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르몬시터-58화 (58/86)

#58. 사내연애도 아무나 하는 거 아니네

2017.11.19.

조금 전까지와는 달리 견의 눈빛에서 장난기가 뚝뚝 떨어졌다.

“정모단 씨 완전 제 스타일인데. 남자친구 있어요?”

“네.”

단호박 백 개쯤 먹은 듯한 대답에 견의 입가가 스륵 풀어졌다.

“나보다 잘생겼어요?”

“글쎄요. 막상막하인 것 같은데.”

“그럼 나한테 와요. 내가 더 잘해요.”

“뭘 잘한다는 건데요? 그놈이 그놈인 것 같구만.”

낮게 웃음을 터뜨린 그놈이 문 쪽을 살피고는 다짜고짜 모단을 꼭 끌어안았다.

“누구 들어오면 어쩌려고요!”

“한 번만 봐줘요. 아까부터 안고 싶어 죽는 줄 알았는데.”

모단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손발만 꼼지락거렸다. 두근거리는 것이 반, 들킬까 봐 조마조마해서 떨리는 것이 반이다.

“내가 맨날 놀아달라고 해서 시간도 없었을 텐데 언제 그걸 다 준비했어요?”

“이 정도는 기본이죠.”

사실은 대학교 때 보던 전공 서적부터 얼마 전에 교육받은 내용, 최신 유아교육 리포트까지 찾아봤더랬다.

초중고 교사가 아닌 유아교사는 단순히 애 보는 사람 취급하는 이들도 간혹 있기에 더 바짝 준비했다.

견이 제 앞에서만 하찮은 척하지 일적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도 알기에, 다른 직원들 역시 그럴 것이기에 잔뜩 긴장했다.

만약 나중에라도 견과 자신의 사이가 알려지게 되면 빽으로 특별근무팀에 합류시켜 수당을 받게 해줬다는 말이 나돌지도 모른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차라리 안 한다고 할 걸 그랬나 싶을 만큼의 책임감과 부담감마저 얹혔다.

견이 안았던 팔을 풀었다. 두 눈에 하트가 가득했다.

“일하는 모습이 섹시한 건 남녀 불문인가 봐요. 또 반했네.”

“그러게요. 백견 씨도 이렇게 사무실에서 보니까 더 근사해 보이네요.”

모단이 두어 걸음 물러섰다.

“얼른 나가요. 너무 오래 있어도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아요.”

“뽀뽀해 주면 나갈게요.”

“입으로 밥만 먹고 말만 하다 죽은 귀신이 붙었나? 틈만 나면 뽀뽀 타령이야.”

“집적대기 전에 먼저 해주면 되잖아.”

견이 모단의 어깨를 가볍게 밀었다. 얼결에 두어 걸음 물러나자 등 뒤에 벽이 닿았다.

견이 한 손으로 벽을 짚고 모단을 제 앞에 가뒀다.

“스릴 있고 좋죠?”

빤히 올려다보던 모단이 견의 가슴에 슬그머니 손을 올렸다.

“어디서 배워 온 벽치기인지 모르겠지만 제법 설레네요.”

“내가 생각해도 처음 해본 것치고는 제법 자연스러웠던 것 같아요.”

견이 소리 죽여 웃었다.

“밤마다 모단 씨 설레게 하는 법 공부하잖아요.”

“얼굴로 다 하면서 공부까지. 모범생이네.”

모단이 견의 목에 걸린 사원증을 나긋이 움켜쥐었다. 그대로 당기자 긴 목과 잘생긴 얼굴이 주욱 따라왔다.

“칭찬해 주려고요?”

“네. 훈육은 단호하게, 칭찬은 화끈하게 하자는 주의라서.”

“얼마나 화끈할 건지 기대해도 돼요?”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클 텐데.”

그놈의 뽀뽀 한 번쯤 기꺼이 해주려던 때였다.

회의실 문에서 달칵 소리가 났다.

“회의 아까 끝난 거 맞죠?”

“네. 다들 나오는 거 봤어요.”

소스라친 모단이 저도 모르게 손에 쥔 사원증을 무서운 힘으로 당겨 버리고는 빠져나갔다.

뜻밖의 멱살잡이에 바닥까지 내동댕이쳐질 뻔한 견은 얼굴로 벽치기를 하기 직전에 아슬아슬하게 멈췄다.

“어라? 아직 누가 있었네?”

“백견 씨 아니에요?”

엉거주춤 서 있는 한 여자와 고개를 숙이고 구겨져 있는 견을 본 직원 두어 명이 갸웃거렸다.

