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르몬시터-27화 (27/86)

#27. 챙겨주고 싶다, 이 남자

2017.08.02.

운전하는 견의 옆모습을 빤히 쳐다보던 그녀가 한마디 했다.

“비 오는 날 먼지 나게 맞는다는 게 어떤 건지 오감으로 체험학습 시켜 드려요?”

“아니요. 다음에 다른 체험 신청할게요.”

견은 전혀 쫄지 않은 것처럼 태연히 화제를 바꿨다.

“근데, 누구 맘에 든다고 주변에 먼저 떠들고 다니는 사람 되게 별로지 않아요? 물건 찜하듯이 여기저기 떠벌려서 부담부터 잔뜩 준 후에 고백하고, 안 받아주면 태도 돌변해서 이상한 사람 만들고.”

“그건 동감이에요.”

“내가 훨씬 낫죠? 깔끔하게 본인한테 직접 얘기하고. 안 받아줘도 한결같잖아요.”

‘넌 너무 직접적이고 한결같아서 문제야, 자식아.’

말을 말자 싶어진 모단은 잠자코 견을 노려보았다.

‘어쩌다가 저 얼굴에 저런 정신머리가 깃들었을꼬.’

외모만큼은 정말 나무랄 데가 없긴 했다.

오늘은 셔츠에 타이까지 검은색이었는데, 다른 남자가 입었다면 백 프로 장례식장 가려고 입었구나 했을 터였다.

그런데 백견은, 블랙이 왜 가장 고급스러운 색이라고 불리는지 옷 한 벌로 완벽하게 보여주기 위해 입은 것 같았다.

‘혹시 이 인간, 신이 덕질하려고 공들여 빚은 피규어 아니었을까? 2D로 감상만 하려고 했는데 실수로 4D가 되어버린 거지. 그래서 상태가 안 좋은 거야. 미안해서 돈도 좀 주고…….’

일찍 일어난 데다 종일 졸아서 그런가, 의식의 흐름이 가관이다.

모단은 눈을 세게 감았다 떴다. 줄곧 앞만 보고 있던 견이 불쑥 물었다.

“나 계속 쳐다보는 이유가 뭐예요? 너무 잘생겨서? 아니면 데이트 의상치고는 너무 칙칙해서?”

“계속 본 적 없어요. 데이트 아니니까 칙칙해도 상관없고요.”

“철벽은. 광개토대왕이 와도 못 부수겠네.”

견은 칙칙하다는 말이 무색해질 만큼 희게 웃었다.

“너무 그러지 마요. 사이좋게 지내자니까. 적당히 친해져야 같이 있어도 덜 어색하고 좋죠.”

“백견 씨가 나 좋아하는 거 아는데 어떻게 안 어색하고 어떻게 안 부담스러워요?”

“신경은 쓰고 있었네요? 흘려버린 줄 알았는데.”

기다란 손가락이 운전대 위에서 흥얼대듯 움직였다.

“그래요. 남자로도 안 보이는 것보다는 조금 불편해도 의식하는 편이 낫죠.”

“그런 쪽으로 불편하진 않거든요?”

“편한 관계도 좋고.”

“뭔데 이랬다저랬다 해요?”

“다 좋으니까.”

두근.

모단의 눈동자가 제 가슴 쪽으로 스르르 내려갔다.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근육덩어리 녀석이 미쳤나. 누구 맘대로 두근이야? 네가 오늘 카페인을 너무 먹었지?’

“나 오늘 정모단 씨 보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모단은 화들짝 고개를 돌렸다.

“근육운동은 제대로 해야 해요.”

“그, 근육이요?”

이번에는 두근 아니라 쿵쾅 소리가 난 것도 같았다.

“네. 운동할 땐 바른 자세로 해야 관절에 무리 안 가고 근육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거든요. 앞으로는 스쿼트 할 때 무릎이 발끝보다 너무 많이 나오게 하지 마요.”

저 말고 다른 근육 얘기인 걸 알자마자 갈비뼈 안쪽 근육덩어리의 소리가 급속히 잦아들었다. 미묘해지려던 차 안의 분위기도 순식간에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침에 운동하는 거 볼 때마다 너무너무 말해주고 싶었는데. 아, 속 시원해.”

