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스킨십에 후진은 없다
2017.09.20.
“나 토끼 도시락 싸왔다! 무탈이 너는 무슨 도시락 싸왔어?”
“어, 그러니까 나는…….”
견과 섭호의 눈이 마주쳤다.
분명 전달받았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어제 오후의 소란 때문에 진이 쪽 빠져서 둘 다 까맣게 잊어버렸다.
“엄청 멋진 도시락을 쌌는데…… 식탁에 놓고 왔네.”
습관적으로 이마를 긁적이려던 견은 반창고가 걸리는 바람에 손을 내렸다.
더 당황한 건 섭호였다.
“죄송합, 아니. 미안하다. 소풍 가는 데가 어디라고 했지? 밥 먹기 전에 그쪽으로…….”
“아니, 아니에요!”
동후가 카드를 줄 때쯤에 입구로 나왔던 모단이 얼른 나섰다.
“번거롭게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제 도시락 같이 먹어도 충분해요.”
“어떻게 그럽니까.”
“정말 괜찮아요. 다른 학부모님들도 바쁘시거나 날짜를 착각하셔서 못 챙겨주시는 경우가 있거든요. 밥도 간식도 넉넉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도 그런 폐를 끼칠 수는…… 첫 소풍인데 괜히 기죽지나 않을지…….”
‘이 자식 왜 이렇게 몰입한 거야. 쓸데없이 부성애 돋는 눈빛은 또 뭔데?’
견이 섭호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 몸을 굽히자마자 귀에 대고 을렀다.
“기 안 죽으니까 폐 끼치게 냅둬. 난 오늘 꼭 정모단 씨가 만든 도시락을 먹어야겠어.”
섭호가 스윽 허리를 폈다.
“면목 없습니다. 선생님께서도 출근 전에 바쁜 시간 쪼개가면서 도시락 싸셨을 텐데.”
모단의 눈가에 뜨끔한 기색이 스쳤다.
“어…… 말씀대로 바빠서 그냥 샀는데…… 무탈이가 먹기엔 좀 그럴까요?”
손맛을 기대했던 견이 칙칙해지는 것을 본 섭호는 그것참 잘됐다는 표정을 가까스로 감췄다.
“아닙니다. 우리 무탈이는 착한 어린이라 아무거나 다 잘 먹으니까 조금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소풍 장소는 차로 3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휴양림이었다.
쉴 새 없이 관찰하고 만지고 뛰어놀며 숲 체험을 하고 나자 점심시간이 되었다.
7세들은 그래도 알아서 먹는 편이었으나, 그보다 더 어린 아이들은 손이 많이 갔다.
네 반 내 반 구분 없이 아이들을 어느 정도 먹인 후에야 교사들은 겨우 엉덩이를 붙일 수 있었다.
“무탈아, 먼저 먹고 있으라니까 왜 하나도 안 먹었어?”
내 여자 힘들게 일하는 거 보고 있으니 밥이 안 넘어가서요.
견은 미소를 지었다.
“선생님 먼저 드신 후에 같이 먹으려고요.”
“어쩜. 일편단심에다 예의 바르기까지 한 껌딱지네.”
효림이 감탄했다. 제 자식 칭찬받은 것처럼 뿌듯해진 모단은 사랑을 듬뿍 담아 아이의 뺨을 포옥 감싸주었다.
“고마워. 얼른 같이 먹자. 근데 무탈이가 먹기엔 조금 크겠다.”
“괜찮아요. 잘 먹겠습니다.”
견은 얌전히 김밥을 입에 넣었다. 제법 괜찮은 이 손맛이 김밥집 아줌마 말고 모단의 것이었다면 더 좋았겠다는 아쉬움을 한데 씹으면서.
교사들 사이에서 짧은 수다가 오갔다.
“주말에 애들 데리고 캠핑 다녀왔는데 좋더라고.”
“캠핑이요? 너무 좋으셨겠다.”
모단이 관심을 보이자 견도 귀를 쫑긋 세웠다.
“모단 쌤도 캠핑 좋아해요?”
“한 번도 안 해봤는데 좋을 것 같아요. 캠핑 가서 구워 먹는 고기가 그렇게 맛있다던데.”
“그럼. 삼겹살을 구워도 꽃등심 맛이 난다니까.”
“전 원래 불에 구워 먹는 건 소고기보다 돼지고기가 좋더라고요. 삼겹살도 짱 맛있고, 목살도 좋고요.”