“어디 아프세요?”

“그러니까, 그게요!”

당황한 모단이 정신없이 머리를 굴렸다.

“저는 두고 간 물건을 찾으러 온 사람인데요, 어…….”

견이 한 손으로 코와 입을 가리고는 허리를 폈다.

“같이 찾아드리다가 제가 갑자기 코피가 나는 바람에 놀라게 해드렸네요. 죄송합니다.”

“별말씀을…… 어억!”

진짜 코피가 나고 있었다. 그야말로 예술점수 만점짜리 타이밍이다.

“괜, 괜찮으신 거죠……?”

모단이 견의 팔을 짚었다가 얼른 떼고는 가방에서 물티슈를 꺼냈다. 건네받는 와중에 자연스럽게 손이 한 번 더 닿았다.

회의실 문을 열었던 직원도 어디선가 휴지를 가져다주었다. 고맙다며 받아 든 견이 모단을 돌아보았다.

“다들 식당에서 기다리실 텐데 얼른 가보세요. 저는 저녁 생각이 없어서 사무실에 있겠다고 우리 부서 직원들한테 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네, 네. 그럴게요.”

“오늘 회의하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다음에 뵐게요.”

견이 화장실 다녀오겠다며 먼저 나갔다. 모단도 다른 직원들에게 어영부영 인사를 하고는 사무실을 탈출했다.

“어휴, 진짜…….”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식당으로 올라가는데 견에게서 전화가 왔다.

[파일 또 두고 갔어요.]

“아, 맞다!”

[틈만 나면 무소유를 실천한다니까. 좀 있으면 데이트 끝나고 남자친구도 까먹고 가겠어요.]

“그 지경까진 안 갈 테니까 걱정 말아요. 선생님들이 파일 찾았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하지?”

[못 찾았다고 하고 내일 사무실로 또 오는 건 어때요? 다들 퇴근했을 때쯤에.]

“됐고요, 가방에 넣었다고 할 테니까 이따 만날 때 갖다 줘요. 근데 코피는 멎었어요? 괜찮아요?”

[알잖아요. 모단 씨만 옆에 있어주면 괜찮은 거. 금방 멎을 거예요.]

“그러게 왜 자꾸 장난을 쳐서는…….”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사내연애도 아무나 하는 거 아니네, 하는 웃픈 깨달음이 섞여 있었다.

견이 속삭였다.

[덕분에 이번 달도 무사하네요. 고마워요.]

***

늦은 시각까지 노트북을 놓지 못하는 견을 지켜보던 섭호가 옆으로 다가갔다.

“한성어패럴? 갑자기 여긴 왜유?”

“바뀐 거래처들을 살펴보던 중에 관심이 가서. 내가 있을 때는 납품가가 안 맞아서 다른 데랑 했었는데…….”

견은 대강 얼버무렸다.

아무리 섭호라 해도 아직 모단의 집안 사정까진 얘기할 수 없다.

물론 모단에게도, 제가 한성어패럴에 대해 알아보았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딱히 걸리는 건 없네. 하긴, 구멍가게도 아닌데 대강 훑어봐도 보일 만큼 허술하게 못된 짓을 하진 않았겠지.’

백 프로 사적인 감정이긴 했다. 내 여자를 괴롭히다니 가만두지 않겠다, 그런 심보가 치밀어 확인할 수 있는 데까지만 뒤적여 본 거였다.

근데 가만두지 않을 꼬투리가 없다. 짜증이 나려고 했다.

‘대표가 바뀐 후에 바로 독점 거래처가 된 걸 보면 분명 뭐가 있을 것 같긴 한데.’

나중에 시간을 내어 좀 더 캐보기로 한 견이 노트북을 밀어두고는 방향을 틀었다.

“섭호야, 너도 제이네트웍스 알지?”

“알쥬. 1차 벤처붐에 대해서 얘기할 적에 빠지지 않는 사례니까유.”

“어떤 회사야? 그리고…… 사장은 어떤 사람이었어?”

가뜩이나 선이 굵은 섭호의 눈썹이 슬쩍 틀어졌다.

“갑자기 거긴 또 왜유?”

“얼마 전에 누가 얘기하는 걸 들었는데 흥미가 생겨서.”

워낙 흥미도 취미도 이리 튀고 저리 튀는 견인지라 그다지 의심스럽진 않은데, 한편으로는 언제 무슨 일을 꾸밀지 모르는 위인이라 불안하기도 했다.

뭔가를 생각하던 섭호가 답했다.

