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아무도 없어요. 빨리 와요
2018.01.14.
임시주주총회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오늘도 희명그룹은 겉으로 보기엔 평화로웠다.
퇴근시각이 한참 지났음에도 몇몇 사무실에 불이 환했다. 그중 한 곳에 블랑아이 직원들을 주축으로 구성된 특별근무팀이 모여 있었다.
“캐릭터를 더 단순화시킬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요. 외부 캐릭터 디자이너에게 의뢰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요.”
“자칫 아예 다른 캐릭터가 되어버리면 출판사나 토이즈와의 연계성이 너무 떨어지지 않을까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더 고민이 필요할 것 같네요.”
각 부서의 입장과 의견이 오가는 열띤 분위기 속, 모단은 맞은편에 앉은 견을 힐끔 보았다.
원래 하얀 피부가 유난히 더 희었다. 핏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안색 탓에 이목구비의 선이 더욱 날카롭게 도드라졌다.
넥타이 매듭과 셔츠 단추 하나를 느슨하게 풀고 소매를 걷고 있었다. 얼마간 흐트러진 차림이 오히려 보는 이의 긴장을 불러일으킨다는 걸 모르는 듯 무심한 표정이다.
다 마신 종이컵을 아랫니로 잘근잘근 씹는 것을 본 모단의 뺨이 확 붉어졌다. 종이컵 대신 제 입술을 저렇게 물고 빨 때 얼마나 야한지 떠올라 버린 탓이다.
‘아는 게 병이다, 병.’
모단은 최대한 멀리 눈을 돌렸다.
시선 하나가 줄어든 후에도 여전히 견의 종이컵에는 다른 여자들의 부러움 섞인 눈빛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보고 마무리하죠.”
은규가 손짓했다. 견이 씹던 종이컵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프로젝터 옆에 놓인 노트북에서 뭔가를 찾던 견이 살짝 당황했다. 그러자 블랑아이 여직원이 얼른 일어나 다가갔다.
“백견 씨, 여기요. 제가 아까 USB에서 바탕화면으로 빼놨어요.”
“아, 여기 있었구나. 고맙습니다.”
“나온 김에 제가 도와드릴게요.”
“그럴…….”
별생각 없이 그러라고 하려던 견은 갑자기 뺨이 따갑고 등줄기가 오싹하고 뒷덜미에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에 고개를 들었다.
찰나이지만 분명 보았다.
모단의 눈에서 레이저포인터의 열 배쯤 되는 광선이 나왔다 사라지는 것을.
견은 살기 위해 단호히 거절했다.
“……필요 없습니다. 간단한 거니까 제가 할게요.”
여직원이 시무룩하니 자리로 돌아가고, 동영상 콘텐츠를 재생시킨 견은 화면에서 조금 빗겨난 곳에 섰다.
견의 옆에 바짝 붙어 서는 여직원 때문에 울화가 치밀었다가 겨우 진정한 모단은 동영상을 보다 말고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프로젝터에서 나오는 빛이 화면 귀퉁이에 조각 같은 옆선을 베껴내고 있다.
‘그림자까지 잘생긴 남자라니. 누구 건지 몰라도 참…… 껄껄.’
모단은 주인과 그림자가 쌍으로 꼬리를 치는 것을 힘겹게 물리치고 동영상에 집중하려 애썼다. 특별수당 받아 가면서 회의 내내 한마디도 안 하거나 헛소리만 할 순 없으니까.
수준이나 내용에 대한 의견이 몇 가지 나오고, 모단도 말을 꺼냈다.
“스토리는 좋은데, 몇몇 부분에서 성 역할이 고정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게 걸리네요.”
몇몇은 동의하고, 몇몇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활동적이거나 공격적인 캐릭터는 모두 남자아이고, 여자아이 캐릭터는 수동적이고 잘 우는 걸로 그려져 있어요. 그리고 곰곰이가 ‘여자애들을 때리면 안 돼!’라고 하는데, 여자뿐만이 아니라 친구를 때리면 안 되는 거고, 나아가 타인에게 폭력을 쓰면 안 되는 거죠.”
말해놓고 모단은 저도 모르게 견의 눈치를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견이 어깨며 팔뚝을 슬슬 문지르고 있었다. 남들은 신경도 쓰지 않았으나 모단의 귀에는 ‘그걸 아는 사람이 왜 때리는데요’ 하는 징징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효림이 말을 보탰다.
