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르몬시터-79화 (79/86)

#79. 남편이랑 아들이랑

2018.01.31.

“그래도 일두 너…… 사고까지 낸 거는 좀 심한 거 아니냐?”

한 손으로는 단단히 입을 막고, 다른 손으로는 문고리를 꽉 움켜쥔 모단은 정신을 바짝 차리려 애썼다.

‘방금 일두라고 했어. 기억해야 돼. 일두, 일두…….’

휴대폰을 가져왔다면 녹음이라도 하는 건데, 속이 타들어갔다.

“왜? 별로 안 다쳤다며. 백지협 이사는 오늘도 멀쩡히 출근했더만. 애초부터 내가 계획한 게 딱 그 정도였어. 주총 파투내는 거.”

말투가 느물거리는 게, 실실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설마 내가 정말 사람까지 죽이려고 그랬겠냐? 나 그럴 배짱까진 없다. 돈도 없고.”

돈이라니.

돈이 모자라서 못 죽였다는 건가?

“봐라. 어설프게 썼더니 그 차가 백견 차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백견 집에서 나왔다고 무조건 갖다 박잖아. 시간이나 좀 끌어달랬는데 요란하게 박고 튀어버려서 오히려 눈에만 더 띄었다고. 환장하겠다, 나도.”

얼마간 침묵 후, 떨리는 목소리가 대꾸했다.

“그래도, 그건 아니었어.”

“하, 이 X신 같은 새끼.”

한쪽의 목소리가 으르렁대듯 낮아졌다.

“너도 같이 들었잖아. 그 개새X들이 죄다 우리한테 뒤집어씌우려고 판 짜놨다는 거. 그 주주총회 열렸으면 거기서 염훈하고 변진상 들먹인 백견은 엿 되고 우리는 완전히 X 됐을 거라고.”

“모르겠다. 그만두고 싶다, 나는. 솔직히 무서워.”

모단은 필사적으로 기억하고 곱씹었다.

“솔직히 난…… 어제 사직서 갖고 나왔다. 정신이 없어서 내진 못했지만…….”

“변진상이 잘도 받아주겠다.”

짤막한 욕설이 섞였다.

“정신 차려. 있는 놈들은 어떻게든 빠져나가겠지만 너랑 나는 아니야. 우리가 먹은 거 몇 배 이상으로 뒤집어쓰면 회사 잘리는 정도에서 끝날 것 같아? 인생 조지는 거야. 내 인생만 조지냐? 딸린 식구들은?”

옷을 추스르는 기척이 나더니, 기운 없는 목소리가 중얼거렸다.

“백견 오늘 회사 안 나왔어. 어디 있는지 아무도 몰라.”

“루머 때문에 쪽팔려서 못 나오는 걸 수도 있지. 그런 놈들이 무단결근 무서워하겠냐?”

“무섭다고, 나는! 이러다 갑자기 백견이 나타나서 우리 목이라도 조를까 봐 잠도 못 자겠다고!”

쿵쾅대는 발소리가 들렸다.

“야, 야! 김광남!”

급히 따라 나가는 소리도 들렸다.

그제야 앞치마 주머니에서 수첩과 펜을 꺼낸 모단은 방금 들은 것들을 휘갈겨 적었다. 그러고는 조용히 빠져나와 어린이집으로 내달렸다.

***

“잘 있었어요? 심심했죠?”

약속한 대로 일찍 돌아온 모단의 손에는 치킨 봉투와 편의점 봉투, 그리고 웬 쇼핑백이 주렁주렁 들려 있었다.

“이거 받아요.”

먹을 것들을 식탁에 내려놓은 그녀가 쇼핑백을 건넸다. 견은 얼결에 받아 들었다.

“뭔데요?”

“일주일 동안 옷 한 벌은 좀 그런 것 같아서 사왔어요.”

“상관없는데…….”

견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쇼핑백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심플한 디자인에 보들보들한 촉감의 잠옷이 나왔다.

“어차피 어디 나가진 않을 거고, 편하게 있으라고요.”

“고마워요. 근데…….”

한 벌이 아니었다. 똑같은 색과 무늬를 가진 여성용 잠옷과 남성용 잠옷까지 줄줄이 나왔다.

