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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64/145)

64화

“그 천하디천한 새끼가 감히…….”

세드릭은 하이에른 저택에 돌아와 제 방에서 이를 부득 갈았다.

그는 식사 내내 안타르와 피오나가 친근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 더 나아가 식사가 끝날 무렵에는 서로의 이름을 부를 정도로 친밀해졌다는 사실이 미칠 것만 같았다.

그러나 피오나는 세드릭의 속을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것인지 그저 태평했다.

[아, 안타르? 생각보다 더 괜찮은 사람이길래 친구로 지내기로 했어.]

친구는 무슨. 척 봐도 옐링 공작의 남편이 되어 한탕 해 먹으려는 거지새끼가 분명하던데.

분노를 다스리려 애쓰던 중 문득 협탁 위의 화병이 시야에 들어왔다. 화병에 꽂힌 꽃을 노려보던 세드릭이 거친 손길로 꽃을 잡아챘다.

꽃들이 비명을 지르듯 후드득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내며 그 위로 꽃잎을 아무렇게나 흐트러뜨렸다.

그는 순식간에 엉망이 된 꽃 뭉치를 정원에 던져 버리기 위해 창문을 열고 테라스로 나갔다.

“이까짓 게 대체 무슨……!”

그가 막 손에 들린 꽃을 집어 던지려던 찰나.

삐익―

높은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귀를 울렸다. 세드릭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휘영청 떠 있는 보름달 한가운데서부터 흰 불꽃이 일렁이는 듯한 형상의 매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이그니스.’

그것이 레베카의 정령임을 알아본 세드릭이 꽃을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팔을 뻗었다. 그러자 그의 팔에 안착한 이그니스가 부리로 제 발에 매여 있는 쪽지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세드릭이 작게 중얼거리고는 쪽지를 받아 들었다. 그는 방으로 돌아와 문을 잠근 후 주전자의 물을 덜어 이그니스가 목을 축이도록 도왔다.

이그니스가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 촛불을 밝힌 그가 주홍색 불빛 아래서 쪽지를 펼쳤다.

세 살짜리 어린아이가 쓴 것처럼 삐뚤빼뚤한 글씨체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계획 시행 일자를 조금 더 앞당긴다. 최대한 빠르게 피오나 옐링을 유혹할 것. 그리고 적절한 때에 죽음으로써 너에 대한 사랑을 증명하라 속삭일 것.>

쪽지의 내용을 확인한 세드릭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마침 그 역시도 갑작스레 나타난 안타르의 존재 때문에 초조함을 느끼고 있던 차였다. 계획을 앞당기면 그만큼 이 역겨운 짓을 지속해야 할 날도 줄어들겠지.

세드릭은 쪽지의 내용을 확인한 후 힐끔 등 뒤를 돌아보았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느새 이그니스가 침대 위에서 그의 행동을 빤히 지켜보고 있었다.

‘젠장…….’

세드릭은 애써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혹시나, 정말 혹시나 일이 잘못되어 레베카가 자신을 버리려 할 때 쓸 요량으로 쪽지를 없앤 척만 하고 몰래 보관해 두고 싶었는데.

필적마저 위조되어 있는 데다가, 이그니스는 언제나 그가 쪽지를 완전히 불태울 때까지 떠나지 않았다.

결국 세드릭은 내키지 않는 손길로 레베카가 제게 보낸 쪽지를 촛불에 가져다 대었다. 그는 까맣게 타들어 가는 종이 귀퉁이를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괜찮아.’

어차피 피오나는 이미 제게 마음이 기울어진 상태였다.

그가 별다른 실수만 저지르지 않는다면 이미 기울어진 상태의 천칭이 쉽사리 다른 쪽으로 움직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괜찮았다. 반드시, 괜찮게 만들 것이다.

그리하여 차남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을 억누르고 살아야 했던 과거를 보상받고 제 손으로 영광을 거머쥐리라.

이윽고 쪽지는 재가 되어 사라졌다.

이그니스는 부리로 재를 쑤석여 혹 남은 조각이 없는지 확인한 후, 밤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 * *

한가하고 나른한 오후, 귀부인들끼리의 다과회 자리였다.

“3황자비 전하께서는…… 하루에 몇 번이나 하세요?”

그 질문을 들은 디아나는 차를 마시다가 말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 바람에 찻물이 주르륵 흘러내려 귀부인들 사이에서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다.

“어머나, 이를 어째.”

“전하, 괜찮으세요?”

“괜, 괜찮네.”

사실 전혀 괜찮지 않았다.

디아나는 누군가 건넨 손수건으로 입을 닦아 내며 정신적 충격을 수습하려 애썼다.

‘올 게 왔구나.’

