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무탈은 개뿔
2017.09.17.
“선생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하루에도 몇 번씩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를 연발하는 아이에게, 모단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선생님은…… 고기랑 밥이랑 면 중에 뭐가 좋으세요?”
“응?”
아무리 갑작스러워도 먹는 것에 관한 일이라면 대답이 자동응답기처럼 튀어나오는 그녀다.
“밥이랑 고기 같이 먹고 후식으로 면?”
“아…… 그런 방법이…….”
다음 데이트 때는 뭘 먹을지, 스테이크와 한정식과 파스타 중에 고를 생각이었는데 셋 다 까인 것 같다.
견은 터지려는 웃음을 겨우 참느라 입술을 앙다물었다. 괜히 민망해진 모단이 얼른 덧붙였다.
“선생님이 꿀꿀 돼지처럼 많이 먹겠다는 게 아니라, 골고루 먹어야 키가 쑥쑥 크는 거 알지?”
“알아요. 농부님과 요리사님의 정성을 생각하며 꼭꼭 냠냠 꿀꺽해야 되는 거.”
“그렇지.”
“근데 선생님은 성장판 닫힌 지 오래됐잖아요.”
“뭐야?”
순간 정색했던 모단이 입꼬리를 방긋 올렸다.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고, 단군설화도 아는 아이인데 성장판쯤은 당연히 알겠지. 요런 애 앞에서 선생님은 사실 돼지보스라는 진실을 감춘 게 잘못인 거다.
“모단 쌤!”
효림이 문밖에서 고개만 내밀고 물었다.
“지금 원장실에 동후 어머니 오셨던데 무슨 일이에요?”
“그래요?”
습관처럼 견의 머리를 쓰다듬고 일어선 모단은 연경에게 잠시 아이들을 부탁했다.
동후 엄마라는 말을 듣자마자 연경의 이마에 주름이 패었다.
“내가 작년에 동후 담임이어서 알지. 선생님 휘어잡으려고 드는 어머니라 좀 힘들 거예요. 쌤을 어리고 만만하게 봤다가 아니니까 일부러 더 트집 잡으시는 것 같은데, 휩쓸리지 말고 너무 속상해하지도 말고 지금까지 하던 대로 해요.”
고맙다고 인사한 모단은 얼른 원장실로 향했다.
문 위쪽에 달린 유리 너머로 동후 엄마의 뒷모습이 보였다.
“원장님도 아시다시피 우리 동후가 돌도 되기 전부터 여기 다니면서 한 번도 안 간다는 소리 한 적 없는 애거든요.”
“그렇죠.”
“바뀐 환경이라고는 선생님밖에 없는데. 혹시 선생님이 너무 무섭다거나 하는 이유로 아이가 안 가려고 하는 건 아닌가 싶어서…….”
“어머, 정 선생님. 들어오세요. 안 그래도 잠깐 오시라고 하려 했는데.”
원장의 목소리에 동후 엄마가 움찔 돌아보았다. 그러나 곧 특유의 도도한 분위기로 되돌아왔다.
“제가 보기엔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담임선생님과 말씀 나눠보시겠어요?”
원장이 눈짓을 하고는 자리를 비켰다.
인사를 하고 맞은편에 앉은 모단이 말을 꺼냈다.
“아침부터 동후가 울고 가서 많이 속상하셨죠? 지금은 잘 놀고 있어요.”
“네.”
“아이들이 주말에 너무 재미있게 놀았거나 반대로 충분히 쉬지 못했다는 기분이 들면 집에 더 있고 싶어 하는 경우도 있어요. 어른하고 똑같죠. 동후 주말에 어떻게 지냈나요?”
“집에만 있었어요. 애아빠도 저도 바빠서.”
무성의한 대답만 돌아왔다.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않는데도 모단은 한결같은 미소를 유지했다.
“그러셨군요. 등원 거부가 며칠 동안 계속된다거나 더 심해지면 다른 문제가 있지 않은지 면밀히 살펴봐야 하겠지만.”
일부러 말을 끊자, 틀어져 있던 동후 엄마의 고개가 비로소 모단 쪽을 향했다.
