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3화 (143/145)

143화

“젠장, 역시 개새끼 맞잖아!”

콰앙!

롬바드가 씩씩대며 천장을 후려쳤다. 정령의 힘을 실어 커다란 바위도 쪼갤 수 있을 만한 위력이었으나 천장은 잠시 진동했을 뿐 곧 잠잠해졌다.

[롬바드, 네 감을 못 믿는 건 아니야. 하지만 니오타는 어렸을 때부터 내내 내 곁을 지켜준 친구이자, 너와 함께 인간들을 지켜낸 동료야. 너무 미워하지는 말아줘.]

“데이지……. 그러니까 내가 사람 보는 눈 좀 키우라고 했잖아.”

롬바드가 힘 빠진 어조로 중얼거리며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천장을 부수려다가 실패한 무수한 시도에 지쳐 벽에 등을 기대고 아무렇게나 앉았다.

아므리엔이 음울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데이지는 원래부터 눈치가 썩 좋지 않았다. 너도 그걸 모르지는 않았을 텐데.>

“……알지. 알았지.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하는 말이니까 믿어 보려 한 거야. 게다가 그놈이 내숭을 워낙 잘 떨었어야지.”

롬바드가 니오타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를 까득 갈았다.

롬바드는 마물과 함께 짐승처럼 자라온 만큼 촉이 좋았다. 그래서 니오타를 처음 보았을 때도 본능적인 불쾌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놈이 천사 같은 얼굴로 실실거리며 돌아다니는 것에 익숙해지기도 했고. 데이지가 그를 믿었기에 애써 꺼림칙함을 잊고 그와 잘 지내보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네가 나를 그렇게까지 좋아하지 않는 건 알아.]

[솔직히 나도 나 싫다는 사람과 굳이 잘 지내고 싶지는 않지만, 축하하는 마음만큼은 진심이야.]

[데이지를 잘 부탁한다, 롬바드 디하니스.]

그래서 어젯밤, 니오타가 결혼을 축하한다며 술잔을 건넸을 때도 의심 없이 그것을 받아들었다.

하지만 술잔을 다 비웠을 때쯤 별안간 속이 역류하더니 롬바드는 피를 토하며 기절했다. 그리고 눈을 떠보니 빛 한 점 들지 않는 이 어두운 밀실에 갇혀 있었다.

“대체 무슨 수를 쓴 거지?”

롬바드가 양손을 내려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 독은 전부 게워낸 것 같긴 한데, 기이하게 몸이 무거운 느낌이었다.

정령의 힘을 쓰려고 마력을 움직일 때마다 체력이 평소의 배는 빠르게 깎여 나가는 느낌이랄까.

<이 밀실 자체에 무언가 장치를 해둔 모양인데, 안쪽에서는 특별히 수상한 걸 발견할 수가 없다.>

“하여간 쓸모없는 정령왕 같으니.”

<……네 그 싸가지는 어쩜 그렇게 한결같은지.>

아므리엔이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하며 한탄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롬바드는 아므리엔의 주절거림을 한 귀로 흘려보내며 어둠 속을 열심히 더듬었다. 그래도 니오타 그 개새끼가 탈출에 도움이 될 만한 단서라도 남겨 두지 않았나 싶어서였다.

하지만 약 오르게도 니오타는 성냥 없이 촛대만 남겨 두질 않나, 탈출에는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 노트와 펜 따위만 남겨 두었다.

롬바드는 분개해서 노트를 찢어버리려다가 참았다. 반드시 여기서 탈출해서 니오타를 죽이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롬바드는 아므리엔을 닦달해 간신히 초에 불을 붙이고, 노트를 펼쳤다.

첫 장은 이러했다.

「데이지 블루벨.

이 눈치 없는 여자야.

너 미워.」

* * *

롬바드는 일기장에 이곳에 갇히게 된 경위와 니오타의 욕을 한 바가지 적으면서도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않았다.

니오타의 마지막 양심이라고 해야 할지, 그조차 기만인진 모르겠지만. 도구는 없었으나 밀실 구석에는 상당량의 물과 식량이 있었다.

롬바드는 그것을 아득바득 아끼며 탈출을 도모했다. 꼭 이곳에서 나가서 ‘네가 남겨 둔 식량 덕분에 탈출할 수 있었다’라고 말해줄 작정이었다.

건국 기념일이 곧이었고, 그날은 그와 데이지의 결혼식이었다. 그때까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의 곁으로 돌아가야 했다.

롬바드는 밀실에서 그나마 힘이 온전한 곳을 찾아 그곳의 바닥을 집요하게 공격했다.

물방울이 긴 세월 동안 조금씩 바위를 깎아내듯이. 조금씩, 포기하지 않고.

콱!

그 결과, 약 1년 후. 롬바드는 밀실 바닥 일부를 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는 곧장 그 안으로 흙을 파 내려가며 길을 만들었다. 밀실을 벗어나자마자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워졌다.

롬바드는 내친김에 밀실 바깥쪽, 그러니까 흙에 파묻혀 있던 마도구들을 찾아내 죄다 부숴버렸다. 니오타가 열 받길 바라면서.

“하, 이제 가볼까. 깜짝 놀라게 해 주는 편이 더 기분 더럽겠지?”

롬바드가 킬킬거리며 몸을 투명하게 만들었다. 대체 자신을 어디로 끌고 온 건가 했더니, 의외로 숲을 벗어나자마자 번듯한 황궁이 보였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걸 노렸던 걸까. 음침한 새끼.’

