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르몬시터-57화 (57/86)

#57. 이 여자가 내 여자라고

2017.11.15.

“혹시 이것도 알아요? 제이네트웍스 사장이 누구 사위였는지.”

1차 벤처붐 시절의 성장 신화이자 급격한 몰락의 상징이기도 한 제이네트웍스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있지만 사장이 어떤 사람인지까지는 잘 몰랐다.

“한성어패럴 한규철 사장.”

견은 얼마간 남아 있던 술기운마저 싹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 사람이 내 외할아버지예요. 물론 생물학적으로만.”

견은 얼마 전 백 회장과 함께 갔던 <갤러리 한>에서 그와 마주쳤던 것을 떠올렸다.

할아버지에게 얼핏 들은 바로는 그에겐 외동딸이 있었다고 했다. 오랫동안 해외에 나가 있다가 들어왔는데 병으로 금방 세상을 떠났다고 들었다.

그녀가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은 사실이 왜 전혀 알려지지 않았는지는 모단의 설명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그 집에서는 저와 아빠를, 이혼하기 전까지는 딸조차도 받아들이지 않았었다고.

“그런 분에게, 그래도 혹시나 하고…… 아빠 회사를 도와달라고 부탁하러 갔었죠. 상처를 줄 거면 돈도 같이 줬으면 고마웠을 텐데. 어떻게든 갚았을 건데.”

“그게 내 생일날…….”

모단은 고개를 까닥했다. 견은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까만 눈동자가 물기로 부풀어 오르더니 그녀를 담은 채로 툭 떨어졌다.

“백견 씨! 지금…….”

울어요?

물으려던 말이 다 나오기도 전에 견이 모단의 어깨를 깊이 끌어안았다.

어깨 너머에서 꾹 누른 혼잣말이 들려왔다.

“그래서 그렇게 울고 있었던 거였구나…….”

말속에 미처 다 담지 못한 감정들이 온기로 전해졌다.

나를 위해 서슴없이 울어주는 사람.

내 편이 생겼다는 게 새삼 실감이 났다. 저까지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모단은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놓았다.

“주사도 참 흥미진진하네요, 백견 씨는.”

“주사 아니에요. 술 다 깼어요. 그리고 취했든 안 취했든…….”

견이 팔을 풀고 그녀를 마주 보았다.

“좋아해요.”

물기가 남은 속눈썹과 눈동자가 울컥할 만큼 아름다웠다.

“얼마나 좋아하는지 나도 잘 모를 만큼.”

진심이 달콤하게 녹아내린다.

입을 맞출 때보다 더 쑥스럽고 설레서 모단은 괜한 소릴 주워 삼켰다.

“음…… 마치 백견 씨 재산처럼요? 통장에 얼마가 들어 있는지 몰라야 진정한 부자라던데.”

“비슷하네요. 지금도 엄청나게 많은데 자꾸 저절로 불어나는 게.”

재수 없는데 사실이겠지.

입을 비죽한 모단이 들릴 듯 말 듯 흘렸다.

“근데 왜 10단계는 안 하는지.”

모단이 먼저 문을 열고 내리려는데 뒤에서 견이 잡았다.

“방금 뭐라고 했어요?”

표정이 심각했다.

“10단계라고 한 거 맞죠?”

모단은 혹시 10단계의 ‘10’이 욕처럼 들렸나 싶어 어물어물 해명했다.

“그러니까, 지금보다 더 좋아져야 한다거나…… 아무튼 백견 씨만의 선이 있는 것 같은데 그 기준이 뭔지 궁금했어요. 그냥 그랬다고요.”

다시 도망치려다가 또 잡혔다.

모단의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러 견을 피했다. 그러나 견은 몸을 바짝 기울이고 고개까지 움직여 가며 집요하게 눈을 마주치려 했다.

“왜 이래요? 그만해요!”

“그러게 왜 나를 안 봐요.”

모단이 마지못해 시선을 맞췄다. 견이 입을 열었다.

“처음엔 무서웠어요.”

