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살았으면, 살기만 했으면
2017.05.07.
“야, 너 내려.”
모단의 오랜 친구 새윤은 종종 그런 말을 하곤 했다. 유치원 선생님이 유치원 밖에서도 상냥하고 사근사근할 거란 편견을 버리게 해준 게 바로 정모단이라고.
“문까지 열어드렸는데도 버티는 건 뭐야? 내려. 나와서 얘기하자고. 방금 진짜로 죽을 뻔한 게 누구인지 제대로 따져 보…….”
갑자기 남자가 밖으로 다리를 내놓더니 몸을 빼냈다. 나오라고 하긴 했는데 움직임이 너무 거칠고 불안한 데다 키까지 컸다. 모단은 얼결에 두어 걸음 물러났다.
“어어?”
그대로 돌아선 남자가 차도 버리고 어디론가 가려 했다. 몸을 날리다시피 손을 뻗은 모단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죄송하다는 말 한마디만 하면 될.”
거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갑자기 더운 곳에 들어간 것처럼 숨이 턱 막혔다.
심장에서 쿵, 소리가 났다. 안에서부터 울려 귓속을 선명히 때렸다. 강한 정전기 같은 게 스친 것 같기도 했다.
동시에 남자가 돌아보았다. 그제야 그의 눈 밑에 박힌 점을 발견한 모단은 눈을 찡그렸다. 습관처럼 밴 거부감이 한 번 더 숨통을 조이는 것 같았다.
‘하필이면…….’
그런데 어딘가 낯이 익었다. 뚫어져라 보던 모단은 헉, 했다.
‘잠깐, 이 남자 걔 아니야? 희명그룹의 백견!’
가끔씩 매스컴에도 나오는 데다, 새윤을 통해 이런저런 얘기를 들은 적도 있어 얼굴은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직속 상사는 아니지만 곧 다니게 될 회사의 오너 일가…….’
아까 내리라고 할 때 멱살까지 안 잡은 건 잘한 일 같았다.
모단이 이 사태를 어떤 방향으로 마무리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마주한 얼굴 한복판에 새빨간 선이 주르륵 그어졌다.
“어어, 코피……!”
모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견이 한 손으로 코와 입을 가렸다. 눈이 커지고 어깨가 눈에 띄게 흔들거렸다.
‘고작 코피 가지고 뭐 저렇게 놀라? 코딱지 파다가 코피 터진 다섯 살짜리도 저렇게까지는 안 놀라는구만.’
직업병이 도진 모단은 가방에서 휴지와 물티슈를 꺼내려 했다. 그때 떨리는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
“월경…….”
잘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들었다.
견이 쿨럭 기침을 했다. 손가락 사이로 검붉은 피가 넘쳐흘렀다.
모단은 아까 그가 치어버릴 듯 달려올 때 그랬던 것처럼, 소리도 못 지르고 굳어버렸다.
콜록, 왈칵. 컥, 커억, 주르륵.
얼굴이 유달리 하얘서일까, 순식간에 그를 물들이는 핏빛이 더욱 새빨갛게 보였다. 그게 너무 선연해서 나머지는 붕 떠버린 것 같았다.
그가 한 걸음 다가서는 광경이, 와들와들 떨리는 눈동자와 손이, 물씬 풍기는 피비린내가 다 꿈처럼 느껴졌다.
“살려…….”
이번에는 그가 모단의 팔을 쥐었다. 뭘 어쩔 틈도 없이 커다란 몸이 기울었다.
모단은 제 어깨 위로 무너지듯 쓰러지는 견을 간신히 받아냈다. 그러나 장신에 의식까지 없는 남자를 너끈히 받쳐 주기엔 무리였다.
“어윽!”
견의 겨드랑이 사이에 팔을 넣은 채로 낑낑대며 버티던 모단이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았다. 결국 그는 모단 위에 철푸덕 널린 꼴이 되고 말았다.
“이게 무슨, 아우!”
저를 덮친 남자는 너무 뜨거웠고, 무거웠다. 가까스로 옆으로 밀어낸 모단이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견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 떨리는 손을 코 밑에 대어보았다. 다행히 뜨뜻미지근한 숨이 닿았다.
‘아픈 건가? 아니, 몸이 안 좋으면 운전대를 안 잡는 게 상식 아니냐고!’
갑자기 낯선 벨소리가 울렸다. 견의 재킷 안에서 나는 소리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허락은 생략하고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휴대폰을 꺼냈다.
