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토벌대가 수도로 돌아가는 길에 이례적일 정도의 폭우가 쏟아졌다.
빗줄기가 워낙 굵어 한 치 앞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였기에, 토벌대는 부득이하게 근처 마을 여관에 각 연대별로 흩어져 이틀 정도를 묵게 되었다.
디아나는 이틀 가까이를 그렇게까지 푹신하지도, 또 크지도 않은 여관 침대 위에 축 늘어져 있었다.
그것은 비 때문이 아니라…….
“가기 싫다…….”
……이틀 내내 그녀를 붙들고 있었음에도 떨어지기 싫다고 칭얼대는 케이든 때문이었다.
케이든이 이불 속에서 꾸물꾸물 몸을 움직여 디아나를 등 뒤에서 끌어안았다.
그가 디아나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비적거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온몸이 물먹은 솜 같아 힘겹게 눈을 끔벅이던 디아나가 그 소리에 어이가 없어져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케이든이 곧장 시선을 마주쳐 오며 은근하게 웃었다.
“왜? 또 할까?”
“……그러고도 체력이 남아요?”
“응. 나눠줘?”
“결국 그것도 케이든 욕심 때문이잖아요. 내가 기운 차리면 또 하려고!”
“들켰네.”
케이든은 뻔뻔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 당당한 태도에 외려 할 말이 없어진 디아나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 간단한 동작만으로도 허리에서 찌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디아나가 앓는 소리를 흘리며 베개 위로 다시 엎어졌다.
“비 언제 그쳐…….”
“왜? 빨리 수도로 돌아가고 싶어서?”
“네…….”
“난 가기 싫은데. 지금도 1황녀랑 핀들레이 공작의 얼굴을 옆에서 봐야 하는데, 수도로 돌아가면 카드몬드 후작까지 합세할 거 아니야. 정말 싫다.”
움찔.
그때 ‘카드몬드 후작’이라는 말에 디아나의 몸이 찰나 움찔 떨렸다.
케이든은 맨몸으로 디아나에게 딱 달라붙어 있었기 때문에 그 떨림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무언가 본능적인 불길함이 찾아들었다.
케이든이 슬쩍 한쪽 팔로 침대를 짚고 일어났다.
“디아나?”
“……네? 왜요?”
“방금 카드몬드 후작이라는 말에 반응한 것 같은데. 혹시 무슨 일 있었어?”
“아니요? 아무 일도 없……었는데요?”
디아나는 필사적으로 도리질 쳤다.
케이든의 말에, 순간 마지막으로 보았던 루드비히의 모습을 떠올려버린 것이 실수였다.
그러니까, 루드비히가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자국을 남겼던 일.
하지만 케이든은 이미 디아나가 거짓말할 때의 표정을 파악한 후였다.
게다가 조금 전에는 명백히 말까지 더듬거리지 않았는가.
짙고 곧은 눈썹 한쪽이 슬쩍 들렸다.
케이든이 더없이 심술궂은 얼굴로 디아나의 어깨에 이를 세웠다.
동시에 한 손으로는 그녀의 옆구리를 간질였다.
“아무 일도 없긴 무슨. 딱 봐도 무슨 일 있었네. 말을 안 해 준다는 건 깨물리고 싶다는 뜻이야, 그대?”
“꺄악! 아니거든요! 진짜 이 변태를 어떡……!”
디아나가 작게 비명을 질렀다.
케이든은 이후로 한동안 집요하게 그녀를 괴롭혀대며 루드비히와의 일을 캐물었다.
결국 간지럼에 항복한 디아나가 침대 위로 엎어졌다.
그녀의 어깨는 꽃이라도 핀 듯 울긋불긋한 자국으로 가득했다.
“진짜 별거 아닌데…….”
“그러면 말하기 어렵지 않겠네. 뭔데 그래?”
“그게, 전에 4황비 전하를 만나러 갔던 날에 그 앞에서 잠깐 만났는데.”
디아나는 잠깐 말을 멈추고 그때의 루드비히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가 그녀의 손등에 입 맞춘 것은 둘째치고, 그날 이상하게 그에게서 느껴지던 분위기가…….
“그냥 좀…… 끼를 부리던데.”
“……뭐?”
“헉, 내가 무슨 말을. 잊어주세요.”
디아나는 무의식중에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어버리고 뒤늦게 기겁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케이든이 그녀가 뱉은 말을 주워들은 후였다.
케이든의 입꼬리가 삐딱하게 치솟았다.
그가 음산한 어투로 중얼거렸다.
“그래, 끼를 부렸다는 말이지…….”
“저, 케이든. 제 말 듣고 있어요? 말을 좀 잘못했다니까요. 그냥 제 착각일 수도 있는 거잖아요. 케이든? 야!”