“몇 년을 잘 다니던 애가 고작 하루 안 간다고 떼를 썼다고 해서 담임교사의 자질까지 염려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동후 엄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방금 전에 제 말이 기분 나빴다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솔직히 기분이 좋지는 않습니다. 열심히 일하고 정성껏 아이들 돌보다가 이런 말 듣고 기분이 좋을 사람은 없어요, 어머니.”
“뭐라고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교사도 사람이라고요.”
동후 엄마가 입을 벌린 채 굳었다.
“기본적으로 내 아이를 남에게 맡긴다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있으실 수밖에 없다는 건 이해합니다. 미디어에서 이런저런 안 좋은 소식도 들리니 더 그러실 테고요. 하지만 어머니께서 저를 믿지 못한다는 걸 느끼면 동후도 불안해해요.”
모단의 말투는 정중하고도 단호했다.
“어린이집에서의 주 양육자인 저와 제대로 애착이 형성되기가 어렵다는 뜻입니다. 어머님과 저는 서로 믿고 소통하면서 가정에서나 원에서나 동후가 잘 자랄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하는 관계이지, 갑을관계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텃세도 기싸움도 갑질도 모두 사절한다는 뜻을 딱 부러지게 전달한 모단이 원장실 천장에 걸려 있는 CCTV 모니터를 가리켰다.
“막연한 의심이 생기면 어머님도 피곤하실 테니까요, 근무 중에 시간 될 때 오셔서 직접 확인하고 가시는 건 어떨까 싶습니다. 3번이라고 쓰여 있는 곳이 바다반 교실이구요, 자유놀이 중이네요. 저기 보면 동후가…….”
말을 멈춘 모단의 눈이 커졌다.
미처 어쩔 틈도 없이, 화면 속 동후가 손에 들고 있던 장난감을 세게 집어 던졌다.
소리가 들릴 리가 없음에도 퍽 하는 소리가 들린 것만 같았다.
몇 걸음 앞에 있던 무탈이가 이마를 감싸고 주저앉는 것과 연경이 급히 뛰어오는 광경이 눈앞을 어지럽혔다.
모단은 바로 원장실을 뛰쳐나갔다.
‘침착, 침착하자. 내가 더 놀라서 허둥지둥하면 안 돼. 침착하게, 침착하게…….’
교실 앞까지 가기도 전에 벌써 해빛이의 울음소리가 넘어왔다. 문을 열자마자 연경이 무탈이를 안고 있는 게 보였다.
“어떻게 된 거예요?”
“해빛이랑 동후가 같은 장난감을 두고 다투다가 동후가 그걸 던졌어요. 해빛이가 맞을 뻔했는데 옆에 있던 무탈이가 끼어들어서…….”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가 눈을 지나 뺨으로 흐르는 통에 견은 눈도 제대로 못 뜨고 있었다. 모단은 얼른 화장실로 들어가 깨끗한 수건을 가지고 나왔다.
“지혈하고 바로 병원 다녀올게요.”
“병원은 안 돼요!”
견이 모단의 팔을 잡았다. 아이답지 않은 악력이었다.
“괜찮아, 무탈아. 선생님하고 같이…….”
무서워서 그런 거라 짐작한 그녀가 바로 달래려 했으나, 아이의 목소리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차분했다.
“먼저 섭호…… 형한테 전화해 주세요. 오늘 회사에 있을 거라고 했으니까 바로 올 거예요.”
울지도 않는 아이를 내려다보던 모단은 입술을 깨물었다. 제 손이 덜덜 떨릴 정도인데 이 아이는 엄마 한 번 찾지 않고 어쩜 이렇게 차분한 건지, 복잡한 생각이 스쳤다.
“알았어. 일단 원장실로 가자.”
모단은 한 손으로 수건을 꾹 누르고 다른 팔로 무탈이를 안아 들었다. 교실을 나가려다 동후 엄마를 보고 멈칫했다.
“동후야, 넌 괜찮아? 대체 왜 그랬어! 너 그런 애 아니잖아!”
언제 뒤따라온 건지, 동후 엄마가 동후를 잡고 이리저리 살피고 있었다. 가뜩이나 놀라고 긴장한 와중에 엄마까지 다그치자 결국 동후도 울음을 터뜨렸다.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인지. 쟤가 먼저 때리거나 한 거 아니야?”
“어머니.”
아이 뺨에 살짝 멍이 들었다고 그 소란을 피웠던 사람이, 남의 애가 피를 철철 흘릴 때는 거들떠도 안 보느냐는 말이 치밀었다. 동후를 비롯한 아이들만 없었다면 하고도 남았다.
