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백견이 돌아왔다
2017.07.30.
은규가 견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뱉었다.
“모단이는 안 됩니다.”
견의 한쪽 눈썹이 느릿하게 올라갔다 내려왔다.
“‘모단이’요?”
테이블 위에 손을 겹쳐 올린 견이 몸을 기울였다.
“학부형이 어린이집 선생님을 부를 때 쓰는 호칭은 아닌 것 같은데.”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정모단 씨랑 어떻게 아는 사이죠?”
그러나 눈빛과 분위기는 조금도 여전하지 않았다.
압도당하는 것만 같았다. 은규는 저도 모르게 움츠렸던 어깨를 황급히 폈다.
‘쫄지 말자, 박은규. 더 이상 직장 상사도 아니잖아! 할 말 있는 쪽은 나라고!’
생각과는 달리 손바닥 안이 땀으로 질척했다. 은규는 주먹을 꽉 쥐고 애써 차분하게 답했다.
“고등학교 동창입니다. 모단이와 제일 친한 친구가 제 아내이기도 하고요.”
“그랬군요.”
“제가 대답해 드린 이유는, 이걸 아셔야 제가 한 말이 덜 주제넘게 들리실 것 같아서입니다.”
심호흡을 한 은규가 다시 한 번 말했다.
“모단이한테 그러지 마세요.”
아까보다 더 단호했다.
그러나 견은 심상히 되물었다.
“왜요?”
“예?”
정색을 하면 했지, 왜냐고 물을 줄은 몰랐는데.
당황한 은규가 얼른 대답을 쥐어짰다.
“코에 점 있는 여자가 꼭 모단이만 있는 건 아니잖습니까.”
“저에 대해 이런저런 소문이 도는 건 저도 압니다. 말 나온 김에 확실히 짚고 넘어가자면, 제 취향은 코에 점 있는 여자가 아니라 정모단 씨입니다. 기회가 된다면 본인에게 전해주셔도 상관없습니다.”
‘그딴 말을 어떻게 전하라고! 네가 대신 쳐 맞으라면서 나를 칠지도 모르는데!’
본인 또한 오랜 짝사랑 끝에 새윤을 품은지라 표현이 유별난 편인데, 백견은 더했다.
여기서 밀리면 안 된다. 은규는 다른 카드를 꺼냈다.
“백견 씨가 스물아홉이죠?”
“네.”
“모단이는 자기보다 어린 남자 싫어해요.”
“그건 정모단 씨 판단이 경솔했네요. 어리다고 다 같은 연하겠습니까?”
“네?”
“게다가 한 살 차이가 뭐 대수라고. 우리 엄마는 아버지보다 세 살 많으셨습니다.”
“아니, 그게.”
“정모단 씨 정도면 충분히 능력 있는 연하남하고 살 수 있다고 봅니다. 예쁘지, 능력 있지, 다소 폭력적이지만 성격도 좋지. 안 그래요?”
안 그렇다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할 수도 없고.
어버버거리는 은규를 쳐다보던 견이 씩 웃었다.
“또 뭐 싫어합니까?”
은규의 눈이 커졌다.
“정모단 씨요. 뭘 싫어하고 뭘 좋아하는지 더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멍하니 입을 벌린 채로, 은규는 한참 동안 견을 바라보았다.
피하지 않고 마주 보는 견의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진심이세요?”
“진심입니다.”
은규의 이마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이러면 안 되는데. 옛정 비슷한 게 생각나려고 하잖아!’
지금은 가장 존경하고 닮고 싶은 상사가 누구냐고 물으면 ‘우리 부서에 그런 건 있을 수가 없다’고 하지만, 예전엔 백견 대표였다.
승진이 가장 빠르다는 기획전략팀에서 앞날이 불투명한 블랑아이로 옮긴 것도 견과 일해보고 싶어서였다.
언제나 한발 앞서 있는 젊고 유능한 상사.
