누구를 보낼 참인가?”

“이번에 무도원주를 맡은 십방도객(十方刀客) 관무평에게 맡길 생각입니다.”

관무평은 용천월과 함께 내당에서 손꼽히는 두 고수 중 한 명으로, 백무원의 초무량에 비할 수 있는 뛰어난 무인이었다.

“그라면 중재를 맡길 만하지. 한데 그 혼자서 괜찮겠나?”

“그래서 남궁경과 제갈영을 함께 보낼 겁니다.”

“남궁과 제갈이라…… 자네다운 인선이야.”

특히나 남궁세가는 장강 중하류에 있어, 남경과도 교류가 많을 터였다.

그때, 탁신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공교롭군. 이번에 진우선이 항주에 간다던데 말이야. 경로가 비슷하겠어.”

***

아침이 밝아왔다.

“우선아. 집이 편하고 좋네. 동네도 조용하고. 재단장도 잘했구나.”

만총이 마당 한쪽에서 운기행공을 마치고 일어선 진우선에게 웃으며 말했다.

둘은 어제저녁에 만나 진우선의 집에서 잠을 잔 상황이었다. 그사이에 비무도 한 차례 한 건 물론이었다.

“괜찮지? 나도 마음에 들더라.”

“그러게. 나도 호심당 마치면 이쪽으로 집 하나 얻어볼까 싶네.”

두 사람이 그렇게 대화를 나누다가, 시간에 맞춰서 집을 나섰다.

잠시 후, 진우선과 만총이 장사의 포구에 도착했다. 배를 타고 장강으로 이동할 계획이었다.

그때, 한 여인이 눈을 빛내며 진우선에게 다가왔다.

“진 공자! 오랜만이에요!”

“아! 제갈 소저시군요!”

진우선이 여인의 얼굴을 기억해 냈다.

지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그녀는 진우선이 호심당에서 첫 임무를 다녀올 때 인사를 나눴던 제갈영이었다.

그녀를 따라 한 사내도 다가왔다.

“난 남궁경이오. 반갑소.”

남궁경이 따가운 눈초리로 진우선을 바라보았다. 그는 처음 보는데도 무언가 탐탁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진우선과 만총이 대수롭지 않게 인사를 건넸다.

“백무원의 진우선입니다.”

“저는 호심당에서 온 만총입니다.”

그러자 제갈영이 활발하게 말을 붙여왔다.

“만 공자, 나도 작년까지 호심당에 있어서 몇 번 마주치긴 했었는데, 기억나요? 반가워요.”

“네, 얼굴은 기억이 납니다.”

“만 공자가 이번에 호심당 비무에서 일 위였다면서요? 무위가 엄청났다고 들었어요. 축하해요.”

“감사합니다.”

만총이 다소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제갈영의 입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진 공자와 만 공자가 함께 임무를 나서는 모양이군요. 어디로 가는 거예요?”

그때, 남궁경이 다소 언짢은 기색으로 말했다.

“영아. 그만해라.”

그와 동시에 한 중년인이 냉기를 풀풀 날리며 진우선에게 다가왔다.

“자네가 진우선이군. 이름 많이 들었다. 난 내당 무도원주 관무평이다.”

관무평은 초면인데도 적대감이 상당했다.

반면에 진우선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반갑습니다.”

“글쎄. 나는 마냥 반갑진 않아. 이번 임무 간에 서로 신경 쓰일 일이나 없었으면 좋겠군. 눈에 거슬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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