모단은 응급 상황임을 되새기며 간신히 억눌렀다.
“아이들 앞에서 그런 말씀 삼가 주시고요, 원장실로 같이 가주세요. 무탈이 보호자분께 연락부터 드리고 다시 말씀 나눠야 할 것 같습니다.”
무탈이가 다쳤다는 말을 듣자마자 섭호는 바로 내려오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모단이 전화기를 들고 있는 사이, 견은 어쩔 줄 몰라 하는 원장의 손길을 슬며시 밀어내고 미소를 지었다.
회장님이 각별히 부탁한 아이의 이마에서 피가 터진 것을 본 원장은 잠깐 사이 몇 년은 늙어 보였다.
“제가 할게요.”
제 손으로 이마를 덮은 수건을 지그시 누른 견은 한쪽 눈으로 상황을 살폈다.
동후 엄마는 구석에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회사 사람인지 남편인지 모르겠으나 표정에서부터 짜증이 묻어났다.
동후는 혼자 불안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맘에 걸린 견이 말을 걸려는데, 모단이 먼저 동후에게 손을 내밀었다.
울먹이던 동후가 주춤주춤 다가왔다.
“잘못했어요, 선생님…….”
“아무리 화가 나도 물건을 던지는 건 안 되는 거야. 무탈이에게도 미안하다고 말해줘야지.”
“미안해, 무탈아.”
“괜찮아.”
그때 동후 엄마가 원장을 향해 물었다.
“여기 어린이집 상해보험 들어 있죠? 원에서 난 사고는 원에서 처리해 주는 거라고…….”
동후 엄마의 말을 자르고 똑똑 손기척이 났다.
들어서자마자 피 묻은 수건을 본 섭호의 얼굴이 무섭게 굳었다. 그를 알아본 동후 엄마의 얼굴에는 퇴사 통보를 받은 거나 다름없는 표정이 스쳤다.
성큼성큼 다가온 섭호가 곧장 견부터 안아 들었다.
“병원은 제가 데리고 가겠습니다. 먼저 응급조치부터 한 후에 연락드리죠.”
동후 엄마가 급히 나섰다.
“아이들끼리 놀다가 작은 문제가 생긴 것 같아요. 우리 애는 절대 그럴 애가 아니거든요. 그리고 그 교실에 다른 선생님도 있었…….”
“우리 애는 그럴 애가 아니다. 친구끼리 장난으로 그런 거고 놀다 보면 그럴 수도 있다. 막지 못한 교사나 피하지 못한 아이 잘못도 있지 않느냐.”
내려다보는 섭호의 시선에서 냉기가 뚝뚝 떨어졌다.
“가해자 부모들의 전형적인 화법이로군요.”
원장실 안에 있던 모두가 얼어붙었다. 평소의 그를 아는 모단이 가장 놀랐다.
“그럴 애랑 아닌 애가 따로 있는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그럴 때 진심으로 사과하라고 가르치는 부모를 가진 애와 남 탓 하는 부모를 가진 애는 확실히 따로 있는 것 같군요.”
회장 손주의 비서라는 직책과 타고난 체격에 싸늘한 분노까지 더해지니 위압감이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견이 섭호의 어깨를 슬쩍 쥐었다.
“형, 동후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그래, 우리 동후가 절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그러니까 동후하고 우리 선생님한테는 화내면 안 돼. 알았지?”
끼어들어 보려던 동후 엄마가 주춤했다.
“특히 우리 선생님한테는 절대 화내지 마. 내가 들었는데 저 아줌마가 옛날에 동후 얼굴 요만큼, 아주 요만큼 빨개졌다고 애 똑바로 안 본다고 우리 선생님한테 막 소리 질렀대.”
동후 엄마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견은 짐짓 천진해 보이는 웃음 뒤에 숨어 한 번 더 경고했다.
“우리 선생님 속상하게 만들지 마. 알았지?”
섭호는 고개만 까닥했다.
“치료부터 받은 후에 다시 뵙겠습니다. 총무2팀 민은희 차장님.”
원장과 모단에게 묵례를 한 섭호가 견을 안고 어린이집을 나섰다.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내내 섭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견이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이만 내려주지? 내가 진짜 애냐?”
