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르몬시터-75화 (75/86)

#75. 책임질게요. 내가 다

2018.01.17.

“난 오늘 집에 못 들어갈 것 같은데.”

[왜?]

옆에서 듣고 있던 모단도 놀란 눈을 했다.

“비즈니스호텔로 갈 거야. 혼자 쉬면서 조용히 정리 좀 하려고. 자료는 충분히 봤고 또 볼 거고 내일 절대 실수 없이 할게. 더 확인할 거 있으면 메일로 보내줘.”

본인도 중요한 회의나 출장이 있으면 깔끔한 호텔에서 야근을 자처할 때가 있기에 지협은 선선히 수긍했다.

[알았어. 그럼 내일 바로 회사로 오는 건가?]

“응. 일찍 갈게. 아, 섭호한테 슈트 한 벌만 챙겨다 달라고 전해줘.”

통화를 마치기도 전에 모단은 죽이며 주스 등을 주섬주섬 치웠다.

“그럴 거였으면 말을 하지. 조금이라도 더 쉬고 집중해야 하는데 괜히 내가 방해한 거 아니에요? 얼른 가야겠다.”

“같이 가요.”

모단이 그대로 굳었다가,

“거짓말이에요.”

금방 풀려났다.

“가자고 해도 안 가려고 했거든요?”

“혼자 쉬면서 조용히 정리할 거라는 말 거짓말이라고요.”

그 말에 다시 멈췄다가,

“모단 씨만 괜찮으면 같이 있고 싶어요.”

이번에는 정말로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달이 저만치 내려가서 아예 사라져 버릴 때까지.”

홀리듯 똑바로 맺혀오는 시선.

간절히 청해오는 눈짓에 단단히 붙들렸다.

“옆에 있어줬으면 좋겠어요.”

***

“하아…….”

새빨간 꽃잎 같은 소리가 새었다.

“……흡…….”

무르익은 과일처럼 달게 흐무러지는 소리가 살갗에 농밀하게 달라붙었다.

회사에서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호텔,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침대 위에서 둘은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서로를 만지고 품었다.

입과 손으로, 냄새와 소리로 세상을 하나하나 느끼고 배우고 알아가는 아이처럼.

순수하고도 집요하게, 그렇게.

누가 먼저 안겼는지,

겉옷은 죄다 어디로 갔는지,

에어컨이 고장 난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더운 건지,

그럼에도 떨어질 줄 모르고 맞닿은 피부 아래 두근대는 박동이 누구 것인지, 그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먹먹하리만치 애타고 벅찬 마음을 조금이라도 더 내어주기에도 바빴다.

평소에도 서로에게 솔직하지만 단둘이 있을 때는 더욱 그랬다.

항상 많은 대화를 주고받지만 지금만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다 알았다.

제일 좋아하니까.

너무 사랑하니까.

‘이 안에 얼마나 많은 생각들이 들어 있을지.’

모단이 반듯한 이마와 눈썹을 손끝으로 덧그리다 입술을 묻었다.

열이 올라 뜨거웠다. 그대로 녹아 스며들어 버릴 것만 같았다.

‘이 안에 얼마나 많은 것들을 묻고 품어왔을지.’

모단의 심장 위를 덮고 어루만지던 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숫눈처럼 흰 피부에 희미한 손자국이 남았다가 사라졌다. 그 위로 입술이 내렸다.

씹어 삼키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고 약하게 빨아들인 흔적이 점점이 수놓아졌다.

“……읏, 아.”

시트를 짚고 있던 팔에서 힘을 빼고 몸을 낮춘 견이 모단의 허리를 안고 빙글 돌아누웠다.

아래에 있던 모단이 위로 올라오며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맨가슴에 쏟아졌다.

“얼굴 안 보여.”

견이 모단의 머리를 한쪽으로 넘겨 느슨히 쥐었다. 고개를 비스듬히 튼 모단이 그를 흉내 내듯 견의 앞머리를 장난스레 쓸어 올려 사과머리를 만들고는 웃었다.

“귀엽네.”

