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145)

10화

“……뭐?”

케이든은 순간 제가 잘못 들은 줄 알고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디아나는 아까의 케이든처럼 진중한 얼굴로 조용히 말했다.

“싫거나 불쾌하면 말해 달라 하셨잖아요. 전하가 싫지는 않았어요. 그냥 전하께서도 말씀하셨다시피 장소가 이렇다 보니 고민을 하느라.”

“…….”

“전하?”

디아나는 케이든이 어딘지 묘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자 고개를 기울였다.

그는 이내 허허로운 웃음을 터트렸다.

“그대는 참…… 이상할 만큼 내게 관대한 것 같단 말이지. 내가 그대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못된 놈이면 어쩌려고.”

디아나는 내심 뜨끔했다. 케이든은 역시 예리한 사람이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케이든 또한 그저 느낌일 뿐이라고 여겼는지, 별다른 추궁을 이어 가지는 않았다. 그가 제자리로 돌아가 앉으며 말했다.

“그보다 우리 관계가 의심받지 않으려면 더 중요한 부분을 발견했어.”

“뭔데요?”

“이름.”

“아.”

“명색이 사랑에 빠져 정치적 장벽도 뛰어넘은 이들끼리 전하, 영애라고 부르면 어색하잖나. 그러니 그대도 나를 이름으로 부르는 게 좋을 것 같아, 디아나.”

케이든이 담백하게 덧붙였다.

디아나는 그 태도와 목소리가 못내 좋아서 빙그레 웃었다.

“알겠어요, 케이든.”

“…….”

“아, 설마 지금 귀 빨개진 거예요?”

“놀리지 마. 내 의지로 되는 게 아니라고.”

케이든이 고개를 푹 숙여 귀를 감추고는 툴툴댔다.

디아나는 결국 사람들의 시선조차 잊고 낭랑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에 케이든의 귀 끝은 조금 더 발갛게 물들었다.

* * *

밀라드는 1황녀 레베카의 처소인 백염궁으로 가는 내내 또다시 씩씩거렸다.

“어떻게 감히 1황녀 전하의 부름을 무시한답니까! 그 천한 것이 감히 전하의 심기를 거스르기라도 하면……!”

“진정하거라. 어쨌든 상대 또한 3황자가 아니냐. 1황녀 전하께서도 이해해 주실 게다.”

서즈필드 자작이 나직한 어조로 제 아들을 진정시켰다.

그사이 두 사람은 마중을 나온 시녀를 따라 정원 한편에 마련된 만찬장으로 향했다.

자작과 밀라드는 그곳에 자리하고 있던 이들을 향해 깊이 허리를 굽혔다.

“초대에 감사드립니다. 나이젤 서즈필드입니다.”

“밀라드 서즈필드입니다.”

두 사람을 맞이한 건 나긋하고도 오싹한 목소리였다.

“어서 오게나. 그런데 한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은데.”

테이블의 가장 상석에 앉아 있던 1황비가 레베카와 꼭 닮은 눈을 번뜩였다.

그 물음에 밀라드의 어깨가 흠칫했다. 서즈필드 자작은 아들의 등을 툭 건드리며 침착하게 몸을 바로 세웠다.

1황비의 오른쪽에 앉아 있던 레베카가 재차 물었다.

“서즈필드 영애는 어디 있나? 내 아우의 아내가 될지도 모르는데 인사조차 하지 않을 수 없어 불렀거늘.”

“그 아이는 이른 아침 3황자 전하의 부름으로 진즉 집을 나선 참이었습니다. 함께 오지 못해 송구하옵니다.”

“아아, 그래. 3황자가…….”

레베카는 언뜻 즐거워 보이는 얼굴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하지만 그녀의 웃음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이 자리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안타깝긴 하지만 어쩔 수 없군요. 다음을 기약하는 수밖에. 그보다 두 사람 다 앉으시오. 음식이 식겠소.”

