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그 말 그대로 당신에게 돌려주지, 공작.”
낯선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드는 것과 동시에, 보랏빛 실이 공작의 창을 칭칭 감싸 멈춰 세웠다.
챙-!
“크윽!”
이어 황금빛 검이 창을 자비 없이 튕겨냈다.
공작은 손바닥이 터지는 듯한 감각에 급히 창을 없애고 뒤로 물러났다.
“……3황자?”
레베카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짜증 나게도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하고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 부름에 케이든은 힐끔 뒤를 돌아보았을 뿐, 공작에게서 경계를 거두지 않았다.
보랏빛 실이 허공으로 녹아들듯 사라졌다. 희미한 반짝임만 남기고 사라지는 실 너머의 인영을 눈에 담은 공작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너…….”
“입조심 하지, 공작. 누굴 함부로 부르나.”
“네가…….”
케이든이 으르렁거렸으나 공작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롯이 담담한 얼굴의 디아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연푸른 눈에 혼란, 경악, 희열 등이 어지럽게 떠돌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디아나는 차분했다. 마력을 갈무리한 그녀가 덤덤히 입을 열었다. 평소보다 색이 짙어진 보랏빛 눈은 지독히도 무감했다.
“자비에 핀들레이. 황제 살해, 변종 마물 실험 등의 혐의를 들어 당신을 반역자로 간주, 체포하겠습니다.”
* * *
레베카가 모습을 드러낸 채 한바탕 휘저어준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디아나와 케이든은 핀들레이 공작성에 잠입했던 그 날. 그녀가 일으킨 소란 틈에 몸을 숨긴 채 별 소란 없이 공작성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기다리고 있던 자작의 심복과 접선해 곧장 수도로 돌아온 그들은 지체하지 않고 윙즈까지 동원하여 공작의 비밀을 퍼트렸다.
여론은 그야말로 한순간에 뒤집혔다.
정령의 숙적으로 여겨지는, 수많은 백성의 삶을 난도질한 마물.
그런 마물을 더욱 기괴한 형태로 바꾸고, 실험작들을 일부러 곳곳에 풀어 행동 양상을 연구했다는 사실에 모두가 경악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틸리아시여…….]
게다가 핀들레이 공작은 그에 그치지 않고 변종 마물을 이용한 독을 만들었다.
그 독으로 1황자를 죽이려 들었고, 이제는 황제까지 죽인 후 그 죄를 3황자에게 덮어씌우려 하기까지 했다.
이 모든 것은 즉결처분 되어도 할 말이 없는 죄였다.
위버 공작을 위시로 한 3황자 세력은 케이든이 실종 상태였던 동안 쌓였던 울분을 마음껏 표출했다.
하지만 그들이 기세등등하게 횃불과 병장기를 들고 수도의 핀들레이 공작저에 쳐들어갔을 때.
공작은 그곳에 없었다.
[뭐, 뭐야? 내가 누군지 알고! 당장 이 더러운 손 안 놔?]
공작저에 남은 것은 술에 절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르고 있던 조셉 뿐이었다.
우선 그를 잡아들여 구속한 뒤, 케이든과 디아나는 고민에 잠겼다.
[1황녀는 공작의 실험에 대해 모르는 눈치였어.]
[그럼 1황녀가…… 위험할 수도 있겠네요. 공작성에 침입했던 걸 들켰을 테니까.]
엘리엇을, 그리고 황제를 중독시켰다는 그 독은 분명 회귀 전 레베카가 마셨던 독.
그래서 디아나는 당연히, 그 독을 만든 것 역시 레베카라고 생각했다.
제 능력을 아는 것은 레베카뿐이니, 그녀가 비밀리에 어둠 속성 정령과 닮은 독을 만들어 내어 스스로 들이켰고, 또 그것을 빌미로 자신을 처분했다고 믿었다.
디아나는 지금껏 그것을 진실로 여기며 살아왔다.
회귀 직후. 케이든을 돕고자 하는 마음이 가장 컸던 것은 맞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을 그렇듯 비참하게 버린 레베카에게 복수하고픈 마음도 있었다.
케이든의 곁을 지키며 그녀가 충성할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몇 번이고 확인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레베카 역시 핀들레이 공작에게 속고 만 피해자일지도 모른다니.
그 독이 레베카 스스로 들이켠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니.
디아나는 그것이 적잖이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우선은 공작을 막는 것이 더 급했다.
그녀는 마력을 끌어모아 급하게 힐라사들을 황궁으로 보냈다.
힐라사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핀들레이 공작을 발견해 신호를 보냈다.
공작은 그들의 예상대로 백염궁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여 케이든과 디아나가 급히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핀들레이 공작을 체포하고, 또 다른 죄인이기도 한 레베카를 살려 죗값을 치르게 하려고.
