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연지곤지]
“……이제야 묻기에는 너무 늦은 감이 없잖아 있지만.”
“…….”
“그대가 이혼을 바라는 이유를…… 물어도 될까.”
사실은 계약했을 당시에 들었어야 했던, ‘이유.’
하지만 당시의 케이든은 지금처럼 디아나에게 깊은 마음을 가지게 될 줄 몰랐다. 그래서 그녀의 이유가 궁금하지 않았다.
어차피 1년간 옆에 머물다 떠날 사람.
고마움과 미안함이 크니 그만큼 잘해주어야 할 사람.
첫 만남에서 케이든에게 디아나는 그저 그런 사람이었을 뿐이었으므로.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디아나의 시선 한 자락, 숨결 한 올마저 케이든에게는 소중했다. 그녀가 없는 삶을 이어갈 생각만 하면 숨이 턱턱 막혔다.
이제는 당신이 내게 행복이 되어버렸는데.
케이든은 볼썽사나운 눈물을 참기 위해 미간을 조금 찡그렸다. 그러나 호흡이 가빠지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디아나는 그를 보며 조용히 웃었다. 잠잠해서 더욱 서러워지는 미소였다.
“며칠 전, 제 호적상 오라버니께서 저를 찾아오셨어요. 알고 계실지는 모르겠지만.”
“…….”
“도련님께서 슬슬 아이가 생길 때도 되지 않았냐며 이야기를 꺼내시더라고요. 아마 자작님께서도 같은 뜻이시겠죠.”
사실 밀라드의 말은 그와는 조금 다른 투였지만, 디아나는 교묘하게 말을 바꾸어 자작과 밀라드가 케이든과의 아이를 가지라고 강요한다는 것처럼 말했다.
그편이 케이든을 밀어낼 더 적합한 핑계가 되어줄 테니까.
“이렇다 할 추억 하나 없는 제 집안이지만, 그래도 혈연이라는 이유로 그들은 갈수록 당신께 짐만 될 거예요.”
“상관없…….”
“하지만 그걸 제외하고도 저는 계약이 끝나면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조용히 살고 싶어요.”
케이든이 울컥해 반박하려 들었으나, 디아나는 그의 입을 막고 거짓말로 쐐기를 박았다.
그녀가 이혼하려는 이유의 절반은 ‘혼자 살고 싶다’가 아닌, 레베카 때문이었으므로.
디아나는 제 추악하고 질척한 복수심에 케이든을 끌어들일 생각이 없었다.
케이든의 성격과 신념상, 그는 레베카를 쉽사리 ‘죽이려’ 들지 못할 것이다.
물론 황위 계승 싸움에서야 이길 생각이겠지만, 그는 레베카가 반역, 혹은 사형이 마땅한 죄를 저지르기 전까지는 법을 지킬 사람이었다.
하지만 디아나는 달랐다.
그녀는 이미 한번 레베카에게 목숨을 잃은 전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케이든이 책임질 이유가 없는 일이었고.
디아나 스스로 마무리 지어야 할 문제에 케이든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목이 잘렸던 과거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닌 이상, 그녀가 내뱉을 수 있는 말은 정해져 있었다.
“……미안해요, 케이든.”
“…….”
케이든은 자칫 두서없는 말이 튀어나가 디아나를 상처 입힐까 봐 입술을 세게 말아 물었다.
그러나 자꾸만 입술이 달싹이며 말이 튀어 나가려고 했다.
짐이라고 하지 마.
그대는 짐이 아니야.
그대가 내게…… 어떤 의미인데 그런 말을 해.
울면서 애원이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디아나의 미소에는 틈이 없었다. 그 벽이 케이든의 입을 틀어막았다.
어떻게 애원하든 간에 그녀의 결심은 변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 너무도 뻔해서 그를 절망스럽게 했다.
하지만 정작 거절의 말을 내뱉어놓고 그의 눈치를 보고 있는 디아나를 눈에 담은 순간.
케이든은 어쩔 수 없이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
미련과 절망이 쓸려나간 자리에 남은 마음은 하나였다.
케이든은 디아나가 자신 때문에 불편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거절한 사람의 마음이 불편하지 않게 대하는 것이 거절당한 사람의 도리일 것이다. 설령 그가 마음을 영영 접지 못한다고 해도.
“그래, 애초에 그런 계약이었는데. 내가 너무 곤란하게 한 것 같아서 나야말로 미안해.”
그 말에 디아나는 순간적으로 울컥했다. 곤란한 건 당신이 아니라 나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가까스로 목 안으로 삼켰다. 대신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에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케이든이 길게 숨을 내쉬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가 옆으로 시선을 돌려 노을에 반짝이는 호수를 바라보며 눈을 슬쩍 찌푸렸다. 아무래도 호수의 반짝임에 눈이 부신 듯했다.
