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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화 (144/145)

144화

“…….”

케이든과 디아나는 아므리엔이 전한 이야기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심란함, 충격과 별개로. 아므리엔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지금까지의 무수한 의문들이 끼워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닿았을 때마다 편한 기분이 들며 진정되던 게 그런 이유 때문이었구나.’

그리고 변종 마물에게서 어둠 속성 정령과 비슷한 기운이 느껴졌던 것은, 애초에 어둠 속성 정령이라는 자체가 마물에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힘을 빌려주는 대가로 마력 외에 인간의 피 등을 받는 것도. 마물이었던 본질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습성의 잔재였다.

아직도 혼란에 젖어 있는 케이든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럼 우리 앞에 당신이 나타날 수 있었던 건…….”

<진마력을 담는 그릇의 크기를 수로 비유하자면, 나는 그릇이 정확히 100인 자와만 계약할 수 있다. 넘쳐도, 부족해도 안 되지.>

그 말에 디아나가 작게 탄식했다.

그토록 뛰어난 케이든이 왜 정령왕과 계약하지 못했나 했더니. 저런 이유가 있었구나.

<하지만 빛 속성 정령사와 어둠 속성 정령사는 접촉을 통해 그릇의 크기를 조정할 수 있다. 마침 한 명이 120 정도의 그릇을 가지고 있었고.>

아므리엔은 구체 형태인지라 시선이 향하는 방향은 알 수 없었지만, 케이든의 이야기였다. 이어서 디아나의 이야기도 나왔다.

<이쪽이 80 정도의 그릇을 가지고 있었지. 너희 둘 다 접촉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각자 마력이 줄어들거나 늘어나는 느낌을 받았을 거다.>

사실이었기에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든은 마력량이 점차 줄어들며 발작도 잦아들었고, 디아나는 반대로 마력이 늘어나 더욱 폭넓은 능력의 사용이 가능해졌다.

<진마력은 흡사 물처럼, 높은 쪽에서 낮은 쪽으로 흐른다. 그리고 조금 전 너희의 그릇이 정확히 100의 크기가 되었지.>

케이든과 디아나가 잠잠히 시선을 마주했다. 엄중한 목소리가 끼어든 것은 그때였다.

<그러니 묻겠다.>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위압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구체로부터 웅웅거리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나와 계약하겠는가?>

두 사람은 잠시 침묵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디아나였다.

“당신과 계약하면…… 저걸 없앨 수 있나요?”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으며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허공에 뜬 채로 멈춰 있는 마룡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아므리엔은 확답을 주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럴 수 없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글쎄. 나는 결국 힘을 빌려줄 뿐인 존재. 모든 것은 너희에게 달렸다.>

디아나는 그 말에 케이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역시 조금 전부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케이든과 물끄러미 시선을 맞추던 디아나가 설핏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케이든도 그녀를 따라 하듯 픽 웃음을 흘렸다.

그들은 어느새 눈빛만으로도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케이든의 눈짓에, 디아나가 웃음기 서린 얼굴로 아므리엔을 쳐다보았다. 그녀가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우리는…….”

* * *

“들어가시지요.”

기사가 감옥의 철문을 열어주며 고개를 숙였다.

레베카는 사양하지 않고 철창 안쪽으로 발을 들였다. 애초에 양손이 구속되어 있어 거절할 수 없기도 했지만.

철컥-

이내 등 뒤로 철문이 잠기는 소리가 나더니 기사의 기척이 멀어졌다.

“후.”

레베카는 가볍게 호흡을 고르고 감옥 안에 놓인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본래라면 사슬로 지탱된, 나무판자 같은 의자 겸 침대를 써야 하지만 케이든의 배려로 바뀐 것이었다.

“크큭…….”

그때 철창 너머로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이끌렸다. 레베카는 철창 너머, 맞은편 감옥을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레베카와 달리 차디찬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자비에 핀들레이가 있었다. 그는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듯하던 평소의 모습과 달리, 산발인데다가 제정신도 아닌 모양이었다.

등 뒤로 손을 구속당한 자비에가 미친 사람처럼 큭큭거리며 레베카를 비웃었다.

“나였다면 저 버러지 같은 것들에게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고 살아남을 바에야 죽었을 텐데.”

“…….”

“역시 넌 처음부터 황제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어린 것이 제법 영악하기에 날 닮았나 싶어 황좌 위에서 잠시 노닐게라도 해 주려 했거늘, 전부…….”

이후로도 자비에는 중간중간 숨 쉬는 것처럼 레베카를 모욕했지만, 그녀는 아무런 반응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 대신 머릿속으로 최근의 일들을 차근히 회상하며 정리했다.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히 남아 있는 일들.

[저게 무슨…….]