“공작저에 안 계시기에 어디에 계신가 했더니, 이런 곳에 와 계셨군요.”
“……어둠 속성의 정령사가 너였나?”
“조셉 핀들레이를 비롯해 당신 휘하의 귀족들은 이미 구속되었습니다.”
“안타깝구나. 진작 알았더라면…….”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었을 겁니다.”
서느런 목소리가 두서없이 이어지는 공작의 말을 끊어냈다. 더 이상의 말은 불필요했다.
케이든이 몸을 낮추며 공작에게 접근하고, 디아나는 4황비에게서 받아 온 구속구를 꺼내 들었다.
그것을 본 핀들레이 공작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그러나 소리 없는 웃음은 광기에 가까운 섬뜩함을 자아낼 뿐이었다.
어느 순간 웃음을 그친 그가 무표정하게 말을 내뱉었다.
“너희는 그 나약함을 버리지 못하는 이상 절대 나를 잡을 수 없다.”
우지끈!
공작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레베카가 쓰러져 있던 바닥이 부서졌다.
그와 동시에 핀들레이 공작이 뚫린 벽을 통해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레베카의 몸이 아래로 추락했다.
그 아래는 흰 불꽃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디아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떨어지는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윽……! 케이든, 공작이!”
디아나는 레베카의 팔을 힘겹게 붙잡은 채 소리 질렀다.
케이든이 그 말을 듣고 곧장 공작을 쫓으려 했으나, 활짝 열린 방문 너머로 희미한 외침이 들려왔다.
“아무도 없습니까!”
어딘지 귀에 익숙한 목소리였다.
내내 멍하니 있던 레베카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중얼거렸다.
“루비…….”
“……젠장. 하여튼 도움이라고는 안 되는 놈.”
루드비히는 마력을 전혀 다루지 못하는 일반인이다. 게다가 백염궁에는 사용인들도 여럿이다.
결국 케이든은 나직이 욕설을 짓씹으며 불길을 헤치고 뛰쳐나갔다.
* * *
위버 공작을 비롯한 케이든 휘하의 귀족들은 날이 밝자마자 핀들레이 공작의 죄를 폭로했다. 그로써 발하나스는 또 한 번 들썩였다.
“매국노!”
“살인자! 저건 살인자야!”
변종 마물로 인해 가족을, 친지를 잃은 사람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도주한 핀들레이 공작을 찾아내려 애썼고, 그 결과 공작이 공작성으로 돌아가 문을 굳게 닫아걸었다는 소식이 황궁에 전해졌다.
케이든과 귀족들이 그 정보를 바탕으로 핀들레이 공작을 잡아들일 계획을 세우는 사이.
레베카는 카를롯타가 갇힌 탑의 다른 방에 연금되어 있었다.
원래라면 핀들레이 공작의 주군이었던 레베카는 지하 감옥으로 가야 함이 마땅했다. 하지만 1황녀가 공작에게 황제 살해나 실험을 지시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케이든과 디아나의 증언 때문에 그녀는 이곳에 갇히게 되었다.
“흐…….”
레베카는 탑에 갇힌 직후부터 지독한 열병을 앓았다. 이렇게 아파본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젠장…….”
그 와중에 간간이 귓가를 웅웅 울리는 뭔지 모를 말소리, 안개가 낀 듯 부연 시야 너머로 보이는 광경은 혼란을 더했다.
‘또…….’
오늘도 비슷한 꿈이다. 레베카는 멍하니 머릿속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았다.
꿈속의 레베카는 지금보다 조금 긴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흰 단발이 어깨에 스치듯 찰랑였다.
‘레베카’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침대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침대 곁에 있던 핀들레이 공작이 침착한 태도로 그녀에게 물을 건넸다.
[깨어나셨습니까, 폐하.]
레베카는 잠시 눈을 가느다랗게 뜬 채 공작을 응시하다가, 컵을 받아들었다.
공작이 건넨 물로 목을 축인 그녀가 나지막이 입술을 뗐다.
[……독에 당했나?]
[예. 주치의의 소견으로는 그러합니다.]
[대체 어떤 놈이 겁도 없이…….]
레베카가 이를 갈았다.
당장에라도 제게 독을 먹인 이를 찢어 죽일 듯 흉흉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이어진 공작의 말에, 그러한 기색은 씻은 듯 사라졌다.
[조사 중 디아나 서즈필드의 방에서 같은 종류의 독이 발견되었다고 하더군요. 하여 우선 서즈필드 영애를 감금해둔 상태입니다.]
[……뭐?]
그 빈 자리를 채운 것은 경악. 그리고 배신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