“나는 속이 뒤집히려고 하네요. 남 운동하는 걸 왜 쳐다봐요! 본인이나 열심히 하지!”

“열심히 하고 쉴 때 잠깐 본 거예요! 누가 들으면 넋 나가서 계속 보다가 침 흘린 줄 알겠네.”

“물론 그러진 않았겠죠. 내 몸매가 그 정도는 아니니까.”

“그건 본인 생각이고. 무턱대고 마른 몸보다 훨씬 매력 있어요.”

“두루뭉술하고 뻔한 칭찬은 안 하느니만 못해요.”

“그럼 구체적으로 해도 돼요? 덤벨 들 때 뒷목하고 어깨선 되게 예뻐요. 여자의 경우에는 허리하고 힙의 비율이 0.7에서 0.8 사이일 때 가장 이상적이라는데, 딱 보기 좋은 걸 보니까 0.75쯤 되나?”

“쉴 때 잠깐 본 게 그 정도시다? 작정하고 봤다간 뼈와 내장까지 보겠네, 아주!”

꽤 먼 거리였는데, 싸우다 보니 벌써 레스토랑 앞이었다.

전에 지협의 차를 타고 갈 때는 집까지 엄청 멀게 느껴졌었다. 모단은 어쩐지 민망해졌다.

견이 미리 예약해 둔 자리에 마주 앉자 바로 직원이 다가왔다.

몇 번 와본 곳인지, 견은 메뉴판도 보지 않고 주문을 했다.

모단은 견이 뭘 권하기도 전에 쏜살같이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그때 맞선놈이 먹는 게 너무 맛있어 보여서 한입만 달라고 할 뻔했던 거다.

“옷 좀 벗을게요.”

뜬금없이 ‘벗겨’가 떠오르는 통에 모단은 마시던 물을 뿜을 뻔했다.

다행히 견은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얼굴로 재킷을 벗어 옆의 의자에 걸어두었다.

“단둘이 첫 식사인데 시커먼 양복이라니 좀 그렇죠?”

자꾸 일일이 의미부여하지 말라고 딱 자르려는데, 견이 말을 이었다.

“오늘 부모님 모신 납골당에 다녀왔거든요. 얼마 전에 기일이었어요. 내 생일 다음 날.”

너무 담담하게 말을 꺼내는 통에 되레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견이 한 박자 늦게 아, 했다.

“돌아가신 지 오래돼서 난 이제 무뎌졌는데 듣는 입장에선 어렵죠? 밥 먹기 전에 우울한 얘기해서 미안해요.”

“괜찮아요.”

“그럼 조금 더 얘기해도 돼요? 다른 사람 아니고 정모단 씨니까.”

되레 잘됐다는 듯한 말투였다. 쓸데없이 해맑게 웃기까지 했다.

“그때 정모단 씨랑 부딪혔을 때, 내 생일파티를 하고 있었다고 했잖아요.”

“네.”

“그날 처음으로 내가 아프다는 걸 알게 되고, 온 가족이 발칵 뒤집어졌었어요. 손님들이 다 가시고 난 한밤중에 부모님이랑 고모가 먼저 서울로 가신다고 했어요. 희명병원에 미리 조치를 해놓으시겠다고.”

시간이 지나 많은 것들이 흐려졌지만, 지금도 또렷이 기억나는 것들이 있다.

작아진 저를 맨 처음 보았던 고모의 표정.

처음으로 아버지의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보았던 것과, 무릎을 꿇고 저를 끌어안은 엄마가 끊임없이 귓가에 속삭여 주던 말 같은 것.

많이 놀랐지, 우리 애기.

어디 아프진 않니?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저는 조금 더 있다가 할아버지 차를 타고 가기로 했고요.”

낯선 저를 누구에게도 보일 수 없었기에, 백 회장의 품에 안겨 잠들었다 깨기를 반복하며 모두가 잠들 시각까지 기다렸었다.

“자정 넘어 새벽에 리조트를 나가려고 하는데 전화가 왔어요. 사고가 났다고.”

어느새 모단은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을 만큼 이야기에 몰입했다.

“고모는 많이 다쳤고 엄마와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돌아가셨어요.”

충분히 짐작하고 있던 얘기임에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그때 많이 아파서, 일주일 동안 계속 아파서…….”

