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아, 진짜…….”
그 순간 페란트가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욕설을 중얼거렸다.
레베카는 제 귀를 의심하느라 저도 모르게 말을 멈추었다.
페란트가 레베카와 정면으로 시선을 마주하지 않은 채 불만스럽게 말을 쏟아 냈다.
“제가 저들과 따로 만나자고 약속을 잡은 것도 아니고, 누님께서 하신 말씀을 잊은 것도 아닌데. 제가 대화 한마디 나누는 것까지 전부 간섭하셔야 속이 시원하시겠습니까? 지나치십니다.”
“하.”
“적당히 좀 하십시오. 누님께서 보시기에는 제가 마냥 머저리겠지만, 저도 생각이라는 걸 할 줄 아는 놈이란 말입니다.”
레베카는 황당함에 헛웃음을 뱉었다. 그러나 페란트는 마지막 말까지 짓씹듯 내뱉고는 몸을 홱 돌려 사라져 버렸다.
레베카는 서늘한 눈으로 페란트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조금 전 그와의 대화에서 심상찮음을 감지한 그녀가 눈을 번득였다.
‘……아무래도 계획을 조금 더 앞당겨야겠어.’
* * *
데뷔탕트 무도회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사교 시즌으로 접어든 수도는 조용할 틈이 없었다.
과장을 조금 보태서 일주일 중 하루를 제외하고는 매일 파티, 다과회, 연주회 등의 모임이 있을 정도였다.
디아나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그만큼 세드릭 하이에른을 가까이서 살필 기회가 많이 남았다는 뜻이었으므로.
“다 같이 다과회요?”
“네. 엘리엇 전하랑 플뢰르랑 케이든까지요. 아, 혹시 바쁘시면…….”
“전혀, 전혀요. 전혀 안 바빠요!”
디아나는 이렇다 할 행사를 주최해 본 경험이 없었던지라, 플뢰르에게 찾아가 함께 다과회를 열자 제안했다.
플뢰르가 너무 뛸 듯이 기뻐하자 조금 미안해지긴 했다.
‘어디까지나 세드릭을 끌어들이기 위한 다과회니까.’
디아나는 제가 보았던 세드릭의 모습이 진실인지, 그리고 그가 말했던 ‘덜떨어진 거’가 피오나 옐링이 맞는지 확인할 필요성을 느꼈다.
디아나는 플뢰르의 동의를 얻어 낸 후 피오나 옐링, 세드릭 하이에른의 앞으로 초대장을 보냈고, 그들은 흔쾌히 참석하겠다는 답신을 보냈다.
그들 외에도 아직 정치적 영향력이 크지 않아 부담이 적은 어린 영식과 영애들이 참석 의사를 다수 밝혔다.
황후의 도움까지 얻어 다과회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마침내 며칠 후 다과회 당일이었다.
피오나는 세드릭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리며 수줍게 웃었다.
“날이 좋아서 다행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야유회를 겸하는 다과회이니만큼 날씨가 무척이나 중요한데, 다행이네요.”
세드릭은 마주 웃음을 띠며 동의했다. 그들은 다정한 태도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걸음을 옮겼다.
“아, 어서 와요.”
이윽고 정원 한쪽에 세워진 천막 아래로 발을 들이자 플뢰르와 디아나가 그들을 웃으며 맞이했다.
피오나와 세드릭이 나란히 고개를 숙였다.
“피오나 옐링입니다. 초대에 감사드립니다.”
“세드릭 하이에른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1황자비 전하, 3황자비 전하.”
정중히 인사하는 세드릭은 도저히 일전의 그 사람과 같은 인물로 보이지 않았다.
‘그때는 순간적인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그랬던 건가? 아니면…….’
디아나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은 채 태연히 그와 인사를 나누고, 그들을 자리로 안내했다.
피오나, 세드릭의 자리는 케이든과 디아나의 옆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손님들이 속속들이 도착하고, 빈자리가 모두 채워졌다.
플뢰르는 수줍게 몸을 일으켜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부족하나마 정성을 다해 준비했습니다. 짧게나마 즐거운 시간 보내고 가시길 바랍니다.”
그녀가 말을 마치고 자리에 앉자 사람들이 박수를 쳐 호응해 주었다.
합동 다과회는 생각보다 훨씬 더 성공적이었다.
엘리엇과 플뢰르는 원체 사람 좋기로 소문이 나 있던 터라, 어린 영식과 영애들 또한 그들을 어려워하지 않고 곧잘 이야기를 나누었다.