팀원들의 의견을 귀담아듣고, 적극 반영하고, 그 모든 걸 기가 막히게 조합해 최선의 결과를 뽑아냄으로써 일하는 보람이라는 걸 느끼게 해주던 사람.
한때 그의 롤모델이었으나, 지금은 그 추억을 떠올릴 때가 아니다.
은규는 굳게 마음을 다잡았다.
“지, 진심이어도 안 됩니다.”
“남들이 안 된다는 걸 되게 만들고 잘난 척하는 게 제 취미입니다. 아시지 않나요?”
너무 잘 아는 탓에 입안이 바짝 말라들었다.
“이유 없이 안 되는 일은 없습니다. 이번엔 좀 더 타당한 이유를 들려주시길 바랍니다.”
하마터면 ‘죄송합니다, 대표님’ 하며 고개를 숙일 뻔했다.
형편없는 기획안을 제출했다가 면전에서 까인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어쩐지 빠른 시일 내에 정모단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해 올려야 할 것 같은 기분마저 들려고 했다.
‘안 돼. 이렇게 어영부영 마무리해 버리면 모단이를 더 만만하게 볼 거라고!’
이런 말까지 해도 되나 망설였던 은규는 해버리기로 마음먹었다.
“백견 씨는 재벌 3세잖아요.”
“그렇죠. 일부러 만나려고 해도 만나기 힘든 재벌 3세.”
“모든 여자가 재벌남과의 로맨스를 꿈꾸는 건 아닙니다.”
이번에는 견의 말문이 막혔다.
“언젠가 모단이가 했던 말, 전해 드릴까요?”
모단도 이 남자가 좋다고 하면 모를까, 일방적인 거라면 빨리 끊어냈으면 했다.
혹시라도 친구가 상처받는 건 원치 않았다.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모단에게 괜히 이직을 권했다는 죄책감마저 들 것 같았다. 사실 벌써부터 조금씩 들고 있었다.
“재벌 만난다고 다 팔자 피는 거 아니라는 거, 오히려 팔자 조질 수도 있다는 거 어느 정도만 나이 먹어도 알잖아. 물론 돈이란 게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낫지만 너무 많아도 문제니까.”
“…….”
“나와 정말 닮았다고 생각한 사람도 막상 지내보면 참 다르구나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고, 심지어 날 때부터 한집에 산 부모와도 안 맞을 때가 있는데, 완전 다른 세상에서 살아온 사람끼리 맞춰가는 게 쉽겠어? 돈으로 커버치는 것도 한계가 있지.”
얼마간 맞는 말이라는 건 인정하지만, 얼마든지 반박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견은 어쩐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은규의 말들이 꼭 모단의 목소리로 들리는 것 같아서.
“여기서부터는 제 생각입니다만, 모단이는 굳이 어렵게 맞추지 않아도 되는 남자를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모단이 어머님도, 제 아내도 같은 생각이고요.”
뭔가에 찔리고 긁힌 것처럼 속이 따끔따끔했다.
“저도 진심으로 드리는 말씀이었습니다. 타당하지 않다고 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은규가 의자를 밀고 일어섰다.
“그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인 은규는 양손에 커피컵이 든 종이 캐리어를 들고 멀어졌다.
한참 동안 그대로 앉아 있던 견은 힘을 빼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드라마에서 보면 보통 돈 많은 시어머니가 여자한테 봉투 같은 거 주면서 헤어지라고 하던데. 물 안 맞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겨야 하나?’
마른 입술 사이로 쓰디쓴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뭐 하나 쉬운 게 없는 여자구만.”
***
지협은 쓰고 있던 안경을 내려놓고 미간 사이를 지그시 눌렀다. 견이 개인 메일로 보낸 기획안을 몇 번이나 훑어본 후였다.
“갑자기 뭔 꿍꿍이인지.”
안 그래도 호르몬시터도 찾았겠다, 다시 일을 시작해 보라고 권할 참이었다.