“요새는 그렇게 패밀리룩으로 나온대요. 마네킹에 나란히 입혀놓은 거 보고 뜻밖의 지름신이 내려가지고.”

“패밀리룩이요?”

“네. 직원이 선물하실 거냐고 물어보기에 남편이랑 아들이랑 커플로 입을 거라고 했어요. 잘했죠?”

“콜록!”

졸지에 남편 겸 아들이 된 견이 마른기침을 터뜨렸다.

모단은 씩 웃고는 여성용 잠옷을 챙겼다.

“원래 새 옷은 빨고 입어야 한다는데 오늘만 그냥 입어야겠다. 저 씻고 내려올게요. 치킨 식기 전에 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욕실 쪽으로 총총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던 견은 복잡한 심정으로 큰 잠옷을 잘 챙겨두고 작은 잠옷을 들었다. 가까운 방으로 들어가 갈아입고 나와서 주섬주섬 식탁을 차렸다.

맥주 한 캔을 꺼내놓고 하나를 더 꺼낼까 말까 망설이는데 뒤에서 모단의 목소리가 스윽 넘어왔다.

“술은 내 것만 있으면 되지, 뭘 고민하고 있어요?”

조금 커 보이는 잠옷을 걸치고 젖은 머리를 한 모단이 의자를 당겨 앉았다.

맞은편에 앉은 견이 둘 사이에 놓인 치킨과 모단이 쥔 맥주를 번갈아 보다가 꼴깍 침을 삼켰다.

“나 술 먹어도 괜찮은데. 민증 보여줄까요?”

“어디서 얼토당토않은 비주얼을 하고서 민증 타령이야. 내 직업윤리상 용납할 수 없으니까 요구르트나 마셔요.”

모단이 친히 빨대까지 꽂은 대용량 요구르트를 견의 앞에 놓아주었다. 견은 비죽거리던 입술로 빨대를 물었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모단의 얼굴에 절로 엄마미소가 떠올랐다.

“이런 말 하기 미안한데, 너무 귀여워요…….”

“미안하면 그런 말 하지 마요.”

“잠옷 잘 어울리네요.”

“모단 씨도 예뻐요.”

“그 얼굴로는 그런 말 하지 마요. 범죄자가 된 기분이니까.”

고뇌에 빠진 모단이 두 손으로 이마를 짚고 고개를 젖혔다.

“전에 무탈이한테 귀엽다고 했을 때는 아무 거리낌이 없었는데, 지금은 말하자마자 엄청난 죄책감을 느꼈어요.”

“괜찮아요. 나 애 아니잖아요.”

“29살 아니고 29개월 같은 얼굴을 하고서 애 같지 않은 소리만…….”

중얼대던 모단이 갑자기 고개를 내렸다.

“세상에. 내가 옛날에 어린이집에서 화장실 가는 거 도와준다고 했을 때 나 구속시키고 싶었겠어요…….”

요구르트를 뿜을 뻔한 견이 소맷부리로 입가를 문지르려다 새 잠옷임을 깨닫고 물티슈를 찾았다.

“구속까진 아닌데,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행이네요.”

어린이집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 이래저래 떠올려 보다 창백해진 모단은 차라리 생각하지 않는 게 낫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말을 돌렸다.

“근데 왜 무탈이라고 했어요?”

견이 섭호가 지어준 거라며 설명을 보탰다.

“원래 이름은 윤호였는데 다들 무탈이라고 불렀대요. 근데 섭호가 동생을 별로 예뻐하진 않았다나 봐요. 동생을 낳다가 엄마가 돌아가셨으니 어린 마음에 원망스럽기도 하고, 아버지도 늘 동생만 신경 쓰고.”

“충분히 그럴 수 있죠.”

“형아, 형아, 하면서 쫓아다니는 것도 귀찮고, 너무 약해서 못 따라오니까 매번 업어줘야 하는 것도 힘들어서 몰래 떼놓고 나가기도 하고 그랬다는데…… 그러다 갑자기 세상을 떠났으니. 그때의 죄책감이 아직도 있는 것 같아요.”

“비서님한테 그런 사연이 있었구나.”

모단이 홀짝 맥주를 마셨다. 시원해야 하는데 오늘따라 썼다.