마룡이 하늘로 떠오르던 순간. 레베카는 핀들레이 공작과 대치 중이라는 것을 잊고 저도 모르게 그쪽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녀 또한 마룡이 날지 못하리라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죽어라!]

그 틈을 타 핀들레이 공작이 레베카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녀가 그것을 눈치챘을 때는 이미 단도 끝이 심장을 막 파고들려던 차였다.

레베카는 죽음을 직감하고 저도 모르게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직후, 이변이 일어났다.

푹-!

[크아아악!]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단도를 쥔 공작의 손을 정확히 관통했다. 공작은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고, 그로써 목숨을 건진 레베카가 당황해 고개를 돌렸다.

[무슨…….]

[전하! 괜찮으십니까!]

[무사하십니까!]

그러자 멀지 않은 곳에서 제1연대의 기사 몇이 후다닥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때 살면서 드물게도 레베카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핀들레이 공작에게 했던, 혼자 왔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기사들이 염려 어린 얼굴로 제 앞까지 달려왔을 때 자연히 딱딱한 목소리가 흘러나갔다. 당황으로 인한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내가 자리를 지키라고 했을 텐데.]

[앗, 그래도. 혼자 가신다니 걱정이 되어서…….]

[죄송합니다.]

우물쭈물 눈치를 보던 기사들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들의 정수리를 보는 순간 레베카는 어쩐지 목이 꽉 메어 아무런 말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그런 그들을 깨운 것은 머리 위로 몰아치는 바람과 열기였다. 마룡 쪽으로 다급히 시선을 돌린 그들은 그것의 입 주위로 모여드는 불길한 기운을 감지하고는 속절없이 굳어졌다.

[안 돼…….]

저걸 맞았다간 마물이고 인간이고 할 것 없이 전멸이다. 그런 직감에 레베카가 이를 악무는 찰나.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저, 전하! 저기!]

레베카와 같은 생각을 하며 종말을 기다리던 기사들이 놀라 외쳤다. 그들의 시선이 닿은 곳은 케이든과 디아나가 있던 전장이었다.

그들은 분명 세상을 모조리 불사를 듯 짙은 마력을 느꼈었다. 하지만 마룡의 입에서 뻗어나간 불길이 사람들에게 닿기 직전.

콰앙!

불길이 돌연 꺾이더니 하늘로 솟구쳤다. 마치 무언가에 막혀 튕겨 나간 것처럼.

[저게 무슨…….]

[……사람?]

이윽고 그 충격의 여파로 일었던 먼지가 걷히고, 그 너머로 드러난 것은 두 인영이었다.

케이든과 디아나.

‘정령왕과 계약했다지.’

절체절명의 순간. 정령왕과의 계약에 성공했다는 두 사람은 이후 합심해서 마룡을 무너트렸다.

디아나가 마룡의 날개를 묶어 그것을 땅으로 떨어트리면, 케이든이 달려들어 날개를 베어 냈다. 그렇게 날개 두 개를 없앤 후에는 목을 베고 심장을 파괴했다.

일련의 행동은 마치 짜 맞춘 군무처럼 완벽했지만, 그 여파까지는 통제하지 못했다. 주변 사람들은 마룡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꼬리와 발을 휘두를 때마다 휩쓸리지 않기 위해 애쓰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었다.

레베카는 멍하니 그들의 전투를 지켜보다가, 마룡의 목이 베일 때쯤 정신을 되찾고 기사들과 함께 자비에 핀들레이를 포박했다.

레베카가 계속해서 반항하는 그의 목덜미를 내리쳐 기절시키는 동안, 마룡 쪽의 전투도 끝이 났다. 그렇게 자비에 핀들레이의 마지막 발악은 끝이 났다.

전투는 그렇게 끝이 났지만 본래 전쟁이 끝난 후의 일 처리가 더 많고 복잡한 법이다.

이번 일을 통해 케이든과 디아나는 완전히 영웅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초대 5인의 정령사 이후, 정령왕과 계약한 이들은 처음이다 보니 당연한 일이었다.

‘어둠 속성 정령의 존재도 증명됐고. 재주도 좋게 그런 고서들은 어디서 찾아온 건지.’

레베카는 저도 모르게 혀를 쯧 찼다.

분명 그녀도 어둠 속성 정령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관련 자료를 찾기 위해 다방면으로 애썼건만. 결국 결과를 잡아챈 것은 케이든이었다.

아무튼 최근, 케이든과 디아나가 모았던 고서들의 해독이 마침내 끝났다.

그리고 해독 결과 그들이 가져온 고서는 초대 황제인 데이지 블루벨의 일기. 그리고 초대 어둠의 정령사였던 롬바드 디하니스의 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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