“귀엽다고?”

점이 자리한 쪽의 눈이 윙크하듯 가늘어지나 싶더니, 전혀 귀엽지 않은 손길이 모단의 뒤통수를 잡고 끌어당겼다. 곧장 입속을 헤집는 열기에 저절로 눈이 감겼다.

어쩜 이렇게 매 순간이 설레고 벅찰 수 있을까.

누군가와 닿는다는 게, 함께한다는 게 이만큼이나 행복한 일일 줄이야.

“견이 씨가 말했던 스킨십 단계…… 그거 엎어야 할 것 같지 않아요?”

그를 만나기 전에는 몰랐다.

사랑하는 이와 몸과 마음을 나누는 방법이 이렇게나 많다는 걸.

하나가 된다는 게 꼭 하나의 행위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걸.

“그러게요. 뭐가 덜하고 더한 게 아니라…… 다 좋긴 해요.”

몸으로 느끼는 열락과는 또 다른 정신적인 환희가 있었다.

찰나의 육체적 흥분과는 비교할 수 없는, 터져 흩어지는 게 아니라 깊숙이 새겨지는 것 같은 극치감.

설명할 수 없는 인력과, 표현할 수 없는 유대가 가져다주는 신비로운 공명.

이대로도 벅차도록 행복한 마음과, 이보다 더 좋은 건 과연 어떨 것인가에 대한 원초적 호기심이 견의 안에서 마구 뒤섞여 터질 듯 부풀었다.

모단이 견의 오른쪽 어깨를 가리켰다.

“여기도 점이 있었네요? 그것도 두 개나.”

“몰랐어요?”

한 팔을 세워 느긋하게 머리를 기댄 견이 제 어깨를 흘깃 돌아보았다.

“몇 번을 벗겼으면서 그것도 안 보고 뭐 했대.”

꼭 복사해서 붙여넣기 한 것처럼 나란히 자리한 점 위로 모단의 손찌검이 찰싸닥 작렬했다.

“저기요, 정모단 선생님. 아까 회의실에서는 타인에게 폭력을 쓰면 안 된다고…….”

“타인이라고요?”

“아뇨. 자기예요.”

“손대지 말까요? 눈으로만 볼까요?”

“아뇨. 더 손대주세요.”

눈 조금 크게 떴을 뿐인데 견은 고분고분 꼬리를 내렸다.

모단은 보기 좋게 벌어진 어깨 위에 콕콕 찍힌 쌍둥이점을 한참 바라보았다.

“눈 밑에도 있고, 여기에도 있고. 또 어디 있어요?”

“찾아봐요. 일곱 개 찾으면 소원이 이루어질지도 모르잖아.”

“드래곤볼이야?”

모단은 키득거리면서도 견의 팔이며 가슴께를 이리저리 살폈다.

“말 나온 김에 먼저 일곱 개 찾는 사람 소원 들어주기 할까요?”

“나 점 별로 없는, 아얏!”

“일단 하나 찾았고.”

모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코를 가볍게 쥐었다 놓은 견이 돌변했다.

반쯤 몸을 일으킨 그가 모단의 손목을 한 손에 하나씩 움켜쥐고 지그시 눌렀다.

“6번하고 7번 갈비뼈 사이에 하나, 배꼽하고 골반 사이에 하나…….”

순식간에 꼼짝도 못 하게 된 모단이 반칙 운운하며 바르작거렸으나 잡힌 손을 빼내기엔 역부족이었다.

별거 아닌 장난이라고 여겼는데, 막상 샅샅이 훑는 눈길 아래 놓이자 낯이 화끈해졌다.

“아까 회의실에서부터 이러고 싶었는데.”

보물찾기하는 아이처럼 반짝이면서도, 꼭 그 빛만큼 어둑하고 진득한 그림자가 어린 시선이라 더 그랬다.

“김 대리가 따준 음료수 호호 웃으면서 마셨으면 거기서 손목 잡았을지도 몰라요, 나.”