“무서웠다고요? 내가요?”

“아뇨! 모단 씨 말고 나요.”

지레 찔려서 펄쩍했던 모단이 안도했다.

“내 마음대로, 막 욕심대로 하면 부서질 것 같아서. 처음이라 아무것도 모르니까 더욱.”

모단은 마른침을 삼켰다. 아무것도 모르는 게 그 정도면 본능도 천재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전에 내가 그랬잖아요. 삶을 달콤하게 만드는 무언가를 누려보면 그게 없던 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진다고.”

견의 목소리가 조금씩 낮아졌다.

“분명히 좋을 텐데, 손만 잡아도 심장이 터질 것처럼 좋으니까. 너무 좋을 것 같은데…….”

이번에는 견이 눈을 내리깔았다.

“그렇게 되면…… 모단 씨를 볼 때마다 그런 생각만 하게 될까 봐 겁나서요. 그러면 너무 미안하잖아. 내 스스로가 싫어질 것 같아요.”

그리고 말할 수 없는 이유도 하나.

아랫입술을 잘근 깨문 견의 잇새에서 가느다란 한숨이 새었다.

그 한숨을 넘겨받듯 모단이 휴, 했다.

“지금 이렇게 말해주기 전까지 내가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는지 알아요?”

“무슨 생각이요?”

전혀 모르겠다는 견의 표정을 보자 답답한 동시에 묘하게 안심이 됐다.

연기는커녕 정말 생각조차 못 했을 뿐인 거다. 게다가 그렇게나 소중한 이유라니, 저야말로 미안해해야 할 것 같지 않은가.

모단은 견의 허리를 안았다.

“내가 어떤 생각을 했냐면.”

쿵쿵대는 가슴에 이마를 묻고 속삭였다.

“그냥, 전부 나 때문인 것 같다는 생각…….”

그 한마디에 담겨 있는 많은 의미를 필사적으로 가늠해 보던 견의 눈썹에 힘이 들어갔다.

제가 물러나는 게 밀어내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아마도 지금 짐작이 가는 것보다 더 많은 걱정들을 남몰래 끌어안고 있었으리라.

견은 무딘 저를 탓하며 온 진심을 다해 그녀의 등을 쓸어주었다.

“절대로, 그 어떤 것도 모단 씨 때문인 거 없어요.”

몸을 뗀 모단이 견의 입술에 제 입술을 짧게 포갰다. 견이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술 냄새 날까 봐 안 한 건데.”

“그런 것쯤은 괜찮아요.”

촉, 하고 한 번 더 닿았다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다른 것도 다 괜찮아요. 백견 씨가 괜찮다면 나도.”

배시시 웃음을 흘린 모단이 이제야 차 문을 열었다.

“이만 가봐요. 비서님 집에 계시죠?”

견은 묵묵히 차에서 내렸다.

지금 집엔 아무도 없었다. 섭호는 오랜만에 아버지를 뵙고 오겠다며 시골로 내려갔다.

더 취했더라면, 지미에게 들은 말이 기억조차 안 날 만큼 술이 올라왔더라면 입 밖으로 냈을지도 모른다.

아뇨, 아무도 없어요.

자고 갈래요? 하고.

“부축까진 안 해도 되겠네. 조심해서 들어가요.”

“고마워요. 내일 봐요. 맛있는 거 살게요.”

고개를 끄덕한 모단이 다시 차에 탔다. 제가 가는 걸 봐야 견이 들어갈 걸 알기에 짧게 인사하고 바로 자리를 떴다.

대문 안으로 들어선 견은 정원을 가로지르며 지미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모.”

[너 이 자식, 지금이 몇 신데…… 지난번에 내가 그랬다고 똑같이 갚아주는 거냐?]

“나 모단 씨한테 말 못 해. 고모가 검사 한 번 해보자고 했던 거. 아무리 간단한 혈액검사랑 호르몬검사가 다라고 해도 안 할래.”

