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화 (43/145)

43화

‘……쥐새끼인 줄 알았는데, 표범 새끼였나.’

루드비히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차피 이렇게 되었으니, 지금은 차라리 깔끔하게 사과를 건네는 편이 나으리라.

생각과 행동 사이의 간격은 짧았다. 루드비히는 처연하게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숙였다.

“확실히 그렇군요. 비록 실수였다지만 3황자 전하께서 그로 인해 큰 부상까지 입으셨으니…….”

루드비히는 진심으로 케이든을 안타까워하는 듯 교묘히 ‘실수’라는 단어에 힘을 주었다.

그가 눈물을 참는 것처럼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맺었다.

“저 역시 1황녀 전하를 모시고 있는 만큼,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

루드비히가 서슴없이 고개를 숙여 버리자 케이든 역시 더 말할 여지가 없어졌다. 그가 속으로 혀를 쯧 찼다.

‘하여간 여우 같군.’

루드비히는 공공연한 레베카의 수족이다.

그런 그가 케이든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사과하는 모습은 곧 레베카의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루드비히가 케이든이 원하는 대로 선선히 사과를 건네는 모습에 약간이지만 혼란과 연민을 느낄 것이다.

‘정적인 상대에게 고개까지 숙이는데, 혹시 정말 실수였던 것은 아닐까?’ 하고.

조금 더 나아가면 케이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몇몇 귀족은 ‘실수였다는데, 굳이 사람들 앞에서 머리까지 조아리게 하는군’이라고 말하며 눈살을 찌푸릴 수도 있을 것이다.

루드비히는 이 한 번의 행동으로 레베카가 비록 ‘실수’였다지만 케이든을 다치게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한다는 이미지까지 얻어 냈다.

루드비히는 그것을 알고 있기에 재빠르게 고개를 숙인 것이었다.

그는 겉으로 보기에는 나긋하고 부드러운 청년 같지만, 목적을 위해서 제 자존심 따위는 서슴없이 팔아 치울 수 있는 승부사였으니까.

결국 케이든은 루드비히와 얼굴을 더 맞대고 있다가는 잃기만 할 것이라는 판단하에 그와의 대화를 마무리 짓고 그를 돌려보내야 했다.

* * *

한편, 페란트는 핀들레이 공작과의 대화에서 홀로 슬쩍 빠져나왔다.

‘그분은 영 불편하단 말이지.’

페란트는 2황비의 시야에서 벗어나자마자 크라바트를 엉망으로 풀어 헤치며 뒷머리를 벅벅 헤집었다.

자비에 핀들레이 공작.

그는 미소 띤 얼굴로 제 속내를 감추는 루드비히와는 다른 방향으로 속을 알 수 없는 인물이었다.

핀들레이 공작은 웬만한 어린아이를 한 번씩은 울려 보았을 정도로 싸늘하고 냉랭한 인상의 소유자였다.

그는 시종일관 무표정했다. 그와 정면에서 시선을 마주한 사람은 자연스럽게 어깨를 움츠리게 되었다.

페란트도 별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심하다면 심하다고 할 수 있었다.

“참 기분이 더러워지는 눈이야.”

페란트는 문득 불쾌한 기색으로 얼굴을 구겼다.

핀들레이 공작은 1황비 일가와 더불어 페란트를 마주할 때마다 그를 길가의 쓰레기 쳐다보듯 응시했다.

페란트는 그 시선이 소름 끼치도록 싫었다. 가끔은 화도 났다.

그래 봤자 일개 귀족 주제에, 감히 황족을 그런 눈으로…….

“……그런데 왜 2황자 전하께서는 늘 1황녀 전하와 연합하시는 거예요?”

바로 그때, 페란트는 희미하게 귓가를 파고드는 목소리에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

페란트가 서 있는 곳은 휴게실이 즐비한 복도였다.

그는 미심쩍게 눈썹을 구기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방금 내 얘기였던 것 같은데?’

페란트는 발소리를 죽이고 주위의 휴게실을 확인했다.

그러자 한 곳의 문이 아주 살짝 열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페란트는 벽에 몸을 바짝 붙이고 휴게실 안을 엿보려 했지만, 워낙 자그마한 틈이었던지라 휴게실 안의 모습까지는 볼 수 없었다.

페란트는 어쩔 수 없이 방문 안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신이 나서 재잘대는 목소리들로 미루어 보아 나이가 어린 귀족 영애들인 듯했다.

휴게실 안의 여인 중 누군가 발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이참, 영애는 수도에 올라온 지 얼마 안 되셨으니 모르실 수도 있겠네요.”

페란트는 행여 방 안에 제 기척이 들릴까 봐 더더욱 숨을 죽였다.

찻잔을 내려놓는 듯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이윽고 말이 흘러나갈까 염려한 듯, 조금 전보다 한층 작아진 목소리가 문틈으로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대신 어디 가서 말하고 다니시면 안 돼요.”

“영애도 참. 우리가 어디 그 정도 의리도 없는 사람들인가요?”

