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낮게 목을 긁는 소리를 낸 엘판드가 디아나의 손 가까이 코를 들이밀고 킁킁대며 냄새를 맡았다. 디아나의 심장이 작게 뛰었다.
‘그냥 넘어가라, 제발.’
그녀는 불안하고 초조한 심정으로 엘판드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 순간이었다.
툭―
엘판드가 불시에 디아나의 주먹에 제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 그에 그치지 않고 머리를 비비더니, 그르렁거리며 그녀의 주위를 빙빙 돌기 시작했다.
‘응?’
예상했던 거랑 반응이 너무……다른데?
“케이든. 혹시 이게…… 일반적인 반응인가요?”
디아나는 제게 이리저리 몸을 치대는 엘판드를 보며 눈을 깜박이다가 어리둥절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케이든 역시 그녀와 별반 다를 바 없는 표정이었다. 그가 한 마리 순한 고양이가 되어 버린 엘판드를 보며 미간을 좁히고 중얼거렸다.
“아니, 저 녀석이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살갑게 구는 건 나도 처음 보는데. ……나한테도 안 저래.”
케이든은 황당한 심정에 머릿속으로 엘판드에게 말을 걸었다.
‘내가 부르지 않은 사이에 뭐라도 잘못 주워 먹었나.’
<무례하기 짝이 없는 물음이군. 나도 잘 모르겠지만, 이 인간에게선 왠지…… 편안한 기분이 느껴진다.>
‘뭐?’
케이든은 순간적으로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어딘지 익숙한 동작으로 엘판드의 턱을 긁어 주는 디아나를 응시했다.
‘설마…….’
디아나와 닿았을 때 이상하리만치 편안한 느낌이 들던 게, 우연이 아니었던 건가?
‘하지만 디아나는 정령사가 아닐 텐데.’
케이든은 미간을 좁힌 채 디아나를 빤히 응시했다.
하지만 디아나는 기민하게 그러한 기색을 눈치채고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엘판드와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척에 열중했다.
그사이에도 밤은 깊어 가고 있었다. 케이든은 우선 확실치 않은 의혹을 거두어들이기로 맘먹었다.
“그나저나 그 정도면 인사는 충분히 나눴잖아. 떨어져.”
케이든은 아까부터 디아나의 몸에 제 몸을 치대기에 여념이 없는 엘판드의 뒷덜미를 쭉 잡아당겼다. 물론 그랬다가 엘판드의 꼬리에 얻어맞았지만.
디아나가 먼저 조심스럽게 엘판드의 등에 올라타고, 케이든이 이어 그 뒤에 올랐다.
디아나는 저를 품에 끌어안듯이 자세를 잡는 케이든의 체온이 신경 쓰여 몸을 바르작거렸다.
케이든이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하고 웃었다.
“꽉 잡아, 디아나.”
다음 순간, 엘판드가 밤하늘로 뛰어들 듯 창문 바깥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 * *
바깥은 건국 기념일을 맞아 열린 축제로 인해 무도회 못지않게 시끌벅적했다.
케이든과 디아나는 축제 거리 인근의 골목에 내려서 엘판드를 돌려보내고, 자연스럽게 사람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싸다, 싸! 아를라스 왕국산 인증 마크가 찍힌 마도구!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닙니다!”
“옐링 지방에서 갓 잡아 온 신선한 해산물로 만든 찜! 옆 가게의 술과 함께하면 아주 기가 막힙니다!”
“가장행렬에 참석하실 분은 이쪽으로 모여 주세요!”
“조금 있다가 중앙 광장에서 제국 최고의 연극단인 세리즈 연극단의 공연이 펼쳐집니다! 표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서둘러 주세요!”
먹거리를 파는 사람, 연극을 홍보하는 사람, 가장행렬에 참석하려는 사람들이 어지럽게 뒤섞였다.
디아나와 케이든은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얼굴이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그 사이에서 후드를 깊이 눌러쓴 채 고개를 숙이고 걸었다.
“아, 미안해요!”
“조심 좀 하지……!”
그러나 사람이 워낙 많은지라 지나가던 이와 부딪칠 때마다 후드가 벗겨지려 했다.
디아나는 황급히 양손으로 후드를 붙잡아 얼굴이 드러나지 않게 했다. 그녀가 난감한 표정으로 케이든을 돌아보았다.
“어떡하죠? 이러다간 뭐 하나 제대로 체험해 볼 수도 없겠는데요.”
“음…….”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케이든이 곧 반색하며 디아나의 손을 잡았다.
“저쪽에서 가면을 팔고 있네. 가 보자.”