“맞아요. 모든 남자아이가 여자아이에 비해 키도 크고 힘이 센 게 아니거든요. 모든 여자아이가 얌전한 것도 아니고요.”
“무조건 남자가 여자를 보호해 줘야 한다는 말도 씩씩하지 못하면 남자가 아니다, 무조건 힘이 세어야 강한 거라는 오해를 심어줄 수 있어요. 성별에 상관없이 상대적 약자를 배려하는 마음을 갖자는 메시지가 담겼으면 합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단이 말을 이었다.
“선천적인 차이는 인정하되 성 역할에 관해서는 최대한 개방적으로 다양하게 접하는 게 좋다고 봅니다. 성별이 중요한 게 아니라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는 방향으로요. 분홍색을 좋아하는 남자아이도, 로봇을 좋아하는 여자아이도 전혀 이상한 게 아니니까요.”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이 좋을까요?”
“예를 들어 아빠가 요리하고 엄마는 운전하는 장면이 나올 수도 있고, 남자 미용사나 간호사, 여자 정비사나 축구선수 등이 등장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나이가 좀 있는 희명출판사 과장이 끼어들었다.
“하긴, 나 어릴 때만 해도 사내자식이 부엌 들어오는 거 아니라고 해서 얼씬도 못 했는데 요즘은 TV에 요리 잘하는 남자들이 그렇게 많이 나오더라고. 뭐라고 하더라? 요섹남?”
“맞아요. 그거 보고 우리 와이프도 저보고 요리 좀 해보라고 매일 성화예요.”
잡담 반 의견 반이 오가는 사이 흐뭇한 눈으로 남몰래 모단을 보던 견이 뭔가를 감지했다.
‘저 표정은…….’
옆 사람을 따라 웃는 것처럼 보이지만 초점이 미묘하게 어긋나 있다. 동공의 움직임을 감지해 보니 책상 위의 과자로 떨어졌다 올라갔다 한다.
‘배고프구만.’
먹고 싶은데 손은 안 닿고 굳이 일어나서까지 잡기는 민망해 망설이는 게 빤했다.
웃음을 삼킨 견이 손을 뻗어 과자 하나를 먼저 집었다.
“다과 준비해 놓은 건 아무도 안 드시네요. 하나씩 드세요.”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쟁반을 모단 가까이 밀어주었다. 환해진 모단이 얼른 과자를 집었다.
“마실 것도 있어요.”
일어선 견이 책상 한가운데 나란히 세워뒀던 비타민 음료수 병도 하나씩 앞에다 놓아주었다.
“고맙습니다.”
모단의 인사에 견은 잠자코 미소 지었다.
남들 눈에는 그저 매너 좋은 웃음이었으나, 그 눈동자 안에서 ‘나 잘했죠?’ 하는 말을 발견한 모단은 바보같이 헤벌어지려는 입가를 단단히 단속했다.
그런데 옆에 앉아 있던 남직원이 모단의 손에 들려 있던 음료수를 냉큼 가져갔다.
“제가 따드릴게요.”
그 정도는 나도 얼마든지 딸 수 있다고 하려는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따닥 소리가 나더니 뚜껑 빠진 병이 되돌아왔다.
“고, 고맙습니다, 김 대리님.”
옆에 있던 다른 직원이 놀림조로 툭 쳤다.
“뭐야. 누군 따주고 누군 안 따줘? 내 것도 좀 따줘.”
“에이, 왜 그러세요.”
자기들끼리 쑥스러워하거나 말거나 음료수를 한입에 털어 넣으려던 모단은 갑자기 뺨이 따갑고 등줄기가 오싹하고 뒷덜미에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에 눈을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이쪽을 보는 듯하다 고개를 돌리는 견의 얼굴에 웃음기가 쏙 빠져 있었다.
‘삐졌구만.’
상큼한 맛을 기억해 낸 뇌가 벌써 입안에 침을 분비하기 시작했으나, 모단은 하릴없이 병을 내려놓고 과자만 우걱우걱 씹었다.
좁아진 미간을 볼펜 끝으로 두어 번 누르던 견이 그 볼펜을 손가락 사이에 끼고 핑그르르 돌렸다. 그러다 볼펜이 툭 떨어졌다.