“사실 수도 사람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긴 해요. 1황비 전하와…… 2황비 전하의 관계요.”

이어진 말을 듣는 순간, 페란트는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여인들은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이어 갔다.

“1황비 전하와 2황비 전하가 왜요?”

“원래 폐하께서는 지금의 2황비 전하를 황비로 들이실 생각이 없으셨대요. 본래는 황후 폐하 이외의 황비를 두지 않으려 하셨는데, 핀들레이 공작가에서 강력하게 항의하는 바람에 1황비 전하를 들이셨으니까요.”

현 황후는 발하나스 제국의 우방인 라비크 왕국의 공주였다.

황제는 젊었을 적 라비크 왕국으로 잠시 유학을 떠난 적이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당시 왕자였던 현 라비크 국왕을 우연히 만나 진솔한 친구가 되었고, 이후 두 사람은 나란히 군주의 자리에 오르며 평화를 약속했다.

그 증거로 황제는 현 황후를 제 아내로 맞이했다.

그리고 자신은 후계 생산을 위한 종마처럼 다뤄지고 싶지 않다며, 자신이 원할 때까지 따로 황비를 두지 않을 것이라 선언했다.

하지만 핀들레이 공작을 위시로 한 귀족파는 그 결정에 격렬하게 반발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귀족파 측 사람을 황후의 자리에 밀어 넣어 황실에 간섭하겠다는 속셈을 갖고 있었지만, 대외적으로는 자칫 라비크 왕국이 발하나스에 관여할 수도 있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거기에 후일 라비크 왕국에서 후계자의 핏줄을 명분으로 땅을 요구할지도 모르는 일 아니냐며 강경한 입장을 고수했다.

결국 황제는 귀족파의 반발에 못 이겨 핀들레이 공작의 딸을 1황비로 들였다.

그에 귀족들은 황후를 견제할 말이나마 세웠음에 안심하며 황제의 결혼에 대하여 더 말을 얹지 않았다.

“하지만 1황비 전하께서는 당신이 황후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 것이 불만이셨던 거죠.”

1황비는 타국 출신인 황후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그러나 황후가 먼저 아들을 낳고, 그 후 1황비가 딸을 낳으며 그녀의 입지는 상당히 위태로워졌다.

물론 황후가 낳은 아들이 마력을 다루지 못하고, 몸이 약해 반푼이나 다름없다지만 여러모로 황실에 간섭하기가 모호해진 상황.

그런 1황비를 돕겠노라 자발적으로 황궁에 발을 들인 사람이 지금의 2황비, 아델라였다.

아델라는 1황비가 핀들레이 공녀였던 시절, 그녀의 시녀이자 절친한 친구였다.

아델라는 1황비가 황제를 술에 진탕 취하게 만든 날 그의 침실에 들어갔고, 그날 밤 아이를 가졌다.

그 일로 황제는 크게 분노했다.

그는 새로이 황비를 들일 생각도, 그 황비에게 제 아이를 가지게 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어쩔 수 없이 아델라를 2황비로 봉한 뒤.

1황비와 2황비가 계획적으로 자신을 농락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이후 보란 듯 제가 눈여겨보던 하녀 하나를 취해 황비로 봉했다.

그녀가 바로 케이든의 친모인 3황비였다.

“물론 시간이 많이 흐른 후로는 황제 폐하께서 2황비 전하도 간간이 찾으셨고, 그 바람에 2황녀 전하까지 태어나신 거지만…….”

“2황비 전하께서는 1황비 전하와 1황녀 전하를 제 목숨보다 아끼시는데, 자식이라고 어디 다르겠어요? 애초에 아이를 가지고 황비가 된 것도, 다 그분들을 도우려던 거죠.”

“저런. 그러면 2황자 전하께서는 태어났을 때부터 1황녀 전하의 도구나 다름없었던 거로군요.”

“바로 그거예요.”

이야기를 듣는 동안 페란트의 숨이 점점 거칠어졌다.

그는 당장에라도 문을 열고 들어가 테이블을 엎으며 고함을 치고 싶었다.

하지만 저들의 말대로, 태어났을 때부터 2황비가 세뇌하듯 되뇐 말을 붙잡고서 분노를 억눌렀다.

경거망동하지 마라. 절대 그분께 폐를 끼치지 마라.

2황비의 음산한 목소리와 여인들의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뒤섞여 꼭 기분 나쁜 소음처럼 들렸다.

“아무튼, 방어전은 결국 모든 연대가 우승을 놓고 싸우는 행사잖아요. 그런데 1황녀 전하께서 너무도 당연하게 2황자 전하가 전공을 세울 기회를 빼앗아 가시는 게 아닐까 염려가 되는 마음에…….”

누군가 은근하게 말꼬리를 흐리며 그의 처지를 비웃었다.

그에 페란트가 끝내 이성을 잃고 문고리로 손을 뻗는 순간.

“숙녀들의 대화를 엿듣는 것은 신사의 도리가 아니라 말씀드렸을 텐데요.”

나긋한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 등 뒤에서 그의 손을 잡아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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