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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영검전-2화 (2/225)

002.

#검노야 (1)

새벽녘. 아직 해조차 완전히 밝아오지 않은 시간.

마당에 나서던 진우선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그대로 멈춰버렸다.

‘귀, 귀신!’

덜컥 겁이 났다.

몸도 조금씩 떨려왔다.

‘아니야.’

그것은 분명하게 보이지만, 마치 연기처럼 있는 듯 없는 허상 같았다. 형체는 흐릿하면서도 사방이 투과되어 보였다.

“검노야……?”

진우선의 동공이 흔들렸다. 자신이 본 것을 믿을 수 없어서였다.

마당 가운데에 흐릿하게 존재하는 무인의 형상.

분명 검노야였다.

어젯밤에 사 온 목각인형의 모습 그대로였다.

착각일까?

허깨비를 보는 것일까?

그렇게 의문이 들었을 때.

스윽.

검노야가 고개를 돌렸다.

환영임에도 생생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어젯밤 뇌리에 각인된 인형의 모습과 똑같은, 한없이 인자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손짓했다.

어서 다가오라는 듯.

“헛!”

진우선이 놀란 숨을 급히 토해내면서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내가 잘못 본 걸 거야!’

그래서 눈을 비비고 다시 살폈다.

검노야는 여전히 온화한 모습으로 손짓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몇 번을 다시 봐도 똑같아!’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아!”

문득 든 생각에, 진우선이 급히 방 안으로 들어가 책상 위를 살폈다.

어젯밤에 검노야의 목각인형을 세워둔 걸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목각인형의 실물을 확인하면, 희끄무레한 환영이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

혹시 이게 환각이라면, 그렇게 하면 깨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현실은 생각과 달랐다.

‘인형이…… 없어!’

목각인형을 놓아두었던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설마 마당에 있는 검노야가 진짜라는 걸까?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그와 동시에 피가 싸늘하게 식는 느낌도 들었다.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리고 살갗에 소름이 마구 돋았다.

다시 마당을 보고 검노야의 모습을 확인해야 할 텐데, 그럴 용기가 쉽게 나지 않았다.

그때였다.

[우선아.]

따뜻한 목소리가 전해졌다.

소리가 공기를 타고 귀로 들어온 게 아니었다. 곧바로 머릿속과 마음속에 새겨졌다.

‘귀신의 소리다!’

흔히 들었던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러니 귀신의 목소리인 게 틀림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차분한 그 음성이 무척이나 인자하다고 느껴졌다.

[두려워하지 말고, 이리 오거라.]

그 순간, 감쪽같이 몸의 떨림이 멎었다. 두려움도 사라졌다.

마치 언제 놀랬냐는 것처럼. 말 한마디에 마음이 평온해져 있었다.

곧장 진우선이 고개를 돌렸다.

열린 문 너머로 검노야가 보였다. 여전히 자애로운 모습으로 손 짓하고 있었다.

진우선의 눈이 그와 마주쳤다.

[반갑구나.]

검노야의 목소리가 전해져왔다.

마음을 포근히 감싸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에도!’

불현듯이 어젯밤의 기억이 떠올랐다.

[알았노라.]

짧게 전해진 한마디.

그건 진우선이 “잘 부탁드립니다.” 라고 말한 것에 대한 검노야의 대답이었다.

그때만 해도 착각인 줄 알았는데, 인제 보니 그게 아니었다. 그걸 검노야가 확인해주었다.

[네 생각이 맞다.]

“……!”

진우선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말하지 않았음에도 자신의 마음을 알아채고 있었다.

‘내 생각을 알 수 있는 건가?’

어쩌면 당황, 두려움, 조심스러움 등의 마음마저 알 수 있는 걸지도 몰랐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두렵거나 겁나지는 않았다. 무섭거나 불안하다는 생각도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로, 마음이 평안하고 차분했다.

침착해진 진우선이 검노야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진짜 검노야이신가요?”

[그래.]

검노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했던 것이지만, 직접 들으니 비로소 실감이 났다.

[고맙다. 내게 이름을 지어주어서. 마음에 드는 이름이야. 참 좋구나.]

