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
#서
“옜다. 수고 많았어.”
“감사합니다.”
진우선이 두 손으로 전낭을 받았다.
고서점의 주인인 황호가 한 달 치 품삯을 준 것이다.
그런데 전낭이 평소보다 조금 더 크고 묵직한 느낌이었다.
“이번 달에도 수고 많았어. 앞으로도 계속 잘 부탁한다.”
황호가 말하는 사이, 진우선이 주머니를 열었다.
느낌이 틀린 게 아니었다. 품삯이 실제로 지난달보다 조금 많았다.
“아무래도 잘못 넣으신 것 같습니다.”
“실수 아니야. 일부러 그렇게 넣었어.”
황호가 진우선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을 이었다.
“너 여전히 무관 다니고 있지?”
“네.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래서 조금 더 넣었어.”
진우선이 의문 띤 눈빛으로 황호를 쳐다보았다.
“거기 엄청 비싸잖아. 무관비에 좀 보태라고.”
황호가 무심하게 말을 툭 던졌다. 하지만 손가락은 살짝 꼼지락거리며 코밑을 쓸었다.
표정이나 말이 참으로 어색해 보였다.
“아! 감사합니다.”
“우리 사이에 뭘 또. 됐어, 됐어. 생각해보니까 삼 년이 넘었더라? 이제 올려줄 때도 됐다 싶었던 참이고. 그래, 그런 거야.”
황호가 겸연쩍어하며 가볍게 손사래 쳤다.
서른이 훌쩍 넘었는데도 이런 대화를 할 때면 쑥스러움이 많은 모양이었다.
진우선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옆에서 보기에 황호는 때론 허술하고 때론 고지식했다. 하지만 원체 사람이 좋아 주변에 적이 별로 없었다.
지금처럼 마음을 써줄 때도 꽤 있고.
“무공 배우는 거 힘들지?”
“마냥 쉽진 않지만, 그래도 꽤 재미있어요.”
“재미있어? 똑같은 자세를 수백 번, 수천 번 해야 하잖아? 우웩!”
황호가 구토하는 몸짓을 보이며 너스레를 떨었다.
확실히 조금 전의 진지한 모습보다 지금 행동이 자연스럽고 편해 보였다.
진우선이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도 꼭 해야지요.”
“그렇지.”
황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우선의 사정을 잘 아는 까닭이었다.
진우선은 열 살 때쯤 횡액을 당해 부모님을 여의었다.
그뿐 아니라 태어나고 자라온 마을을 잃어버렸다. 복면을 쓴 도적들이 사람들을 모조리 학살하고 마을을 불태워버린 것이다.
더욱 끔찍한 사실은 진우선이 그 모습을 두 눈으로 모두 봤다는 점이었다.
그랬기에 진우선이 엷게 미소 지으며 무관에서 무공을 배우겠다고 했을 때, 황호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나중에 정무맹에 가서 세상에 해악을 끼치는 사람들과 맞서 싸울 겁니다!”라고도 했었지, 아마?’
그리고 이 년이 지났다.
진우선은 빼먹지 않고 열심히 무관에 다니며 자신의 삶을 잘 살아 내고 있었다.
“이제 이 년 정도 됐지? 나 같으면 벌써 몇 번은 때려치웠을 텐데. 넌 참 대단해.”
“아저씨도 하다 보면 잘하실 거예요. 다들 처음 몇 달이 어렵지, 재미 붙이면 할 만하다고 하더라고요.”
“아-! 난 됐어, 됐어. 그렇게 많이 움직이는 건 별로야. 안 할래.”
황호가 손을 휘휘 내젓고는 말을 이었다.
“우선아. 오늘은 이만하고 들어가.”
“지금요?”
아직 한낮이다. 고서점을 닫을 시간도 아니고, 일이 끝날 시간도 아니었다.
“어차피 무관 갈 거잖아. 오늘은 더 빨리 가보라고.”
황호가 서점 밖으로 진우선의 등을 떠밀었다.
진우선은 마지못해 밀려 나가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목소리가 매우 들떠 있었다.
***
깜깜한 밤.
해가 다 지고 나서야 한 소년이 무관을 나왔다.
달빛이 비추자 얼굴이 드러났다.
열다섯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
그는 바로 진우선이었다.
진우선이 현판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청운무관.
해가 저물 때까지 수련하고 나와 피곤한데도, 현판의 네 글자를 되뇔 때마다 다시 온몸에 기운이 나는 것 같았다.
문득 낮에 들었던 칭찬도 떠올랐다.
“못 본 사이에 실력이 많이 늘었어. 그동안 열심히 했구나!”
“슬슬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 되겠어. 이만하면 유운공을 배우기에 충분해.”
“한 번 배워볼 테냐?”
무려 청운무관의 관주의 말이었다.
정말 기뻤다.
그동안 꾸준히 성실하게 수련한 결과를 인정받았으니 좋았다.
게다가 청운무관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 유운공도 익히게 되었으니 더할 나위가 없었다.
‘이제 시작이야!’
진우선이 두 손을 불끈 쥐었다.