“걸어서 언제 주차장까지 갑니까. 다 큰 도련님도 업고 뛰었는데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듯 딱딱한 존댓말이 흘러나왔다.
“너, 조금 전에 정말로 내 보호자 같았어.”
“언젠 보호자 아니었습니까?”
“정말 형 같아서 든든했다고.”
뒷좌석에 견을 태우고 운전석에 앉은 후에야, 섭호는 너무 참아서 변비 될 뻔한 사투리를 터뜨렸다.
“무탈은 개뿔, 워째 하루도 무탈할 날이 없구먼! 당췌 복장이 터져서 살 수가 없슈! 인자 하다하다 개미 저범(젓가락)만 한 얼라한테도 쥐어터지는 거유? 어린이집이구 뭐구 다 땔쳐유!”
“충청도에서는 개미도 젓가락질을…… 잘하겠지. 소리 지르지 마. 머리 아프다아…….”
엄살모드로 들어간 견을 흘겨본 섭호가 희명병원으로 차를 몰았다.
“정말 그 엄마한테 치료비 받을 거야?”
“말본새를 봐서는 흉터 치료비까지 받아내구 싶지만은, 자칫 회장님 지인의 자제가 갑질혔다는 식으로 막 나올 수도 있을 것 같네유.”
“그렇지. 괜히 앙심 품고 걸고넘어지기라도 하면 신상도 가짜인 애가 빽으로 어린이집 들어온 것까지 털릴지도.”
얼마 후, 차가 희명병원 별관 앞에 도착했다.
“일단 고모한테 보여주고 나서 결정하자.”
견이 창문 너머를 휘 둘러보고는 차 문을 열었다.
“흉터 안 남는다고 하면 사과만 받고 없던 일로 해. 하지만 이 완벽한 얼굴에 손톱만 한 흉이라도 남는다고 하면 피의 대가를 치르게 해주겠어.”
“장난감으로 대그빡 맞구 중2병이라도 온 겨? 뇌 검사도 해봐야 되는 거 아뉴?”
둘은 툭탁거리며 월경연구소 안으로 들어갔다.
미리 연락을 받고 기다리던 지미는 보자마자 혀부터 찼다.
“위스퍼가 고생이 많네. 장가도 가기 전에 애부터 키우느라고.”
“그러게 말입니다. 백지미 고모님 안 계셨으면 더 고될 뻔했습니다.”
“너부터 누워. 주둥이를 꿰매 버리게.”
“죄송합니다, 화이트 박사님.”
위스퍼에 욱해 백치미로 덤볐다가 바로 깨진 섭호가 주차 핑계를 대며 연구소 밖으로 도망쳤다.
견은 지미의 손짓에 따라 얌전히 침대에 누웠다. 지미가 빠르고 정확한 손놀림으로 상처를 말끔히 소독하고 두 바늘을 꿰맸다.
“고마워, 고모. 근데 흉터 남을까?”
“이 정도에 흉터는 무슨. 소독하게 내일 한 번 더 오고, 월경 끝나고 다시 보자.”
“알았어.”
일어나 앉은 견의 눈에 어린애답지 않은 빛이 번뜩 스쳤다.
“근데 이번 달에 나 왜 이렇게 됐는지 안 물어봐?”
지미의 동공이 크게 흔들리더니 애먼 허공으로 향했다.
“호르몬시터하고 무슨 문제라도 있었나 보지?”
“아니. 호르몬시터에게는 아무 문제 없었어. 문제는 고모가 준 약에 있었지.”
섭호가 나간 문 쪽을 살핀 견이 아드득 이를 갈았다.
“내가 이 얼굴로 그런 의약품을 찾기는 좀 그렇긴 한데……. 그 약이 어딜 봐서 PMS치료제야? 그냥 비아그라지!”
지미는 안 보이고 안 들리는 사람처럼 묵묵부답이었다.
“내가 별의별 부작용을 다 겪어봤지만 그런, 어우! 발정기 온 고양이가 왜 그렇게 애달프게 울면서 괴로워하는지 온몸으로 깨달았어, 그날!”
지미의 목소리가 1년에 한두 번 들어볼까 말까 한 상냥한 톤으로 바뀌었다.
