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6화 (76/145)

76화

“디아나.”

“네?”

“건국 기념 무도회 날, 첫 춤만 끝내고 같이 놀러 나가자. 둘이서.”

케이든의 말에 디아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그런 그녀를 보며 속으로 다짐했다.

‘제대로 고백하자.’

이런 식의 충동적인 고백이 아니라, 디아나가 그가 지닌 마음의 크기를 제대로 알아차릴 수 있게. 제대로 준비해서 고백하자.

케이든은 그렇게 생각하며 디아나의 답을 기다렸다.

“음, 둘이서……요.”

한편 디아나는 난감한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디아나는 이따금 자신이 케이든에게 품어서는 안 될 감정을 품는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눈치챈 상태였다. 조금 전만 해도 제 의지로 몸을 움직여 그에게 입을 맞추지 않았던가.

그런 와중에 케이든과 단둘이 건국제를 즐겼다가, 혹시라도 그의 곁에 남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될까 두려웠다.

‘역시 안 된다고 해야…….’

디아나가 거절의 말을 뱉기 위해 입술을 달싹이는 것과 동시에 케이든이 눈썹을 누그러트렸다.

“안 될까……?”

그 얼굴을 눈에 담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듯 애처로운 기색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디아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상 불가항력이었다.

‘아차.’

디아나는 케이든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걸리는 것을 목격하고서야 제가 한 행동을 깨달았다.

그러나 케이든은 이미 한껏 신이 난 얼굴로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녀를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고마워, 디아나.”

그 얼굴이 어린 소년처럼 너무도 천진난만해 보여서, 디아나는 차마 말을 번복할 수 없었다. 어쩐지 미인계에 넘어가 버린 느낌이었다.

* * *

늦은 밤.

“정말 하나도 없는 게 분명해?”

“예, 예……. 그렇습니다, 도련님.”

밀라드는 사나운 얼굴로 위협적인 물음을 뱉었다. 그러자 서즈필드 저택의 집사가 허리를 깊이 굽히며 쩔쩔맸다.

밀라드는 집사의 손에 들린 은쟁반이 텅 빈 것을 보고 이를 뿌득 갈았다.

‘이 박쥐 같은 것들……!’

1년 중 사교 모임이 가장 활발한 시기임에도, 밀라드의 이름으로 오는 초대장은 점점 그 수가 줄더니, 지금은 아예 뚝 끊겨 버렸다.

어쩌다가 파티에 참석하게 되어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레베카와 갓 약혼했을 때는 그에게 말 한마디라도 더 붙여 보려고 안달하던 영식들은 이제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슬그머니 그를 피하곤 했다.

그 모든 것이 케이든이 방어전에서 승리한 이후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나가 봐.”

“쉬, 쉬십시오.”

밀라드가 이를 악문 채 축객령을 내리자 집사가 황급히 인사하고는 곧장 방을 벗어났다.

밀라드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가 씨근덕거리는 숨을 뱉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1황녀 전하께라도 찾아가고 싶은데, 하필 근신 중이시니…….’

밀라드가 입술을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레베카의 얼굴을 본다면 이 불안감이 나아질 것도 같은데, 그녀는 현재 페란트의 일로 인해 백염궁에서 근신 중인지라 누군가를 만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결국 밀라드는 불안을 이기지 못하고 몸을 일으켜 방을 나섰다.

그가 향한 곳은 서즈필드 자작의 집무실이었다.

똑똑.

“아버지, 접니다.”

밀라드는 서즈필드 자작이 굉장히 늦은 시각이 되어서야 잠자리에 든다는 것을 알기에 곧장 문을 두드렸다. 예상대로 즉시 답이 돌아왔다.

“……들어오너라.”

집무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안경을 쓴 채 서류를 살피고 있던 서즈필드 자작이 의아하게 고개를 들었다.

“이 시간에 네가 어쩐 일이냐.”

그 물음에 숨을 한번 고른 밀라드가 또렷한 어조로 말했다.

“아버지, 지금이 바로 디아나 그 애를 이용할 적기입니다. 그 애의 손으로 3황자를 죽이게 하는 겁니다.”

“……뭐?”

서즈필드 자작이 황당한 목소리를 냈다. 야밤에 다짜고짜 찾아와서 하는 말이 3황자를 죽이자는 것이라니.

하지만 밀라드는 제 생각에 흥분한 듯 줄줄이 말을 이었다.

“솔직히 그렇잖습니까. 그 사생아를 굳이 살려 둬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어차피 처음부터 3황자를 막을 수단으로 결혼시켰던 것 아닙니까. 3황자가 그 사생아에게만은 굉장히 유한 편이니 죽일 기회를 잡기도 쉬울 겁니다. 디아나를 이용해 3황자를 죽이고, 3황자 암살의 죄를 들어 그 아이까지 처리하면 깔끔하게 모든 일을 마무리 지을 수 있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냐.”