보기 좋게 튀어나온 견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크게 움직였다.

“상주인데 장례식장 근처에도 가지 못했어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코끝이 시큰해지려는 찰나, 하이톤의 발랄한 목소리가 뒤통수를 빡 쳤다.

“주문하신 샐러드와 에이드 나왔습니다!”

모단은 상냥하게 접시를 놓아주고 가는 여직원을 얼떨떨한 눈으로 올려다보다가 정신을 차렸다.

피식 웃은 견이 앞접시와 포크를 넌지시 챙겨주었다.

“방금 그 표정은 뭐였어요?”

“내 표정이 뭐 어땠는데요.”

“챙겨주고 싶다, 이 남자. 딱 그런 표정이었는데.”

“그런 거 노렸어요?”

“조금요.”

장난스레 웃는 얼굴을 본 모단은 어깨를 으쓱했다.

“난 7세 이하까지만 챙겨줘요. 그 이상 먹었으면 제 앞가림은 알아서 해야지.”

“하하.”

음료 한 모금을 마신 그녀가 덧붙였다.

“우리 아빠는 병으로 돌아가셨어요. 뇌출혈로 쓰러져서 몇 달 동안 고생하셨죠.”

이번에는 견이 멈칫했다.

“소위 말하는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있었는데도 전혀 준비 같은 거 되지 않아서 힘들었는데, 백견 씨는 갑작스러워서 더 그랬을 것 같네요.”

들어주는 걸로도 모자라 자신의 이야기까지 선뜻 꺼내줄 줄은 몰랐다.

견은 속에서 울렁이는 무언가를 가까스로 가라앉혔다.

“고마워요, 그런 말 해줘서.”

견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리고 오늘 같은 날 같이 있어줘서…….”

“엇, 저거 내 건가 보다!”

“에라이.”

또다시 발랄한 여직원이 문제였다.

기가 막힌 향기를 풍기며 철판 위에서 지글지글 익고 있는 스테이크를 들고 오는 그녀에게 모단의 정신이 홀딱 팔려 버린 거였다.

“접시 어느 쪽에 놓아드릴…….”

“여기요, 여기.”

눈은 스테이크에 고정한 채 테이블을 두드리는 모단을 본 견은 픽 웃고 말았다.

‘철벽이면 철벽이지, 예고도 없이 문이 열렸다가 냅다 닫히는 건 또 뭐야? 뻐꾸기시계도 아니고.’

견의 음식도 곧 나왔다. 스테이크를 한입 베어 문 모단의 입에서 예의 녹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으으음.”

“나하고 만난 중에 가장 행복해 보이네요.”

“역시 고기가 진리예요. 그날도 이거 먹을걸. 몇천 원 차이밖에 안 나는데.”

“그러게 마늘 싫어하면서 왜 갈릭버섯오일파스타는 시켜가지고.”

“마늘 안 싫어하는데요.”

모단이 고기 옆에 있던 마늘 플레이크를 가득 떠서 입에 넣었다. 견이 곧장 야단을 했다.

“아, 무슨 여자가 데이트하면서 그렇게 스스럼없이 마늘을 퍼먹어요!”

“데이트 아니라고 했을 텐데요.”

모단은 보란 듯이 더 퍼먹었다.

“밥 먹고 뽀뽀할 것도 아니고 얼굴 맞대고 속닥거릴 일도 없는데 마늘을 먹든 양파를 먹든 무슨 상관인지.”

견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어김없이 귀까지 빨개졌다.

“그런 말 하지 마요.”

“그런 상상을 하지 마요.”

모단은 육즙이 묻은 나이프를 든 손을 스윽 들어 보였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견은 제 접시에 있던 마늘 플레이크까지 덜어주었다.

“많이 드세요. 정모단 씨 말대로 오늘은 아무 일도 없을 것 같으니까.”

“‘오늘은’이 아니라 ‘앞으로도 쭈욱’이겠죠. 그리고 주려거든 고기도 같이 줘요.”

한 사람은 먹느라 정신없고, 다른 사람은 보느라 정신없어서 별 대화도 없이 식사가 끝났다.

후식으로 나온 녹차를 거의 다 마셨을 때, 모단이 말했다.

“오늘 먹은 건 같이 내요.”