이번에도 잘 해내자고 굳게 다짐했다. 그러고는 돌아가기 위해 다시 몸을 돌렸다.
그런데 무관에서 멀어질수록 마음 한편에서 씁쓸함이 밀려왔다.
종종 들었던 소문이 뇌리를 맴도는 까닭이었다.
- 무관에 돈을 많이 내야만 무사부가 직접 지도해준다.
- 돈을 많이 낼수록 더 빨리, 더 자세히 배울 수 있다.
진우선은 평소에 그런 소문을 듣고서도 그러려니 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혼자 지낸 지가 몇 년인데, 돈의 위력을 모를 리 있겠는가.
다만, 넉넉하지 않은 자신에게는 해당 없는 이야기인지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을 뿐이었다.
하지만 오늘 그 소문을 제대로 실감하게 되었다.
진우선은 낮에 을(乙)급의 비용을 치렀다. 여태껏 갑을병의 세 단계 중 가장 저렴한 병급으로 배웠었는데, 을급으로 단계를 높인 것이다.
그러자 관주가 곧바로 진우선을 찾았다.
그동안 무관에 다니면서도 거의 본 적 없었던 관주인데, 그는 반나절 동안이나 진우선에게 직접 유운공을 지도해주었다.
‘삼재공이 아니라 유운공을 바로 배울 줄이야…….’
사실 지난 이 년 간 삼재공밖에 배운 게 없었다.
무사부들이 종종 부족하다고 말했으니, 정말 자신의 실력이 부족한 줄로만 알았다.
청운무관에서는 최소한 유운공 정도는 배워야 제대로 수련했다고 할 수 있는데, 그에 입문조차 할 수 없는 미천한 실력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을급이면 바로 되는 거였어.’
돈의 효과가 컸다.
그런데 효과가 클수록 기분이 씁쓸해지는 건 왜일까.
머릿속에 문득 청운무관에서 보낸 지난 이 년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그동안 익힌 건 삼재공밖에 없다. 모든 무공의 기초라고 하는 삼재공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며, 꾸준하고 성실하게 익혀왔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니 그 시간이 너무도 아까웠다.
갑급, 을급의 비용이 있었다면 몇 달 걸리지 않았을 테니까.
잠시 함께 수련했었던, 금세 실력이 늘어 다음 단계로 나아간 사람들을 떠올리니 허탈한 마음이 마구 몰려왔다.
‘청운의 꿈도…… 돈으로 사는 건가?’
심경이 복잡해졌다.
“후우-!”
진우선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
정무맹 호심당에서 세운 청운무관에 단단히 실망한 것이다.
강호에 우뚝 선 정무맹.
정무맹의 신진고수들이 함께 수련하고 익히는 호심당.
바로 그 호심당에서 청운의 꿈을 안고 정무맹을 찾은 일반 사람들에게 무공을 가르쳐주기 위해 무관을 여럿 열었다.
청운무관도 그중 하나였다.
진우선은 청운무관에 다니며 실력을 쌓아 정무맹으로 가고 싶었다. 오늘 을급에 등록한 것도 그래서였다.
‘너무 모순이야!’
속이 역겨웠다.
마음이 비비 꼬여버렸다.
청운무관에 청운의 꿈을 안고 찾아가는 게 아니라, 돈을 가지고 찾아가는 게 현실이라니.
냉소적인 반응이 나오는 게 당연했다.
‘돈 좋아하는 두꺼비지, 두꺼비.’
탐욕스러워 보였던 관주의 얼굴이 괜히 더 밉상처럼 느껴졌다.
생각할수록 실망이 점점 커졌다. 배신감마저 스멀스멀 올라왔다. 걸음을 옮길수록 발이 더 무거워졌다.
돈을 더 내서 잘 배우고 왔는데도 가슴에 무언가가 탁 얹힌 것처럼 답답했다.
‘아니야!’
진우선은 이내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생각을 고쳤다.
생각을 이끄는 건 자신이다.
안 좋은 생각은 꼬리를 물수록 길어지기만 할 뿐이다.
‘힘내자! 이렇게라도 배울 수 있는 게 어디야! 나는 오늘도 어제보다 나아졌어!’
이제 내일은 또 오늘보다 더 나아지지 않겠는가.
‘내일도, 모레도 열심히 해서 정무맹에 가자!’
이름난 무가나 문파에서 무공을 익힌 사람은 정무맹에 바로 갈 수 있다고 했다.
그게 아니라면, 청운무관 같은 곳에서 수련하고 실력을 쌓아야만 가능하다고 들었다.
진우선의 목표는 후자였다.
청운무관에서 실력을 쌓아 정무맹에 들어가는 것.
‘난 잘할 수 있어!’
마음을 단단히 먹자 내일도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하하핫-!”
진우선이 속상한 것들을 입 밖으로 내뱉는다는 느낌으로 크게 웃었다.
웃을 때마다 근심이 떨어져 나가는 듯했다.
온몸이 가벼워졌다.
발걸음은 경쾌했다.
그렇게 쓰린 마음도 조금씩 옅어지고 있었다.