서즈필드 자작이 끝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밀라드의 말을 끊었다.

자작은 케이든이 디아나를 정비로 올리는 조건으로 그와 거래했으니, 케이든이 죽는다면 그의 계획이 어그러진다.

게다가 그 사실을 제외하고도 밀라드의 주장은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서즈필드 자작은 골이 울리는 듯한 느낌에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3황자와 디아나가 지극히 사랑하는 사이라는 것은 저잣거리의 아이들도 아는 사실이다. 그런 상황에서 디아나가 갑자기 눈이 돌아 3황자를 죽였다고 하면 사람들이 믿을 것 같으냐?”

“정신이 나갔다고 둘러대면 될 것 아닙니까.”

“사람들이 그 말을 잘도 믿겠구나. 가뜩이나 1황녀 전하께서 자꾸만 무고한 사람들을 끌어들여 해한다는 말이 돌아 조심스러운 판에…….”

“그렇다고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란……!”

“네가 가만히 있지 않으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이냐!”

결국 서즈필드 자작이 폭발해 책상을 쾅 내리쳤다. 그 기세에 눌린 밀라드가 저도 모르게 목을 움츠렸다.

서즈필드 자작은 밀라드를 노려보며 짓씹듯 말했다.

“너는 아직 1황녀부도 아니고, 가주도 아니다. 디아나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것은 가주인 나뿐이란 말이다! 알아들었으면 썩 돌아가!”

서즈필드 자작이 사나운 고함을 토하고는 밀라드에게서 고개를 돌려 버렸다.

“경솔한 놈 같으니……. 저래서야 어떻게 가주가 되겠다고…….”

그가 이마를 짚으며 혀를 쯧쯧 차는 소리가 밀라드의 귀를 선명히 파고들었다.

“…….”

밀라드는 잠시간 주먹을 세게 말아 쥔 채 모욕감을 참다가 몸을 홱 돌려 집무실을 벗어났다.

그가 어둠으로 덮인 복도를 성큼성큼 지나치며 악귀처럼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너는 아직 1황녀부도 아니고, 가주도 아니다.]

[경솔한 놈 같으니……. 저래서야 어떻게 가주가 되겠다고…….]

서즈필드 자작의 말이 독약처럼 귓가를 웅웅 맴돌았다.

‘가주…….’

밀라드가 제 방 앞에서 발걸음을 우뚝 멈췄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창문 밖으로 떠 있는 달이 눈에 들어왔다.

“…….”

말없이 달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 언뜻 섬뜩한 기색이 스쳤다가, 이내 사라졌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 사교 시즌의 마지막 날이자, 건국제 당일이 되었다.

이번 건국제의 주인공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케이든은 다소 곤욕스러운 아침을 보내야 했다.

“……저기, 무슈 드롱.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가?”

케이든은 거울 너머로 제 머리카락을 한 가닥씩 손질하고 있는, 건장한 체격의 남자를 향해 어색하게 물었다.

마담 드슈의 라이벌, 무슈 드롱이 충격적인 표정으로 답했다.

“왜 그런 당연한 걸…… 물으시는 거지요? 3황자 전하께서는 이번 건국제의 주인공이나 다름없으십니다. 전하께서! 제국의! 얼굴이 되시는 거란 말입니다!”

“내가 잘못했네. 계속하지.”

무슈 드롱이 케이든의 머리카락과 빗을 양손에 쥔 채 열변을 토했다.

케이든은 이러다가 머리카락이 뽑힐 것 같다는 두려움에 황급히 말을 거두어들였다.

마담 드슈 역시 디아나의 치장을 전담하고 있었기에, 무슈 드롱은 그녀를 이기겠다는 마음에 불타올라 열과 성을 다해 케이든을 꾸몄다.

그 결과 케이든은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멎을 듯한 완벽한 차림새가 되었다.

머리카락의 절반 정도를 자연스럽게 넘겨 이마와 곧은 눈썹을 드러냈고, 몸에 딱 맞는 제복을 입혀 탄탄한 몸매를 강조했다.

“완벽하네요.”

“감히 역작이라고 일컬어도 손색이 없겠습니다.”

무슈 드롱과 그의 조수들이 감탄했다. 손이 부족한 탓에 그의 치장을 도왔던 3황자궁의 하녀들 또한 볼을 붉혔다.

“자, 이제 마무리해 봅시다!”

무슈 드롱이 의욕적으로 외쳤다. 그렇게 케이든이 여러 사람들의 손길에 반강제로 몸을 맡기고 있던 때였다.

“케이든, 준비는…….”

먼저 준비를 끝마치고 그의 방을 찾았던 디아나가 멈칫했다. 그녀의 시선이 케이든에게 크라바트를 매어 주려는 듯한 동작을 취하고 있는 하녀에게 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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