그런데 예고도 없이, 언뜻 블랑아이와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일을 들이밀다니.
지협이 책상 위의 수화기를 들었다.
“너 어디야?”
[당연히 회사지. 출근시간 지난 지가 언젠데.]
요즘 외근으로 바빠 회사에 백견이 출몰한다는 소문을 미처 듣지 못한 지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부서도 사무실도 없는데 대체 어디로 출근했다는 거야?”
[없는 자리는 만들면 되고. 메일 확인했지?]
“보긴 봤다만은.”
[자세한 보고도 할 겸 내가 10층으로 갈게.]
“알았어. 홍보팀 사무실 말고 회의실로 와. 조용히 얘기하게.”
빈 회의실로 들어온 견이 눈을 찌푸렸다.
“왜?”
“별거 아냐. 안 좋은 추억이 있는 장소라서.”
허벅지를 슥슥 문지른 견이 의자를 당겨 앉았다.
먼저 앉아 있던 지협이 책상 위에 놓아둔 기획안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갑자기 이런 제안을 올린 이유가 뭐야?”
“괜찮을 것 같아서.”
견이 진지하게 설명했다.
“희명그룹이 건실한 이미지이긴 한데 젊은 층한테는 약간 고리타분한 인상을 주잖아? 한 번쯤 파격적인 이슈로 화제가 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지협은 다시 기획안을 내려다보았다. 가운데 큰 글씨가 눈에 확 들어왔다.
―No spec, be yourself.
“공모전 겸 특채지. 공모전 수상했다고 가산점 몇 점 주는 건 너무 쪼잔하잖아. 채택된 사람들은 통 크게 바로 채용.”
“말이 쉽지. 현실적인 문제가 한두 가지야?”
“그런 문제를 극복하고 해결하면서 발전하는 거 아닌가?”
지협이 미간을 찡그렸다. 견은 싱긋 웃었다.
“판에 박힌 이력서랑 자기소개서는 과감하게 버리고, 철저하게 익명으로 기획안만 받는 거야. 학력이니 빽 같은 거 다 거르고, 실질적으로 회사에 도움이 될 만한 아이디어가 있는 사람을 뽑자는 거지.”
견이 들고 온 파일에서 서류 몇 개를 더 꺼내 내밀었다.
“지난번 주주총회 자료를 바탕으로 대강 추려봤어. 개선이 필요한 계열사 및 부서들.”
받아 든 지협이 찬찬히 종이를 넘겼다.
“괜찮을 것 같지 않아? 남녀노소 구분 없이 능력 있는 인재를 뽑는다는 슬로건을 내거는 거야. 고졸도 입사할 수 있고, 반대로 회장 손주도 떨어질 수 있다고.”
견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어떻게 생각해, 백지협 이사님?”
목록을 훑어보던 지협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블랑아이가 포함되어 있었다.
“없는 자리는 만들면 된다던 말이, 설마…….”
지협의 눈빛이 딱딱해졌다.
“다시 대표 자리에 앉진 못할 것 같으니까 사원으로 들어오겠다는 거야?”
견이 팔짱을 끼고 눈을 내리깔았다.
“웃기지? 사람 하나 미친놈 만드는 건 참 쉽던데, 사실 멀쩡하다는 걸 증명하는 건 왜 이렇게 어려운지.”
“말이 돼, 그게?”
지협이 종이를 던지듯 내려놓았다.
“네가 돈이 없어, 능력이 없어? 새로 시작해. 따로 하라고.”
“보기에 안 좋잖아. 내가 블랑아이를 발라 버리면 팀킬이고, 망하면 개망신인데.”
얼마간 일리 있는 말이긴 했다.
잔뜩 골치 아픈 얼굴을 한 지협이 툭 뱉었다.
“일 크게 벌이지 마. 조금만 기다려. 어차피 임원은 단기계약직인 거 몰라? 지금처럼 블랑아이 실적이 계속 안 좋으면 변진상 대표도 잘릴 수 있어.”