직접 먹는 건 물론이고 먹는 얘기만 해도 세상 진지해지는 모단을 지켜보던 견은 웃음을 참기 위해 김밥 하나를 더 욱여넣었다.
“저는 전 남자친구랑 같이 갔었는데 싸우고 왔어요. 낭만적일 줄 알았는데 현실은 너무 힘들고 불편하고. 더운데 텐트 치고 걷다가 서로 인성 바닥까지 봤잖아요.”
효림의 말에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다음엔 글램핑을 해봐요. 힘들게 장비 안 싸가도 분위기는 나잖아.”
“아, 맞다. 요샌 그런 데도 있대요. 레스토랑이나 카페 옥상에 글램핑장처럼 텐트랑 장비 다 갖춰놓고 대여해 주는 거.”
“어디요? 저도 가보고 싶은데.”
모단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짧은 정적이 흘렀다. 효림이 모단의 팔을 툭 쳤다.
“누구랑? 모단 쌤 남자친구 생겼어요?”
지금만큼은 맹세코 견을 떠올리지 않았다. 새윤과 둘이, 혹은 아예 은규와 해빛이까지 껴서 하룻밤 놀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인데.
어쩐지 억울해진 모단이 입을 내밀었다.
“친구랑 가면 안 되나요……?”
“선생님.”
견이 나직이 한마디 했다.
“그런 데는 남자친구랑 가야죠.”
저격당한 모단을 포함한 모두가 응? 했다가 폭소했다.
“아유, 무탈이 얘는 하는 말마다 어쩜 이렇게 잔망스러운지.”
“일곱 살짜리가 더 낫네. 무탈이도 아는 걸 모단 쌤은 몰라요? 그런 데는 남자친구랑 가요.”
모단이 가늘어진 눈으로 견을 돌아보고는 코를 세게 찡그렸다.
견이 그대로 따라 하자, 모단은 곧장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좀 많이 눈부셔서 견은 저도 모르게 눈을 찡그렸다.
“어, 왜? 이마 아프니?”
“아니요.”
견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화끈대는 뺨까지 들키면 열 나는 거 아니냐고 또 걱정할 테니까.
그때 효림이 가볍게 던졌다.
“모단 쌤, 말 나온 김에 소개팅이나 하실래요?”
모단의 눈이 동그래졌다.
“소개팅이요? 읍!”
한다 안 한다 말하기도 전에 김밥이 모단의 입을 틀어막았다. 견이 손수 먹여준 거였다.
“많이 드세요, 선생님.”
“으응, 고, 고맙…….”
겨우 음식을 씹어 삼킨 모단이 간신히 ‘안 해요’ 했다. 견은 손에 쥐었던 방울토마토를 내려놓고 오구오구, 하는 얼굴로 물을 건네주었다.
“왜요? 부담 갖지 마시고 밥 한 끼 먹고 재밌게 논다고 생각해요.”
“생각해 주신 건 감사하지만 맘 없는 사람하고 밥 먹는 거 불편해서요.”
효림은 더 이상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흐뭇한 눈을 한 견이 작은 손을 모단의 무릎 바로 옆에 짚고 다가가 속닥거렸다.
“선생님. 나랑 밥 먹는 건 좋지요?”
웃음을 터뜨린 모단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고 있는 아이의 입에 치킨 조각을 반 잘라 넣어주었다. 옆에서 보던 효림의 표정이 구깃해졌다.
“이상하네. 왜 저는 지금 커플하고 같이 밥 먹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걸까요?”
“그야말로 사랑둥이네. 저런 껌딱지면 열이라도 달고 다니겠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 모단이 견의 뺨을 꾹 찔렀다.
“무탈이, 선생님 아들 할래?”
“아니요.”
의외의 단호함에 모두가 당황했다. 이어진 말은 절로 입이 벌어지게 했다.
“나중에 저랑 똑같이 생긴 아들을 낳으시는 건 어때요?”
얘 어떡하니, 하는 연경의 중얼거림 위로 웃음소리가 포개졌다. 모단도 그래, 그래야겠다, 하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김밥에 든 오이 끄트머리를 씹었는지 입안이 조금 썼다.
“선생니이이이임!”
나무 그늘 아래 신나게 뛰어다니던 아이들 사이에서 고함이 터졌다.
“비눗방울 잡고 싶은데 쟤네들이 자꾸 터뜨려요오!”
“아니에요오! 그냥 터지는 거에요오!”