“제이네트웍스에 관해서라면 제가 대학교 때 리포트 작성한 자료가 있는데 드릴까요?”

“어! 근데 잠깐, 불안하게 왜 갑자기 표준어를…….”

“유료입니다.”

신나게 대답부터 해놓고 멈칫했던 견이 혀를 찼다.

“사무적인 자식. 치사하게…….”

“본인이 공짜로 보고 싶은데 공짜로 안 보여주면 치사한 겁니까? 남이 시간과 정성을 들여 만든 건 대가를 지불하고 보는 게 당연한 겁니다. 그런 날강도 각설이 품바 같은 마인드로 살지 마십시오.”

“아, 알았어! 얼마면 돼? 얼마면 되냐고.”

“설거지 한 번, 빨래 한 번, 청소 한 번이면 됩니다.”

“뭐가 그렇게 비싸? 현금으로 하면 안 돼?”

“안 됩니다. 몸으로 받겠습니다.”

위험한 부부 같은 대화를 주고받은 후, 섭호가 먼저 일어섰다.

“뭐 해유? 새벽꺼정 청소하고 싶지 않음 언능 시작혀유.”

“지금 당장 하라고? 이렇게 늦은 시각에?”

“아파트도 아닌디 뭔 상관이랴? 둘 다 출근하는디 집안일을 늦게 안 하믄 언제 한대유?”

“내일 이모님 다녀가시는 날 아닌가? 그럼 굳이 할 필요가…….”

“싫음 땔쳐유. 지는 절대 강요 같은 건 안 하니께.”

견이 진저리를 쳤다. ‘저놈의 여편네 또 시작이네’ 하는 표정이다.

“자료 그까이 거 도련님이 찾아도 얼마든지 찾겄쥬. 십 년두 넘은 일이니께 끽해야 한 달 정도 밤 좀 새우고 코피 좀 터지고 다크서클로 줄넘기 몇 번 하믄 되지 않겄슈?”

“청소기 어디 있는데!”

“빨래부터 하는 게 먼저유.”

역시나 맞벌이 부부 같은 대화가 오간 후에 견도 일어났다.

시키는 대로 세탁기에 빨래를 넣고, 설거지를 하고, 청소기를 돌렸다.

일도 일이지만 뒷짐 지고 쫓아다니는 섭호의 잔소리에 질린 견이 고함을 쳤다.

“평소엔 앓느니 죽는다고 그냥 네가 한다더니 갑자기 왜 이러는 건데! 기분 나쁜 거 있으면 말로 해!”

“지는 그저 도련님 잘되라고 이러는 거구만유.”

“꼰대야, 시어머니야? 오늘 컨셉 완전 이상하게 잡았어, 너.”

“지가 없더라두 기본적인 건 하실 줄 알아야 할 거 아뉴.”

“네가 왜 없어? 너 어디 가?”

짜증으로 이글대던 견의 눈동자에 덜컥 걱정이 차올랐다.

“혹시 비서님 많이 안 좋으신 거야?”

퇴직 후에 줄곧 고향에 머물고 계신 섭호의 아버지 성근의 건강이 얼마 전부터 좋지 않다고 했다. 그래서 요즘 섭호는 주말마다 시골에 내려갔다 오고 있었다.

“그냥 나이 때문에 그러신 거라면서. 아니었어?”

“맞어유. 좀 쉬시면 될 것인디 뭔 농사를 그리 거창하게 짓는지. 인자 취미 수준이 아니라니께유.”

“근데 왜 꼭 어디 갈 것처럼 말했어? 이제 내가 싫어졌어?”

“누가 들으믄 언젠 좋아한 줄 알겄슈.”

“이 자식이.”

“손 하나 까딱 안 혀 버릇허다가 나중에 정모단 선생님께 소박맞지 말구 시키는 대루 혀유.”

“아! 역시 너의 큰 그림은……!”

갑자기 열정적으로 집안일에 임하기 시작한 견이 넌지시 말했다.

“이번 주말엔 가야 할 데가 있어서 안 되고, 다음에 내려갈 땐 나도 같이 가자. 오랜만에 뵙고 싶은데.”

“좋아허시겄네유. 옥수수 따고 감자 캘 사람 한 명 늘었다구.”

“으음…….”

견의 걸레질이 급격히 느려졌다. 같은 데만 열 번쯤 닦고 있는 것 같다.

“가기 싫음 관둬유.”

“무슨 소리야. 도움이 되든 안 되든 꼭 가야지. 밭일하기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 다른 생각을 좀 하느라고 그랬을 뿐이야.”

“뭔 생각이유?”

