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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53/145)

53화

디아나는 볼을 식히고 무도회장으로 돌아갈 생각으로 근처의 빈 휴게실을 찾아 들어갔다.

그러나 문이 닫히기 직전.

“……써 가게?”

“조금 더 있다가 가지.”

“미안. 파트너를 기다리게 할 수는 없잖아.”

복도 반대쪽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디아나는 문고리를 쥔 채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미간이 절로 좁혀졌다.

‘이 목소리는…….’

세드릭 하이에른?

본능이 경종을 울렸다. 지금 문을 닫아서는 안 된다고.

디아나는 휴게실 문을 아주 살짝 열어 둔 채로 바깥을 내다보았다.

그러자 반대편 복도에 자리한 휴게실의 문이 활짝 열려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열린 문 너머로 보이는 휴게실은 아수라장이었다.

디아나의 또래, 혹은 그보다 약간 더 아래로 보이는 영식들이 술에 취해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있었다.

그에 반해 문고리를 잡고 서 있는 세드릭은 완전히 멀쩡한 낯이었다.

그때 소파에 앉은 몇 명이 세드릭을 향해 야유인지 환호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지금 짝 있다고 자랑하냐!”

“우우, 재수 없다!”

“그래도 잘된 일이잖냐. 무려 옐링 공작의 사위, 더 나아가서 미래의 옐링 공작 남편이 되는 거라고.”

“맞아. 야! 피오나랑 잘해 봐라! 만약에 잘 안 되면 나 소개시켜 주고!”

“하여간 저 미친놈.”

영식들은 저들끼리 우스갯소리를 주고받으며 낄낄거렸다.

세드릭이 짐짓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만 놀려. 이만 가 볼게.”

“그래, 조심히 가라.”

“약혼식 때 꼭 불러 주고!”

세드릭은 끝까지 웃음을 잃지 않은 채 휴게실의 문을 닫았다.

달칵.

작게 문 닫히는 소리가 나며 복도가 적막해졌다. 세드릭은 문에 등을 기댄 채 잠시 가만히 서 있었다.

‘왜 안 가지?’

디아나는 의아함에 미간을 좁혔다. 그러나 직후.

“후…….”

세드릭의 얼굴에서 미소가 씻은 듯 사라졌다.

소름 끼치도록 무감한 얼굴이 된 그가 짜증스러운 한숨을 내뱉으며 제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앞으로 적어도 몇 년은 그 덜떨어진 거랑 같이 다녀야 할 텐데……. 벌써 역겹네…….”

담담해서 외려 섬뜩한 중얼거림이 문틈으로 흘러들어 왔다. 디아나는 경악해 입을 작게 벌렸다.

‘설마.’

저거…… 피오나 옐링을 지칭하는 말인가?

세드릭의 중얼거림은 상당히 애매했기에 디아나는 혼란스러워했다.

그사이,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하던 세드릭이 별안간 몸을 돌렸다. 그가 손을 뻗어 휴게실 문 옆쪽에 걸려 있는 작은 그림을 떼어 냈다.

우드득.

세드릭은 그것을 반으로 부수더니 조각들을 휴게실 문 밑에 끼워 넣었다.

안에서 바깥으로 나오게 하지 못하려는 의도가 명백한 행동이었다. 세드릭은 조금 후련한 얼굴로 손을 탁탁 털었다.

‘대체…….’

디아나는 그 모습을 보고 충격에 휩싸였다.

그러던 중. 세드릭이 불현듯 고개를 돌렸다. 디아나는 문틈 사이로 그와 시선이 마주친 듯한 느낌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

세드릭이 눈을 가늘게 뜬 채 디아나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더니 성큼 걸음을 떼었다.

디아나는 급하게 문에서 몸을 떼고 무프를 불러냈다.

벌컥!

디아나가 무프의 결계로 모습을 감추는 것과 거의 동시에, 세드릭이 휴게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그는 휴게실 안쪽을 샅샅이 훑더니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문을 닫았다. 문밖으로 발걸음 소리가 멀어졌다.

하지만 디아나는 발걸음 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후에도 한동안 휴게실을 벗어나지 못했다.

‘……대체 뭐야, 저 미친놈은?’

* * *

데뷔탕트 무도회는 어느덧 막바지에 다다랐다.

레베카는 밤이 깊을 때까지 피로를 견디며 꿋꿋이 자리를 지켰다.

케이든이 어떤 귀족과 접촉하는지도 파악해 두어야 했고, 자신을 지지하는 귀족들에게 자신이 여전히 건재하다는 사실 또한 각인시켜 두어야 했으니까.

‘얼추 됐나.’