“그건 너무 계략적으로 보여서 싫어. 그리고 그때까지 못 기다려.”
지협의 미간에 잡힌 주름이 더 깊어졌다.
“차라리 경력사원 채용을 추진해 보면?”
“변진상이 날 뽑을 것 같아?”
그 또한 맞는 말이다. 견과 변진상 대표가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라는 건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
“나만 좋자고 하는 거 아니야. 블라인드 공모전, 신선하잖아.”
눈빛도, 목소리도 확신에 차 있다.
“심사도 아주 투명하고 공정하게 해줘. 사견이지만 해당 부서의 직원들 의견을 적극 반영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요즘 국민투표가 유행이기도 하고.”
술술 이어지는 말들을 듣고 있던 지협은 조용히 이마를 짚었다.
“사람 심리가 일단 고르고 나면 되도록 그 선택이 옳았다는 쪽으로 합리화시키려는 경향이 있지. 그 직원을 뽑는 데 자신도 일조를 했다면 더 애착이 갈 거란 말이야. 혹시라도 공채사원들 사이에서 나올 수 있는 불만을 최소화시키는 하나의 방안도 될 수 있다고 봐.”
논리정연한 설득에 감정적인 호소까지 이어졌다.
“나 이제 결근 안 할 수 있어. 다른 사람들하고 똑같이, 아니지. 더 잘할 수 있다고. 대표였을 때보다도 더 열심히 할 거야.”
견과 눈이 마주친 순간, 지협은 직감했다.
잘 되건 안 되건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 올 게 분명한 프로젝트를 당분간 제가 맡게 될 것임을.
“혹시 내 것보다 더 훌륭한 기획안이 나와서 떨어지면 찍소리도 안 할게.”
그리고……
“아마 그럴 일은 없겠지만.”
백견이 돌아왔다는 걸.
***
토요일 아침, 모단은 출근할 때보다 더 일찍 일어나야 했다. 교사 교육이 있는 장소까지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없는 탓이었다.
오전까지만 해도 눈이 초롱초롱했다. 그러나 점심을 먹고 나서부터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아무리 정신을 차리려 애써도 눈꺼풀이 내려앉으며 목이 저절로 상모를 돌렸다.
선잠이 들었다가 움찔 놀라 깨는 추태까지 부렸다.
마지막 쉬는 시간, 강당 밖으로 나온 모단은 자판기에서 뽑은 차가운 캔커피를 뒷목에 대고 다른 손으로 견에게 문자를 보냈다.
―한 시간 후면 끝나요.
폰만 보면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순식간에 답장이 왔다.
―괜찮으면 교육받는 데로 데리러 가도 돼요?
―안 괜찮고 안 돼요. 장소 정하고 거기서 만나요.
―지금 비 오는데. 우산은 있어요?
‘헉, 젠장.’
지하 강당이라 건물 밖이 보이지 않았다. 안 그래도 일기예보에 오후부터 비가 온다고 하긴 했는데 안 믿었다.
‘없다고 하면 데리러 온다고 난리를 치겠지?’
휘황한 차에서 찬란한 남자가 내려 아는 척을 하는 상상만으로도 어찔했다.
아무리 아는 사람은 없다지만, 어디서 무슨 말이 나와 어떻게 돌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가져왔어요.
―그럼 두 시간 후에 그 레스토랑에서 봐요. 깜찍이 핀 꽂고 다른 놈팡이랑 마주 앉아서 하하호호 했던 데.
“이 자식이……!”
문자에 심술이 덕지덕지 묻어 있다.
“놈팡이는 뭐고 하하호호는 또 뭐람.”
하긴, 꽤 비쌌는데 맛도 제대로 못 보긴 했다.
―알았어요.
버스정류장까지 가는 동안만이라도 비가 그쳐 주길 바랐는데, 더 주룩주룩 내렸다.
