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상처는 치료하고 나올 줄 알았는데.”
숨이 가빠 띄엄띄엄 상대를 부르자 허공에 물감을 칠하듯 스르륵 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경기장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분명했다.
상대는 어두운 클로크로 온몸을 가린 채 얼굴에는 괴상한 부엉이 가면을 쓰고 있었다.
온갖 잡념이 머릿속에 맴돌아 어지러웠다.
안타르는 혼란스러움을 털어 내고자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으나 소용없었다.
“당신 뭡니까? 뭔데 나를 도와준…… 겁니까?”
도왔다.
그 말을 입 밖에 내는 순간 어쩔 수 없이 울컥 목이 메었다.
아무에게도 도움을 받지 못할 것이란 무력감. 이대로 죽고 싶지 않다는 절망감.
그때 느꼈던 감정이 다시금 떠올라 말을 잇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삶을 바꿀 기회라니, 대체…….”
“말 그대로야.”
부엉이 가면을 쓴 이가 안타르와 대조되는 차분한 목소리를 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 비타스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일할 생각이 있어? 난 당신과 계약하고 싶어. 원하는 조건이 있다면 최대한 맞춰 줄게.”
“내 의사를…… 물어본다고요?”
“그래.”
“왜?”
이런 식의 동등한 ‘제안’은 처음이었던지라 안타르가 경계심으로 미간을 구겼다.
더군다나 지금의 그는 막 상대에게 목숨을 빚진 상황이었다.
목숨의 대가로 충성을 요구해도 이상하지 않을진대.
마치 어렸을 적 도둑질을 해 경비대에 끌려갈 뻔했던 자신을 구해 주고, 그 대가로 계약을 요구했던 비타스의 사장처럼.
그 모습을 본 상대, 디아나가 저도 모르게 가면 아래로 한숨처럼 미소 짓고는 입을 열었다.
“나는 당신에게 각인 같은 충성을 바라는 게 아니니까.”
그 누구라도, 레베카라는 빛에 눈이 멀어 그녀가 제 목을 조르는 것조차 깨닫지 못했던 과거의 자신 같지 않았으면 해서.
그 말에 안타르의 어깨가 굳었다. 디아나는 잠잠히 말을 이었다.
“그래서 선택할 기회를 주고 싶었어. 위험한 일이니까 냉정하게 재고 판단해. 내가 당신에게 도움이 될 사람인지, 아닌지. 그래서 내가 당신에게 도움이 될 사람이라고 판단되면 날 이용해. 대신 나도 그 대가로 당신을 이용하는 것.”
“…….”
“그게 내가 당신에게 제안하는 거래의 조건이야.”
말을 마친 디아나가 품에서 종이를 꺼내 들었다.
백지나 다름없는 종이에는 단 세 줄의 문장과 그녀의 서명만이 적혀 있었다.
<첫째, 안타르는 D. 옵스큐르를 고용주로 여기며 명령에 따르되 명령의 협의가 가능하다.
둘째, 안타르는 D. 옵스큐르와의 계약에 대해 임의로 발설할 수 없다.
셋째, 안타르는 D. 옵스큐르의 신상에 관해 물어선 안 된다.>
디아나는 그것을 안타르에게 건넸다.
“이외의 조항은 추가하고 사인해도 돼. 정령사끼리의 계약은 마력을 담은 서명을 통해 어길 수 없으니까. 그래도 며칠 내로는 결정해 줬으면 좋겠네.”
‘유로의 대가야 안타르가 흘린 피로 대신했다지만…… 어차피 무프의 대가도 치르러 가야 하니까. 뒷일은 뮈젤에게 맡기면 되겠지.’
어둠 속성 정령만이 지닌 이 ‘특이성 대가’라는 것은 참으로 불편하고 귀찮기 짝이 없었다. 디아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러나 안타르는 그때까지도 말이 없었다.
“안타르?”
디아나는 안타르가 종이를 받아 들지 않고 멍하니 저를 바라보고만 있자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했다.
그 부름에 이성을 되찾은 안타르가 무언가를 결심한 듯 입술을 닫고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지금 무슨…….”
디아나는 당황해 한발 물러서려 했다.
하지만 안타르가 그녀의 손을 잡고 손등에 이마를 대는 것이 먼저였다.
그가 조용히 입술을 달싹였다.
“고맙습니다.”
“…….”
“정말…… 고맙습니다.”
그에 멈칫한 디아나는 잠시 가만히 선 채로 그가 감정을 추스르기를 기다려 주었다.
안타르는 희고 고운 손등에 이마를 기댄 채 눈을 감았다.
당신은 대체 누구인지.
당신이 어떻게 나를 알고 있는지.
당신이 내 이름을 부를 때마다 묻어나는 알 수 없는 친근감은 무엇인지.
내게 무슨 쓸모가 있다고 이런 계약을 제안하는 것인지.
묻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차마 그것들을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아니, 중요하지 않았다.
“계약…….”
당신은 내게 선택권을 주고 싶다고 말했지만.
“하게 해 주십시오.”
사실 당신을 처음 만난 순간부터 내게 선택권이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르겠으니.
* * *
며칠 후, 한낮의 황궁 연무장.
케이든은 부쩍 강해진 햇빛 아래서 옷소매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말했다.
“다들 잠시 휴식하지.”
“흐어어.”
“드디어 쉬는구나.”
케이든이 말을 내뱉자마자 제3연대 소속 기사들이 검과 활을 내던지며 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그들 중 몇은 더위를 견디지 못하고 상의를 훌렁훌렁 벗어 던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케이든은 땀을 닦아 내고는 다시금 검을 고쳐 쥐었다.