검노야가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존경하는 뜻을 담아 검노야라 칭한 진우선의 생각을 파악한 것이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진우선이 살짝 웃었다.

순한 미소가 얼굴에 어렸다.

그 모습에 검노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웃는 모습이 보기 좋구나. 어린 나이에 스스로 삶을 챙겨나가느라 참 고생 많았어. 힘들지는 않았느냐?]

“그냥…… 열심히 살았어요.”

진우선이 말을 흐렸다.

힘들고 고생했던 기억들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떠오른 까닭이었다.

여태껏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허드렛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구걸한 적도 꽤 있었다.

아무것도 구하지 못한 날이면 물가에 가서 물로 배를 채우며 허기를 달랬다.

잘 곳이 없어 새벽까지 방황한 적도 많았다. 관제묘나 사당에서 잠들면 다행이었다.

부모님을 여인 열 살 이후로 진우선은 그렇게 살았었다.

스스로 삶을 챙겨왔다는 말에 이런 기억들이 마구 떠올랐다.

그리고 고생했다는 말에 울컥 슬픔이 복받쳐 올랐다. 괜히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진우선은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오히려 엷게 미소 지었다.

[장하구나. 정말 수고 많았어.]

검노야가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리고 손을 뻗었다.

검노야의 손이 진우선의 머리에 닿았고,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의 눈빛은 대견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진우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다 아는 것 같았다. 굳이 듣지 않아도 이미 그 삶을 들여다본 듯했다.

“감사합니다.”

진우선이 촉촉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살짝 목이 메어 있었다.

하지만 진우선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래서 얼굴이 우는 것 같기도 하고 웃는 것 같기도 했다. 울다가 웃는 느낌도 있었다.

진우선은 웃음으로 눈물을 참아 냈다.

그렇게 마음이 가라앉았을 즈음, 검노야가 진우선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우선아.]

“네.”

[나한테서 배워보겠느냐?]

“네?”

진우선이 반문했다.

갑작스러운 말이었는지, 그 뜻을 아예 이해하지 못한 눈빛이었다.

검노야는 그런 진우선을 보며 웃어주었다.

[허허.]

그리고 아련한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우선아. 네가 어젯밤 나를 스승님이라고 불렀었지. 그 순간 참으로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깨어 있다는 걸 자각했으니까.]

검노야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허공 어딘가를 향하던 눈이 진우선의 짙은 눈동자를 마주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너를 보니 알겠더구나. 네가 나와 이어져 있다는 것을. 네 바람이 내게 와서 닿았고, 그게 우리 인연을 만들었다는 것을.]

검노야는 인연이라 말하고 있었다.

진우선의 간절한 소망이 만들어 낸 인연이리라.

[네 스승이 되는 게 내 사명이라 생각되더구나. 그래서 너를 알고 싶었고, 네 진심을 느낄수록 가르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 허허허.]

검노야가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그는 진우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자세히 듣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인연의 끈이 둘을 이어주니 검노야가 진우선의 역경을 공감할 수 있었고, 그와 동시에 꿋꿋하게 살아가는 진우선의 사람됨도 알게 된 것이다.

“아-!”

진우선이 탄성을 흘렸다.

머릿속에 어젯밤이 떠올랐다.

목각인형을 사 오면서 여러 생각을 했었다.

검선이라고.

인자한 스승님 같다고.

자신에게도 이런 스승님이 계셨으면 좋겠다고.

‘그게 이루어지다니!’

바라던 바가 현실이 되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

그러나 진우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머릿속이 새하얀 느낌이었다. 사고가 멎은 듯했다.

눈으로 보고 있지만, 실감이 나지 않았다.

검노야의 이야기를 들었고, ‘그렇구나!’ 하면 될지도 모르지만, 그게 쉽지 않았다.

[그럴 만도 하지. 나도 그랬으니.]

검노야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는 여전히 너그러운 미소를 띤 채로 기다려주었다.

진우선에게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여긴 것이다.

시간이 흐르며 차츰 진우선의 머리가 맑아졌다.

“고맙습니다!”