문 앞에 서서 고민하던 모단은 가방을 고쳐 멨다.
한 손을 이마 위에 올리고 빗속으로 뛰어들려는 순간, 갑자기 시야가 가로막혔다. 머리 위로 구름 같은 기척이 드리웠다.
“어쩐지, 이럴 것 같더라.”
한 손에 커다란 우산을 든 견이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우산 가져왔다면서요? 혹시 잘생긴 남자가 우산 같이 쓰자고 할까 봐 없는 척했어요? 로망 한번 클래식하네.”
툴툴 말을 흘려낸 그가 눈썹을 까닥 올렸다 내렸다.
“정모단 씨 인생에 이제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어요. 나 아니면.”
뒤이어 보란 듯 입술을 오므려 내밀더니 쁍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메롱 하는 것보다 열 배는 더 얄미웠다.
“이제 사람 뒷조사까지 해요? 여기서 교육받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차에 타서 얘기하죠. 우리 지금 완전 민폐예요.”
좁은 입구에서 너도나도 우산을 펴느라고 복잡하긴 했다.
견이 가볍게 모단의 팔을 잡아당겼다.
“고집은 맑은 날에 부리고, 일단 차로 가요.”
바로 앞에 세워둔 차의 조수석에 모단을 먼저 태운 견이 차 앞을 빙 돌아 운전석으로 향했다.
우산을 접고 차에 탄 그가 어깨와 팔을 가볍게 털어냈다.
“오지 말라는데 왜 와요?”
“사실 가도 되냐고 물어보기 전에 미리 와 있었어요. 볼일이 생각보다 일찍 끝나서.”
모단이 눈을 부릅떴다. 견이 선수를 쳤다.
“우산 쓰고 가는 거 봤으면 조용히 가려고 했어요! 그러게 왜 거짓말을 해요? 자꾸 거짓말하면 코 길어진다니까.”
“됐고, 어떻게 알고 온 거냐고요!”
“혹시 남자가 손 뻗어서 안전벨트 채워주는 거에 대한 로망은 없어요? 지금 당장 들어줄 수 있는데.”
모단이 냅다 제 손으로 안전벨트를 맸다. 내린다고 하진 않겠군, 속으로 중얼댄 견이 씩 웃고는 운전대를 잡았다.
“날마다 카페테리아에 앉아 있다 보면 별의별 얘기가 다 들리거든요. 거기서 들었어요.”
부드럽게 속력을 올린 차가 금세 도로로 접어들었다.
“어떤 남자 직원이 그러더라고요. 주말에 정모단 씨한테 영화 보자고 했다가 까였다고. 어디서 교육이 있다던데 우연히 만난 척 태워줄까 어쩔까 떠들던데.”
“뭐라고요?”
“홍보팀 유영훈. 알아요?”
뒷조사 해놓고 둘러대는 줄 알았는데, 정말인 모양이다.
자원봉사 동호회에서 만난 그가 며칠 전에 그런 문자를 보내서 거절한 적이 있었다.
사이드미러를 보려고 튼 시선과 스치듯 마주쳤다. 견이 지나가듯 중얼거렸다.
“지협이 형한테 자르라고 해야겠다.”
“농담이라도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직장인한테 그게 농담으로 들릴 것 같아요? 그리고 백지협 이사님이 그런 얘기 듣는다고 그러실 분이에요?”
“왜 내 편은 안 들어주고 그놈하고 형 편만 들어줘요?”
‘나 지금 몇 살짜리랑 얘기하니?’
하여간, 말문 막히게 하는 데는 기가 막힌 재주를 가진 남자다.
“농담 아닙니다. 멀쩡한 남자 실업자 만들어놓고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고 싶지 않으면 앞으로도 다른 남자들한테 철벽 단단히 쳐요.”
모단이 한쪽 팔을 창틀에 세우고 비스듬히 머리를 기댔다.
운전하는 견의 옆모습을 빤히 쳐다보던 그녀가 한마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