다른 사람도 아닌 제가 그녀에게 상처를 줄 수는 없다. 생리 안 한다는 말을 듣고 나서 검사해 보자는 말을 꺼내면 너무 공교롭지 않은가.

한동안 대답이 없다가, 잠이 완전히 깬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공짜로 건강검진 받는다고 생각하면 되는데, 왜?]

“그렇게 생각을 안 할 것 같으니까.”

전부 나 때문인 것 같았다던 모단의 말이 아프게 박혔다.

한참 전엔 그런 말도 했었다. 눈치 보고 자란 거 티 내고 싶지 않은데, 다른 사람 기분 같은 거 알고 싶지 않은데 자꾸 눈에 보인다고. 미움받아도 상관없다 하면서도 자신 때문에 남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걸 견딜 수가 없다고.

그렇게나 착한 사람이라는 걸 안다.

보이는 겉모습은 상처를 싸매고 덮느라 생긴 굳은 껍데기일 뿐이라는 것도.

그래서 애초에 그녀가 제게 도움을 주는 방법을 몰랐으면 했다.

“고모에겐 아직 끝나지 않은 연구겠지만 나한테는 이제 끝이야. 이게 다야.”

[뭐?]

“이제 와서 뭐가 어떻게 되든 아무 상관 없고.”

어느덧 정원 한가운데 멈춰 서 있던 견은 한마디만 보태고 전화를 끊었다.

“그냥 정모단 씨가 다야. 미안해요, 고모.”

***

아이들이 등원하기 전, 희명어린이집 전체 교사회의가 있었다.

“그럼 이번 달하고 다음 달 행사는 이렇게 마무리하는 걸로 하고, 참. 오늘 저녁부터 선생님 세 분은 특별근무하시는 거 맞죠?”

“네.”

얼마 전에 블랑아이에서 어린이집 쪽으로 업무 지원 요청이 들어왔다.

자체 보육프로그램을 활용한 유아동 어플리케이션을 제작하기 위해 만 3세, 4세, 5세 전문가의 도움을 청한다는 내용이었다.

“힘들겠어요. 퇴근하고 다른 부서 가서 야근까지.”

“그래도 특별수당이 나오잖아요.”

밉지 않게 속닥인 효림이 얼른 덧붙였다.

“공부도 될 것 같고요. 일주일 내내 하는 것도 아니고.”

“근데 처음엔 도움도 되고 재밌겠다 싶어서 덥석 한다고 했는데 생각보다 준비할 게 많더라고요. 걱정이에요.”

효림과 다른 교사의 말에 모단도 고개를 끄덕였다.

견이 저도 참여하는 프로젝트라며 얘기해 줬을 때부터 관심이 가긴 했으나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지라 입도 떼지 않았다.

그런데 다른 교사들이 먼저 모단을 추천했다. 희명 보육프로그램을 적용해 본 경력은 짧지만 만 5세, 즉 7세 담임을 맡아본 기간이 가장 길다는 이유였다.

거기에 자유롭게 추가근무가 가능한 미혼 교사가 몇 없다는 이유도 있었다.

기대도 안 했던 소식을 들은 견은 잔뜩 환해져서는 사내 비밀연애에 대한 로망을 수십 개씩 풀어놓으며 신나 했다.

모단이 사내연애의 단점을 수십 개 풀어놓음으로써 망상의 싹을 자르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건물 안 CCTV의 위치와 비어 있는 회의실 위치까지 통째로 외워 버릴 기세였다.

아이들을 귀가시킨 후에 교사 셋은 3층으로 향했다. 바로 위층에 있는 블랑아이 사무실에서 첫 회의가 있었다.

“우리도 엄연히 직장인인데 이런 사무실 되게 어색하지 않아요?”

“그러니까요. 같은 건물인데 왜 남의 회사에 온 것 같은지 모르겠네.”

항상 앞치마를 걸치고 사원증은 출퇴근용으로만 쓰는 교사들의 눈에, 깔끔한 오피스룩에 사원증을 목에 건 사원들의 모습은 낯설 수밖에 없었다.