동그란 비눗방울을 살포시 잡고 싶은 감성파와 눈에 띄는 족족 터뜨려야 직성이 풀리는 행동파 사이에 팽팽한 전운이 감돌았다. 여차하면 ‘바보똥꼬야’를 비롯한 막말까지 오갈 분위기다.
‘요런 똥꼬맹이들. 볼이 땅기고 현기증이 일도록 비눗방울 불어줬더니만 쌈박질이냐!’
모단이 한숨을 폭 내쉬고는 외쳤다.
“얘들아! 선생님이 신기한 거 알려줄까?”
“뭔데요?”
“비눗방울을 안 터뜨리고 가만히 손에 올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대.”
“정말요?”
홀딱 넘어온 아이들이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너도나도 손을 내밀었다. 금세 살금살금으로 바뀐 걸음걸이들이 너무 귀여웠다.
모단은 다시 비눗방울을 불어주기 시작했다.
“와, 됐다!”
“으아아, 내 거는 터졌어! 다시, 다시.”
여기저기서 소란이 벌어졌다. 몇 번 만에 흥미를 잃고 다시 행동파로 돌아가는 아이들도 있고, 꽤나 집중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어라.”
흥분을 잠시나마 가라앉히기 위한 임시방편에 냉큼 홀린 아이들을 구경하며 ‘좋을 때다’ 하는 눈빛을 흘리고 있던 견이 멈칫했다.
비눗방울을 분답시고 동그랗게 오므린 모단의 입술을 봤다가 속이 뜨끔해져서 줄곧 앞만 보고 있던 참이었다.
둥실대던 비눗방울 하나가 손등에 내려앉아 있다. 푸딩처럼 탱글거리는 것을 빤히 내려다보던 견이 옆에 앉은 모단의 눈앞으로 조심조심 손을 들어 올렸다.
“와, 무탈이가 잡았네? 무슨 소원 빌고 싶어?”
“진짜 소원 이루어져요?”
“그럼.”
모단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동심은 소중하니까.
“그럼 저는…….”
모단을 한 번 보고 비눗방울을 한 번 본 견이 다시 그녀의 눈을 보았다.
“선생님하고 결혼할래요.”
순간, 모단은 헉 하다가 입 앞에 있던 비눗방울 액을 흡입할 뻔했다.
‘내 친구 딸이 너랑 동갑이란다. 내 첫사랑이 개새만 아니었어도 엄마뻘이라고……!’
어디선가 심쿵 소리와 철컹철컹 소리가 한데 들려오는 것 같았다.
“에이, 무탈이가 다 크면 선생님은 할머니 될 텐데?”
“그 정도까진 안 걸려요.”
쪼그만 게 뭐 이렇게 단호해.
“그리고 할머니 돼도 예쁠 텐데 뭔 상관이에요.”
하마터면 휴대폰을 꺼내 112에 신고할 뻔했다. 방금 솔직히 좀 설레었다고, 당장 잡아가셔야 될 것 같다고!
그녀의 속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견이 싱긋 웃었다.
“저 다 컸어요.”
모단의 입가에는 귀여워 죽겠다는 웃음이 걸렸다.
“정말인데. 저 진짜 커요.”
“그래. 우리 무탈이는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니까 앞으로 더 많이 클 거야.”
안 먹고 안 자도 월경만 끝나면 충분하다는 말은 꼴깍 삼켰다.
“걱정 마세요. 선생님이 할머니가 되어도 선생님하고 결혼한다고 할게요.”
“그래, 고맙다.”
“나 금방 크니까 기다려요.”
견이 한 번 더 다짐을 받았다.
“나하고 결혼해요, 선생님.”
아직도 터지지 않은 비눗방울 위로 무지갯빛이 미끄러졌다.
꼭, 반지 위에 얹힌 보석처럼.
***
―주말까지 못 기다리겠고 수요일에 만나요. 일찍 와야 많이 즐길 수 있어요.
견이 보낸 묘한 문자에는 주소 하나가 덧붙어 있었다. 어디냐고 물어봐도 와보면 안다는 말뿐이다.
가족의 날이라 한 시간이나 일찍 퇴근을 하니 아직도 하늘에 해가 남아 있다. 모단은 참 어색한 광경이라 생각하며 택시를 잡고 기사님께 주소를 알려 드렸다.
20분쯤 걸렸을까. 도심을 빠져나가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과 카페들이 몰려 있는 길을 살짝 지난 곳에서 차가 멈췄다.
“다 왔습니다. 목적지가 여기네요.”
“아, 네. 감사합니다.”