의자를 뒤로 밀고 책상 아래를 본 견이 모단에게 말했다.
“죄송한데 제 볼펜이 그쪽으로 굴러가서요. 좀 주워주실래요?”
“네.”
모단이 책상에 한 손을 걸치고 몸을 숙였다.
견과 제 사이에 애매하게 떨어져 있는 볼펜을 향해 팔을 뻗는데 맞은편에서 더 긴 팔이 쑥 다가오더니 낚아채 갔다.
어정쩡하니 고개를 들자 저처럼 몸을 굽힌 견과 책상 아래에서 눈이 마주쳤다.
견이 인상을 팍 쓰고는 입술을 달싹였다.
‘먹지 마.’
잔망스러운 질투에 3초쯤 멍해졌던 모단이 불쑥 윙크를 했다. 카운터펀치로 입술을 쭉 내밀어 공기뽀뽀까지 날려주고는 먼저 몸을 일으켰다.
견은 한 박자 늦게 볼펜을 쥐고 일어났다.
“백견 씨,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
“저요? 제 얼굴이 그래요? 엎드렸다 일어났더니 피가 쏠렸나 봐요.”
모단은 웃음을 참기 위해 과자를 더 욱여넣었다. 뻑뻑해 죽을 것 같았으나 마시면 다른 쪽으로 죽을 것 같아 꾹 참았다.
준비한 다과가 어느 정도 동이 났을 때쯤 회의가 끝났다.
“오랜만에 친목도 다질 겸 회식 어때요? 저녁 겸 한잔씩들 하죠. 치맥 콜?”
“콜! 좋습니다!”
“시간 되시는 분들 다 같이 가요.”
몇몇이 못 간다는 말을 꺼냈다. 견도 슬쩍 빠졌다.
“저는 마무리할 게 있어서 조금 더 있다 가겠습니다. 맛있게들 드세요.”
여직원들 사이에 아쉬운 기색이 번졌다. 누군 잡고 누군 안 잡을 수 없으니 놔주는 수밖에.
효림이 모단의 팔짱을 꼈다.
“쌤도 갈 거죠?”
견의 은근하고도 간절한 눈빛이 모단을 마구 찔렀다. 모단은 본체만체 눈을 데구루루 굴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치맥 먹기 딱 좋은 날이네요.”
왁자지껄한 인사를 남기고 모두가 나간 후, 홀로 남은 견은 이마를 팍 구겼다.
‘저 여자가. 아무리 굶주렸어도 그렇지……!’
이 씨, 하고 중얼거린 그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누구한테 문자가 그렇게 와요?”
모단의 휴대폰이 1초 간격으로 띠링거렸다. 효림을 향해 어색하게 웃어준 모단은 몰래 문자를 확인했다.
―가지 마요.
―가지 말라니까. 진짜 갈 거예요?
―사무실에 아무도 없어요. 빨리 와요.
―치킨 내가 사줄게요! 아예 치킨 프랜차이즈를 사주면 되잖아!
“엄마요. 빨리 들어오라고 난리시네요.”
“정말요?”
“맞다. 그러고 보니 저 다음 주에 감사인데 일지 정리도 다 못 한 거 있죠. 어린이집 잠깐 들렀다가 얼른 집에 가야겠어요.”
“에이, 아쉽다.”
“저도요. 치맥, 아…….”
진심으로 아쉬웠다. 눈물을 머금고 손을 흔들었다.
“제 몫까지 맛있게 드시고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그래요. 내일 봐요.”
일행과 멀어진 모단은 주위를 살피고는 잽싸게 회사에서 몇 건물 떨어져 있는 죽집으로 들어갔다.
전복죽 하나를 포장하고, 근처에 있는 생과일주스 가게에서 피로회복 주스도 샀다.
회사로 돌아가 어린이집이 아닌 옥상으로 올라갔다.
텃밭 옆 창고에서 애들하고 놀 때 쓰는 돗자리를 꺼내 입구에서는 절대 안 보이는 사각지대에 깔아놓고는 견에게 문자를 보냈다.
―옥상에 아무도 없어요. 빨리 와요.
얼마 되지 않아 우당탕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창고 벽에 붙어 있던 모단이 견임을 확인한 후에 삐죽 몸을 내밀고 손짓했다. 옥상 문을 꼭꼭 닫고 얼른 다가온 견이 한 품에 그녀를 안았다.