“원래는 섭호에게도 이 모습을 보여줄 생각 같은 거 없었어요. 근데 중학생 때였나, 우연히 보게 됐는데…… 섭호가 날 끌어안고 엄청 울더라고요.”

미안해, 윤호야.

형이 잘못했어, 무탈아.

그 말만 몇 번이고 반복하던 어린 섭호를 떠올리면 견은 아직도 코끝이 찡했다.

“동생인 줄 알았대요. 천사든 귀신이든 다시 돌아온 줄 알았다고. 그 이후로 많이 챙겨줘요.”

“어떡해…….”

코끝이 빨개진 모단이 훌쩍 소리를 냈다. 간신히 눈물은 참았다.

치킨을 다 먹을 때까지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그러다 모단이 웃었다.

“왜요?”

“그냥, 얘기하면 할수록 견이 씨 맞구나 싶어서요.”

커도, 작아도, 그와 있으면 시간이 꽉 차는 건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이 통하고 마음이 통하는 데는 겉모습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음…….”

견은 선뜻 말을 고르지 못했다. 감동받은 한편, 난감해 보였다.

“그래도 조금은 중요한 것 같아요. 이 겉모습으로는 뽀뽀까지밖에 못 하니까.”

“으이구.”

적당한 틈을 보다가, 모단은 원에서 가져온 수첩을 꺼냈다.

“견이 씨, 실은 할 말이 있어요.”

“뭔데요?”

“오늘 15층에서…….”

자초지종을 들은 견은 단번에 그들이 우일두와 김광남이라는 걸 알아챘다.

“소문이 거기서부터 난 거였구만. 근데 쓸데없는 수고를 했네요. 난 그 정도 소문 가지고 창피해서 얼굴 못 들고 다닐 사람은 아닌데?”

“비슷하게 생긴 애가 어린이집 다닌다는 것까지 알았으면서 견이 씨가 얼마나 뻔뻔한지는 파악을 못 했나 보네요.”

“칭찬이죠?”

“그럼요.”

다소 찜찜하긴 했으나, 그보다 더 충격적인 건 사고에 관한 얘기였다.

“형하고 섭호를 친 게 한규철이 아니라 우일두였다니. 그럼 한규철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제가 전화를 걸었을 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했던 게 사실이었던 건가?

그렇다면 곧바로 혜숙을 공격해 온 건 뭐였을까. 모종의 계획이 틀어져서? 아니면 제가 오히려 자극한 거였나?

견은 일단 휴대폰을 꺼냈다. 아이답지 않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지협에게 방금 들은 말들을 전했다.

“한성어패럴 쪽에서도 난리 난 것 같대요. 저 없어졌다고.”

“최소 일주일은 전 세계를 뒤져도 못 찾을 테니 안심이네요.”

웃으며 대답하고 나서 모단은 조금 씁쓸해졌다.

“엄마도 잘 계시겠죠?”

“일요일에 다녀올까요?”

모단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마음 같아서는 직접 보아야 안심이 될 것 같긴 했지만 견이 불편할 것 같아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견은 단호했다.

“장거리 운전을 교대해 줄 수 없다는 게 많이 미안하지만 모단 씨만 괜찮다면 가요.”

***

일요일 아침부터 비가 왔다.

금지는 마루에 걸터앉아 마당에 떨어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손에 집히는 것을 기계적으로 입에 넣고 있었다. 그러다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헉, 아버님! 어떡해요? 아침에 딴 블루베리 제가 다 먹었어요!”

어느새 텅 빈 대접을 들고 눈꼬리를 늘어뜨린 금지를 본 성근이 픽 웃었다.

“실컷 먹어. 어차피 사람 먹으라고 키운 것인디.”

금지가 혜숙을 모셔온 ‘안전한 곳’은 바로 섭호의 본가였다. 섭호는 기겁했지만 자초지종을 들은 성근은 두말도 않고 승낙했다.

“뭔 비가 이렇게 온댜. 어제 땅콩줄기 미리 뽑아놓길 잘혔지.”

삐걱대는 화장실 문을 손본 성근이 밀짚모자를 탁탁 털고는 마루로 들어섰다. 혜숙이 안쪽 부엌에서 작은 소반을 들고 나왔다.

