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대체 언제부터 정령사였던 거지? 황궁에 들어온 이후? 아니면, 처음부터? 케이든에게 마음을 주어 그를 돕다 보니 나를 방해하게 된 건가, 아니면 처음부터 목적이 나였나.’
레베카는 집요하게 파고들었으나 그럴수록 의문만 묵직해질 뿐이었다.
결국 그녀는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고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윽…….”
루드비히가 엉성하게 처치한 상처에서 곧장 통증이 엄습했다.
막을 새도 없이 잇새로 신음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레베카는 이를 악물고 외투를 걸쳐 상체를 가렸다.
‘우선은 막아야 한다.’
레베카는 공작의 밀실에서 3황자, 그리고 3황자비와 마주쳤다.
그것은 곧 그들 역시 자신이 본 것과 같은 것을 보았다는 뜻이다.
하물며 그녀가 한발 늦었으니, 그 안에 있던 증거들까지 이미 탈취했겠지.
그것을 폭로하면 레베카가 설령 공작의 실험을 몰랐다고 하더라도 정치적으로는 사형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당장은 3황자 부부의 입을 막는다. 그 후에 핀들레이 공작을 족친다.
레베카가 그리 다짐하며 애써 몸가짐을 추스를 때였다.
쾅!
갑작스러운 소리와 함께 방문이 활짝 열렸다.
루드비히는 저런 무례를 범할 인간이 아니다. 그렇다면 누구지?
레베카가 반사적으로 흠칫하며 경계 태세를 갖추고 몸을 돌렸다. 직후 성큼성큼 다가오는 인영을 발견한 그녀가 눈을 부릅떴다.
“……공작?”
무례하게도 황녀의 방을 제멋대로 침범한 것은, 조금 전까지 그녀가 작살 내놓겠다 다짐했던 핀들레이 공작이었다.
항상 차갑디차가운 얼굴을 하던 그가 저렇게까지 동요한 것은 처음 보았다.
“감히.”
핀들레이 공작은 대륙마저 씹어 삼킬 수 있을 정도로 형형하게 눈을 빛내며 이를 으득 갈았다. 그리고 레베카가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가, 그대로 내리쳤다.
짝-!
날카로운 마찰음이 울리며 레베카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그녀는 찰나 제게 벌어진 일을 파악하지 못했다.
세상에 난 후로 이렇듯 모욕적인 폭력에 노출된 것은 처음이었기에 충격이 컸다.
하지만 이어진 말은 레베카에게 더한 모욕감을 선사했다.
“감히 장기 말 따위가 어디서 주인의 자리를 넘보느냐. 감히!”
“……뭐?”
분노가 충격을 몰아냈다. 레베카가 사납게 이를 드러내며 공작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지금의 핀들레이 공작은 제정신이 아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는 케이든이 제 식솔을 데리고 황궁을 빠져나갔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을 때부터 심기가 불편했다.
[저, 저희는 정말 눈을 뗀 적이 없습니다! 살려……!]
[살려 주십시오!]
공작은 케이든의 주변에 어둠 속성의 정령사가 숨어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사람을 붙여 두었다.
하지만 케이든은 그런 그를 농락하듯 증발하듯이 사라져버렸다.
그것이 어둠 속성 정령사의 능력일 것으로 짐작하니 더더욱 속이 쓰렸다.
그런 와중에 핀들레이 공작성에서 전해온 급보는 결국 그의 인내심을 끊어지게 만들었다.
[주, 주인님! 지하에 침입자가……!]
[사로잡는 것은 실패했으나 큰 부상을 입혔습니다.]
[연구자료가 대부분 사라졌습니다. 침입자가 가져간 것으로 보이는데, 그가 사용하는 능력이, 꼭 1황녀 전하와…….]
레베카가 저를 의심하고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 것은 진즉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공작에게는 그것이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연구는 거의 다 완성되었다. 그리고 설령 연구를 완성하지 못하더라도, 케이든의 주위에 있는 어둠 속성 정령사를 찾아내 갈가리 찢어 그 힘을 취하면 될 일이었다.
역사상 가장 강력했다는 어둠 속성 정령의 힘, 그리고 황제의 외조부라는 명분.
그 두 가지를 손에 쥘 수만 있다면.
자꾸만 거슬리게 구는 손녀를 치워내고 그가 그 자리에 앉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어차피 레베카는 오로지 그때를 위해, 현 황제와 혈연이라는 명분을 만들기 위해 고이 키워왔던 장기 말이다.
결국 제가 빌려준 핀들레이라는 이름이 없다면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나약하고도 오만한 장기 말.
