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연지곤지]
“디아나, 그만.”
“아.”
엷은 웃음기가 어린 목소리에 디아나가 퍼뜩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자 케이든은 외려 더욱 무게를 실어 그녀의 손에 얼굴을 기댔다. 그가 장난스럽게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말했다.
“물론 나야 좋긴 한데. 그대는 사람들이 다 보는 데서 이래도 괜찮겠어?”
“으악.”
그 말에 뒤늦게 이곳이 연무장 한복판임을 깨달은 디아나가 작게 비명을 지르며 손을 거두었다.
그녀가 드물게도 허둥지둥하며 수건을 옆에 내려놓았다.
케이든의 앞에만 서면 어쩐지 한없이 허술하고 정신없는 사람이 되는 기분이었다.
“죄송해요, 기분 나쁘셨죠.”
“그럴 리가. 오히려 좋았…….”
“네?”
“아, 아니. 하나도 기분 안 나빴다고.”
‘만져 주는 게 기분 좋았다’라고 하려던 케이든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황급히 말을 돌렸다.
그는 속으로 저 자신에게 작은 욕지거리를 중얼거리며 애꿎은 얼음물만 벌컥 들이켰다.
그사이, 민망함을 추스른 디아나가 케이든에게 샌드위치를 건네며 목소리를 낮췄다.
“사실 날씨는 반쯤 핑계고, 드릴 말씀이 있어서 겸사겸사 찾아왔어요. 모의 전투가 코앞이라 바쁘시잖아요.”
“핑계…….”
그 말이 얼음물보다 확실하게 이성을 돌려놓았다.
어쩐지 허탈한 기분에 실소하며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케이든이 샌드위치를 받아 들었다.
“하지만 그대가 할 말이 있다고 했으면 늦게라도 돌아갔을 거야. 아무튼, 무슨 일인데 그래?”
그의 물음에 디아나가 힐끔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기사들이 그들과 거리를 둔 채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있었기 때문에 외려 궁 안에서 얘기할 때보다 말이 새어 나갈 걱정은 적을 듯싶었다.
호흡을 가다듬은 디아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난번에 제가 쓰러진 일 때문에 쫓겨난 두 시녀…… 혹시 기억하세요?”
“아, 그대가 수도 출입 금지령이라는 관대한 처분을 내려 주었던 이들 말이군. 잊을 수 있을 리가.”
케이든은 그때를 돌이켜 보면 다시 생각해도 심장이 선득해지는지 스산하게 웃었다.
디아나는 케이든의 손에 들린 빈 잔을 가져와 얼음을 채우고, 작은 쪽지와 함께 그것을 돌려주었다. 그녀가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그들이 심부름꾼을 통해 제게 이 쪽지를 전했어요. 선처에 감사하는 의미로 보답을 하고 싶다면서요.”
“보답이라…….”
“대지 속성 중급 정령사의 소재를 알리는 내용이에요.”
“……뭐?”
케이든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그는 눈짓으로 디아나의 허락을 구한 후 다급한 손길로 쪽지를 열었다.
<안타르.
대지 속성의 중급 정령사.
현재 불법 격투장 ‘비타스’ 소속.>
케이든은 짤막한 쪽지의 내용을 확인한 후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미심쩍은 듯 미간을 찌푸렸다.
“……중급 정령사쯤이나 되는 이가 불법 격투장에 매여 있다니. 영 못 미더운데.”
“그래도 확인 정도는 해 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 쪽지는 전하께서 가져가셔도 괜찮으니 레밋 경께 조사를 부탁드려 보는 것도…….”
디아나는 초조한 마음을 감추며 애써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안타르와의 계약은 뮈젤이 잘 마무리했다고 했으니, 케이든을 비타스에 가게끔 만들기만 하면 돼.’
케이든은 굳이 안타르의 존재가 아니더라도 불법 격투장 중 질 나쁜 축에 속하는 비타스, 그리고 비타스가 제시하는 계약의 불공정함을 알게 되면 분명 분노할 것이다.
그가 비타스를 없애고, 안타르가 그에 감동하여 케이든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고 하면 레베카의 의심을 살 일 없이 전력을 보충할 수 있었다.
한편, 케이든은 쉽사리 경계를 떨치지 못하고 쪽지를 노려보았다.
‘……설마 또 디아나를 해하려는 수작은 아니겠지.’
두 시녀는 이미 타니아와 함께 디아나에게 불손하게 군 전적이 있었다.
결국에는 디아나 덕에 목숨을 건졌다지만 한번 그런 마음을 먹었던 자가 두 번이라고 못 먹겠는가.
하지만 쪽지에 담긴 내용대로, 중급 정령사를 찾는 것은 지금 케이든에게 가장 절실한 부분을 채울 기회이기도 했다.
“확인…… 해 보실 거죠?”
그때 디아나가 불안을 이기지 못하고 자그맣게 덧붙였다.
그에 한숨을 삼킨 케이든이 쪽지를 접어 갈무리하며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 할 것 같아. 미안해, 디아나. 아무리 그래도 그대를 업신여겼던 자들인데…….”
“애초에 이 쪽지를 들고 온 게 저잖아요. 저는 정말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
‘됐다.’
디아나는 속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안타르를 제4연대로 데려올 수 있다면 모의 전투에서의 승리는 확실했다.
‘그럼 그다음을 준비해야겠네.’
이런저런 기억을 떠올리다 보니 마음이 급해졌다. 디아나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자 케이든이 따라 일어났다.