“김치전 조금 했어요. 점심치고는 이르긴 한데, 먹고 시장하면 이따 국수라도 삶아 먹게요.”

“우와, 대박!”

금지가 반색하며 얼른 앉았다.

비가 와서 밭일도 못 하니 전이나 부쳐 먹자는 혜숙의 제안에 돕겠다고 나섰다가 부엌 좁다며 쫓겨나 냄새만 맡고 있던 참이었다.

“손님을 성가시럽게 해서 워쩐대유. 도리가 아닌디.”

성근의 말에 혜숙은 손까지 내두르며 고개를 저었다.

“신세지는 객식구지 손님은 무슨 손님이에요. 밥값은 해야 저도 마음이 편하죠. 얼른 드세요.”

영 머쓱해하면서도 은근슬쩍 막걸리까지 챙겨 오는 성근을 보며 금지가 환히 웃었다.

“와, 아버님 최고!”

뒤이어 혜숙이 만든 김치전도 한가득 입에 넣고는 또다시 외쳤다.

“어머님 음식 솜씨도 최고! 저 여기 있는 거 너무 좋아요. 계속 이렇게 살고 싶다.”

금지를 바라보는 성근의 눈에 흐뭇함이 번졌다.

금지의 첫인상만 보고 부잣집 깍쟁이 아가씨로 오해했던 혜숙도 지금은 막내딸을 보는 눈이었다.

적당히 궂은 날씨와 진한 막걸리, 갓 부쳐 낸 전으로 느긋한 휴식을 즐기고 있는데, 밖에서 차 소리가 났다.

“모단 언니 벌써 왔나 봐요!”

금지가 제일 먼저 반갑게 일어섰다. 혜숙과 성근도 몸을 일으켰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정모단입니다.”

대문 안으로 들어선 모단이 혜숙과 금지에게 반가운 눈인사를 하고는 성근에게 공손히 인사를 했다. 사람 좋은 웃음으로 반긴 성근은 바로 옆에 서 있는 견을 보고는 멈칫했다.

“……안녕하세요.”

어색한 인사를 받은 성근의 눈매가 설핏 일그러졌다.

이런 견을 보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서 말문이 막혔다. 잊고 지내던 옛날 일들이 두서없이 스쳤다.

언제 코피가 날지 모른다고 24시간 견의 근처에서 대기하며 이게 무슨 미친 짓인가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오랜 시간 보필해 온 백 사장 부부와 백 회장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면 절대 못 했을 일이다.

그러나 그 말도 안 되는 말은 현실이 되었고, 더욱더 말도 안 되게 백 사장 부부가 세상을 떠났다.

혼자 남은 도련님은 하필 윤호가 세상을 떠날 때와 비슷한 나이로 돌아가곤 해서, 보듬을 때마다 아프고 고마운 감정을 한데 느껴야 했다.

“근데 이 아이는 누구……?”

혜숙이 조심스레 물었다.

덩달아 갸웃대던 금지가 소문을 떠올린 듯 아, 하는 것과 동시에 모단이 얼른 설명했다.

“백 회장님 지인분의 손주고, 우리 어린이집 원아예요. 근데 어쩌다 백견 씨 아들이라고 소문이 나서 골치가 아파지는 바람에 일주일만 제가 데리고 있기로 했어요.”

“정말 닮긴 했다…….”

무심결에 중얼거린 금지가 얼른 입을 막고는 미안한 눈을 했다.

견은 나중에 갚아주리라 생각하며 예의상 웃어주었다.

“봐줄 만한 어른들은 모두 바쁘고, 낯선 사람은 절대 안 따른다고 해서. 그나마 저는 선생님이라 잘 따르거든요.”

혜숙은 더 이상 묻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성근이 손짓했다.

“그려, 다들 잘 왔어. 마침 전도 부쳐 놓고 했으니까 얼른들 올라와서 들어.”

“고맙습니다.”

모단과 견도 엉거주춤 마루로 올라와 자리를 잡았다.

“괜찮아, 엄마? 손목은 좀 어때?”