두 사람은 서둘러 가면 가게로 향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불꽃놀이와 함께 자정을 장식하는 가장행렬은 건국제의 대미를 장식하는 행사였으므로 사방에 가장행렬 분장을 한 사람으로 넘쳐났다. 오히려 가면을 쓴 사람보다 후드를 눌러쓰고 걷는 케이든과 디아나가 더 수상해 보일 정도였다.
“아이고, 어서 오십시오! 편하게 둘러보세요!”
가장행렬에 참가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도, 단순히 축제를 즐기러 나온 사람들 또한 재미로 가면을 쓰곤 했다. 노점 주인은 손님들로 미어터지는 가판대를 보며 행복하게 외쳤다.
케이든과 디아나는 가판대 한쪽 구석에 서서 가면을 골랐다. 서로의 가면을 골라 주기로 하고서 얼마 후. 케이든의 손에는 토끼 가면, 디아나의 손에는 늑대 가면이 들려 있었다.
“토끼……?”
“늑대……? 이젠 아주 대놓고 변태라고 욕을 하지그래?”
케이든과 디아나는 서로가 고른 가면을 보고 난색을 표했다. 하지만 가면을 고르기 시작하며 상대가 어떤 것을 골라 주든 군말 없이 받아들이자고 약속했기 때문에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가면을 교환해 얼굴에 썼다.
디아나의 머릿속에서 유로가 들으란 듯 깔깔대며 웃었다.
<으하핫! 토, 토끼! 늑대 가면은 네가 써야 하는 거 아니냐?>
‘제발 입 좀 다물어…….’
디아나는 웃는 얼굴로 이를 갈았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늑대 가면을 쓴 케이든은 굉장히 우습…… 아니, 근사했다. 그녀가 손을 뻗어 약간 삐뚤어져 있는 늑대 가면을 바르게 고쳐 주었다.
“잘 어울리시네요.”
“칭찬 맞아? 변태라고 욕하는 대신 이 가면을 고른 건 아니지, 그대?”
“설마, 그럴 리가요.”
“입은 웃고 있는데.”
“입 말고 제 눈을 보세요. 저는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요.”
“가면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데, 무슨 수로?”
케이든이 황당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디아나는 그 말을 못 들은 척하며 그의 손을 잡아당겼다. 어느새 그녀는 처음으로 바깥세상에 나온 아이처럼 들뜬 기색을 보였다.
“그럼 가요!”
* * *
확실히 가면을 쓰니 외려 돌아다니기가 편했다. 케이든과 디아나는 거리를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특이해 보이는 음식들을 사 먹었다.
“그걸 대체 어떻게 드시는 건지…….”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나는 그대가 더 신기하니까.”
두 사람은 각각 매운 고기 꼬치, 초콜릿 코팅을 입힌 딸기 꼬치를 손에 든 채 서로를 희한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참고로 매운 고기 꼬치 쪽이 디아나, 초콜릿 코팅을 입힌 딸기 꼬치 쪽이 케이든이었다.
“단것을 좋아하신다는 건 저번부터 들어서 알고 있긴 했는데, 정말 어마어마하게 달게 드시는군요. 그러면 건강에 안 좋아요.”
“그러는 그대야말로 그렇게 자극적인 음식을 좋아해 버릇하면 못써. 돌아가면 황궁의를 불러 봐야겠군.”
“저만 검사받는 건 좀 억울한데요? 그럴 거면 같이 받아야죠.”
케이든은 디아나의 항의를 못 들은 척 주위를 둘러보다가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그대도 여기 나왔나?”
“이 목소리는…… 헉, 3황자 전하? 왜 여기 계십니까?”
케이든은 한쪽에서 긴 막대를 이용해 바닥의 구멍에 공을 굴려 넣는 사람들의 근처에 서 있던 사내의 어깨를 짚었다.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린 사내가 케이든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황급히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는 케이든과 디아나가 결혼식 날 밤 찾았던 가게의 주인이었다.
케이든이 웃으며 그를 가볍게 끌어안았다가 놓아주었다.
“왜긴. 부인과 함께 축제를 즐기러 나온 거지.”
“무도회는 어쩌시고요?”
“해야 할 일은 다 마치고 나온 거니까 괜찮아.”
“맞아요. 걱정 마세요.”
디아나도 곁에서 거들었다. 두 사람의 확언을 듣고서야 주인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는 반가운 기색으로 케이든, 디아나와 한 번씩 악수를 나누고 쾌활하게 웃었다.
“이야, 정말 오랜만입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리엇 님께서도 최근에는 자주 찾아오지 않으셔서 영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