“돌아가려고?”
“네. 얼음도 동난 것 같고…… 다들 이만하면 충분히 쉬신 것처럼 보여서요.”
디아나가 빙긋 웃으며 한 말에 평화롭게 널브러져 있던 기사들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그들은 모종의 시선을 주고받으며 소리 없이 입을 벙긋거렸다.
야, 우리 비 전하께 뭐 잘못했냐?
몰라……. 찍혔나?
겉모습이랑 다르게 되게 얄짤없는 분이네…….
등 뒤의 웅성거림을 듣지 못한 디아나는 사용인들에게 돌아갈 채비를 하라 일렀다.
케이든은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불쑥 물었다.
“그런데, 디아나.”
“네?”
“정말 말은 안 놓을 거야? 부부 사이에 나만 말을 편하게 하는 것도 좀 그런데.”
케이든이 어색하게 볼을 긁적였다. 디아나는 난처한 웃음을 띤 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제가 어떻게 감히 그래요.”
“부부 사이에 ‘감히’라는 표현을 쓸 것까진 없지. 내가 안 괜찮아서 그래. 아, 나도 같이 공대를 쓰는 건 어때?”
“그건 제가 좀…… 불편할 것 같은데요?”
디아나가 대번에 어깨를 움츠리며 얼굴을 찡그렸다.
제게 공대를 쓰는 케이든이라니.
이따금 그가 장난하는 식으로 내뱉는 공대도 부담스러운데 평소에도 공대를 듣는다면 황송함에 기절할지도 몰랐다.
케이든은 연이은 거절에 시무룩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안도의 미소를 지어 보인 디아나는 응원하는 차원에서 그의 어깨를 토닥이고 발길을 돌려 궁으로 돌아갔다.
“……이상하단 말이지.”
케이든은 멀어지는 디아나의 모습을 지그시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묘한 섭섭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건 제가 좀…… 불편할 것 같은데요?]
디아나는 세상 그 누구보다 케이든에게 호의적으로 굴다가도, 이상하게 그가 그녀와의 거리를 좁히려고 할 때마다 칼같이 선을 그었다.
그녀는 자신이 케이든에게 무언가를 해 주는 것은 당연히 여기면서, 케이든이 그녀를 위해 무언가를 하려 하면 그것을 무척이나 부담스러워했다.
하여 케이든은 조금 억울했다.
그의 선 안으로 먼저 발을 들인 것은 디아나인데, 그녀는 제 선 안으로 케이든이 발을 들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느낌이라서.
‘이게 뭐라고 이렇게 서운한 건지.’
케이든은 무겁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디아나를 따라 하는 것처럼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그가 이내 파트라슈에게 다가갔다.
* * *
1황자 엘리엇 리 블루벨은 현재 유일하게 한가한 황자였다.
그는 마력을 다루는 능력이 전무했기에 기사단을 이끌 수도, 모의 전투에 참여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 사실을 그렇게까지 아쉬워하지 않았다.
“내가 가지고 태어나지 못한, 노력으로 얻을 수 없는 걸 갈망해 봤자 절망스럽기만 할 테니까요. 난 지금의 내가 가진 것들을 사랑하는 것으로도 만족해요.”
어깨를 으쓱이며 말한 엘리엇이 플뢰르의 손을 찾아 쥐었다. 그에 그녀가 쑥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역시 잘 어울리네.’
디아나는 맞은편에서 흐뭇한 웃음을 띤 채 그들을 지켜보았다.
두 사람 다 호감을 가질 수밖에 없을 만큼 바르고 선한 사람들이라, 저렇듯 나란히 붙여 두니 자연히 마음이 평화로워졌다.
모의 전투를 일주일 앞둔 지금.
엘리엇과 플뢰르는 황궁 내에서 가장 한가한 황족이었고, 디아나 또한 케이든이 모의 전투 준비로 정신없었기에 달리 어울릴 이가 없었다.
하여 1황자 부부는 거의 매일같이 디아나를 찾아와 그녀와 함께 찻잔을 기울였다.
그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디아나는 1황자 부부에 대한 불편함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다.
플뢰르가 얼음을 동동 띄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여름이 가까워져서 그런지 조금 더운 감도 없지 않은데, 역시 여기가 조용하고 좋네요.”
“그러게요.”
디아나는 그녀의 말에 동의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들이 있는 곳은 황궁 깊은 곳에 있는, 황족들만이 출입할 수 있는 유리온실이었다.
본래는 중앙 정원에서 티타임을 즐기려 했으나, 그곳은 귀족이라면 누구나 출입할 수 있는 곳이기에 갈수록 사람이 늘어 북적거렸다.
1황자 부부와 3황자비가 주기적으로 중앙 정원에 나타난다는 소식에, 그들에게 말을 붙여 보고자 종일 중앙 정원에 상주하는 귀족마저 생길 지경이었다.
하여 세 사람은 소란을 피해 이곳으로 자리를 옮겼고, 그것은 옳은 선택이었다.
레베카와 가까이 지내는 황족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아 다행이었다.
‘벌써 봄이 끝나 가고 있구나.’
디아나는 유리창 너머에서 내리는 햇살에 미간을 옅게 찡그렸다.
그녀가 손으로 눈가에 그늘을 드리운 채 푸른 하늘을 바라보던 중.
‘……벨라도바?’
유리창 너머, 저 멀리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벨라도바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