“여, 여보세요?”
짧은 침묵 후, 경계 어린 남자의 목소리가 넘어왔다.
[누구십니까?]
“이 휴대폰 주인 아세요? 여기 희명그룹 본사 앞 횡단보도인데요, 이분이 피를 흘리면서 쓰러지셔서…….”
알아들을 수 없는 짧은 말을 내뱉은 상대는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
채 5분도 되지 않아 감색 슈트를 입은 남자와 진회색 슈트의 남자가 희명그룹 본사 건물에서부터 달려오는 게 보였다.
“도련님!”
감색 슈트를 입은, 혼혈 혹은 외국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먼저 뛰어오더니 쓰러져 있던 견의 상체를 일으켜 안았다. 절박한 기세에 놀란 모단은 주저앉은 채로 주춤 물러났다.
곧바로 뒤따라온 진회색 슈트의 남자가 견을 업는 걸 도와주었다.
“고모에게 연락해 뒀어. 바로 이동해.”
“네.”
문이 열린 채 길 한복판에 서 있던 차 뒷좌석에 그를 태운 남자가 차를 몰아 빠르게 사라졌다. 구경하던 사람들도 주춤주춤 흩어졌다.
숨을 몰아쉰 진회색 슈트의 남자가 아, 하더니 손을 내밀었다.
“경황이 없었네요. 죄송합니다. 어디 다친 덴 없으십니까?”
“없어요. 괜찮습니다.”
모단은 얼결에 그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그사이 몸을 굽힌 남자가 모단의 가방을 집었다. 바닥에 떨어진 몇 가지 소지품을 챙겨 넣고는 건네주었다.
“희명그룹 홍보팀 이사 백지협입니다. 실례지만 성함이?”
가방을 받아 들던 모단이 움찔했다.
백지협. 역시나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다. 백견의 사촌 형이자 또 다른 희명그룹 상속자.
어린이집 최종 면접 때도 당연히 못 봤고, 앞으로 희명어린이집에서 10년을 일한대도 볼 일 없을 거라 생각했던 사람들을 오늘 여기서 둘이나 보다니. 이러다 백희명 회장도 보게 되는 거 아닌가 싶다.
모단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정모단입니다.”
“정모단 씨.”
잠시 뜸을 들인 그가 말을 이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사촌 동생이 몸이 조금 약한 편이라, 코피만 나도 빈혈로 쓰러질 때가 있어요.”
‘코피라니, 빈혈이라니. 칼 맞은 사람처럼 피투성이로 쓰러져 있었던 걸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나?’
매정하다 못해 사무적으로까지 들리는 말투에 눈살을 찌푸리려는데, 그가 재킷 안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건넸다.
침착해 보이는 말투와는 달리 가늘게 손을 떨고 있었다. 다시 보니 얼굴도 아까 그 남자만큼이나 희게 질렸다.
“혹시 오늘 일로 불편하신 게 있다면 언제든지 저한테 연락 주십시오. 회사나 다른 쪽 말고 저한테 연락 주시는 게 가장 편하고 깔끔하실 겁니다.”
‘일 키우지 말자 이건가.’
모단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쪽에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몰라도, 정신없고 황당하기는 저도 마찬가지였다.
솔직히 저들이 누군지 몰랐더라면 끝까지 다그쳤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조용히 넘어가고 싶어졌다.
아무리 같은 건물 안에 있대도 고위임원이랑 사내어린이집 교사가 마주칠 일은 없을 테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거니까.
“제가 명함 안 받으면 나중에 뺑소니 어쩌고 할까 봐 더 불안하실 것 같으니 받긴 받을게요. 연락드릴 일은 없을 겁니다.”
지금 모단이 바라는 건 딱 두 가지뿐이었다.
혹시나 저쪽에서 CCTV나 블랙박스를 돌려 봤을 때 차 문을 따고 그를 끌어내려던 모습이 그렇게까지 난폭해 보이지 않았으면 하는 것과 백견이 제가 한 말은 물론이고 얼굴도 기억 못 했으면 하는 것.
더 이상 묻지도 따지지도 않겠다는 반응이 조금 의외였는지, 그녀를 빤히 보던 지협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나중에 꼭 정식으로 사례 드리겠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정모단 씨 연락처도 받을 수 있을까요?”
이런 남자가 연락처를 묻는데 왜 주지를 못하니…….