디아나는 겸허하게 양손을 무릎 위로 모았다. 어차피 케이든과 결혼하기로 마음먹었을 때부터 염두에 두던 상황이기는 했지만, 직접 들으니 생각보다 타격이 컸다.

하지만 디아나가 어느 정도 진정하고 찻잔을 내려놓자마자 다시 같은 주제로 대화가 이어졌다.

“신혼이시면 하루에 두 번은 하시나?”

“에이, 그 시기면 하루에 세 번도 거뜬하죠.”

“무슨 소리예요. 두 분 다 한창때에, 몸에 이상 없이 건강하신데 당연히 다섯 번까지도 가능하시겠죠!”

귀부인들은 그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진지한 태도로 부부 사이의 밤 생활에 관해 논했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은 하나같이 디아나를 향해 있었다.

디아나는 조금 울고 싶었다.

‘왜 저를 보시는데요…….’

물론 디아나는 신혼이었고, 케이든과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고 알려졌으며, 첫눈에 반한 것으로 그치지 않고 일사천리로 결혼까지 골인한, 자타 공인 열렬한 사랑의 상징이었다.

……디아나는 생각을 이을수록 정신이 피폐해지는 것 같아 생각을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귀부인들이 눈을 반짝이며 일시에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요즘은 하루에 몇 번이나 잠자리를 가지세요?”

“한 번? 두 번?”

“다섯 번?”

“어…….”

디아나는 멍하니 목소리를 내며 머리를 굴리려 애썼다.

그러니까, 지금 여기에서 ‘케이든과 자신은 방을 따로 쓰며, 가끔 동침하는 척만 한다’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거겠지.

찰나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쳐 갔다. 답을 망설이면 안 되는데, 하루에 몇 번 한다고 대답해야 하지? 다섯 번이라고 하기엔…….

그러던 중 머릿속을 빙글빙글 돌던 수많은 말 중 하나가 입 밖으로 불쑥 튀어 나갔다.

“하, 한 번?”

“겨우 한 번이요?”

“그……러니까, 아침, 점심, 저녁마다…… 한 번이요.”

“어머, 어머.”

“어쩜, 아직 뜨거우실 때군요!”

“몸은 괜찮으신지 모르겠네요. 여기서 체력을 쓰실 게 아니라 얼른 3황자궁으로 돌아가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디아나가 급히 말을 바꾸자 귀부인들이 잔뜩 흥분해 한 마디씩 뱉었다.

‘내가 방금 무슨 말을.’

그에 반해 디아나는 한발 늦게 자신이 내뱉은 말을 자각하고는 양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지금이라도 창문에서 뛰어내릴까? 그러면 이 수치심을 면할 수 있을 거야…….

디아나는 민망함과 수치스러움에 반쯤 넋을 놓아 갔다.

하지만 귀부인들의 눈에는 그 모습이 ‘하루에 다섯 번도 할 수 있다는데, 왜 우리는 하루에 세 번만 하는 거지?’ 하고 슬퍼하는 것처럼 보였다.

제각기 결혼 5년 차, 7년 차, 9년 차 등에 접어든 귀부인들이 결의로 눈을 빛냈다.

‘도와주자.’

‘도와줘야 해!’

잠자리는 부부 사이에 가질 수 있는 큰 기쁨 중 하나였다.

사실 이 자리에는 그조차 없었다면 진즉 이혼을 결심했을 여인들이 많았다.

그들은 결혼 후 약 1년간은 침실에서 나오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이들이었다.

어차피 그것도 다 젊을 때, 아직 사랑의 열기가 식지 않았을 때나 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귀부인들은 신혼인 디아나를 돕겠다며 적극적으로 나섰다.

“역시 유혹에는 옷만 한 게 없죠.”

“그보다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요?”

“세상에, 부인! 누가 들을까 겁나네요. 그렇지만 저는 속옷 쪽이 더 낫다고 생각한답니다.”

“역시 그렇죠? 최근에 ‘에스딜의 화원’이라는 의상실의 디자인이 유행이라던데…….”

“마침 제가 거기서 구매해 놓은 속옷이 두 벌이랍니다!”

“저기, 저는 정말 괜찮은데…….”

뒤늦게 정신을 차린 디아나가 그들을 만류하려 애썼지만, 갓 결혼한 그녀가 이미 남편과 볼 장 안 볼 장 다 본 귀부인들을 이길 수는 없었다.

“기운 내세요, 3황자비 전하!”

“성공하실 수 있을 거예요!”

“꼭 다섯 번 채우시길 바랄게요!”

결국 그녀는 귀부인들이 손수 챙겨 준 필승의 속옷 세트를 들고 3황자궁으로 돌아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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