레베카는 케이든이 디아나와 함께 3황자궁으로 돌아간 이후에야 한숨을 돌리며 벽에 기대어 섰다.

워낙 많은 사람을 상대해서인지 머리가 아팠다.

루드비히가 없었더라면 할 일이 두 배는 늘어났을 거라는 생각을 하자 끔찍했다.

홀로 생각을 정리하며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는데, 누군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1황녀 전하.”

“……아, 외조부님. 어쩐 일입니까.”

그는 핀들레이 공작이었다. 레베카는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급히 자세를 바로 했다.

제국 전체를 발아래 두다시피 한 레베카였으나, 그녀 역시 핀들레이 공작 앞에 서면 어쩔 수 없이 긴장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

핀들레이 공작은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레베카를 빤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페란트 전하께서는 오늘따라 유달리 즐거워 보이시더군요.”

“예?”

레베카가 어리둥절하게 되묻자 핀들레이 공작이 무도회장 한쪽을 턱짓했다.

그쪽으로 시선을 옮기자 페란트가 영식 무리 가운데에서 유쾌하게 웃고 떠드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건…….’

레베카는 페란트 주위에 앉은 영식 중, 가까이 지내지 말라 주의를 주었던 이들이 끼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미간을 구겼다.

민심은 한번 잃으면 되찾기 쉽지 않다.

레베카가 페란트에게 경고한 영식들은 음지에서 더러운 놀이를 일삼는 질 나쁜 이들이었다.

만약 페란트가 그들과 어울리다가 그쪽에 손을 뻗기라도 한다면, 민심은 순식간에 돌아설 것이다.

핀들레이 공작은 레베카가 당황하는 모습을 찬 눈으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얼마 전에 조셉이 2황자 전하와 바깥에서 만남을 가진 모양이더군요. 일전의 일로 근신하라 명했는데도 기어코 저택을 빠져나갔기에, 제 손으로 직접 다리를 부러트려 놓고 온 참입니다.”

그 말에 레베카가 저도 모르게 흠칫 어깨를 떨었다.

공작은 어지간하면 조셉이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고 그를 오냐오냐 키우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가 그 누구보다 가차 없어지는 경우가 두 가지 있었는데, 첫째는 조셉이 그의 말을 거슬렀을 경우.

그리고 두 번째는, 조셉이 레베카의 앞길에 방해가 되는 일을 저질렀을 경우였다.

“1황녀 전하.”

핀들레이 공작이 낮은 목소리를 냈다.

“저는 전하를 황제로 만들기 위해 제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제 딸 역시 마찬가지이지요.”

“…….”

“그런데 고작 2황자 따위를 통제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황위에 오르시겠다는 겁니까.”

레베카는 손톱이 손바닥에 박힐 정도로 주먹을 세게 말아 쥐었다.

자존심 강한 그녀에게 핀들레이 공작의 말은 더없는 모욕이었다.

하지만 그의 말에 틀린 구석은 없었다. 그녀가 이를 악물고 고개를 수그렸다.

“……알겠습니다.”

레베카는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렸다. 그녀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페란트에게로 다가갔다.

“페란트.”

“……아, 누님. 오셨습니까.”

방금까지만 해도 마냥 즐거워 보이던 페란트의 얼굴은 레베카를 발견하는 순간 불편하게 굳었다.

그 모습을 보자 불안감이 한층 커졌다. 레베카는 페란트의 주변에 앉은 영식들을 흘긋 일별하고는 입을 열었다.

“할 말이 있는데. 잠시 자리를 옮기는 것이 어떻겠니, 란트.”

“꼭 지금 하셔야 하는 말입니까? 아니라면 나중에 제가 따로 찾아뵙겠습니다.”

“뭐?”

레베카는 페란트의 태도에 황당하게 입을 벌렸다.

그러나 황당함은 곧 더할 나위 없는 분노로 바뀌었다.

그녀는 차게 가라앉은 얼굴로 이를 갈 듯 그를 불렀다.

“페란트.”

그 목소리에 페란트가 습관적으로 움찔했다.

레베카는 그를 지긋이 응시하다가 고개를 까딱하며 몸을 돌렸다.

그러자 한숨을 푹 내쉰 페란트가 어기적거리며 그녀를 따라왔다.

레베카는 사람들의 시선이 잘 닿지 않는 구석까지 가서야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는 분노를 억누르기 위해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쉰 후 몸을 돌려 페란트를 노려보았다.

“내가 분명 저치들과 어울리지 말라고 했을 텐데. 자칫했다가는…….”

“아, 진짜…….”

그 순간 페란트가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욕설을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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