***
진우선이 고서점 거리에 들어섰다.
이제 집이 가까웠다.
진우선의 거처가 바로 고서점 뒷마당에 딸린 작은 집이니, 고서점 거리는 그의 집주변이라 할 수 있었다.
거리는 여전히 북적거렸다. 밤이 깊어가고 있는데도 거리는 밝고 사람은 많았다.
거리 좌우로 객잔, 음식점, 포목점, 잡화점 등을 비롯해 온갖 점포들이 늘어서 있기 때문이다.
익숙한 모습의 번화가를 진우선은 무심하게 걸었다.
바로 그때.
“……!”
진우선이 갑자기 멈춰 섰다.
잡화점 한쪽에 시선이 꽂혀 몸이 그냥 지나치지를 못했고, 발도 멈춰버렸다.
하지만 진우선은 그걸 의식할 겨를도 없었다. 그의 정신이 무언가에 홀려버린 탓이었다.
진우선은 곧장 잡화점으로 몸을 돌렸다.
“오, 우선아! 오늘도 무관에 잘 다녀왔어? 늦은 시간까지 고생이 많아.”
잡화점 주인 왕소가 다가오면서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그는 같은 거리에서 장사하기에 평소에도 친한 관계였다.
“뭐, 눈에 들어오는 거라도 있어?”
“이거요.”
“인형?”
“네.”
왕소가 진우선이 가리킨 물건을 보았다.
한 뼘 정도 길이의 매끈한 목각인형이 책장 선반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오! 이게 여기 있었네.”
왕소가 검을 든 노인 모습의 인형을 집어 들었다.
“역시, 요즘 무공을 배우고 있어서 그런가, 이런 인형에 끌리나 봐.”
왕소는 진우선이 잘 볼 수 있도록 그의 눈앞으로 인형을 내밀고 슬쩍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근데, 이거 우선이 너랑 맞겠다. 너를 위한 거네.”
사실 이 목각인형은 꽤 잘 만들어진 것이라 곧 팔릴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도 찾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잊고 있었다.
그걸 진우선이 발견했고, 반한 눈빛을 보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왕소가 할 일은 진우선이 구매하게 하는 것뿐. 왕소의 혀가 매끄럽게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우선아. 딱 보니까, 검선이시다, 검선! 검을 익혀 신선에까지 이르신 분이 있다면 이런 모습이실 거야! 네가 봐도 그렇지?”
왕소는 말 몇 마디로 순식간에 목각인형을 검선으로 만들고 있었다.
허풍 섞인 상술이 분명한데도 진우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저도 그럴 거 같다고 생각해요.”
진우선이 인형을 들어 좀 더 가까이에서 살폈다.
인형은 연하게 색칠되어 있었다.
가지런하게 조각된 백발은 비단으로 묶여 있고, 연청색 경장은 바람에 흩날리고 모양을 하고 있었다.
오른손에 든 검도 잿빛으로 빛나는 게 진짜처럼 보였다.
그리고 인형의 얼굴은 전혀 세속적이지 않았다. 세상의 것들에서 초연해 보였다.
전체적인 모습이 정말 검으로 도를 깨우친 사람 같았다.
검선(劍仙).
정말 이런 사람이 있다면, 검선이라는 표현이 과하지 않으리라.
하지만 진우선은 검선보다 더 끌리는 말이 있었다.
‘스승님!’
인형의 표정은 참으로 자애롭고 인자했다.
그 표정이 탈속한 듯한 분위기와 어우러지니 존경심이 마구 우러나왔다.
‘참 좋은 스승님이실 거 같아요!’
제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이렇게 따스하다면, 마음속에 근심과 걱정이 자리할 일이 하나도 없을 것 같았다.
그런 시선 속에서 무공만이 아니라 인생도 배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도 이런 스승님이 계시면 좋을 텐데…….’
뜻하지 않게 인형에 소망을 빌면서 진우선은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청운무관에서 마음이 많이 상했다는 걸.
그래서 지나가다가 단숨에 이 인형에 끌렸다는 걸.
“마음에 들지? 우선아, 내가 너한테는 특별히 싸게 줄게.”
“감사합니다.”
진우선은 곧장 인형을 샀다.
목각인형을 차마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집에 온 진우선은 허름하지만 깨끗이 정리된 책상 위에 조심스러운 손길로 인형을 올려놓았다.
“검노야.”
진우선은 인형을 본 뒤로 줄곧 생각했던 이름을 불렀다.
인형이 어떤 인물을 조각한 것인지는 모른다.
알 수 있는 것은 그저 검을 들고 있는 인자한 노인의 형상이라는 점, 그리고 검선이라 여겨도 될 만큼 존경스러워 보인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검(劍)’ 자에 존경한다는 의미로 ‘노야(老爺)’를 더해, 검노야(劍老爺)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진우선이 밝게 웃으며 작은 소망을 담아 말했다.
그리고 인형을 바라보았다.
인형도 진우선을 마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무척이나 온화하고 부드러웠다.
바로 그때. 인형의 마음이 느껴지는 착각이 들었다.
[알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