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1.
#그들이 있는 곳 (3)
진우선이 팔운루에 온 지 사흘이 지났다.
이제는 이곳에서 수련하는 게 꽤 익숙해진 상태였다.
장소도 편하고, 조용했다.
총관이 자신 있어 할 만큼 무공을 익히기에 매우 좋은 환경이었다.
신경 쓰이는 거라곤 종종 담장 너머 칠운루에서 격하게 수련하는 소리가 들린다는 점이었다.
사실 어지간한 소리는 들리지 않고, 높은 담벼락에 가려 있어 눈으로도 보이지 않으니 크게 방해되지 않았다.
그러니 거의 아무 소리가 없다고 봐도 될 터였다.
팔운루에 다른 사람의 인기척은 없고, 오직 진우선의 숨소리만 있었다.
아무도 오지 않아서였다.
무사부들 중 한 명이 올 법도 한데, 아무도 오지 않았다.
오늘도 올 예정이 없었다.
“아직 네게 무사부가 정해지지 않았다. 다들 미리 정해둔 게 많아서 조정하려면 좀 더 걸릴 거 같아. 관주님도 이번에 맹에 볼일이 있어서 가셨고. 일단 며칠만 더 혼자 수련하고 있거라.”
총관의 말이었다.
진우선이 청운무관에 도착했을 때 그렇게 들었다.
총관이 그렇다는데 진우선으로서는 어찌할 바가 없었다.
그저 혼자서 팔운루에 들어올 수밖에.
그래도 진우선밖에 쓰지 않는 고요한 팔운루에 날마다 들르는 사람이 한 명 있긴 있었다.
매영령이었다.
그녀는 오늘도 찾아왔다.
해질녘, 진우선이 오는 시간에 맞춰 팔운루를 찾았다.
사흘째 계속 짧게라도 들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선 오라버니. 책 이야기 재밌어요. 어쩜 그렇게 재밌게 말해요?”
매영령이 보기에 진우선은 딱히 재미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여러 책에서 본 이야기들을 해주는 건 꽤 흥미진진했다.
“근데 더 듣고 싶은데…… 송 사부가 오실 때가 되어서 가 봐야 할 거 같아요.”
매영령이 울상을 지었다.
진우선의 이야기가 재미있어서 아쉬운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하지만 수련하러 가기 싫은 이유가 가장 컸다.
“그럼 뒷이야기는 내일 또 해줄게.”
“네. 알았어요. 내일 또 올게요! 열심히 수련하세요!”
매영령이 손을 흔들고 떠났다.
적막한 팔운루에 사람의 흔적을 남겨주는 건 오직 매영령 하나였다.
***
짙은 밤.
팔운루의 넓은 연무장에서 진우선이 검을 든 채 느릿하게 움직였다.
그 모습이 매우 신중해 보였다.
[우선아. 네가 검을 이끄는 것이니…….]
진우선은 광영무의 첫 초식을 배우며, 검노야의 모든 가르침을 계속 떠올렸다. 그러면서 수련에 임하고 있었다.
광영무는 여태까지와 달랐다.
검이 쉽게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리고 쉽게 뻗는다면 막혀버리기 일쑤였다.
어려운 상황이었다.
머릿속이 혼잡했다.
그렇게 수련에 집중하고 있을 때, 담장 너머의 소리가 확 들려왔다.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
“네. 홍 사부님.”
옆 칠운루에서 수련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칠운루는 전광이 수련하는 곳.
전광은 첫날부터 무사부가 정해졌고, 그 후로 온종일 가르침을 받고 있었다. 그게 지난 사흘간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전광이 진우선과 같은 날 갑급으로 왔으니, 참으로 비교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진우선은 그런 점은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열심히 하네.’
그저 소리를 들으며 전광의 의지를 높이 살 뿐이다.
근데 오늘따라 이상했다.
평소에는 잘 들리지 않던 소리였는데 오늘따라 크게 들렸다.
‘왜지?’
괜히 마음이 쓰였다.
전광의 목소리에 기합이 단단히 들어가 있기에 한밤중에도 또렷한 건 맞지만, 이는 평소와 똑같은 정도였다.
그런데 오늘따라 미묘하게 불편했다.
‘집중! 집중! 내 검에 집중하자!’
진우선이 마음을 다잡았다.
집중력이 흐트러져서 소리가 들린 건지, 소리가 들려서 집중력이 흐트러진 건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내 수련을 하는 거야.’
***
팔운루에 들어온 지 열흘이 지났다.
날씨가 퍽 쌀쌀해진 게, 옷을 조금씩 두껍게 입는 게 좋을 듯했다.
하지만 진우선은 여전히 옷을 가볍게 입었다.
잠시도 쉬지 않은 채 집중하며 몸을 움직여야 하고, 그러면 몸이 더워져 땀을 많이 흘리는 까닭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광영무는 검법과 심법이 따로 나누어진 게 아니라 한 몸이니. 형을 수련할수록 내기도 순환하며, 그렇게 내공을 쌓는 동공의 일종이기에, 일전에도 말했듯이 부단히 노력하여 단련하고 수양해야……]
광영무는 동공이었다.