“그런 건 별로 같이 하고 싶지 않네요. 내가 살게요. 내가 먹자고 우겼으니까.”

“그럼 차라리 제가 낼게요. 차도 얻어 탔으니까.”

“그 맞선놈하고 똑같은 취급 받기 싫습니다.”

딱 자른 견이 벗어두었던 재킷을 들고 일어섰다. 모단도 이번만큼은 별 반박을 하지 못하고 엉거주춤 뒤따랐다.

“계산 부탁드립니다.”

“네.”

견이 내민 카드를 공손히 받아 든 직원이 순간 눈을 크게 떴다. 옆에 있던 직원 역시 비슷한 반응이었다.

‘뭐지?’

조금 떨어져 서 있던 모단은 직원이 포스에 갖다 대는 카드를 힐끔 보았다. 글씨까진 안 보였으나 평범해 보이는 회색 카드다.

계산을 마치고 나란히 문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비는 그쳐 있었다.

“오늘은 코트 안 놓고 가요?”

“앗, 휴대폰 놓고 나왔다!”

“농담 안 했으면 어쩔 뻔했는데.”

“잠깐만요. 얼른 가져올게요.”

“그럼 챙겨서 나와요. 여기로 차 빼올게요.”

고개를 끄덕인 모단이 얼른 다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카운터 너머의 대화 소리가 얼핏 들렸다.

“방금 받은 거 블랙카드 맞죠? 연회비 200만 원 넘는 거.”

“어. 나 실제로 처음 봤어. 돈 있어도 신청 못 하는 카드라며? 카드사에서 먼저 초청장 보내고 심사까지 한 후에 가입시켜 준다던데.”

뒤늦게 모단을 발견한 직원들이 당황했다. 모단은 모르는 척 쑥스러운 미소와 함께 안을 가리켰다.

“조금 전에 뭘 놓고 나가서요.”

“아, 네.”

얼른 아까 그 자리로 가서 휴대폰을 가지고 나왔다.

기분 탓인지, 직원들이 더 깍듯하게 인사하는 것 같았다.

바로 앞에 세워져 있던 차의 조수석 문을 열고 타는데 등 뒤가 따끔따끔한 것 같기도 했다.

“찾았어요?”

“네.”

“다행이네.”

안전벨트를 맨 모단은 한 손으로 뺨을 긁적였다.

‘블랙카드가 까만색이 아니었구나. 처음 알았어.’

헛웃음이 나려고 했다. 동시에 밑도 끝도 없는 부끄러움이 치밀었다.

이 남자와 편하게 떠들고 싸우고 밥 먹고 했던 게 왠지 너무나도 민망했다.

재벌 3세인 거 몰랐던 것도 아니고, 알면서도 볼 때마다 막말하지 않았던가. 새삼스럽게 왜 이러나 싶으면서도 기분이 자꾸 복잡야릇해졌다.

‘역시 머리로 아는 거랑 눈으로 보는 건 확 다르구나. 현실감 빡 오네.’

올 때와는 달리 차 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견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는지 줄곧 옆을 신경 쓰는 눈치였다.

“앞에 글로브박스 열어볼래요? 조그만 상자 하나 있을 거예요. 쇼핑백에 담긴 거.”

모단은 허리를 굽혀 글로브박스를 열었다. 면세점에서 사도 비싸다는 유명 화장품 브랜드의 쇼핑백이 보였다.

“그거 금지가 정모단 선생님께 전해 드리래요. 당분간 해외 나가 있을 것 같다면서 저한테 대신 부탁했어요. 감사의 뜻이라던데.”

모단은 상자를 꺼내 들었다. 크기를 봐서는 립스틱 같았다.

‘타이밍하고는.’

가뜩이나 괜히 초라한 기분이 들려고 하던 찰나에 제대로 불을 지폈다.

‘별로 받고 싶지 않은데, 이거 안 받는다고 자존심이 세워지나?’

그건 자존심이 아니라 자격지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봐도 동정이라면 모를까, 이유 있는 호의까지도 매몰차게 쳐내는 건 물질적으로든 심적으로든 상대보다 여유가 없다는 반증인지도 모른다.

“고맙다고 전해줘요. 뭘 바라고 끼어든 건 아니었지만.”

“나도 대강 들었어요. 클럽에서…….”