“정말로 나만 두고 간 줄 알았잖아요. 이럴 거면 아까 눈은 왜 그렇게 야살스럽게 찡긋거렸나 싶고, 다음 생엔 치킨으로 태어나야 하는 건가 싶고…….”
“1절만 해요.”
넓은 등짝을 우쭈쭈 쓰다듬어 준 모단이 손을 잡아끌었다.
“내일이 보름이잖아요. 견이 씨 그날.”
“그날이라고 하지 말지?”
모단이 크크 웃고는 돗자리를 가리켰다. 견은 감동받은 눈을 했다.
“아까 보니 안색도 별로고. 은규한테 얘기 들었는데 점심도 거의 못 먹었다면서요?”
“속이 별로 안 좋아서요. 입맛도 없고.”
“그래서 죽 사왔으니까 반이라도 먹어요.”
자리를 잡고 앉은 견 앞에 죽을 놓아준 모단이 뚜껑을 열어주고 수저도 뜯어주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그녀를 물끄러미 보던 견의 입가가 나른하니 풀어졌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몸이 무거웠는데 한순간 가벼워진 것 같다.
견이 옆에 앉은 모단의 무릎을 짚고는 몸을 기울였다.
“아.”
나긋하니 벌어진 입에 시선을 고정한 모단이 어쩌라고, 하는 눈을 했다.
“먹여줘요. 숟가락 들 힘도 없어가지고.”
“아까 옥상 문 열어젖힐 때는 부술 기세던데.”
“가진 힘을 그때 다 썼어요. 아…….”
눈을 흘기면서도 모단은 죽을 떠서 호호 불어 입 앞에 대주었다.
장난스레 몇 번 받아먹은 견이 손을 내밀었다.
“맛있다. 이제 내가 먹을게요.”
“괜찮아요. 그냥 있어요.”
모단이 수저를 꼭 쥐고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쯤 해주는 게 뭐 어렵다고.”
“너무 잘해주면 불안한데. 잔뜩 먹여서 어디다 쓰게요?”
“쓰긴 뭘 써요! 어디다 쓰려고 만나는 거 아니라고요.”
“그렇다고 아무 데도 안 쓰면 남자친구 서운하지.”
“쓰는 거 말고 주고 싶어요. 뭐든 해주고 싶다고요.”
농담조로 시작한 말이 조금씩 가라앉더니 희미한 물기가 섞였다.
“견이 씨는 이보다 더한 것들을 주고 있는데, 이 정도쯤은…….”
말을 다 맺지도 못하고 모단의 고개가 땅을 향했다. 당황한 견은 따라서 몸을 숙였다.
“왜 그래요?”
심상치 않은 기색에 견의 목소리도 낮아졌다.
“무슨 일이야. 응?”
얼굴을 보자마자 울컥했지만 회의 내내 잘 버텼는데 결국 무너져 버렸다. 힘겹게 맘을 추스른 모단이 발개진 눈을 들었다.
“엄마한테 다 들었어요. 그 사람이, 한성어패럴이…….”
아빠를 무너뜨린 게 누구였는지 이제야 알았다고, 혜숙과 따로 만난 것도 다 들었다고 털어놓는 동안 눈물이 뺨을 그었다.
“나는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결국 엄마에게 아무 도움도 되질 못했어요. 컸으니까 이젠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줄 알았는데 매번 속만 상하게 하고 받기만 하고…….”
견은 말없이 팔을 뻗어 모단의 어깨를 안아주었다. 손바닥 안에 바들바들 떠는 작은 새를 쥐고 있는 것 같았다.
“엄마에게도 너무 미안하고, 견이 씨한테도 미안하고, 괜히 나 때문에…….”
“모단 씨 때문이 아니라 덕분이죠.”
조금 차갑게 들릴 만큼 단호한 말투였다.
“더 심하게 썩어서 손도 못 대기 전에 발견하게 해줬어요. 덕분에 모든 게 바로잡힐 거고, 모두에게 좋은 일이 될 거예요.”
한참 동안 견에게 기대 있던 모단이 입을 열었다.
“내가 뭔가 도움이 될 만한 게 있다면 말해줘요.”
“이미 가장 큰일을 해주고 있어요. 모단 씨가 없으면 난 회사고 주주총회고 뭐고 어디 갈 수조차 없으니.”