그 모습을 본 파트라슈가 질린다는 듯 물었다.
“전하께서는 안 쉬십니까? 물론 쉬면 안 되는 상황이긴 합니다만…….”
“알면서 뭘 물어.”
케이든은 성의 없이 대꾸했다.
훈련으로 인한 열기에 질식할 것 같았지만 잠깐의 휴식조차 아까웠다.
파트라슈는 묵묵히 다시 검을 휘두르기 시작한 그를 보며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얼마 전부터 계속 저러시네. 물론 모든 걸 걸고 덤벼야 이길 수 있는 상대가 맞고, 저런 태도 변화는 환영이긴 하지만…….’
케이든은 디아나가 쓰러진 이후, 전보다 더 철저하고 강하게 레베카를 넘어서려 애쓰고 있었다.
부관으로서야 반길 만한 변화이긴 했지만, 가끔은 지나쳐 보여 걱정이 되었다.
‘말려도 안 들으실 텐데.’
그간의 경험으로 인해 파트라슈는 제 충고 따위 케이든이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그가 에라 모르겠다, 하고 흙바닥 위에 벌렁 드러눕는 순간이었다.
“……디아나?”
“예?”
케이든의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 파트라슈도 덩달아 놀라 상체를 벌떡 일으켜 세웠다.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연무장 저편에서 디아나가 사용인들과 무언가를 품에 안은 채 다가오고 있었다.
“케이든.”
케이든을 발견한 디아나가 반가이 미소 지었다.
그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케이든이 서둘러 그녀에게 다가갔다.
파트라슈는 드러누워 쉬던 저보다 검을 휘두르던 케이든이 그녀의 기척을 빠르게 감지했다는 사실에 내심 혀를 내두르며 주섬주섬 몸을 일으켰다.
“날이 더운데 여기까진 어쩐 일이야? 몸은?”
케이든은 디아나의 앞에 서자마자 걱정부터 내뱉었다.
그러자 디아나는 민망하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황궁의께서도 이제 다 나았다고 하셨잖아요. 아무래도 다들 더우실 것 같아서 황후 폐하께 부탁해 얼음을 받아 왔어요. 마침 다들 쉬고 계셨나 보네요.”
디아나와 사용인들이 가져온 것은 작은 동산을 이룰 만큼 많은 양의 얼음이었다.
케이든은 디아나와 사용인들이 한쪽에 얼음을 정리하는 동안 상의를 탈의한 기사들에게 눈을 부라렸다.
허둥지둥 옷을 주워 입는 기사들 사이를 파트라슈가 발랄한 걸음으로 가로질러 다가왔다.
“오셨습니까, 비 전하.”
“아, 레밋 경.”
“번거로우셨을 텐데 감사합니다. 물론 비 전하께서 챙기시려던 건 저나 기사들이 아니라 주군이겠지만.”
파트라슈는 두 사람이 계약으로 맺어진 관계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었지만, 괜히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했다.
그 말에 민망한 듯 헛기침하는 디아나를 대신해 케이든이 파트라슈의 등을 밀었다.
“그렇게 눈치가 좋은 놈이 왜 여기 있어? 저리 꺼져.”
“귀가 빨개지셨는데요, 주군.”
“시끄러워.”
케이든은 낮게 윽박질러 파트라슈를 쫓아내고는 디아나와 함께 자리를 잡고 앉았다.
디아나는 그에게 얼음을 잔에 담아 내밀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며칠 사이에 얼굴이 많이 상한 것 같아요. 너무 무리하고 계신 건 아니죠?”
“아니야.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케이든은 아무렇지 않게, 장난기마저 느껴지는 얼굴로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속내는 달랐다.
디아나의 말로 인해 코앞까지 다가온 모의 전투를 상기한 그의 얼굴이 미미하게 어두워졌다.
‘방어 전력이 부족해.’
모의 전투는 전야제 느낌의 토너먼트와 연대별로 진영의 깃발을 지키는 방어전으로 진행된다.
토너먼트야 그가 단신으로 쓸어버릴 수 있다지만, 어디까지나 모의 전투의 핵심은 방어전이었다.
문제는 바로 그 지점이었다. 케이든을 비롯해 제3연대에는 방어에 특화된 정령사가 전무하다.
이번 방어전에서 또다시 패배한다면 레베카의 세력을 막을 수 없다는 생각에 어깨가 무거웠다.
‘또…….’
한편, 디아나는 케이든의 마력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고는 흠칫했다.
그녀는 급하게 주위를 둘러보다가 급한 대로 얼음을 감싼 수건을 집어 들었다.
“잠시만요. 땀을 너무 많이 흘리신 것 같아요.”
“어?”
케이든이 당황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거나 말거나 디아나는 수건으로 케이든의 얼굴을 닦아 주는 척 손으로 그의 얼굴을 열심히 만지작거렸다.
‘가라앉아라, 가라앉아라.’
디아나는 열심히 케이든의 얼굴 이곳저곳을 매만졌다.
진하고 가지런한 눈썹도, 곧은 콧날도, 하얗고 부드러운 뺨도…….
‘응? 감촉이 왜 이렇게…… 부드럽지?’
디아나는 케이든의 마력을 가라앉히다가 말고 심각하게 미간을 좁히며 그의 볼을 꼬집었다.
그녀가 그의 볼을 조몰락거릴수록 케이든의 얼굴이 점차 기묘하게 변했다.
결국 간지러움을 견디지 못한 그가 그녀의 양손을 붙잡았다.
“디아나, 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