그 상태로 잠시간 호수를 바라보던 케이든이 고개를 원래대로 돌려 디아나를 마주 보았다.
그가 불시에 소년처럼 티끌 한 점 없이 웃었다. 낮은 목소리가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듯 흘러나왔다.
“괜찮아.”
“…….”
“괜찮아질 거야.”
정확히는 그렇게 만들어야겠지.
케이든은 뒷말을 속에 꾹 눌러 담으며 애써 미소를 유지했다.
‘아…….’
그러나 ‘괜찮아질 거다’라는 케이든의 말을 들은 디아나는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정작 거절을 내뱉어 케이든을 먼저 상처 입힌 것은 그녀였음에도 꼭 그녀가 거절당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괜찮아진다고.’
그 말은 곧, 케이든이 더는 디아나를 좋아하지 않게 된다는 뜻이리라.
분명 그녀도 그것을 바랐다. 케이든이 자신보다 더 나은, 더 좋은 사람을 사랑하길 바랐다.
하지만 정작 그의 마음이 제게서 떠난다고 생각하니 덜컥 겁이 났다.
지금이라도 케이든의 소맷자락을 붙잡고 진심이 아니었다고 말하고 싶은 비이성적인 충동에 손끝이 움찔거렸다.
솨아아-
두 사람은 가만히 시선을 마주한 채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파도가 치는 듯한 바람 소리만이 두 사람의 주변을 맴돌다가 사라졌다.
하지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디아나가 충동에 휩쓸리기 직전 케이든이 먼저 움직였다.
케이든은 조금 붉어진 눈가로 아프게 웃으며 디아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만 갈까?”
“아.”
그의 말에 충동에 휩쓸리기 직전이었던 이성이 가까스로 제자리를 찾았다.
디아나는 결국 그와 똑 닮은,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려오는 미소를 띤 채 그의 손을 맞잡았다.
“……네.”
그녀는 짤막한 답만을 내뱉은 후 케이든의 손을 잡고 동산을 내려왔다.
디아나는 앞서 걷는 케이든의 뒷모습을, 케이든은 손 안에 들어찬 디아나의 온기를 징표 삼아 암묵적으로 다짐했다.
‘이 일은 잊자.’
잘못 적은 페이지를 뜯어내 흔적을 지우듯이.
케이든이 디아나에게 고백한 일도, 디아나가 케이든을 거절한 일도 모두 지우고 지금처럼 즐겁게, 때로는 설레며. 그렇게 지내자는.
그리고 약속된 시간이 끝나면 미련 없이 웃으며 서로를 보내주자는, 암묵적인 합의.
때로는 말이 아니라 온기로, 눈빛으로 전해지는 마음도 있는 법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손을 꼭 마주 잡은 채 동산에서 내려왔다.
계절은 벌써 늦여름을 지나가고 있었다.
* * *
휴가는 백일몽처럼 짧았다.
어느새 여름 휴가의 마지막을 알리는 사냥제 당일이었다.
사교 시즌이 끝나고 각자의 영지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던 귀족들이 하나둘 별궁 근처의 숲으로 모여들었다.
“오오, 3황자 전하. 잘 지내셨습니까?”
“푹 쉬신 듯하군요. 얼굴빛이 더 좋아지셨습니다그래, 허허!”
“그러는 자네들이야말로 넉살이 더 늘어서 왔군. 나 없이 혼자 좋은 거라도 챙겨 먹었나?”
케이든은 제게 밀려드는 귀족들에게 적당한 유쾌함을 곁들여 대꾸했다.
다행히 상대는 그의 재치가 마음에 드는 듯 껄껄 웃다가 디아나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3황자비 전하를 뵙습니다. 두 분께서는 여전히 사이가 좋아 보이시는군요.”
“별말씀을.”
디아나는 케이든의 한 팔에 허리를 맡긴 채 그의 곁에 붙어 서 있었다.
종종 그녀를 살피며 머리카락을 넘겨주는 케이든의 행동이나, 그런 그를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는 디아나의 눈길은 다정하기 짝이 없었다.
그 광경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귀족들이 뒤늦게 디아나의 차림새를 발견하고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냥복……?”
“비 전하께서도 사냥제에 참석하시는 겁니까?”
“그래봤자 토끼라도 잡으면 다행인 실력이긴 하지만. 1황자비 전하께서 참가에 의의를 두시겠다길래 함께 참석하기로 했네.”
디아나가 말을 맺으며 시선을 돌려 플뢰르 쪽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우연히 그녀 쪽을 보고 있던 플뢰르와 시선이 마주쳤다.
디아나는 제게 손을 흔드는 플뢰르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주며 웃었다.
그러다가 플뢰르와 엘리엇의 너머, 인파에 둘러싸여 있는 레베카를 발견하고는 멈칫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