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이게 지금 누굴 훈계하려 들어! 길거리에서 빌어먹던 걸 살려 놨더니 이젠 내가 우스운 거냐, 어?”
억센 손이 여자의 멱살을 붙잡고는 그녀를 벽으로 거칠게 밀쳤다.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낀 디아나는 땅을 박차고 달려갔다. 남자의 목소리에서 점점 진득한 살기가 피어났다.
“너 정말 내 손에 죽고 싶어? 기껏해야 부길드장 주제에 작작 하란 말이야, 작작!”
“제가 죽어도 수장님께서 이런 짓을 그만두시기만 한다면 저는……!”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결국 남자가 화를 이기지 못하고 한쪽에 놓여 있던 화병을 잡아채 여자에게 던지려던 순간이었다.
서걱―
허공에 돌연 보랏빛 선이 그려지더니 남자의 목이 그대로 날아갔다.
그 피를 뒤집어쓴 여자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다가, 한발 늦게 기겁했다.
“으, 으아악!”
여자가 놀라 비명을 지르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쿵, 묵직한 소리와 함께 수장의 커다란 몸과 머리가 피 웅덩이를 뒹굴었다.
디아나는 급한 마음에 반사적으로 능력을 사용하고는 여자의 앞으로 다가갔다.
“괜찮아요?”
“어, 어…….”
여자는 조금 전 목격한 광경에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결과적으로는 디아나가 그녀의 목숨을 구했다지만, 눈앞에서 누군가의 목이 날아가는 것을 목격한 사람의 일반적인 반응이었다.
막다른 곳까지 다다른 여자의 팔꿈치가 벽에 걸려 있던 액자를 가볍게 건드렸다.
“아, 잠깐……!”
그에 여자가 화들짝 놀라며 팔을 물렸다.
하지만 그때는 액자 뒤에 숨겨져 있던, 침입자 방지용 함정이 발동된 후였다.
무수한 독바늘과 화살이 디아나를 향해 쏟아졌다.
‘죽는다!’
여자는 디아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본 뒤 눈을 질끈 감았다.
한발 늦게 공포심이 물러가며 죄책감이 찾아들었다.
어쨌거나 상대는 저 빌어먹을 수장에게서 그녀의 목숨을 구해 준 사람이었다.
하지만 조금 전 발동된 함정은 중급 정령사조차 쉽사리 막아내기 어려운 것이었다.
수장을 죽인 것을 보아하니 상대도 정령사인 듯 보이긴 했지만, 중급 정령사 이상이 어디 흔하던가.
자신의 바보 같은 실수로 인해서 은인을…….
“저기요.”
죽였…… 음?
여자, 뮈젤은 자신이 환청을 듣나 싶어 눈을 번쩍 떴다.
그러자 걱정스러운 기색의 청보랏빛 눈이 곧장 시야에 들어왔다.
“지금 1분째 숨을 안 쉬고 있는 것 같은데.”
디아나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 말에 자신이 숨을 참고 있었다는 것을 자각한 뮈젤이 황급히 숨을 들이켰다.
“이게 무슨…….”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오자마자 나온 말에 탄식이 섞였다.
뮈젤은 황망한 얼굴로 제 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았다.
정확히 반으로 잘린 독침과 화살들이 피 웅덩이 위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 가운데 서 있는 디아나는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모습이었다.
“마물……?”
뮈젤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가 곧장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
잠시 침묵하던 디아나는 이내 비스듬히 시선을 내리깔고 조곤조곤 말을 늘어놓았다.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마물은 아니에요. 그보다 내가 당신의 목숨을 한번 구했고, 또 조금 전에는 당신이 나를 죽일 뻔했으니 이 일에 대해서는 비밀로 해 주었으면 하는데.”
디아나가 생긋 웃었다.
“안 될까요?”
살고 싶다면 입을 다물라는 무언의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뮈젤은 전혀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애초에 디아나의 말에는 틀린 구석이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목숨을 구원받고도 그녀를 죽일 뻔했으니, 제 쪽에서 감사를 표해야 마땅했다.
뮈젤은 발밑의 참상에 시선을 두지 않으려 애쓰며 정중히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요즘 변종 마물의 출현이 잦아졌다는 소식이 들려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괜찮아요.”
‘변종 마물이 등장하기 시작한 게 이때부터였던가?’
디아나는 여상히 웃으면서도 속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회귀 전. 레베카는 황녀로서 간간이 기사단을 이끌고 마물들을 처리하러 다니곤 했다.
마물의 출현이 잦아지고, 변종 마물까지 등장하여 그 횟수가 급격히 늘어났던 것이 이시기쯤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한편, 디아나가 고민에 잠긴 사이 뮈젤은 그녀를 샅샅이 관찰했다.
‘이런 건 들은 적도, 본 적도 없어.’
분명 무례한 말이었지만, 뮈젤이 디아나를 마물로 착각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뮈젤은 정보 길드의 부길드장인 만큼 더 많은 것을 보고 듣는 것이 일이었다.
그런 그녀조차도 이 정도의 전력을 가진 정령사가 있다는 소식, 혹은 소문마저 들은 적이 없었다.
‘여기서 잡아야 한다.’
그것은 본능이었다.
뮈젤은 지금껏 대성한 투자처를 처음 발견했을 때와 같은 기분을 느꼈다.