가장 먼저 감사가 나왔다.

소망이 이루어진 순간이며, 소중한 기회가 온 것을 깨달았다.

그러면서 의문도 들었다.

‘무엇을 배우게 될까?’

검노야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어떤 걸 가르쳐줄지도 알 수 없었다.

[나야말로 너를 만나게 되었으니 고맙구나. 이제 네가 외롭지 않게, 그리고 배운 실력이 부끄럽지 않게 가르쳐주마. 내게서 검을 배우면, 어디 가서 기죽지는 않을 것이니라.]

진우선이 의문을 가진 순간, 검노야가 그 의문을 받은 모양새였

검을 가르치고, 배운다.

검노야의 말은 간단했다.

그리고 진지했다. 허풍이라고는 일말의 의심도 들지 않았다.

[우선아. 내게서 배워보겠느냐?]

“네! 배우고 싶습니다.”

[그래. 좋구나!]

진우선이 기쁘게 대답하자 검노야도 환히 웃으며 반겼다.

‘드디어!’

진우선이 기대에 찬 눈빛을 띠었다. 얼굴에도 환한 미소가 어렸다.

이제 놀라움, 두려움, 무서움 같은 건 없었다.

기쁨, 희망, 열정 등이 온몸에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그때, 검노야가 휙 뒤돌아서서 마당 한가운데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검노야의 걸음에 위엄이 어려 있다고 느낀 순간.

쑤욱!

휘휘휙-!

어느 한 걸음에 갑자기 땅이 벽처럼 솟구쳤다.

불쑥 일어난 흙벽이 마당을 감싸고 병풍처럼 둘러쳐졌다.

“헛!”

진우선이 급히 숨을 삼켰다.

하지만 진우선이 놀라거나 말거나, 검노야는 또 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사방을 에워싼 흙벽이 산으로 변했다.

또 한 걸음을 나아갔다.

산에 개울이 생기고, 나무가 솟아나고, 온갖 풀들이 자라났다.

또 한 걸음을 전진했다.

그 순간.

고오오오-!

묵직한 바람이 불었다.

바람이 산을 울리고, 물을 진동시키고, 나무를 흔들었다.

그 상황에서 검노야가 땅을 쿵 밟았다.

그러자 산천초목 모든 게 흔들렸다.

대기는 쐐애액 비명을 토해내며, 세차게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회오리가 피어올랐다. 하늘까지 솟아오르니, 순식간에 용오름이 되었다.

폭풍이 불어닥쳤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폭풍의 강력한 힘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폭풍이 선명히 보였다.

바람 한 올 한 올이 눈에 잡혔다.

그리고 무언가 발견했다.

‘검!’

진우선이 침을 꿀꺽 삼켰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폭풍의 중심에 검이 있었다.

마치 검이 폭풍을 일으키는 느낌이었다.

그런 가운데 변함이 없는 건 검노야 한 사람뿐이다.

진우선이 저도 모르게 검노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검노야는 환영이었다.

흐릿하면서 또렷해 보였다. 주변이 비쳐 보일 정도로 투명하면서도 불투명한 윤곽이 있었다.

말이 되지 않지만, 그렇게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목구비를 비롯하여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어느 하나 뭉뚱그려진 게 없이 매우 분명했으니까.

백발은 백발답게 새하얗고, 연청색 경장은 본연의 질감과 색감이 살아있었다.

하지만 그건 외양일 뿐이었다.

검노야는 거대했다.

그의 묵직한 존재감이 주변을 압도했다. 산천초목이 숨죽인 느낌이었다.

흐릿한 뒷모습에 천지마저 가려지는 듯했다.

“…….”

이 순간, 진우선도 감히 숨을 내쉬지 못했다. 숨이 멎은 듯했다. 검노야의 기세에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그런 검노야에게로 검이 서서히 다가왔다.

검 앞에 선 검노야는 온몸에 은은한 광채마저 어린 것처럼 보였다.

검노야가 검 앞에서 외쳤다.

[천지신명이시여! 저 검노야와 진우선이 스승과 제자로 인연을 맺게 되어 예를 드리오니, 굽어 살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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