그런데 그런 장기 말 따위가. 감히 그의 성에 침입해 그의 것을 훔쳐냈다.
겁도 없이, 상대가 저를 봐주던 것도 모르고 참으로 오만방자하게도.
공작의 입장에서는 애초에 레베카에게 황위를 잠시나마 안겨주기로 한 것만으로도 크나큰 자비였다.
그런데 그 자비에 감사할 줄을 모르고 자꾸만 고개를 쳐들고 대들더니, 결국에는 이렇듯 그를 위협하는 지경까지.
공작은 제 통제를 벗어나려는 장기 말을 얌전히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그가 서늘히 중얼거렸다.
“명분이 조금 부족해지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건 힘으로 채우면 될 일. 스스로 쓸모를 다하지 않겠다 하니 친히 폐기해주겠다.”
늙었다고는 하나 그 역시 한때는 황제의 뒤를 받쳤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의 정령사.
공작의 등 뒤에서 흰 화염이 치솟았다.
그 광경을 보던 레베카가 사납게 웃었다.
“……주제넘게 구는 건 자네지. 어디서 감히 흙발로 황녀의 침소를 더럽히나.”
레베카도 참을 만큼 참았다.
그녀야말로 신하 주제에 자꾸만 저를 장기 말 취급하듯 구는 그가 껄끄러워 처분하려던 참이었다.
착각에서 비롯된 분노로 보이긴 하나, 레베카는 그것을 굳이 정정해주지 않았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다.
그녀의 손을 타고도 흰 화염이 넘실거렸다.
콰앙!
직후 흰 불꽃이 맞부딪쳐 폭발하며 방 안을 환히 밝혔다.
가구가 우지끈 소리를 내며 부서졌고, 벽이 터져 나가 밤바람이 몰아치듯 밀려 들어왔다.
“부, 불이야!”
백염궁은 이윽고 이름에 걸맞게 흰 불꽃에 휩싸여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사실을 뒤늦게 눈치챈 사용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어떻게든 궁을 벗어나려 했지만, 정령의 힘으로 타오르는 불은 물로는 진화할 수 없었다.
“커헉!”
그리고 그 불길의 한가운데서, 레베카는 바닥에 엎드린 채 피를 흘리고 있었다.
본래라면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 그녀가 아니었다. 하지만 핀들레이 성에서 단신으로 탈출하느라 큰 부상을 입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몸으로는 노회한 공작을 당해내지 못했다.
공작은 레베카의 머리를 짓밟고 선 채 싸늘하게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혀를 쯧 차고는 낮게 읊조렸다.
“얌전히 굴었다면 그 알량한 목숨을 조금은 더 이어갔을 것을.”
“쿨럭, 크…….”
헛소리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입을 열면 말소리 대신 핏덩이가 튀어나왔다.
레베카가 핏발 선 눈으로 바닥에 손톱을 세웠다. 하지만 미처 상체에 힘을 주기도 전에 공작이 그녀를 더 세게 짓밟았다.
“쓸데없는 발악은 마라. 지금 이 황궁에는 너를 구할 사람이 없다. 있어도 전부 네 손으로 내친 후가 아니냐?”
핀들레이 공작의 말이 아프게 레베카의 속을 찔렀다.
그녀가 이를 악물었다.
공작의 말에는 틀린 것이 없었다.
황궁에서 케이든의 세력을 제외하면 레베카를 도울만한 사람이라고는 루드비히, 2황비의 세력, 그리고 핀들레이 공작가 뿐이었다.
하지만 루드비히는 정령사가 아니고, 2황비와 그 일가는 이미 그녀의 손으로 산산조각 냈다.
그리고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라고 생각했던 핀들레이 공작가의 주인은 그녀를 짓밟은 채 어느새 손에 날카롭게 벼려진 창을 들고 있었다.
공작이 손에 쥔 창끝이 레베카의 심장을 향했다.
그녀에게 한바탕 폭력을 행사하여 어느 정도 분을 푼 그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무표정으로 돌아와 읊조렸다.
“탓하려거든 분에 넘치는 것을 타고났음에도 그것에 만족하지 못한 자신을 탓하라.”
공작은 그 말을 끝으로 손에 쥔 창을 무자비하게 내리찍었다.
레베카가 웃기지 말라고 소리치고픈 힘을 끌어모아 그를 막으려 드는 순간.
“그 말 그대로 당신에게 돌려주지, 공작.”
낯선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드는 것과 동시에, 보랏빛 실이 공작의 창을 칭칭 감싸 멈춰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