말하다 말고, 견의 눈빛이 확 바뀌었다.

“사람이 왜 그렇게 겁이 없어요? 만약에 그 새끼가 금지 대신 정모단 씨한테 해코지했으면 어쩔 뻔했어요?”

“너 죽고 나 죽자 했겠죠, 뭐.”

“무슨 대답이 그래요? 그리고, 클럽 자주 다녀요? 막 이만큼 짧은 치마 입고 갔어요?”

“한복 입고 가진 않았어요.”

“뭘 입든 이제부턴 가지 마요.”

“그러려고요. 거기 가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전에 내가 보내준 뉴스 봤죠? 세상엔 별의별 미친놈들이 다 있다니까.”

“그러게 말이에요. 생각보다 멀리 있는 것 같지도 않고.”

아까와는 모단의 반응이 영 달랐다.

순순한 건지 심드렁한 건지, 축축 늘어지는 것이 탐탁찮았다.

덤빌 의욕마저 사라지게 하는 게, 섭호의 충청도 사투리를 상대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어느새 차가 집 앞에 도착했다.

“밥도 잘 먹었고 차도 잘 탔습니다. 고맙습니다.”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내리려는 모단을 물끄러미 보다가, 견은 큰맘 먹고 충격요법을 내질렀다.

“나 지금 좀 설레려고 하는데.”

“네. 수고하세요.”

“뭘 수고해요? 내 심장 수고하라고 응원해 주는 거예요? 진짜 왜 그러지? 보통은 밥 먹고 나면 더 쌩쌩해지지 않나? 맛이 없었어요?”

“아뇨. 맛있었어요.”

“그럼 왜냐고 물어봐 줘요, 얼른.”

모단은 안 궁금하고 귀찮아 죽겠지만 한 번만 물어봐 준다, 하는 눈빛을 감추지도 않고 물었다.

“왜 설렐까요?”

“집이 어디냐고 묻지도 않고 알아서 자연스럽게 데려다주니까 꼭 남자친구 같잖아요.”

“죄송합니다. 괜한 착각을 하게 만들어서. 택시비만큼 드릴 테니까 받고 가세요.”

“아, 아니에요.”

차라리 평소처럼 고함을 치지.

난감해하는 눈동자 가득 그런 말이 들어찼다.

조금 미안했지만, 같이 있을수록 기분이 더 가라앉을 것 같아 모단은 과감히 견을 외면하고 차 밖으로 내려섰다.

그때, 익숙한 대문 소리가 들렸다.

쓰레기봉투를 손에 들고 나오던 혜숙이었다.

미처 조수석 문을 놓지도 못한 상태에서 딱 걸린 모단의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졌다.

‘망했다!’

일단 못 본 척 외면했으나, 혜숙은 본 게 분명했다. 못 봤어도 곧 보게 될 터였다. 쓰레기를 버리려면 이쪽으로 와야 했으니까.

모단은 황급히 차 앞으로 돌아 운전석 옆에 섰다. 견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창문을 열었다.

“무슨 일…….”

“잠깐! 얼굴은 내밀지 말고요!”

“어헉.”

한 손으로 견의 이마를 밀어 집어넣은 모단이 허리를 굽혔다. 창틀을 짚고 몸을 바짝 기울여 시야를 가린 후에 목소리 톤을 한껏 상냥하게 올렸다.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쌤!”

“쌤? 토마스도 제임스도 아니고 쌔앰?”

“오늘 교육 너무 힘들었죠? 얼른 들어가서 쉬세요!”

“안 힘들었는데? 좋아 죽을 뻔했는데?”

“가세요, 얼른! 제발!”

마지막 ‘제발’은 어금니 꽉 깨물고 윽박지르다시피 했다.

정신없이 구르는 모단의 눈동자를 따라갔다가, 앞유리창 너머로 다가오는 혜숙을 발견한 견은 그제야 상황을 짐작했다.

운전대에 한 손을 얹고 있던 견이 몸을 틀고 가까이 다가들었다.

“수고하라는 말이나 할 거면 설레게 하지를 말든가. 어쩌자는 겁니까?”

뒤이어 헤어지기 아쉬워하는 남자친구 같은 눈빛으로 속삭였다.

“얼굴 맞대고 속닥거릴 일 없을 거라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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