1황비의 왼쪽에 앉아 있던 2황비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서즈필드 자작과 밀라드는 우여곡절 끝에 자리에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밀라드는 상기된 얼굴로 연신 레베카에게 말을 붙이려 애썼고, 그녀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그에 호응해 주었다.

서즈필드 자작이 티 나지 않게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살필 때였다.

냅킨으로 입가를 톡톡 닦아 낸 레베카가 불시에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자작.”

“말씀하십시오, 1황녀 전하.”

“서즈필드 영애도 3황자에게 마음이 있다던가?”

“……예?”

“혹 내 아우가 영애를 배려하지 않고, 제 마음만 밀어붙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어서 말이야. 만약 그렇다면 언제든 내게 이야기하게.”

레베카는 더없이 상냥한 얼굴로 빙그레 웃어 보였다.

서즈필드 자작은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며 애써 그녀와 마주 웃었다.

‘……역시 의심하고 있군.’

지금 레베카는 서즈필드 자작에게 경고를 함과 동시에 그를 떠보고 있었다.

만약 3황자가 일방적으로 협력을 요구하는 것이라면, 자신이 처리해 줄 테니 이실직고하라고.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서즈필드 자작은 이내 평정을 되찾고 능숙한 상인의 태도로 돌아왔다.

“걱정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제 여식이 외로이 자라난 아이라 그런지, 3황자 전하께서 다정히 대해 주신 것이 무척 감명 깊었던 것 같더군요.”

“저런. 세상에는 그보다 나은 이가 훨씬 많은데도.”

“처음이란 본래 강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차피 지금껏 무언가 부모 된 도리를 해 준 적이 없으니, 원하는 사람과 결혼하겠다는 것까지는 막지 않으려 합니다.”

레베카는 그 말이 진심인지 알아보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자작을 살폈다.

그는 스스로조차 깜빡 속아 넘어갈 만큼 태연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어차피 저는 3황자를 지지할 생각이 없으니, 저희 측 사람으로 그가 결혼을 통해 세력을 늘리는 것을 막을 수 있다면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디아나는 아주 순종적인 아이이니 제 뜻을 거스르지 않을 겁니다.”

서즈필드 자작은 진실과 거짓을 교묘히 섞어 말을 맺고는 웃었다.

한동안 침묵하던 레베카는 이윽고 손에 든 와인 잔을 가볍게 흔들며 종전을 선언했다.

“그래, 그대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나는 결혼 선물이나 준비하도록 하지.”

“영광입니다.”

“서즈필드 영애도 그대들처럼 내 마음에 쏙 드는 이면 좋으련만.”

마지막 중얼거림이 퍽 음산했다.

레베카는 서늘한 분위기 속에서 곱게 웃으며 와인 잔을 기울였다.

피처럼 붉은 술이 꼭 그만큼 붉은 입술 사이로 사라졌다.

* * *

파르망디 거리에서의 만남으로부터 얼마 후. 마침내 케이든이 정식으로 서즈필드 가문에 구혼서를 보낸 날이었다.

서즈필드 자작은 개구리처럼 웃으며 축배를 들었다. 자작 부인과 밀라드는 탐탁지 않아 하면서도 옆에서 함께 축하했다.

그 결과 사용인부터 가주 부부까지 모두가 일찍이 술에 취해 잠들어 저택은 고요했다.

디아나는 그 틈을 타 미뤄 뒀던 위장 신분을 만들기로 했다.

회귀 후, 마담 드슈가 공들여 관리한 덕에 그 어느 때보다 고귀해 보이는 외양으로 낡은 클로크를 찾아 푹 덮어쓴 그녀가 입을 열었다.

“무프.”

디아나의 눈이 한순간 짙은 보랏빛으로 물들며 마나가 일렁였다. 소리 없이 방 안의 공기가 바뀌었다.

야옹.

직후 디아나가 걸치고 있는 클로크 자락 안쪽에서 검은색 고양이가 슬그머니 걸어 나왔다.