눈앞의 여자는 심상찮은 변수가 될 법한 존재였다.
그런 변수를 마주했을 때 뮈젤이 취한 행동은 대개 두 가지였다.
첫째는 싹을 짓밟듯 말끔하게 지우는 것.
둘째는 누구보다 빠르게 우호적인 관계를 쌓아 두는 것.
보통은 첫 번째 방법으로 마음이 기울지만, 디아나의 무력은 조금 전에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한 상태였다.
현재 뮈젤이 지닌 전력으로 그녀를 죽이기는 요원해 보였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 아닌가.
‘어차피 목숨을 빚진 것도 갚아야 하니. 겸사겸사 나쁘지 않군.’
뮈젤은 짧은 새에 모든 판단을 끝마치고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즈음 상념을 떨쳐 낸 디아나가 본래의 목적을 상기하며 뮈젤에게 말을 걸었다.
“그건 그렇고, 의뢰할 게 있어서 왔는데요. 대금은 보석으로 치러도 될까요?”
“아니요. 아가씨께선 대금을 치를 필요가 없으십니다. 앞으로도 계속이요.”
“……네?”
디아나가 당황해 반문했다.
그러자 뮈젤은 더없이 환한 미소를 띠며 양팔을 벌리고 외쳤다.
“갑작스러우시겠지만, 은혜를 갚을 겸 아가씨를 윙즈의 길드장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이것이 뮈젤이 생각해 낸 최선이었다.
목숨을 빚지고, 더불어 보지 말아야 할 것까지 봐 버렸다.
그런 사람에게 돈을 내놓으라고 하는 것은 내 목을 베어 주쇼, 하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뮈젤 본인의 목숨과 정보 길드 윙즈를 보존하고, 동시에 디아나의 호감을 살 방법.
그것은 바로 디아나를 윙즈의 새로운 길드장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장차 위협이 될 누군가를 꺾을 수 없다면, 그 누군가의 아래로 들어가는 것이 가장 안전하니까.
위험에 처한 뮈젤을 구하고 걱정한 것을 보면 인품도 썩 나쁘지는 않아 보이고.
“어차피 아가씨께서 수장…… 아니, 이젠 전 길드장이군요. 이놈을 죽이지 않으셨더라도 제가 죽였을 겁니다. 자꾸 길드의 어린 심부름꾼들에게 더러운 짓을 하려 해서…….”
다시 생각해도 치가 떨리는지 뮈젤이 경멸의 기색을 내비쳤다.
디아나는 그제야 회귀 전, 뮈젤이 윙즈의 길드장이 되어 있던 것을 이해했다.
‘원래는 아까 같은 상황에서 뮈젤이 죽지 않고 저놈이 죽었던 거구나. 아마 뮈젤이 죽인 거겠지.’
그사이 뮈젤은 디아나에게서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간절히 덧붙였다.
“아가씨께서는 저를 비롯해 윙즈 길드원들의 은인이나 다름없으십니다. 부디 제게 은혜를 갚을 기회를 주십시오.”
“음…….”
디아나는 난처한 신음을 흘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뮈젤의 제안은 횡재다 싶을 정도로 혹했다.
‘원래는 위장 신분을 만들어서 차근히 세력을 쌓으려 했는데.’
길드 윙즈를 이어받게 되면 그렇게 수고를 들일 필요가 사라진다.
더불어 뮈젤이라는 유능한 전력도 얻을 수 있다.
끌리지 않는다면 거짓일 것이다.
‘하지만 이제 곧 황궁에 들어가야 하고…….’
아무래도 황궁에 머물게 되면 윙즈 길드장으로서의 업무를 원활히 수행할 수 없게 된다.
더불어 본래라면 뮈젤은 디아나가 아니었더라도 제힘으로 길드장의 자리에 올랐을 것이다.
그런데도 난데없이 나타난 자신이 그 자리를 홀랑 삼키는 게 옳은 일인가 싶어 주저가 되었다.
디아나의 침묵이 길어지자 뮈젤은 숨겨 두었던 비장의 수를 꺼내 들었다.
“귀찮으시다면 실질적인 길드장의 업무는 제가 다 처리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아가씨께서는 그저 길드 윙즈를 마음껏 이용하시면 되는 겁니다.”
“할게요.”
변심은 빨랐다.
명예 길드장이나 다름없는 대우를 하겠다는 말에 디아나는 재빨리 제안을 수락했다.
위장 신분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돈만 해도 그녀가 모아 두었던 비상금을 전부 털어야 했다.
앞으로 윙즈를 이용할 일이 적지 않을 텐데, 그때마다 대금을 치르지 않아도 된다면 디아나로서는 큰 이득이었다.
케이든의 세력을 굳건히 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돈이 필요할 테니까.
“감사합니다! 그럼 아까의 비밀 유지 관련한 내용도 포함해 계약서를 써 볼까요? 아무래도 그편이 안심되실 테니까요.”
뮈젤은 디아나의 확답에 활짝 웃으며 손뼉을 쳤다.
그녀는 계약서 양식을 찾아 책상을 뒤지며 친근하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새 수장님의 성함도 모르고 있었군요. 괜찮으시다면 성함을 알려 주시겠습니까? 저는 뮈젤입니다.”
“아, 그러네요. 디아나 서즈필드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옉?”
뮈젤은 혀를 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