“안녕하세요. 희명어린이집에서 왔는데요.”

“네, 이쪽으로 오세요.”

입구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아 있던 직원이 안쪽 회의실로 안내해 주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이미 와 있던 블랑아이와 희명소프트 직원들이 인사를 했다.

은규 옆에 있던 견과 모단의 눈이 마주쳤다.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바로 다른 데를 보았다.

회사 안에서 보니 괜히 더 멋있어 보였다. 둘이 있을 때와는 달리 무심한 태도와 진지한 표정은 섹시해 보이기까지 했다.

어제도 봤고 오늘도 보름이라 퇴근하자마자 붙어 있을 건데 새삼 두근두근해서, 모단은 다른 생각을 하려 애썼다.

견이 모단을 포함한 교사들에게 깍듯하게 물었다.

“여기 앉으세요. 커피 드릴까요? 종일 애들 보시고 피곤하실 텐데.”

“괜찮습니다.”

발연기를 펼치다 실수라도 할까 봐 모단의 말투가 절로 딱딱해졌다. 반면 다른 교사 둘은 방긋 웃으며 고맙다는 말을 했다.

얼마간 잡담으로 분위기를 푼 후에 회의가 시작되었다.

“블랑아이의 박은규 대리입니다. 이 유아동 어플리케이션 개발의 의도는…….”

은규에 이어 교사들이 희명어린이집 보육프로그램과 유아 발달 단계의 특징을 설명해 주면, 희명소프트의 기술적 검토를 받아가며 콘셉트와 콘텐츠를 정해 나가게 될 터였다.

모단의 차례가 되었다.

“안녕하세요. 7세 담임을 맡고 있는 정모단이라고 합니다. 먼저 7세 아이들의 발달 특성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준비해 온 자료를 차분하게 읽어 나가는 모단에게로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견의 표정이 얼마간 날카로워졌다. 미혼 남자 직원은 한 명도 없길 바랐는데 블랑아이에도 있고 희명소프트에도 있다.

이성적 관심을 떠나서 그저 모단이 말을 하니까 쳐다보고 있을 가능성이 반인데도 견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성취나 경쟁적인 욕구가 커지는 시기입니다. 대근육과 소근육의 발달이 충분히 이루어지고 인지 수준도 높아져 규칙을 적용한 게임이 가능하고, 양보나 협동 등의 친사회적인 행동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단에게 집중할수록 견의 눈매는 주변을 다 잊고 슬슬 풀어졌다.

아이들을 잘 돌보는 건 알았지만 밖에서도 저렇게 전문가 포스를 뽐내다니. 이론과 실무를 다 갖춘 완벽한 인재가 아닌가.

“언어 표현이 제법 논리적인 수준까지 발달해서 간단한 수수께끼를 즐깁니다. 규칙을 지키는 걸 중요하게 여기는 시기라 권선징악이 뚜렷한 전래동화에 흥미를 보여요. 성별에 대해 알게 되고 성 역할에 대한 관심도 생기는 시기이고요.”

견은 그녀의 말을 경청하며 성취감을 느낄 만한 게임, 수수께끼, 전래동화, 성교육 등의 키워드를 뽑아 메모했다.

설명이 끝나고 몇몇이 질문을 했다. 최선을 다해 답해준 모단이 덧붙였다.

“그리고 제가 두 가지를 생각해 봤는데요.”

“네.”

“7세의 큰 특징 중 하나가 초등학교에 갈 준비를 하게 된다는 겁니다.”

“아, 그렇겠네요.”

“보통은 한글 같은 학습적인 면을 많이 걱정하시는데 실질적으로 1학년에게 필요한 건 자기 물건을 스스로 챙긴다거나 선생님의 말을 집중해서 듣고 바르게 전달한다거나 친구와 사이좋게 지낸다거나 하는 기본적인 생활습관과 인성 교육이거든요.”

“기본 생활습관과 인성…… 그렇군요.”