“정모단 생각.”

섭호가 괜히 물어봤다는 표정을 감추지도 않고 쯧쯧거렸다.

“너 모단 씨가 쓰는 반존대 얼마나 귀여운지 모르지?”

“지꺼정 알아야 헐 일이유?”

“너 이리 와보세요. 돌아가시고 싶니? 확 한 대만 때려 드릴까 봐요. 흥분하면 이런 말도 안 되는 말이 막 튀어나와. 정모단 놀리는 게 세상에서 제일 재밌다니까.”

“별것에 다 환장하는구먼.”

섭호가 옛다 반존대, 하고 던져 주었다.

“도련님, 어디 편찮냐?”

“야!”

“내일 아침 진지는 뭐 잡수실까?”

“다른 의미로 환장하겠다, 너는.”

***

“모단 쌤!”

하원 지도를 마치고 가방을 챙겨 나오던 모단은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았다.

“지금 퇴근하시는 거예요?”

“네. 근데 오전에 옥상 텃밭 갔을 때 창고 정리를 제대로 못 하고 와서 확인하고 가려고요.”

“정말요? 그럼 그냥 내가 갔다 와야겠다.”

다른 교사가 손에 들고 있던 걸 내렸다.

“바로 가시는 거면 이것 좀 블랑아이 사무실에 전해주고 가실 수 있는지 여쭤보려고 했는데…….”

“저한테 주세요!”

순간적으로 목소리가 커져 버렸다. 모단이 미소로 얼버무렸다.

“무거운 것도 아닌데요, 뭘. 일 보고 내려가면서 전달하고 퇴근할게요.”

“고마워요, 모단 쌤.”

저야말로 고맙죠.

속으로 음흉하게 웃은 모단이 서류를 받아 들었다. 만 3세부터 5세 유아들의 스마트폰 이용 실태에 관한 설문지를 가정으로 보냈다가 돌려받은 거였다.

신발을 신으며 견에게 문자를 보냈다.

―어디예요? 나 지금 설문지 갖다 주러 블랑아이 사무실 가고 있어요.

―안 돼요! 지금 오지 마요! 나 희명소프트에 있는데! 사무실에 다른 남자 직원만 있을 건데!

―진정해요. 나도 옥상 들렀다 갈게요. 언제 올 건데요?

―거의 끝나 가요.

―알았어요. 사무실 오면 연락해요. 천천히 내려갈게요.

모단은 바로 옥상으로 향했다.

놀이터와 텃밭은 당연하고 휴식 공간에도 아무도 없다. 오늘은 수요일, 한 시간 일찍 퇴근하는 가정의 날이라 굳이 지금 누가 올 것 같지도 않았다.

모단은 텃밭 옆 창고로 들어갔다. 아이들이 활동할 때 쓰는 밀짚모자며 꽃삽, 물뿌리개 등등을 넣어두는 곳이다. 오늘따라 아이들이 방방 떠서 추스르기에 바빠 대강 넣어두기만 했다.

이름이 적힌 밀짚모자를 바다반 팻말 앞에 차곡차곡 쌓아두는데, 무탈이의 것이 손에 잡혔다. 안 그래도 종종 생각나는 아이인데 또 걸렸다.

“선생님, 내 손 잡으세요. 비 와서 깜깜하니까요. 선생님 깜깜한 거 싫어하신다면서요.”

“매일 애기들 안아주느라 고생 많으시니까. 선생님은 내가 안아줄게요.”

“우리 선생님한테는 화내면 안 돼. 우리 선생님 속상하게 만들지 마. 알았지?”

아이치고는 그리 높지 않은 차분한 목소리로 애늙은이 같은 말들을 하던 것을 떠올린 모단은 작게 웃었다.

아마도 무탈이는, 이 세상 남자 중 견 다음으로 저에게 예쁜 말을 많이 해주는 아이가 아닐까.

“잘 지내나 모르겠네. 위 비서님한테 사진이라도 보내달라고 해볼까?”

대강 정리를 마치고 창고를 나오는데 기다렸다는 듯 견에게서 연락이 왔다.

옥상에서 내려와 엘리베이터를 탔다. 15층에서 탄 건 저뿐이었으나 금세 퇴근하는 직원들로 반쯤 찼다.

그리고 9층에 섰을 때, 견과 다른 블랑아이 직원이 나란히 탔다.

“안녕하세요.”

가장 안쪽 구석에 있던 저를 바로 찾아낸 견이 태연히 인사를 했다. 눈을 부릅떴던 모단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아, 안녕하세요.”