케이든 또한 타고나길 굉장히 서글서글한 사람이었고, 최근 있었던 여러 일로 화젯거리가 줄어들지 않아 무난하게 대화를 이어 갈 수 있었다.
디아나는 간간이 1황자 부부와 케이든의 말에 맞장구를 치고 피오나, 세드릭을 살피는 데 집중했다.
그러나 세드릭은 일전에 보았던 모습이 꿈은 아닐지 의심될 정도로 반듯한 모습만을 보여 주었다.
그에 디아나마저 조금 지쳤을 무렵. 세드릭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사람 좋은 미소를 띠었다.
“날이 너무 좋아서 그런데, 잠시 바람을 쐬고 와도 괜찮을까요?”
“얼마든지.”
피오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드릭은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정원 저편으로 멀어졌다.
‘어딜 가는 거지?’
디아나는 의구심 어린 시선으로 세드릭의 뒷모습을 흘깃 살폈다.
그녀는 약간의 차이를 두고 그를 따라가기 위해 일어섰다.
그러자 케이든이 놀란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디아나? 어디 가려고?”
“속이 좀 더부룩한 것도 같아서, 잠시 산책이나 하려고요.”
“그럼 같이 가.”
케이든은 그 말에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디아나의 말은 핑계에 불과했고, 그녀의 진짜 목적은 세드릭의 뒤를 밟는 것이었다.
케이든과 동행하게 된다면 일이 여러모로 복잡해질 가능성이 컸다.
디아나는 난처한 웃음을 지으며 몸을 숙였다. 그녀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직 이 사람들 모두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지 않으셨잖아요. 금방 돌아올 테니까 그동안 친분을 좀 쌓고 계세요.”
아직 정치적 영향력이 크지 않은 어린 영식과 영애들이 대부분이라지만, 두루두루 친분을 쌓아 두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케이든 역시 디아나의 말에 틀린 구석이 없음을 알기에 애써 아쉬움을 감췄다.
그가 그녀의 손을 만지작거리다가 손끝에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속삭였다.
“대신 빨리 돌아와야 해. 내 곁으로.”
“……알겠어요.”
디아나는 손끝을 움찔거리지 않으려 애쓰며 간신히 대꾸했다.
그러나 그 자리를 벗어나 세드릭이 사라진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는 내내 심장이 수런거렸다.
그녀는 양손을 가슴 앞으로 모아 쥐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손끝에 케이든이 남긴 입맞춤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전에는 안 이랬는데, 요즘 자꾸 의식되네.’
예전에는 케이든이 이렇게까지 의식되지 않았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계약 관계로 이루어진 부부였고, 모든 건 사랑에 빠진 ‘것처럼’ 보이기 위한 연기라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러니 그대도 나를 밀어내지 마.]
그날 이후, 어쩐지 케이든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어쩐지 ‘진짜’처럼 느껴져서…….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자.’
디아나는 고개를 휘휘 저어 애써 잡념을 털어 냈다. 지금은 세드릭의 뒤를 쫓는 것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어디로 간 거지?’
세드릭의 뒤를 밟았다는 의심을 피하기 위해 어느 정도 시간 차이를 두고 움직였더니, 그의 흔적을 찾기가 힘들었다.
디아나는 한참이나 주변을 돌며 세드릭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노을이 지기 시작할 때까지 세드릭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놓친 건가…….’
정신을 차려 보니 꽤 멀리까지 와 있었다. 발이 욱신거리는 것이 뒤늦게 느껴졌다.
어차피 사교 시즌은 앞으로 두여 달간 더 이어질 것이고, 세드릭을 살필 기회는 오늘이 아니더라도 많을 것이다.
‘피오나가 그렇게 되는 것도 내년의 일이니까. 아직 시간은 있어.’
디아나는 우선 다음을 기약하고 케이든에게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으며 몸을 돌렸다.
그때 잔디 사이로 삐죽 튀어나와 있던 돌멩이에 그녀의 발끝이 걸렸다.
몸이 크게 휘청거리는 감각에 디아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예상했던 고통 대신, 누군가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강하게 붙들었다.
“이런. 조심하셔야죠.”
디아나는 귀에 익은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눈을 떴다.
살랑―
한낮의 햇살을 닮은 금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흐트러졌다. 레베카와 닮은 듯 다른 연푸른색의 눈이 곱게 휘어졌다.
루드비히 카드몬드가 태양을 등진 채 그녀를 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3황자비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