“아뇨,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제가 특별히 뭘 한 것도 아니고. 차에도 부딪히진 않았고.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도망가려고 몸을 돌리는데 뒤에서 정모단 씨, 하는 부름이 들렸다. 모단은 입술을 깨물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그가 어디론가 전화를 하며 한 손을 들었다.
“아무래도 제 비서에게 가시는 곳까지 모셔다 드리라고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네? 뭐 하러 그렇게까지…….”
“옷이 좀.”
그의 손짓을 따라 고개를 내려 본 모단은 뜨악했다. 경황이 없어서 몰랐는데 옷에 피가 제법 묻어 있었다. 택시기사가 경찰에 신고하기 딱 좋은 꼴이다.
얼마 되지 않아 한 여자가 나타났다. 지협이 짧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럼, 이분 잘 부탁해요.”
“네, 이사님.”
끼어들 타이밍을 잡지 못해 보고 있던 모단이 손을 내저었다. 더 엮여서 좋을 게 없을 것 같다는 촉이 왔다.
“아뇨, 괜찮습니다. 누가 제 옷만 보는 것도 아니고.”
“그럼 지금 바로 옷 한 벌 사다 드릴 테니 갈아입고 가시겠습니까?”
“예에? 그게 더 부담스러운데요.”
“그렇죠? 그러니까 부담 갖지 마시고 타고 가세요.”
미소를 지은 지협은 비서에게 눈짓을 하고는 몸을 돌려 회사 건물 쪽으로 사라졌다.
삼십 평생 타보기는커녕 가까이에서 본 적도 없는 고급 세단을 타고 돌아온 모단은, 그 후로 일주일 동안 소심한 걱정에 떨어야 했다.
만약에 쓰러진 백견이 잘못되기라도 한 건 아닌지, 그랬다가 뭔가 억울한 책임이 돌아오는 건 아닌지, 혹은 갑자기 채용 취소됐다는 문자라도 오는 건 아닌지.
견의 눈 밑에 있던 점이 불안을 더 부추겼다.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지만, 눈밑점을 가진 사람은 그녀에겐 달갑지 않은 징조 같은 거였다.
큰길에서 멀쩡한 사람이 피를 쏟으며 쓰러졌으니 인터넷에서 화제가 될 법도 한데 자그마한 기사 한 줄 뜨지 않는 것도 오싹했다. 대체 얼마만큼의 힘을 갖고 있기에 그토록 깔끔하게 막아버릴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첫 출근 전날까지도 아무 소식 없었고, 모단은 비로소 안도했다.
그땐 미처 알지 못했다.
차라리 그때 잘렸어야, 앞으로의 인생이 평화로웠을 거라는 걸.
***
“도련님.”
침대에 누워 있던 견이 왜, 하는 눈빛으로 돌아보았다. 섭호는 아까부터 내내 구겨져 있던 미간에 더욱 힘을 주었다.
“참말로 지를 꼭 보내셔야겄슈?”
견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반면 눈매는 찼다.
“말했잖아, 나 대신 가는 거라고. 내 자리 제대로 채우고 있어.”
“도련님 옆을 비우는 게 영 찜찜해서 그류. 딱 봐도 몸이 션찮아 보이시는디. 얼굴은 시체마냥 허얘가지구서는.”
“내 피부 잡티 없이 하얀 게 하루 이틀이야?”
턱을 치켜든 견이 제 얼굴을 매만졌다. 해쓱하긴 해도 과연 빛이 났으나, 섭호의 이마에는 더더욱 그늘이 졌다.
“고집 엥간히 부리시지 그류? 지가 회의자료 싹 가져다 드린다니께유. 집에서 편히 보시란 말유.”
“글씨 훑는 거랑 직접 보고 듣는 게 같아? 이제 말단사원으로도 일 못 하는 내가 이럴 때 아니면 회사 돌아가는 상황을 언제 볼 수 있는데?”
견이 몸을 일으켜 앉았다.
“걱정하지 마. 나 안 죽어. 단 1년, 아니, 한 달이라도 제대로 살다 죽는다면 모를까, 이대로는 억울해서 못 죽는다고. 그깟 여자 하나 못 찾았다고 죽는다는 게 말이 돼?”
섭호의 손에 지그시 힘이 들어갔다. 그보다 더 말이 안 되는 일을 이제껏 겪고 있지 않느냐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그래도 혹시 죽게 생기면…….”
이를 악물고 턱에 힘을 준 섭호의 목울대가 뭔가를 삼키듯 크게 요동쳤다.
