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디아나는 제게 손을 흔드는 플뢰르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주며 웃었다.
그러다가 플뢰르와 엘리엇의 너머, 인파에 둘러싸여 있는 레베카를 발견하고는 멈칫했다.
‘얼굴이 좋아졌네.’
디아나는 문득 그렇게 생각했다.
전보다는 덜하다지만, 레베카는 여전히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 가운데에 선 그녀의 얼굴에는 한동안 자취를 감췄던 여유로운 미소가 다시 돌아와 있었다.
‘루드비히의 짓인가?’
디아나가 그리 생각하며 티 나지 않게 레베카에게 시선을 두고 있을 때였다.
시선을 느낀 것인지 레베카가 디아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피할 새도 없이 눈이 마주쳤다.
디아나는 재빨리 표정을 가다듬고 인사를 한 후 고개를 돌리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레베카가 보란 듯 웃으며 고개를 까딱이는 것이 먼저였다.
‘……뭐지? 도발하는 건가?’
얼결에 마주 인사한 디아나가 어리둥절하게 눈을 깜박였다.
찰나지만 레베카가 자신을 긁으려 미소를 띤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회귀 전의 기억으로 말미암아 생각하면, 레베카가 상대방을 긁을 때 보이는 미소는 따로 있었다. 외려 저건…….
‘누굴 포섭하려고 할 때 짓는 웃음인데.’
디아나는 불안한 기분에 레베카를 흘끔거렸다. 그러나 그 불안감은 케이든의 말로 인해 잠시 멀어졌다.
“맞아. 비께서 활을 어찌나 잘 다루시는지 알면 깜짝 놀랄 걸세. 나도 활은 꽤 오랜만에 잡아보는 터라, 이러다가 비께 우승을 뺏기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군.”
“허어, 그 정도란 말입니까?”
케이든의 너스레에 귀족들이 감탄하자 디아나가 붉어진 볼을 하고 그의 어깨를 가볍게 때렸다.
“케이든.”
“왜 그러십니까, 비.”
“그건……! 어쩌다가 운 좋게 한번 중앙을 맞췄을 뿐이잖아요.”
“보통은 그걸 실력이라고 부르지요. 그렇지 않나?”
“맞습니다.”
“실력에 운이 따랐다고 하는 편이 옳겠지요.”
귀족들이 맞장구치자 디아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사람들이 이렇게 나오는데 그녀가 계속해서 제 실력을 깎아내리는 것처럼 보여서는 곤란했다.
군림하는 위치에 있는 자들에게 과한 겸손은 외려 독이 되기도 하니까.
“못 말리겠네요, 정말.”
그녀는 결국 케이든을 향해 작게 투덜거리며 눈을 흘겼다. 케이든은 그런 그녀의 반응이 귀엽다는 듯 천진하게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을 눈에 담자 어쩔 수 없이 가슴이 뛰었다. 동시에 마음 한구석이 시큰거렸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을까.’
디아나는 막 과거로 돌아왔을 무렵의 자신과 케이든을 회상하다가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생각해 보면 영애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쁜 인상은 아니었어. 오히려…….]
[좋았지. 친구 하고 싶었을 정도로.]
케이든과 디아나는 분명, 회귀 전 서로가 바라던 대로 가까워졌다.
디아나는 자신이 그를 가까이서 도울 수 있음에 기쁨을 느꼈다. 그것만은 틀림없는 진실이었다.
……하지만 그건 정말 그들에게 좋은 일이었을까.
‘이렇게까지 가까워져서는 안 됐는데.’
케이든과 디아나는 이제 친구라는 말이 무안하게 느껴질 정도로 가까워졌다. 하지만 그것이 외려 서글프고 괴롭게 느껴지리라는 사실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디아나에게는 레베카라는, 반드시 해결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케이든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해도 바꿀 수 없었다.
한 번일지라도 배신으로 인해 죽음을 겪은 일은 평생 그녀의 일생에서 지워지지 않을 테니까.
디아나가 씁쓸한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케이든의 입꼬리가 약간 처졌다.
그는 다른 귀족들을 돌아보며 적당히 인사를 건넸다.
“그럼 나중에 보지. 그대들에게 행운이 따르기를.”
“감사합니다.”
“빛의 영광이 가득하시기를.”
다행히 귀족들은 더 달라붙지 않고 마주 인사하고는 멀어졌다.
케이든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어느 정도 떨어져 나갔다는 것을 확인한 후 디아나의 허리에서 팔을 거두어들였다.
“케이든?”
그 움직임에 디아나가 뒤늦게 혼자만의 생각에서 빠져나왔다. 케이든이 그녀를 보며 담백하게 사과했다.