구결과 함께 검의 형에 집중하여 초식을 펼쳐내면, 그 흐름을 따라 진기가 저절로 일어나 몸 안에 흐르는 무공이었다.
그러다 보니, 검로만 따라가서는 제대로 펼쳐낼 수 없었다.
제대로 된 이해가 동반되지 않는다면, 모양만 흉내 내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거기에 광영무는 더 특별했다.
광영무는 모양만 흉내 내는 것도 허락하지 않는 무공이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억지로 따라 하기라도 하면, 몸속 진기의 흐름이 뒤틀려버렸다.
상황이 심각할 경우, 내공이 깨지는 것이다.
진우선이 검노야의 광영무를 처음 보자마자 쓰러졌던 게 그래서였다.
이처럼 광영무는 자신만의 흐름을 가진 동공이었다.
“타핫!”
진우선이 기합을 넣었다.
광영무의 열두 초식을 끝마치고, 다시 첫 초식부터 시작하며 소리 낸 것이다.
벌써 그렇게 한 게 오늘만도 수십 번째였다.
진우선의 검은 검노야와 달랐다.
일단 매우 느렸다.
신중하다 못해 답답해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정확했다.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검노야가 그렇게 지도하고 있었다.
[우선아. 반복하여 습득하는 형을 꼭 기억하거라. 구결을 명심하여, 글자가 아닌 네 안의 기운으로 만들어야 하느니.]
검노야가 진우선의 몸을 잡아주며 당부했다.
‘네!’
진우선이 마음속으로 대답했다.
소리 내어 말하기가 힘들었다.
숨이 가빠서 헉헉거리느라 말을 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호흡을 몰아쉬기도 버거웠다.
그러나 검노야의 지도는 놓치는 법이 없었고, 진우선은 오로지 검에 몰두할 수 있었다.
광영무는 동공.
움직여서 익혀내야 내 것이 된다.
부단히 단련하는 것이니, 여태껏 수련한 방법과 비슷했다.
그렇게 노력하는 건 자신 있었다.
늘 열심히 살아왔으니까.
삼재공도, 유운공도 그러했다.
특히 검노야에게 배우면서, 그동안의 수련이 빛을 발하여 금세 익혀내지 않았던가.
광영무는 이제 걸음마 수준이며, 삼재공이나 유운공과는 비교할 수 없는 무공이어서 기간이 훨씬 걸릴 것이다.
그래도 언제고 광영무를 제대로 펼쳐낼 수 있을 날이 올 터였다.
[……광영무를 익혀 네 것으로 만들면, 그때 천지간에 흐르는 기운을 느끼고, 그 충만함이 온몸을 적실 것이니……]
비록 그때가 언제일지는 그저 막막할 따름이지만, 그래도 막연히 두렵거나 하지는 않았다.
‘천지간의 기운을 느끼는 건 과연 어떤 걸까? 스승님께서 잘 지도해주시니, 열심히 수련해보자!’
***
열흘이 더 지나갔다.
진우선이 갑급이 되어 팔운루에 드나들기 시작한 게 벌써 스무날이 된 것이다.
날씨는 이제 으슬으슬했다. 가을이 끝나고 겨울에 접어든 모양이었다.
서 총관도 옷을 두툼하게 챙겨 입은 채 청운무관에 나와 있었다.
“우선아. 미안한 소식을 또 전하게 되었다. 맹에 가신 관주님의 일정이 길어질 모양이야. 무사부들도 마찬가지고.”
“그렇다면, 언제쯤 정해질까요?”
“글쎄다.”
서 총관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말투도 사무적이었다. 그래서인지 말은 미안하다고 하지만,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네. 알겠습니다. 정해지면 알려 주세요.”
“그러마.”
진우선이 꾸벅 인사하고는 청운무관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팔운루로 갔다.
***
“아, 진짜요?”
매영령이 되물었다.
“대체 왜 계속 안 정해지는 걸까요?”
그녀는 진우선의 말을 들으며 계속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도 재미있는 책 이야기를 들으러 왔다. 요 며칠은 사흘에 한 번 정도밖에 못 오고 있어, 즐겁게 대화하고 싶었다.
하지만 방금 들은 소식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괜찮아. 무슨 일이 있는 거겠지. 관주님도 맹에 가셨다고 하고.”
정무맹은 청운무관이 있는 무한에서 다녀오려면 최소 닷새에서 열흘은 걸렸다.
“그래도 너무하잖아요. 무사부가 없으면 아예 지도를 못 받는데. 아! 송 사부에게 오라버니 좀 지도해달라고 해볼게요. 어때요? 괜찮죠?”
매영령은 지금 당장에라도 자신의 무사부인 송문영을 소개해줄 심산이었다.
하지만 진우선이 고개를 저었다.
“안 괜찮아. 그러지 마. 너도 수련해야지. 송 사부님은 널 지도하시느라 바쁘시잖아. 너 수련하기 싫어서 그러지?”