마주 기댄 견이 모단의 손을 꼭 잡았다.
“여기, 탁 트여서 시원하고 좋기는 한데 달이 너무 크게 보여요.”
눈이 시려오나 싶더니 미간이 욱신거렸다. 곧 찌르는 두통으로 번졌다.
몸이 다시 처지기 시작했다. 끓는 듯한 열을 따라 식은땀이 배었다. 그대로 누워버리고 싶을 만큼 진이 빠졌다.
“내가 모단 씨를 다시 찾지 않는 게 나았을까요?”
몸을 따라 기분도 먹구름처럼 낮게 깔렸다.
“차라리 그 책을 보지 말 걸 그랬나 봐요. 언제 죽을지 몰랐을 때는 오히려 괜찮았거든요. 그까짓 것, 한 달에 한 번쯤. 평생 신경 써야 하는 병에 걸린 사람이 세상에 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모단과 닿아 있는 부분만 박동이 뛰는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떨어진 곳은 시리고 저렸다.
“어차피 다 똑같은 건데. 그 병으로 서른이 되기 전에 죽지 않았더라도 서른하나에 사고로 죽을 수도 있는 거고. 그러니까 좀 더 초연하고 신중했어야 했는데. 모단 씨까지 끌어들이는 게 아니었는데.”
이번에도 같은 걱정을 하고 있었다.
나보다는 상대가 더 힘들까 봐. 조금이라도 다칠까 봐.
제가 해주는 건 별거 아닌데, 상대에게 지워준 것들은 왜 이리도 커 보이는 건지.
“그런 얘기, 안 아플 때 했으면 나 화냈을 거예요.”
모단의 눈동자가 견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같이 있어서 이렇게 좋은데 왜 그런 말을 하고 그래요? 지금이라 이해해 주는 거예요.”
그러고는 견의 허벅지를 다독다독 두드려 주었다.
“오늘은 무슨 생각을 해도 우울해질 것 같으면 아무 생각도 하지 말아요.”
다정한 손길에 몸을 맡긴 채 견은 정말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자려고 애쓸수록 달아나는 잠처럼 뜻대로 되지 않았다.
“호르몬시터라는 말, 생각할수록 모단 씨랑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그래요? 난 좀 낯선데.”
“정말로 모단 씨가 옆에 있으면 편안해져요. 노련한 베이비시터가 우는 아기를 몇 번 토닥여서 스르르 재우는 것처럼. 기적 같은 재주가 있어요.”
“모두의 호르몬이 아니라 백견 한정이잖아요. 그럼 백견조련사 같은 게 더 낫지 않나?”
“왜, 아예 사육사라고 하지.”
“그것도 나쁘지 않네요. 야성적이고.”
둘 사이에 비로소 평소와 같은 빛의 웃음이 떠올랐다.
“조련이든 사육이든 마음대로 해요. 말 잘 들을게요.”
나른한 시선과 맞닥뜨린 모단의 머릿속에 나쁜 생각들이 쑥쑥 자라났다. 위험한 말들이 혀 밑에서 맴맴 돌았다.
“이, 일단 죽이나 다 먹어요.”
“다 먹으면 간다고 할 것 같아서 밥알 세면서 먹을 건데요.”
“죽에 밥알이 어딨어요?”
“그러니까.”
방금 전에 말 잘 듣는다고 한 게 무색할 만큼 요망한 대꾸다. 하나 조금이라도 오래 같이 있고 싶은 건 모단도 마찬가지였기에 굳이 때리지는 않았다.
그때 견의 휴대폰이 울렸다. 지협이었다.
[나 오늘 너희 집에서 잔다.]
“왜?”
[같이 확인할 것도 있고, 간 김에 내일 중요한 날이니까 아침 먹으려고.]
냉장고에 있는 음식 꺼내 먹는 재주도 없는 지협은 가끔씩 이런저런 핑계로 섭호가 한 밥을 얻어먹으러 오곤 했다. 부모님 댁으로 가면 밥보다 잔소리를 더 많이 먹게 된다면서.
귀로는 지협의 말을 들으면서도 줄곧 모단만 담고 있던 견의 눈에 고민이 스쳤다.
혀로 입술을 핥고 꾹 깨문 견이 결심한 듯 말했다.
“난 오늘 집에 못 들어갈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