“혹 불쾌했다면 미안해, 그대.”
“아.”
디아나는 어리둥절하게 케이든을 바라보다가 그의 말에 이유를 깨닫고 당황한 얼굴을 했다.
그녀가 황급히 케이든을 향해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런 거 아니에요, 정말로요.”
“그래?”
“네. 말씀드렸잖아요. 편하게 대해달라고요. 그리고 애초에 이건 저희의 계약이기도 했으니까요.”
디아나는 말끝에 싱긋 미소 지었다.
하지만 케이든은 그 미소가 외려 슬프게 느껴졌다. 그녀가 자신이 불편해할까 봐 일부러 ‘괜찮다’라고 해주는 것처럼 느껴져서였다.
케이든은 속으로 쓰디쓴 웃음을 삼켰다. 결국 디아나가 그를 이렇듯 신경 쓰게 만든 것도, 마음을 가누지 못한 제 탓이었다.
그래서 그가 내뱉을 수 있는 말은 정해져 있었다.
“……그래. 그대가 괜찮다면 다행이야.”
* * *
얼마 지나지 않아 긴 뿔 나팔 소리와 함께 사냥제가 시작되었다.
“꼭 숲 초입에 있으셔야 합니다. 아니면 형님과 함께 숲 바깥, 천막 아래에서 머물거나.”
“알겠다니까요. 한 번만 더 말하면 세 번째예요.”
“디아나, 그대도.”
“네. 조심히 다녀오세요.”
케이든은 몇 번이고 플뢰르와 디아나를 걱정한 후에야 파트라슈와 함께 숲 안쪽으로 사라졌다.
플뢰르는 신기한 얼굴로 허공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무언가 투명한 벽이 존재하는 것처럼 그녀의 손이 가로막혔다.
“이거 봐요, 디아나. 정말 지나갈 수 없나 봐요.”
“그러게요.”
디아나 역시 조금 신기한 기분으로 허공을 더듬었다.
황실에서는 플뢰르와 디아나처럼 가볍게 참가하는 사람과 케이든처럼 우승을 노리고 참가하는 사람을 구분하여 모두의 안전을 위해 마도구로 숲의 경계를 갈라놓았다.
황실에서 나누어준 마도구 배지를 착용하지 않은, 이를테면 플뢰르와 디아나 같은 이들은 숲의 초입만 거닐 수 있었다.
거기에 맞추어 초입에는 초심자가 잡을 수 있는 토끼나 사슴 같은 초식동물 위주로 풀어 놓았고 케이든이 향한 숲 안쪽에는 맹수를 비롯해 마물들을 풀어 놓았다.
사냥제를 즐기는 사람도, 사냥제에서 우승하고 싶은 사람도 만족할 수 있게끔 한 것이다.
‘4황비가 고안했다고 했던 것 같은데.’
디아나는 회귀 전 레베카를 통해 주워들었던 사실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 생각은 제 손을 잡는 플뢰르에 의해 금세 멀어졌다.
“우리도 이만 갈까요? 아무리 산책 명목이라고는 하지만 토끼 한 마리 정도는 잡았으면 좋겠네요.”
“토끼도 좋고 사슴도 좋죠.”
디아나는 플뢰르의 말에 맞장구치며 그녀와 함께 자박자박 걸음을 옮겼다.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며 흙을 밟고, 나무 사이를 거니는 것은 생각보다 더 기분이 좋은 일이었다.
플뢰르는 즐겁게 재잘거리다가 문득 어두운 얼굴을 했다. 디아나가 걱정스레 물었다.
“왜 그래요?”
“아, 별거 아니에요. 그냥 엘리엇도 함께 왔으면 좋았을 것 같아서요. 그이도 기대를 많이 했으니까…….”
플뢰르가 아쉽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본래는 엘리엇 역시 플뢰르, 디아나와 함께 사냥제에 참석하기로 했었다.
하지만 최근 엘리엇 몸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가 나아지기를 반복하는 탓에 사람들은 그를 말렸고, 엘리엇 역시 아쉬움을 감추고 천막에 남아있겠다고 말했다.
플뢰르 역시 그것이 엘리엇을 위한 선택임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과 아쉬움은 별개의 일이었다.
“다음에는 함께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럴까요?”
“그럼요.”
디아나는 플뢰르의 등을 가볍게 쓸며 그녀를 위로했다. 그 덕분에 플뢰르는 조금이나마 웃음을 되찾았다.
디아나는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듯 마주보며 미소를 띠었다.
그러나 그녀의 머릿속은 상당히 암울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엘리엇이 병으로 아팠던 시기까지는 꽤 남았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