“흥! 수련은 딱히 재미없어요. 게다가 송 사부와 수련하는 중엔 잠깐 히힛- 웃기만 해도 인상을 찌푸리셔서, 제가 얼마나 답답한데요.”
“아무튼! 안 돼.”
“쳇!”
진우선이 단호하게 안 된다고 하자 매영령이 못마땅한 기색을 마구 드러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우선 오라버니. 오늘은 무슨 이야기를 해줄 거예요? 시간이 얼마 없어요. 아까 송 사부가 반 시진 후에 온다고 했거든요. 아! 이제 반 시진도 안 남았어요!”
매영령이 진우선에게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오늘도 팔운루에 온 목적이 있었다.
“알았어. 알았어. 혹시 들어봤을지 모르겠는데 옛 고사 중에…….”
진우선이 고서점에서 봤던 책의 내용을 떠올리며 매영령에게 이야기해주었다.
매영령이 갔다.
진우선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검을 들었다.
사방이 조용한 가운데, 수련하기에 더없이 좋은 환경 속에서 검을 펼쳐내기 시작했다.
진우선의 검에서 광영무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진우선은 이렇게 혼자일 때면 계속 광영무를 수련하고 있었다.
검노야에게서 배운 광영무이지만, 검노야는 이럴 때면 모습을 감추었다. 진우선더러 자신을 의식하지 말고 검에만 몰두하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진우선에게는 그것이 크게 도움 되었다.
눈앞에 보이는 건 오직 검 한 자루.
널따란 연무장 위에 광영무의 초식을 머릿속으로 그려보고, 힘껏 몸을 움직여 담아냈다.
검이 나아갈 길을 제대로 그려냈다.
검에 집중할수록 그게 더 잘 되었다. 다른 것은 조금도 떠오르지 않았다.
[……오직 검에 집중하며 몸을 쓰면 온갖 번뇌가 사라지니……]
검노야의 말이 떠올랐다.
검노야의 말은 틀린 게 하나도 없었다.
바로 그때.
쾅쾅쾅!
문 두드리는 소리가 크게 났다.
‘뭐지?’
갑자기 찾아와서 저렇게 문 두드릴 사람이 없었다.
즉, 그는 불청객이었다.
쾅쾅쾅쾅!
문밖의 불청객이 계속 문을 열어 보라고 독촉했다.
집중이 완전히 깨졌다.
“어휴!”
진우선이 한숨을 내쉬었다.
[허허. 나가봐야겠구나.]
검노야도 허탈한 듯이 웃었다.
“야! 문 좀 열어봐! 얼굴 좀 보자! 같이 갑급 왔는데 인사하자고!”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전광이었다.
같이 갑급에 왔다는 말에서 알 수 있었다. 지난번에 들은 음성이 기도 했었다.
진우선이 터덜터덜 걸어가서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시죠?”
“반가워, 팔운루. 나는 칠운루야. 우리 여기 온 지 꽤 됐는데, 인사 한번 안 했잖아. 그래서 왔지. 크크크.”
전광이 빈정거리며 웃었다.
술 냄새가 확 풍겨왔다. 그러고 보니 손에 술병이 하나 들려 있었다.
“아! 이거? 너도 한 모금 할래?”
“아니. 됐어.”
진우선이 고개를 저으며 차갑게 대꾸했다.
“그리고 인사했으니까, 됐지? 인제 그만 가봐. 칠운루는 바로 옆이야.”
“나도 알아. 칠운루는 저기고, 여기는 팔운루인 거. 그리고 말했잖아. 너한테 볼일 있어서 여기로 온 거야.”
전광이 정확히 가리키며, 정확하게 말했다.
행동이나 말투로 보아 취한 것 같지는 않았다.
“야! 근데 너 왜 나한테 반말이야? 너 열다섯이라며! 나보다 어린 것이. 형님이라고 깍듯이 말해야지! 하긴, 네깟 놈이 그럴 리가 없지. 처음 봤을 때부터 영- 재수 없더라.”
“네. 열다섯 맞습니다. 근데 용건은 그게 끝인가요?”
진우선이 냉대했다.
그의 말에 속이 상했으나, 술 마신 사람은 마주 상대하지 않는 것이 상책임을 수차례 경험하여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전광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크크크.”
전광이 이죽거렸다.
그 표정을 보고 있기가 꽤 불편했다.
“야! 너 무사부가 계속 안 오지? 다들 네 무사부를 하기 싫어한다더라. 돈이 안 되니까. 앞으로도 아마 없을 거래. 그러게 왜 돈 안 내고 갑급에 왔냐? 크크크.”
“……!”
그 순간, 진우선이 멈칫했다.
얼굴이 굳어버리고 마음이 싸늘하게 식었다.
하지만 곧바로 침착해졌다.
잠깐 어색했으나 금세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전광은 그런 진우선을 보며 짓궂게 한마디 더 했다.
“내가 이 말 해주러 왔지. 네가 궁금해 할 거 같아서. 너한테 꼭! 말해줘야 할 거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