“너랑 나랑 사랑하는 사이였으니까 배우자 상속분 챙겨주라고 유언 남길게.”
작게 숨을 고른 섭호가 일부러 심상히 대꾸했다.
“이이∼ 나까지 장가 못 가게 만들려는 수작이구먼.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어. 차라리 같이 묻어달라고 하지 그류?”
“그깟 장가 좀 못 가면 어때? 내 몫의 희명그룹 지분이랑 재산이 다 네 몫이 될 텐데.”
“흰소리 할 거면 잠이나 자유. 호르몬시터인지 뭔지 어떻게든 찾을 거니께, 그 죽는다는 말 좀 하지 말란 말유.”
견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렇게 말해놓고 뒤늦게 돈이 탐나서 나 죽게 내버려 두는 건 아니겠지? 너 잘 생각해야 돼. 내가 한을 품은 귀신이 되면 누구 앞에 제일 먼저 나타날 것 같아?”
섭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련님하고 지는 다음 생에 꼭 부부로 태어날 것 같구먼유.”
“갑자기 뭔 소름 끼치는 소리야? 나랑 영혼결혼식이라도 할 셈이야?”
“소름은 지가 먼저 끼쳤슈. 그게 아니고, 부부는 전생의 웬수라는 말이 있잖유.”
“그래? 다음 생에도 내 뒤치다꺼리 하고 싶다고 하면 굳이 말리지는 않을게. 너보다 좋은 남자 만나리라는 보장도 없고.”
“아닙니다. 저와 도련님의 인연은 꼭 이번 생에서 끝났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정중한 표준어로 극강의 진심을 표현한 섭호가 잽싸게 나가 버렸다. 픽 웃은 견은 눈을 감았다.
감은 눈앞에 제집 서재 풍경을 그려보았다.
가족사진이 놓여 있는 마호가니 책상. 맨 밑 서랍에 작은 나무 상자가 있다. 뚜껑을 열면 오래된 종이 냄새가 풀썩 피어오른다. 그 안에 누렇게 바랜 고서(古書) 두 권이 들어 있다.
비교적 보관이 잘된 한 권은 백씨 가문의 가보처럼 내려오는 책, <울투라날개중형(鬱套剆瘌皆重刑)>이고, 조금만 세게 넘기면 부스러질 것 같은 나머지 한 권은 1년 전 찾아낸 <예지미인(藝誌迷人)>이다.
그중 <예지미인> 속의 한 구절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1000년, 고려(高麗) 목종(穆宗) 3년 때의 일이다.
백씨 성을 가진 한 남자가 한 달에 한 번씩 피를 쏟는 희귀한 병을 앓았다. 병세가 극악하여 한 번 피를 쏟으면 이레를 거동치 못하고 누구도 접근할 수 없게 했다.
지나가던 고승이 이르기를, 맨 처음 환자가 피를 쏟을 적에 가장 먼저 접한 자를 찾으라 하였다. 매달 피가 날 적에 그자를 곁에 두면 절로 나을 것이요, 그러지 않으면 서른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 했다.
하나 너무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희미하여 찾지 못했다.
스물아홉이 되던 해 갑작스레 몸이 쇠하더니, 결국 석 달 만에 온몸의 피를 모두 쏟아내고 요절하였다.
견 혼자뿐인 월경연구소 안에 긴 한숨이 퍼졌다.
희명병원 별관 구석에 있는 이곳은 백희명 회장의 딸이자 산부인과 의사인 지미의 연구실인 동시에 한 사람만을 위한 특별 병실이기도 했다.
걱정과 공포를 집어삼킨 공기가 점점 무거워졌다. 어쩐지 질식할 것 같아, 견은 깊게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헐렁한 환자복 앞섶을 들춘 그가 드러난 제 몸을 살폈다.
요즘 들어 부쩍 말랐다. 운동량을 더 늘렸는데도 근육이 붙기는커녕 되레 빠지기 시작한 게 꼭 석 달째다. 그 책을 믿고 싶진 않은데, 정말로 몸이 축나는 게 눈에 보이니 하루하루 속이 타들어갔다.
게다가, 심장 위를 덮은 불길한 검은 얼룩까지.
점 같기도 하고 흉 같기도 한 불그스름한 얼룩이 생긴 건 정확히 초경을 시작한 날부터였다.
꽤 거슬리긴 했지만 아프지도 않고 드러나지도 않는 위치라 그냥 두었다. 어차피 평범한 치료로 해결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데 정확히 석 달 전부터 이 얼룩이 검어지기 시작했다.