“꾸준한 연습이 필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동영상 등을 통해서 반복적으로 접할 수 있다면 좋을 것 같고요.”

견은 손가락 사이에 끼고 있던 볼펜을 빙그르르 돌렸다.

“다른 하나는 코딩입니다.”

“코딩이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모두가 술렁거렸다.

“초중고 교육과정에 코딩이 정식 교과목으로 채택되면서 학부모님들 사이에 코딩 교육에 대한 관심이 엄청나게 높아졌어요.”

자녀가 있는 몇몇 직원이 아, 하고 동조하며 감탄했다.

“기존의 한글 영어 동요 등의 어플리케이션은 흔하다면 흔하니까, 기초적인 코딩 개념을 놀이처럼 익힐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모단이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물론 기술적인 면에 대해서는 전혀 몰라서, 전문가분들께서 참고만 하시라고 말씀드려요.”

“감사합니다. 정말 좋은 아이디어 같은데요?”

“맞아요.”

스님이 염주 굴리듯 돌려 대던 볼펜으로 ‘코딩’을 크게 적고 연신 동그라미를 치는 견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치지 못한 남자가 대나무숲을 발견하기 전까지 앓아누웠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원래 자랑스러웠지만 더 격렬하게 자랑하고 싶다. 이 여자가 내 여자라고!’

열정적이고 훈훈한 분위기에서 회의가 끝났다.

“저녁 안 드셨죠? 다 같이 사내식당 가실래요?”

대부분이 동의했다. 교사들이 모단도 이끌었다.

“모단 쌤은 한 번도 가보신 적 없죠? 이번에 가보면 되겠다.”

“우린 몇 번 간 적 있거든요. 행사 준비 때문에 늦게까지 남아 있거나 할 때.”

다른 직원들과 함께 회의실 안을 정리하는 견을 힐끔 본 모단이 회의실을 나섰다. 그러나 사무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제 이마를 쳤다.

“맞다! 저 파일 두고 왔어요.”

손에 들고 있던 걸 어디 내려놓기만 하면 깜박하기 일쑤인 모단의 건망증을 익히 아는 교사들은 웃고 말았다.

“다른 분들하고 먼저 가세요. 바로 사내식당으로 갈게요.”

모단은 얼른 회의실로 되돌아갔다. 견과 은규, 그리고 다른 직원 한 명이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

견이 심상한 투로 물었다.

“뭐 놓고 가셨어요?”

“네. 하늘색 파일을 두고 갔는데.”

아까 앉았던 자리를 포함해 말끔히 치워진 책상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늘색 파일이요? 본 것 같기도 하고. 잠시만요.”

몸을 돌리는 견을 본 은규가 다른 직원의 어깨를 짚었다.

“거의 다 됐으니까 우리 먼저 올라가죠. 백견 씨, 마무리 좀 부탁드려도 되죠?”

“네, 알겠습니다.”

그 순간, 모단은 보았다.

견과 은규 사이에 쓸데없이 비장한 눈빛이 찡긋 오고 가는 것을.

‘회식 때 뭔 일이 있었던 거야? 서로 흑역사라도 공유했나? 의리 넘치는 절친이 되셨네.’

견이 어디선가 하늘색 파일을 들고 다가왔다.

“여기 있었네요. 제가 저희 부서 직원 것인 줄 알고 같이 챙겼나 봐요.”

누가 들어도 수상하지 않은 멘트와 함께 회의실 문이 닫혔다.

모단이 파일을 건네받기 위해 손을 내민 순간, 견이 자연스럽게 그 손을 잡았다.

“지금 뭐 하시는 거죠?”

“두고 가신 거 달라면서요.”

“내가 언제 백견 씨 손 달라고 했나요?”

“아무한테나 주는 손 아니니까 부담 갖지 말고 받으세요.”

모단이 눈을 흘겼다. 조금 전까지와는 달리 견의 눈빛에서 장난기가 뚝뚝 떨어졌다.

“정모단 씨 완전 제 스타일인데. 남자친구 있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