설마, 하고 웃어넘기려다 웃음 끝이 모호해졌다. 설마를 설마가 아니게 만드는 경우가 종종 있는 인간 아니던가.

“사내연애 짜증 나.”

“언젠 좋다면서요.”

“거슬려요. 다른 놈들이 은근한 눈으로 쳐다볼 때마다 속이 뒤집힌다고.”

“본인한테 꽂히는 여자들 시선은 느껴지지도 않나 보죠?”

“그거 신경 쓸 겨를 없어요. 정모단 신경 쓰기도 바빠 죽겠는데.”

모단의 질투쯤 더 큰 질투로 덮어버린 견이 몸을 숙였다.

찾아낸 점 위에 확인 도장을 찍듯 입술을 눌렀다 떼고, 다시 올라와 입술을 머금었다.

커다란 손과 시트 사이에 갇힌 손 대신 늘씬한 다리가 슬금슬금 견의 허벅지를 타고 올라와 허리를 감았다.

부르르, 잘게 떨고는 한 뼘쯤 떨어진 견이 난감한 눈을 했다.

“이런 건 어디서 배워서는.”

“안아주고 싶은데 손이 이래서. 어쩔 수 없이.”

모단이 붙들린 손끝을 까닥거렸다.

“손 대신 다리라는 속담도 몰라요?”

“이 대신 잇몸은 들어봤어도.”

목덜미가 발개진 견이 손을 풀어주었다. 허리를 감았던 다리도 스르르 미끄러졌다.

“아, 힘들어. 차라리 드래곤볼 찾으러 가는 게 낫겠네…….”

점 일곱 개를 다 찾기에는 지나치게 유혹이 많았다. 인내심이 얄팍해질 대로 얄팍해져 버린 견은 풀썩 옆에 누웠다.

서로 팔베개를 해주겠다며 거의 동시에 뻗은 두 팔이 우스꽝스레 엉켰다. 결국 견의 팔은 모단의 허리로 내려가고, 모단의 팔이 견의 목 아래를 받쳤다.

그렇게 안고 안긴 채로, 견이 중얼거렸다.

“아까 모단 씨 찾지 말 걸 그랬다고 했던 말 취소할게요.”

모단은 습관처럼 견의 머리카락 사이에 손을 묻었다.

“다시 만나지 않았다면 난 이미 죽었거나……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게 살고 있을 테니까.”

그를 만나지 않았다면, 아예 모르고 살았다면 어땠을까.

‘만약 평행우주라는 게 있다면, 그중 하나쯤에서는 백견을 모르는 정모단이 행복하게 잘 살고 있을지도 모르지.’

꿀에 빠진 사탕처럼 달콤한 연애 같은 건 화면이나 활자 속에서만 가능한 거라 여기면서.

늘 나만 바라보고, 종일 나만 생각하고, 평생 나만 좋아하는 남자는 유니콘이나 다름없는 존재일 거라고 생각하면서.

‘근데 만약 그 정모단이 잘생긴 유니콘하고 같이 있는 이 정모단을 본다면, 상대적 불행의 늪에 빠지게 되겠지?’

홀로 그린 망상에 모단의 입꼬리가 설핏 늘어졌다.

“나도 취소할 거 있어요. 옛날에 백견하고 절대 얽히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던 거.”

“그렇게나 쓸데없는 다짐까지 했었다니.”

푸스스 웃은 견이 등을 더 둥글게 말고 모단의 가슴에 귀를 댔다.

쿵쿵대는 심장 소리가 듣기 좋았다. 이 순간 함께 살아 있다고 끊임없이 속삭여 주는 것 같아 고마웠다.

“내가 왜 그쪽 책임져야 하느냐고 했던 것도 취소.”

만나기만 하면 눈부터 치뜨고 화를 내던 그녀가 떠올라 견은 또 웃었다. 그때도 지금도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서 애타게 만드는 건 변함없지만.

“책임질게요. 내가 다.”

견은 스륵 눈을 감았다.

이렇게 모단을 안고 있으면, 나른한 포만과 갈급한 허기가 한데 일었다.