식물의 잎이 바싹 마르는 것처럼, 혹은 뭔가가 타서 재만 남는 것처럼, 지독히도 불길한 빛으로.
거기까지는 어떻게 버텨보려고 했는데, 월경전증후군이 시작된 사흘 전부터는 타는 듯한 통증까지 생겼다.
참다못해 고모에게 따지러 갔다. 그동안 연구라는 명목하에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봉변을 겪었다. 열에 일곱은 어처구니없는 부작용을 겪으면서도, 한 줄기 희망 때문에 안 먹을 수도 없는 팔자였기에.
이번만큼은 차라리 부작용이라고 해주길 바랐는데.
한참 동안 그 얼룩을 유심히 보던 지미는 다짜고짜 환자복을 던져 주며 당장 침대에 누워 있으라고 했다. 중환자실에 묶어둘 순 없으니 여차하면 바로 중환자실로 옮기려고 그런다면서.
중환자실이라는 말이 섬뜩해서, 고모의 분위기가 너무 심각해서 더 이상 묻지도 반항하지도 못했다. 그렇게 붙잡혀서 사흘째 연구소 안에 갇혀 있는 참이었다.
‘고모도 뭘 아셨나? 정말로 곧 무슨 일이라도 벌어지는 거야?’
심장을 에워싼 얼룩이 더 커지고 진해진 것 같아, 견은 옷을 쥐었던 손을 놓고 시선을 뗐다.
꾸물꾸물 살아 움직이는 그림자가 들러붙은 듯 가슴께가 근질거리고 답답했다.
“나, 진짜로 얼마 안 남은 건가.”
하필 이렇게 나 혼자 침대에 누워 있을 때 죽으면 어떡하지.
더럭 겁이 났다. 갑자기 커다란 짐승의 입안으로 집어삼켜지는 느낌이 밀려왔다.
무엇으로부터든 도망쳐야 할 것 같아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섰다. 신발도 제대로 신지 않고 문 손잡이를 잡는데, 밖에서 먼저 열리는 통에 휘청했다.
“어딜 도망가려고. 빨리 안 누워?”
“고, 고모.”
성큼성큼 들어온 지미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견을 훑었다.
“설마 그 꼴로 임원회의 가려던 건 아니겠지? 너 없어도 회사 잘 굴러가니까 신경 끄고 네 몸이나 챙겨.”
“누가 뭐래? 나도 알아. 나 없어도 할아버지랑 작은아버지랑 지협이 형이 알아서 회사 잘 굴리시는 거.”
화는 났지만, 누군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미칠 것 같던 불안함이 슬슬 가라앉았다.
슬금슬금 침대에 걸터앉는 견을 힐끗 본 지미가 책상 앞에 떡하니 버티고 앉았다.
“하도 똥고집을 부려서 위스퍼 보내는 건 허락했다만, 걔 올 때까지 내가 있을 거야. 탈출은 꿈도 꾸지 마.”
섭호가 매번 정색을 하며 위섭호라고 정정해 줘도, 그 얼굴에는 혀 굴리는 이름이 어울린다며 뚝심 있게 위스퍼라 부르는 그녀였다. 본인도 본명 백치미 돋아서 싫다고 화이트 박사라고 부르라고 강요하면서.
견은 미간 사이를 좁혔다.
“여기 있으면 안 죽는대? 고모 약 때문에 죽을 뻔한 적이 더 많았던 것 같은데.”
소화제라고 내준 약을 먹고 머리카락이 한 뭉텅이 빠졌다가 다시 난 적도 있고, 숙면에 도움을 준다는 약을 마셨다가 사흘 동안 안 깨어나는 바람에 관에 들어갈 뻔한 적도 있었다. 풍 맞은 사람처럼 입이 돌아가기도 했다.
말은 조카의 병을 꼭 고쳐 주려고 그러는 거라지만, 아무리 봐도 견을 흥미로운 연구 대상이자 놓치기 싫은 모르모트로 보는 게 분명했다. 다시 잘 꿰매줄 테니 배 한 번만 열어보자는 말을 듣고 연구실에서 탈출하던 날 확신했다.
다른 날 같았으면 메스를 들거나 주사기를 들어 살려달라고 싹싹 빌게 만들었을 텐데, 지미는 웬일로 조용했다. 그게 더 무서웠다.