“우리 조카, 그런 힘든 일을 잘 견뎌냈구나. 효능…… 아니, 부작용 참고할게. PMS증후군이나 완경 즈음에 성욕감퇴가 나타나는 경우도 있어서 그걸 개선하기 위한 성분을 조금, 아주 조금 넣었다는데 그게 너랑 안 맞았나 보다. 아니지. 잘 맞은 건가?”
“고모!”
“그래, 사고 칠까 봐 아예 호르몬시터 근처에도 안 갔다가 이렇게 된 거로구나. 세상에, 이런 신사가 어디 있니. 내 조카의 자제력이 너무 자랑스럽다.”
신사는 무슨, 자제력은 무슨.
찔린 양심에서 멍멍 소리가 나려는데 마침 섭호가 돌아왔다. 견은 태연히 말을 돌렸다.
“꿰맨 거랑 돌아다니는 거랑은 상관없지?”
“상처에 물만 안 닿게 해.”
“알았어.”
견이 나가려는데 지미가 쿡 찔렀다.
“생각 있으면 투자해.”
“갑자기 뭘 어디다 투자하라는 거야?”
“임상실험 해봤으니 누구보다 잘 알 거 아냐.”
지미가 한 손을 입가에 대고 목소리를 낮췄다.
“성욕감퇴, 발기부전, 불감증 등으로 고통받고 있는 성인들을 위해 한 10억만 투자해라.”
“안 해!”
***
다음 날 아침, 견은 어린이집 입구까지 가지도 못하고 멈춰 섰다.
주차장에서부터 올라오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은규와 해빛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무탈이 다친 데는 괜찮나요?”
동후도 아니고 해빛이라니, 섭호마저 당황해서 눈만 굴렸다.
“해빛이가 그러더라고요. 제가 동후를 화나게 했는데 무탈이가 다쳤다고 속상해하면서 많이 울었어요.”
그러고 보니 은규의 손을 잡고 선 해빛이의 눈이 퉁퉁 부어 있다.
“무탈아, 많이 아파?”
“괜찮아. 하나도 안 아파.”
“이마에 반창고가, 반창고가아…….”
비죽대던 해빛이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
“반창고가 이만해, 아빠! 이만한 반창고를 붙였는데에, 으앙! 깡패 같은데 잘생겼어어!”
애들이 오열하는 이유 중 절반쯤이 그렇듯, 어른들 입장에선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였다.
겨우 그친 해빛이 손등으로 눈을 마구 문질렀다. 요란하게 코까지 들이마셨다.
“그만 울고 가자.”
견이 해빛이의 어깨를 다독여 주고는 함께 어린이집으로 향했다.
문 앞에서 이번에는 동후 엄마와 마주쳤다. 이제까지와는 달리 잔뜩 풀이 죽고 기도 죽어 있다.
“죄송합니다. 상처도 흉터도 말끔히 치료하세요. 비용은 저희가 끝까지 책임지겠습니다.”
“사과받은 걸로 됐습니다. 다행히 흉터는 안 남는다고 하니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도…….”
섭호와 엄마를 올려다보던 동후가 뒷짐 지고 있던 손을 쭈뼛쭈뼛 꺼내 견에게 내밀었다.
“미안해, 무탈아.”
반짝반짝 황금빛으로 빛나는, 무려 터닝몬스터 레어카드다.
7세 남아가 이걸 줬다는 건 치킨 다리 두 개를 다 먹으라고 한 것과 버금가는 의미였으나, 주제가 말고는 잘 모르는 견이 그것까지 알 리 없었다.
그래도 자기에게 가장 소중한 걸 주면서 진심으로 사과하고 있다는 것은 알았다.
“이거 정말 나 줘도 되겠어?”
“응.”
“음…… 고마워. 나도 갖고 싶었는데.”
동후가 해맑게 웃었다. 동후 엄마의 표정도 얼마간 밝아졌다.
“앞으로 우리 동후랑 더 사이좋게 지내, 무탈아. 오늘 소풍 간식도 일부러 많이 쌌으니까 꼭 같이 먹고.”
견과 섭호가 동시에 멈칫했다.
‘맞다, 소풍!’
‘맞다, 도시락!’
아직도 코가 빨간 해빛이가 고개를 쏙 내밀고 끼어들었다.
“나 토끼 도시락 싸왔다! 무탈이 너는 무슨 도시락 싸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