머리카락을 노곤히 쓸어내리는 손길,

체온처럼 포근한 목소리와 달큼한 숨결,

촉촉하니 말랑거리는 살과 은은하고 관능적인 체향까지.

그녀가 주는 온갖 감각의 바다에 깊숙이 잠겨 있는 시간은 더할 나위 없이 황홀했다.

정신없이 모단을 찾아 헤매던 예전의 백견에게, 그녀에게 밀려나지 않으려 매달리고 또 매달리던 그때의 저에게 말해주고 싶어졌다.

믿기 어렵겠지만, 조금만 지나면 그녀가 나를 보며 웃어주는 날이 온다고.

꿈만 같겠지만, 그 따뜻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러주기까지 한다고.

‘내 호르몬시터.’

나를 출렁이게 하고 잔잔하게 하는, 달처럼 신비롭고 유일한 존재.

견은 제 품에 맞춘 듯 들어오는 허리를 꼭 안고 숨을 가득 들이마셨다.

“그럼 나는…… 날 책임지는 모단 씨를 책임질게요.”

이른 새벽, 어슴푸레한 빛이 방 안을 회색으로 밝혔다.

먼저 눈을 뜬 모단은 고른 숨을 내쉬며 잠든 견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어제 계속 열이 올랐다 내렸다 했던 게 떠올라 살그머니 이마를 짚어보았다. 적당한 따스함에 안도하고 손을 떼려는데 스윽 올라온 견의 손에 붙잡혔다.

“깜짝이야.”

“……잘 잤어요?”

“네. 견이 씨는요? 아픈 데는 없어요?”

고개를 끄덕인 견이 눈도 제대로 못 뜨고 입술부터 포갰다.

얼마간 장난치듯 입을 맞추고 나서, 모단이 먼저 침대를 빠져나와 옷을 찾았다.

“지금이라도 집에 들어갔다가 출근하려고요. 똑같은 옷 입고 가긴 좀 그래서. 새벽까지 술 마시고 해장국까지 먹고 들어간 걸로.”

견도 눈을 부비며 뒤따라 몸을 일으켰다.

“내가 데려다줄게요.”

모단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조금 더 자요. 난 택시 타고 가면 돼요.”

“그래도…….”

“중요한 날이잖아요.”

어느새 머리까지 다 묶고 매무새를 가다듬은 모단이 가방을 들었다.

“하루 종일 어린이집에 있을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해요.”

침대에서 내려온 견은 대강 바지만 찾아 입고는 뒤를 따랐다.

문을 열기 직전, 모단의 손을 꼭 쥐었다.

“정말로 같이 있어줘서 고마워요.”

“고맙긴요. 나도 좋았는데.”

노골적으로 보내기 싫은 눈을 하고 내려다보던 견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책임진다고 해놓고 이렇게 버리고 가나?”

“책임진다니까 앙탈은. 누나 못 믿어?”

모닝 박력이 터졌다. 견의 웃음도 터졌다.

“다음 달엔 정말로 종일 같이 있을까요? 그날 내내 꼭 붙어서 같이 있으면 아무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모단이 시원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좀처럼 놓지 못하던 손이 힘들게 풀어지고, 모단이 나갔다.

닫힌 문 앞에 한참을 서 있던 견은 그녀가 택시에 탔다는 문자가 온 후에야 욕실로 들어갔다.

“씻기 싫다.”

귀찮아서가 아니라, 그득 묻어 있는 모단의 체향이며 손길을 그대로 품고 있고 싶었다.

마지못해 대강 씻고 나와 옷을 찾아 들었다.

보기 흉할 정도까진 아닌데 이래저래 구김이 갔다. 어차피 회사에서 섭호를 만나 갈아입으면 되니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자료를 꺼내 들고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었다. 서늘한 공기와 맞닥뜨리자 머릿속이 점점 맑아졌다.

준비가 부족할 때는 걱정이 되지만 충분할 때는 오히려 기대가 되는 법.