견이 자연스럽게 옆으로 와서 섰다.

“아직 퇴근 안 하셨어요?”

그가 상상 이상으로 뻔뻔하다는 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알고 있었지만 새삼 놀라웠다.

“옥상 텃밭 좀 확인하느라고요.”

견에 비하면 모단의 태도는 다소 뻣뻣했으나, 안 친한 회장 손주를 대하는 거라고 보면 충분히 이해할 만했다.

“마침 블랑아이도 들르려고 했는데요. 이 설문조사 자료 전해 드리려고요.”

“아, 이거요. 저한테 주시면 됩니다. 제가 가지러 갔어야 하는데. 감사합니다.”

견이 서류를 넘겨받았다.

그의 옆에 있는 동료 직원은 물론, 함께 탄 누구도 둘의 대화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모단은 옅은 한숨을 흘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뱉은 숨의 반의반도 다시 들이켜지 못하고 숨을 멈췄다.

스칠 듯 말 듯하던 견의 팔과 제 팔이 확실히 가까워지나 싶더니 손등까지 닿았다.

톡톡 장난스레 건드리던 견의 손이 모단의 손가락을 살포시 쥐었다.

다들 스마트폰 아니면 층수 계기판만 보고 있으니 타인의 시선이 닿을 일은 없다. 그래도 불안했다. 꼭 그만큼의 설렘이 울렁울렁 속을 흔들었다.

상황이 주는 스릴 때문일까, 심지어 손도 반만 잡았는데 이게 뭐라고 떨리나 싶었다. 고작 손가락 몇 개가 뒤엉키고 만지작거리는 행위일 뿐임에도 지독히도 농밀했다.

느릿한 손길이 좀 더 내밀한 곳을 어루만졌던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동시에 나쁜 상상으로 이끌었다.

“선생님.”

손가락 사이를 훑는 손길은 머리카락이 쭈뼛 설 만큼 끈적하면서, 부르는 목소리는 여상하기만 하다.

모단은 입을 꾹 다물고 시선만 틀었다.

“죄송하지만 바쁘지 않으시면 사무실 들러서 몇 가지만 확인해 주실 수 있으세요?”

“……어떤 거요?”

“그때 말씀해 주셨던 게 제대로 들어갔나 해서요.”

목소리가 떨릴세라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고는 견디다 못해 제 손을 빼내고 견의 손등을 살짝 꼬집었다. 견이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가 얼른 주먹 쥔 손으로 입을 가리고 헛기침을 했다.

그 손등 위에 살짝 발그스름한 흔적이 남은 것을 본 모단도 벽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필사적으로 마음을 다스렸다.

견과 동료 직원, 모단은 3층에서 내려 블랑아이 사무실로 향했다.

곧 나갈 것처럼 보이는 두어 명만 남아 있었다. 함께 들어온 직원도 바로 갈 준비를 하는 듯했다.

몇 안 되는 직원들의 관심이 온통 퇴근뿐임을 눈치챈 견이 의자를 가져다가 제 자리에 나란히 놓고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견이 뭔가를 열심히 클릭하더니 모니터를 가리켰다.

“이 부분, 가능한 거 맞죠?”

업무 서류는커녕 심야영화 예매 페이지가 떠 있다.

모단이 이런 앙큼한 월급루팡 같으니, 하는 눈으로 답했다.

“네, 가능해요.”

“첫 번째하고 두 번째 중에 어떤 게 더 나을까요?”

“첫 번째 것이 더 나을 것 같네요.”

“그럼 이걸로 할게요.”

자리마다 파티션으로 잘 가려져 있어 가능한 꽁냥질이었다.

“백견 씨는 퇴근 안 하세요?”

아까 같이 들어온 직원이 물었다. 때마침 예매를 마친 견이 얼른 인터넷 창을 끄고는 파티션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희명소프트 쪽에서 내일까지 달라고 했던 자료만 확인하고 가려고요.”

“아까 말했던 그거요? 그럼 저도 같이…….”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제가 금방 마무리할 수 있습니다.”

“아, 예. 그럼 저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수고하세요.”

“네, 내일 뵙겠습니다.”

다들 우르르 몰려 나간 후, 사무실 안에 둘만 남았다.

“정모단 선생님, 그거 아세요?”

“뭐요?”

견이 모단 쪽으로 완전히 몸을 틀더니 나른하게 웃었다.

“블랑아이 사무실에 있는 CCTV는 복도 쪽에서 입구가 보이게 설치한 것 하나, 서류보관함 쪽에 설치한 것 하나. 두 개밖에 없는 거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