롬바드가 속으로 혀를 쯧 차고 달리는 속도를 높였다. 기왕 죽다 살아난 거, 성벽 높은 곳에 올라 극적으로 모습을 드러낼 생각이었다.

화악-

“아…….”

성벽 꼭대기에 다다르자 햇빛과 바람이 확 밀려들었다. 롬바드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리며 손차양을 만들었다.

그제야 황궁 앞에 펼쳐진 광경이 제대로 시야에 들어왔다. 황궁 정문에서부터 시작된 붉은 비로드 카펫이 광장까지 길게 이어졌다. 그리고 그 끝에는 결혼식을 위한 흰 제단이 있었다.

‘뭐지? 데이지가 끝까지 결혼식을 취소하지 않은 건가?’

롬바드가 의아하게 눈을 깜박였다. 자신이 아무런 말도 남기지 못하고 실종된 지도 벌써 1년이었다.

그동안 롬바드가 사라졌다는 것을 믿지 않고 기다려주기라도 한 것일까? 마음이 벅차올랐다.

하지만 그건 너무 이른 감동이었다. 발밑에서 긴 나팔 소리가 울리더니 누군가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신랑, 신부께서 입장하십니다!”

롬바드는 반사적으로 시선을 내렸다. 황궁 정문에서 흰 예복과 드레스를 입은 남녀가 다정히 팔짱을 끼고 모습을 드러냈다.

직후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햇빛에 신부 쪽의 머리카락이 반짝거렸다.

“……데이지?”

쿵, 쿵, 쿵.

사람들의 환호성이 저만치 멀어졌다. 그 자리를 대신 메운 것은 불길하게 뛰는 자신의 심장 소리였다.

꿈인가? 설마 내가 그 밀실을 탈출했던 것부터, 전부 꿈인 건가?

하지만 햇빛에 찬란하게 반짝이는 금색 머리카락. 저 실루엣. 분명 데이지였다.

하지만 나는 여기 있는데.

그렇다면 내 연인은, 지금 누구와 결혼식을 올리고 있는 거지?

롬바드는 혼란스럽게 점점 멀어지는 남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던 중, 남자 쪽이 고개를 옆으로 돌려 신부를 보고 녹는 듯한 웃음을 지었다.

‘아.’

그는 니오타 핀들레이였다.

그 순간. 롬바드는 곧장 성벽에서 뛰어내려 니오타를 목 조르고픈 충동에 시달렸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행할 생각으로 다리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데이지가 니오타를 마주 보며 웃었다.

누가 봐도 사랑에 흠뻑 빠진 얼굴로.

<……롬바드.>

아므리엔이 신음처럼 계약자의 이름을 불렀다. 괜찮냐고, 정신 차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뒷말을 내뱉을 수가 없었다. 그만큼 이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롬바드는 니오타가 무어라 속삭이자 웃으며 뺨을 붉히는 데이지의 옆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는 진심으로 행복해 보였다.

‘1년…….’

그제야 자신이 데이지의 곁을 떠나 있던 것이 얼마나 긴 시간이었는지 실감이 났다.

어찌 보면 짧다고도 할 수 있는 시간.

그러나 롬바드의 죽음에 슬퍼하는 데이지를 위로하며 그녀의 마음에 파고들기는 충분한 시간이었던 거다.

“…….”

롬바드는 니오타와 데이지가 군중 앞에서 평생 서로를 바라보겠다는 맹세를 읊고, 반지를 교환하고, 맹세의 키스를 나누는 광경을 그저 묵묵히 지켜보았다.

황제 부부가 탄생하고, 사람들은 환호했다. 결혼식을 위한 제단과 카펫이 치워지고 건국을 기념하는 축제가 벌어졌다.

사람들은 웃고, 떠들고, 춤추고, 노래하며 황제 부부의 행복과 나라의 오랜 평안을 기원했다.

더없이 완벽하게 갖춰진 풍경이었다. 마치 롬바드가 발을 들일 곳은 어디에도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만나러 가지 않을 것인가?>

결국 아므리엔은 롬바드가 미쳐 날뛸 상황까지 각오하고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자 해가 지고 달이 뜰 때까지 미동조차 없던 롬바드가 피식, 버석한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데이지가 행복하다잖아.”

<…….>

“내가 데이지 앞에 다시 나타나면, 지금 사랑하는 사람이 질투심 때문에 전 약혼자를 죽이려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겠지. 그 애가 애써 일군 나라의 건국 기념일은 엉망이 될 거고.”

<그래서 죽기라도 하겠다는 말이냐!>

아므리엔이 벌컥 화를 냈다. 롬바드가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발을 뗐다.

“아니. 떠나야지.”

나는 저 애의 행복을 깨트리고 싶지 않아.

내내 캄캄한 어둠 속에서 살던 롬바드에게 데이지는 한 줄기 빛이었다.

그러니 그 빛이 어둠에 집어삼켜지지 않게 지키는 것은 그가 마땅히 해야 할 일.

아므리엔은 차라리 억울하다고 미쳐 날뛰기라도 하라며 롬바드를 다그쳤지만 그를 설득할 수는 없었다.

롬바드는 조용히 숲으로 돌아가, 밀실 바닥에 증거용으로 써둔 일기장을 묻어두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이제는 필요 없을 테니까.

황궁을 벗어난 롬바드는 이곳저곳을 정처 없이 떠돌았다. 그리고 어느 이름 모를 마을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벌써 천 년 가까이 지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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