시뮬레이션하듯 오늘 할 일을 그려보았다. 어떤 반응이 나올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도 하나하나 차분하게 검토했다.

‘얼른 시간이 흘렀으면 좋겠다.’

모든 게 다 잘 마무리되고, 아무 걱정도 비밀도 없는 때가 빨리 올 수 있도록.

오늘처럼 매일 같은 침대에서 잠들고 싶다고 모단에게 말할 수 있도록.

***

얼마 후, 지협과 섭호도 현관을 나와 차고로 향했다.

“차 한 대로만 가자. 올 때 견이 차 타고 오면 되잖아.”

고개를 끄덕인 섭호가 지협에게서 차 키를 넘겨받았다.

챙겨온 견의 슈트를 뒷좌석에 잘 걸어놓고 운전석에 앉았다.

조수석에 탄 지협이 안전벨트를 하기가 무섭게 입을 열었다.

“어젯밤에 물어보려다가 깜박한 게 있는데.”

“예.”

“알파케미컬, 태산무역, 케이엠홀딩스 쪽은 왜 봤어?”

액셀 대신 브레이크를 밟을 뻔한 섭호가 마른침을 삼켰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너답지 않게 실수를 했던데. 나한테 준 자료에 섞여 있었어.”

지협은 돌아보지도 않고 손에 든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이번 일하고 관련 있는 곳들은 아닌 것 같고.”

“이번 일하고는 상관없습니다. 도련님도 모르시고요. 개인적으로 필요해서 가지고 있으려고 했습니다.”

“이유, 물어봐도 될까?”

섭호는 짧은 심호흡과 함께 핸들을 고쳐 잡았다.

“……조만간 황 회장님께서 그중 한 곳과 사돈을 맺으려 한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그제야 지협이 눈을 들었다.

“유용하게 쓰이길 빈다.”

그러고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섭호는 쓰게 웃을 따름이었다.

차고를 빠져나온 차가 골목을 내려가 큰길로 접어들었다.

“지금 보시는 건 뭡니까?”

“주총 끝나자마자 언론 쪽에 돌릴 보도자료…… 읏.”

지협이 미간을 찡그렸다. 종이에 베인 손가락에서 새빨간 피가 배어 나왔다.

“괜찮으십니까? 거기 열어보시면 밴드 있을 거…….”

섭호가 힐끗 눈짓을 하고 앞을 보았을 때였다.

맞은편에서 달려오던 검은 승합차가 중앙선을 넘었다. 섭호가 급히 핸들을 꺾었으나 돌진하는 승합차의 속도가 훨씬 빨랐다.

콰광!

승합차 범퍼와 지협의 차 운전석 문이 엄청난 굉음을 내며 충돌했다.

지협의 차가 틀어진 핸들 방향으로 마저 돌며 뒤집힐 뻔했다가 내려앉았다. 그대로 한참을 밀려나가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멈췄다.

뒤에서 달려오던 트럭이 2차 사고가 날 뻔한 위기에서 간신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경적 소리와 끼이익 소리가 찢어져라 울렸다.

“으윽…….”

간신히 눈을 뜬 지협이 신음을 흘렸다. 안전벨트에 걸린 가슴과 세게 젖혀졌다 돌아온 목에서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앞유리 너머로 시커먼 형체가 보였다. 사고를 낸 승합차였다.

지협은 어지러운 와중에도 눈에 힘을 주고 초점을 맞추려 애썼다.

범퍼가 반쯤 구겨진 승합차가 멈추기는커녕 쏜살같이 방향을 틀어 사라지는 것을 본 그는 제 눈을 의심했다.

“여기 사고 났어요!”

“누가 신고했나? 얼른 신고해야 되는 거 아니야?”

멈춰 선 차들과 피해 가는 차들, 어수선한 소리와 보닛에서 피어오른 뿌연 연기가 엉망으로 뒤섞였다.

욱신대는 목을 가까스로 움직여 옆을 돌아본 지협은 숨을 삼켰다.

눈을 감은 채 움직이지 않는 섭호의 옆모습이 새빨갛게 물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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