디아나는 필사적으로 케이든의 주의를 돌리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마음이 급한 나머지 꼬박꼬박 지키던 공대조차 잊은 것인지 스스럼없는 반말이 튀어나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루드비히의 이야기에 정신이 팔린 케이든은 그녀의 말소리를 노래처럼 감상하며 이를 으득 갈았다.
‘안타르만으로도 충분히 신경 쓰였는데, 카드몬드 후작까지. 아주 사방에서 난리로군.’
안 그래도 안타르를 볼 때마다 심기가 뒤틀리는 것을 감추느라 애를 먹고 있는데.
루드비히까지 뒤에서 디아나에게 수작질을 부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얼마 남지도 않은 인내심이 뚝뚝 깎여나가는 기분이었다.
물론 그것은 디아나의 잘못이 아니었다.
케이든을 말리려 애쓰던 디아나는 문득 억울한 마음에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데 끼를 부린 건 카드몬드 후작인데 왜 자꾸 저를 더듬거리시는 거죠?”
“그건 그거고, 이건 내가 그냥 그대를 만지고 싶으니까.”
“…….”
디아나는 당당함을 넘어서 솔직하기까지 한 그 태도에 이번에야말로 정말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녀가 힘 빠진 어조로 중얼거렸다.
“이런 변태 같은…….”
“그래서 싫어?”
“……배고파요.”
“어, 말 돌린다. 그러니까 싫은 건 아니라는 소리지?”
“배고프다니까요! 좀 비켜봐요!”
디아나는 또다시 제게 들러붙으려는 케이든을 간신히 밀어내고는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배가 고프다는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케이든과 함께 방에 틀어박혀 있느라 벌써 하루 가까이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했으니까.
케이든도 그것을 알기에 더 고집부리지 않고 일어났다.
디아나는 그와 함께 옷을 갈아입다가 거울을 통해 그가 어깨에 남겨놓은 흔적들을 발견하고 기겁하며 카디건으로 그를 때렸다.
지은 죄가 있기에 케이든은 말없이 그녀의 주먹질을 받아주었다.
그나마 가을이 저물어 가는데다가 비까지 내린 탓에 추워서 다행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우여곡절 끝에 방을 나서 여관 1층으로 내려가려던 차였다.
“……뮈젤?”
디아나는 계단을 오르고 있는, 긴 클로크 차림의 여인을 발견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케이든이 토벌대로 무사히 복귀한 후.
디아나는 혹시 케이든에게 또다시 무슨 일이 생길까 조마조마한 마음에 수도로 먼저 돌아가지 않고 몰래 토벌대의 뒤를 따라왔다.
그러다가 비에 발이 묶이자 케이든과 제4연대는 윙즈 길드원들에게 은밀히 여관 건물의 일부를 내어주었다.
어차피 변종 마물 퇴치 사건으로 인해 서로의 정체를 숨기는 것이 더는 의미가 없어졌고, 이 여관에 제4연대의 사람들만 머물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뮈젤이 이 건물 안에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다만 그녀가 빗물을 닦을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급하게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수장님!”
한발 늦게 디아나를 발견한 뮈젤이 걸음을 재촉에 계단을 올라왔다.
본능적으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깨달은 케이든과 디아나의 얼굴이 나란히 굳어졌다.
뮈젤이 숨을 몰아쉬며 군데군데 빗물에 젖은 쪽지를 디아나에게 내밀었다.
그녀가 일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수도에서 온 전령입니다. 밀라드 서즈필드가 서즈필드 자작을 살해하려다가…… 실패했답니다. 수장님께서 감시를 지시하셨을 때까지만 해도 설마 했는데, 정말로…….”
뮈젤이 끔찍하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디아나는 크게 놀라지 않고 침착하게 그녀가 건넨 쪽지를 펼쳤다.
<감시 도중 밀라드 서즈필드가 감시 대상을 살해하려 듦. 창문을 깨서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해당 행위를 막음. 현재 밀라드 서즈필드는 수도 경비대에 감금됨.>
간략한 보고를 읽어내리는 디아나의 눈이 차게 가라앉았다.
그녀로부터 과거에 밀라드가 서즈필드 자작을 죽이고, 오페라 다이아몬드 광산의 증서를 빼앗아 레베카에게 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는 케이든이 침음을 흘렸다.
“결국 이번에도…….”
디아나는 쪽지를 다 읽고는 말없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창문을 부술 듯이 퍼붓던 빗줄기가 가늘어져 있었다.
구름 사이사이로 빛이 희미하게나마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비가 그치고 있으니, 곧 1황녀도 이 소식을 전해 받겠죠.”
과연 이번 생의 레베카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사실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