보랏빛 눈을 지닌 고양이, 중급 정령 ‘무프’가 영역 표시를 하듯 디아나의 발치에 제 얼굴을 비비적댔다.

그녀는 몸을 숙여 고양이의 귀 뒤를 가볍게 긁어 주며 말했다.

“알았어, 나도 반가워. 그래도 사냥은 나중에. 지금은 나갔다가 와야 하니까, 일이 끝나고 나면 사슴이든 토끼든 원하는 거 잡게 해 줄게.”

이애웅.

얼마나, 라고 묻는 무프의 울음에 디아나는 등 뒤로 식은땀을 삐질 흘리며 답했다.

“세 마리?”

애오우옹.

“……다섯 마리?”

냥.

불만스럽게 앙알대던 무프는 그제야 만족했다는 듯 귀엽게 냥냥거리며 디아나의 발등에 몸을 치댔다.

하여간 영악하기 짝이 없는 고양이야, 라고 생각한 디아나가 가볍게 혀를 차며 서즈필드 저택을 벗어났다.

‘저번처럼 무프에게 대가를 치르는 게 귀찮아 다른 사람의 눈에 띄는 것보다는 이편이 차라리 낫지.’

무프의 결계로 모습을 감춘 덕에 경비를 피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녀는 회귀 후, 케이든과 처음으로 마주쳤던 뒷골목으로 빨려 들어가듯 모습을 감추었다.

어둡고 퀴퀴한 골목길을 태연히 가로질러 도착한 곳은 커다란 도박장이었다.

“이 사기꾼 새끼가! 지금 누굴 속여 먹으려고 들어, 어!”

“졌으면 깔끔하게 패배를 인정하라고! 어이, 거기 경비! 이 사람 좀 보게!”

“이 자식이!”

도박장의 입구는 소란스러웠다.

취기가 오른, 행복한 꿈에 젖어 있는 얼굴로 안으로 들어가려 하는 사람.

모든 것을 잃고 밖으로 나와 공연히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

디아나는 싸움이 붙은 두 사람을 말리는 경비병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도박장 안의 사람들을 이리저리 피하며 향한 곳은 뒷문 쪽이었다.

‘계속 골목을 통해서 돌아가도 되겠지만, 그쪽은 발소리를 감추기가 어려우니까. 귀찮은 일이 생길 수도 있고.’

나무는 숲에 숨기라고 했던가.

무프의 결계는 계약자의 모습을 투명하게 보이게 해 주지만, 누군가와 부딪치는 것이나 발소리까지 막아 주지는 않았다.

그러니 차라리 이렇듯 사람들이 정신없이 뒤엉켜 있는 곳을 지나는 것이 편했다.

발소리를 감추기도 쉽고, 실수로 누군가와 부딪친다 한들 다들 술에 취해 있어 다른 이와 부딪쳤거니 착각하니까.

디아나는 입구와 반대편, 빈민가 깊숙한 곳으로 나 있는 뒷문을 통해 바깥으로 나왔다.

주위에 인기척이 없음을 확인한 그녀가 무프의 결계를 거두었다.

‘이 옆이던가?’

디아나는 자신이 찾는 정보 길드가 바로 근처였던 것을 기억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때 그녀의 눈에 반쯤 열린 문 너머,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찾았다.’

앞머리가 없는 단발에, 동그란 안경을 쓰고 있는 그녀는 회귀 전 알았던 정보 길드의 길드장이었다.

디아나는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띤 채 그리로 다가가다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는 누군가와 언성을 높이며 싸우는 중이었다.

“수장님, 제발! 그 아이는 아직 열 살밖에 안 됐단 말입니다! 제발 자제를……!”

‘수장님?’

디아나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 그녀가 알기론 정보 길드 ‘윙즈’의 수장은 저 여자였다.

그런데 여인은 마치 다른 수장이 있는 것처럼 굴고 있었다.

그때 문으로 가려진 안쪽에서 술에 거나하게 취한 듯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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