“다 괜찮아. 내 팔자에 웬 호강인가 싶다. 여름휴가 못 쓴 걸 이렇게 보상을 받네. 여기 있다 보니까 회사 가기가 싫어졌어. 엄마도 시골에 집 한 채 사서 내려올까?”

“농사는 아무나 지어? 평생 컴퓨터만 만진 사람이.”

모단의 핀잔에 웃기만 하던 혜숙이 견을 돌아보았다.

“애기는 이름이 뭐야?”

장모님께 궁극의 애기 취급을 받은 견의 눈동자에서 영혼이 반쯤 탈출했다. 모단은 표정 관리를 하느라 기를 썼다.

“……백무탈입니다.”

“역시 네가 무탈이였구나? 해빛이가 섭호 오빠보고 무탈이네 형이라고 불러서 그때 들었는데.”

견은 금지를 노려보고 싶은 것을 꾹 참고 힘겹게 예쁜 눈을 했다.

“다시 보니 견이 오빠 하나도 안 닮았네. 그 오빠는 귀여운 구석이라고는 개똥만큼도 없는데 넌 너무 귀엽다! 견차반 아들이라고 소문이 났다니 너도 참 속상했겠구나. 오늘은 모든 걸 잊고 누나랑 재밌게 놀자.”

‘누나 같은 소리 하네. 저걸 어떡하지?’

견은 이를 악물었다. 성근은 막걸리를 들이켰고, 모단은 김치전을 한가득 입에 욱여넣었다.

“근데 애기가 올 줄 알았으면 김치전 말고 다른 걸 해둘 것을. 애기 매운 거 잘 먹니?”

“크읍…….”

결국 모단이 고개를 떨어뜨리며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괴상한 소리를 흘렸다. 성근은 주스라도 가져오겠다며 자리를 피해 버렸다.

“얘는 왜 이래. 사레들렸어?”

모단을 힐끔 본 혜숙은 아무것도 모른 채 손주를 보듯 애틋한 눈으로 견을 살폈다.

“김치 못 먹으면 다른 거 줄까?”

‘장모님, 그렇게까지 안 챙겨주셔도 되는데요…….’

간신히 진정한 모단이 끼어들었다.

“엄마, 아무거나 잘 먹으니까 신경 안 써도 돼요.”

어영부영 먹고 치우고 나니 비가 그쳤다. 견이 졸린 척하고 방에 숨어 있을까 하는데 금지가 팔을 잡았다.

“무탈아, 누나랑 놀까? 저기 뒷집 가면 되게 귀여운 강아지도 있다? 누나랑 같이 가보자, 응?”

마침 주변에 아무도 없겠다, 미친 일곱 살인 척 너나 보라며 한 방 먹여줄까 하는데 성근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무탈아! 잠깐 일루 들어와 봐라.”

“와, 할아버지가 사탕 주시려나 보다! 무탈이 좋겠네. 얼른 다녀와, 얼른.”

천진난만한 금지를 보던 견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얘를 어쩌면 좋냐. 아무 잘못 없는 거 아는데도 때리고 싶네.’

쯧 하고 혀까지 차려다 관둔 견이 안방으로 들어갔다. 홀로 남은 금지는 묘하게 백견 같아 보였는데, 하며 갸웃거렸다.

“부르셨어요?”

견이 성근의 앞에 앉았다.

얼마간 살피던 성근이 입을 떼려는데, 견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비서님. 섭호까지 다치게 해서요.”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거짓말처럼 깍듯해진 성근이 잔뜩 낮춘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다음에 데려와서 정식으로 소개해 주시겠다던 아가씨가 저 아가씨 맞지요?”

“네. 근데 이런 상황에…… 이런 꼴로 같이 와서 죄송해요.”

“뭘 자꾸 죄송하다 하십니까. 보기 좋기만 한데요.”

성근과 견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모단은 혜숙에게 붙잡혔다.

“다친 분들은 좀 어때? 백 군은 잘 있고?”

“으응. 괜찮아. 잘 있어.”

“생각할수록 내가 미안하고 면목이 없어서…….”

길 한복판에서 필사적으로 저를 구해내던 견을 떠올린 혜숙의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모단은 말없이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그때였다. 대문 쪽에서 차 소리가 나나 싶더니, 금지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어떻게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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