택시비를 내고 내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편의점과 식당, 커피숍 등이 간간이 보이는 보통의 길이다.
대체 어디로 들어가야 하는 건가 싶어 견에게 전화를 걸었다.
“도착했는데 어디예요?”
[지금 혹시 횡단보도 앞에 서 있어요?]
“네.”
[건너편에 L호텔이라고 보이죠? 거기로 와요.]
“뭐요?!”
저도 모르게 갈라진 소리를 내버린 모단이 빨개진 얼굴을 가리고 윽박질렀다.
“호텔이요? 미쳤어요?”
수화기 너머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넘어왔다.
[호텔이라고 하면 바로 그런 생각부터 할까 봐 일부러 근처로 알려줬죠. 어쩜 이렇게 예상을 벗어나질 않지?]
“호텔로 오라는데 그런 생각을 안 하는 게 이상한 거죠!”
[그런 생각이 뭔 생각인지 궁금해 죽겠네. 아무튼 얼른 15층으로 와요. 15층이에요.]
전화가 뚝 끊어졌다.
횡단보도 신호가 두 번 바뀌는 동안 치열하게 고민한 모단은 일단 길을 건넜다.
음흉한 속내라고 보기에는 너무 당당하지 않은가. 게다가 제가 오란다고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데 느긋한 것도 그랬다.
‘하긴, 뭔가 작정을 했으면 차 끌고 데리러 와서 주차장까지 논스톱으로 갔겠지.’
쭈뼛거리면 더 이상해 보일 것 같아 허리 쭉 펴고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프론트에 있던 직원에게 15층이라고 하자, 미리 연락이라도 받은 것처럼 바로 카드키를 내주었다.
엘리베이터에 타서 카드키를 대고 층수를 누르려던 모단은 멈칫했다.
숫자가 14까지밖에 없고 그 위에 PH라고 적혀 있다. 14층 다음이 15층이겠지 싶어 일단 눌러놓고 갸웃했다.
“PH? 분명 15층이라 그랬는데…….”
그 순간, 기막힌 단어 하나가 머릿속을 스쳤다.
펜트하우스(Penthouse).
하필 그때 잊고 있던 것까지 떠올랐다. 일찍 와야 많이 즐길 수 있어요, 라고 했던가.
얼굴에 불이 나려고 했다. 수많은 것들을 치열하게 고민하는데 벌써 땡 하고 도착해 버렸다.
“어, 어쩔……!”
문 열리자마자 새빨간 융단 카펫이 쫙 깔려 있다거나 집채만 한 침대가 있다거나 하면 바로 돌아서 튀려고 했는데, 웬 바람이 정신 차리라는 듯 뺨을 찰싹 쳤다.
이끌리듯 두어 걸음 내딛은 모단은 스르르 입을 벌렸다.
“와아…….”
짙붉은 저녁 하늘을 위로 두른 아담한 옥상정원이 단숨에 눈을 사로잡았다.
정원 한쪽에는 커다란 인디언 텐트가 주홍빛 조명을 밝히고 있고, 그 앞에 작은 테이블과 캠핑용 의자, 동그란 바비큐 그릴까지 놓여 있다.
생각지도 못한 광경에 넋을 놓고 있는데, 등 뒤에서 웬 묵직한 온기가 덥석 덮쳐들었다.
“보고 싶었어요.”
심장을 입 밖으로 토할 뻔했다.
목과 귀 사이로 파고드는 달짝지근한 숨이 견의 것이며, 지금 그가 무려 백허그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다.
“와아이씨, 놀랐잖아요! 미쳤냐고!”
쇄골 앞을 가로지른 팔을 잡아서 사정없이 던져 버리고 품에서 나온 모단이 홱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눈앞에 보이는 가슴과 어깨, 팔뚝 등등에 마구 손을 날렸다.
“맘대로 안지 말라고! 물어보고 안는 것도 안 된다고 분명 말했……!”
별로 아프진 않았지만 예의상 오만상을 찌푸리고 맞아준 견이 모단의 손목을 가뿐히 잡아챘다.
“치사하게 이러는 게 어딨어요? 이거는 경우가 아니지!”
“치사아아아? 경우우우우? 지금 경우라고 했어요? 다짜고짜 경우 없는 짓을 한 게 누군데!”
“키스까지 했으면 그런 사이답게 인사하는 게 경우 바른 쪽에 속하는 거죠! 3단계까지 가놓고 2단계를 못하게 하는 게 경우가 아닌 거지!”
너무 논리적이라 자칫 수긍할 뻔했다.
주춤하자마자 손목을 놓아준 견이 보란 듯이 혀끝으로 입술을 스윽 훑고는 한마디 했다.
“스킨십에 후진은 없다는 말도 몰라요?”
“어휴…….”
모단은 이마를 짚었다.
누굴 탓하겠나. 입술 붙일 때 뺨을 후려치고 은장도를 꺼내지 않은 나를 탓해야지.
입을 꾹 다문 모단이 엘리베이터로 유턴하려는데 견이 쿡 찔렀다.
“저녁 먹자고 부른 건데 그냥 갈 건 아니죠? 고기 구울 건데.”
고기, 라는 단어가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발이 그 자리에 철썩 붙었다.
“삼겹살하고 목살 반반. 불도 다 피워놨어요.”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입맛 다시게 만드는 냄새가 난다 했다. 고기를 올리기만 하면 기가 막히게 익혀줄 준비가 되었음을 알리는, 매캐하고 훈훈한 숯 향기가.
“이건…….”
모단은 잠깐 사이에 한 바가지 고인 침을 꼴딱 삼키고는 천천히 돌아섰다.
“솔직히 누구라도 거절 못 하는 그런 상황이라는 거 인정해 줘야 돼요. 인정?”
그녀의 표정이 너무 심각해서 긴장했던 견이 웃음을 터뜨렸다.
“인정, 무조건 인정…… 아하하!”
겨우 대답해 놓고 또 미친 듯이 웃기 시작한다. 민망해진 모단은 눈을 흘기고는 도망치듯 바비큐 그릴 쪽으로 향했다.
“와아, 대박.”
아마도 호텔 측의 서비스인 듯, 테이블에 고기와 채소, 소스류와 수저까지 가지런하고도 푸짐하게 놓여 있다.
모단이 가방과 겉옷을 한쪽에 내려놓았다. 견이 캠핑 의자를 당겨주며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여기 하루 한 명밖에 예약 안 되는 곳이래요. 주말엔 꽉 찼더라고.”
“날씨도 좋아졌으니 그럴 만하네요.”
“그래도 1박 비용이 생각보다 안 비싸더라고요. 장비에 테이블 세팅까지 다 포함된 거라 고기만 사 왔는데. 완전 좋죠?”
“……1박이요?”
눈동자까지 뻣뻣해지는 모단을 본 견이 새침하게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무조건 1박 렌트만 된다고 해서 한 거니까 혹시라도 음흉한 생각하지 마세요. 난 집에 가서 잘 거니까. 내 방 매트리스 아니면 잘 못 자서.”
“완두콩 공주가 따로 없네. 그리고 누가 누구더러 뭘 하지 말라는 거예요?”
모단이 툴툴거렸다. 그사이 견이 고기를 가져다 숯불 위에 올렸다.
치이이익.
“크으으.”
먹음직스러운 소리 위로 어김없이 아재스러운 감탄이 겹쳐들었다. 음흉한 생각이고 뭐고 모단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고기밖에 없는 게 분명했다.
초롱초롱하니 고기만 주시하던 그녀의 눈매가 슬슬 찡그려졌다. 좀처럼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이는 집게를 초조하게 지켜보던 모단이 이마에 힘을 주었다.
“고기 안 뒤집어요?”
“자주 뒤집으면 육즙 빠진다고 그러던데.”
“그건 불판에 구울 때 얘기죠. 숯불에 너무 오래 두면 그릴에 달라붙고 탄다구요. 집게 이리 줘봐요.”
견이 얼결에 집게를 넘겼다. 모단이 그릴 위에 중구난방으로 누워 있던 고기들을 신속하게 뒤집었다.
“에헤이, 이거 봐요. 벌써 좀 탔잖아.”
고기를 뒤집는 모단을 지켜보던 견의 눈이 반짝거렸다. 마치 엄마가 요리하는 모습을 넋 놓고 구경하는 아이처럼.
“내가 해주고 싶었는데. 항상 셰프가 구워주는 것만 받아먹어 버릇했더니.”
모단의 눈에 호기심이 어렸다.
“혹시 백견 씨 집에는요,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집사도 있고 셰프랑 메이드도 있고 그래요?”
“네.”
모단의 턱이 슬그머니 아래로 떨어졌다.
견이 테이블에 한 팔을 세우고 우아하게 턱을 올렸다.
“생각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요.”
“무슨 생각이요?”
견의 눈꼬리가 의뭉스레 접혔다.
“사모님 소리 들어보고 싶은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