“애초에 네가 호르몬시터를 놓치지 말았어야지. 네 목숨줄 쥐고 있는 여잔데, 기억이라도 제대로 했어야지. 네 또래에 코에 점이 있는 여자애라니, 서울에서 김 서방 찾는 것도 아니고!”
“그때 뭘 알았으면 당연히 잡았겠지! 나한테는 다들 아무 말도 안 해줬으면서! 고작 열두 살짜리가 그게 뭔 줄 알고, 얼마나 자세하게 기억을 했겠냐고!”
지미가 신경질적으로 안경을 밀어 올렸다.
“어떻게든 목숨 보전해. 일단 살아야 앞으로도 계속 아버지 돈 펑펑 쓸 거 아냐. 그 돈 네가 안 쓰면 누가 써?”
“나도 살고 싶어! 그러니까 고모든 누구든 제발 좀 살려달라고! 살기만 하면 그동안 축낸 재산 죄다 메꿔놓고 불려놓을 테니까! 뭐든 다 할 테니까, 좀!”
머리가 핑 도는 바람에 견은 눈을 감고 드러누워 버렸다. 지미는 한참 만에 툭 던졌다.
“무리하지 말고 잠이나 자.”
눈은 감고 있었으나 잠이 올 리가 없었다. 견의 머릿속은 점점 더 또렷해졌다.
‘고모 말이 맞아. 모든 게 그 여자애를 놓쳐 버린 내 탓인 거야.’
그날 그 자리. 17년 전 그 리조트.
생각이 그리로 향했다. 안개처럼 퍼지던 생각들이 뭉게뭉게 형체를 갖췄다.
‘일단 나가야 해. 여기 누워서 죽을 때만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어. 어차피 죽을 거라면 하는 데까지 해보고 죽어야지.’
견은 자는 척하면서 지미의 기척을 가늠해 보았다.
‘그 리조트라도 다시 가보자. 한 번만 더.’
갈아입은 옷은 여기에 있다. 그 안에 카드도 있을 거다. 이제 지미만 자리를 비워주면 된다.
‘진짜 섭호가 올 때까지 계실 생각인가? 임원회의 한번 시작하면 기본이 반나절인데. 설마 화장실 한 번은 가시겠지?’
가뜩이나 안 가던 시간이 더럽게 안 가기 시작했다. 시계를 볼 수가 없으니 더 더디게 느껴졌다.
지쳐서 진짜로 잠들 뻔했을 때 드디어 호출이 왔다. 견을 힐끗 본 지미는 아무 말도 없이 나갔다. 발소리가 꽤 다급했다.
튕기듯 일어난 견은 옷부터 갈아입었다. 벗은 환자복을 구겨서 이불 안에 뭉쳐 넣고, 재킷 안주머니에 지갑이 잘 있는 걸 확인하고 휴대폰까지 챙겼다. 책상 위에 놓인 고모의 차 키가 보여서 그것도 냅다 챙겨 버렸다.
별관 앞에 세워져 있던 고모 차에 타고 액셀을 밟았다.
오늘은 보름, 언제 월경이 시작될지 모르니 그 먼 거리를 혼자서 운전해 가는 건 위험했다. 회사 앞으로 가서 조용히 섭호를 불러낸 후에 같이 움직일 생각이었다.
그렇게 회사 앞에 거의 도착했을 때, 불쑥 시야로 뛰어든 한 여자.
심장이 망치로 때리는 것처럼 쾅쾅 뛰었다. 1초만 더 늦게 브레이크를 밟았어도 사람을 칠 뻔했다는 것 때문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몸이, 이상했다.
“사고 날 뻔했…….”
간신히 창문을 열었더니, 뭐라고 말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먹먹했고, 눈앞도 흐릿했다.
누군가 손을 넣고 휘젓는 것처럼 머릿속이 어질어질 뒤섞이기 시작했다.
비키라고, 나 죽으면 네가 책임질 거냐고 생각나는 대로 내뱉었더니 문이 열렸다. 또다시 뭔가에 잡아먹힐 듯한 공포감이 일었다.
서둘러 차에서 내려 걸음을 옮겼다. 회사로 들어가 섭호를 찾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움직이는데, 팔을 붙잡혔다.
그 여자가 잡은 순간.
갑자기 더운 곳에 들어간 것처럼 숨이 턱 막혔다.
심장에서 쿵, 소리가 났다. 안에서부터 울려 귓속을 선명히 때렸다. 강한 정전기 같은 게 스친 것 같기도 했다.
견은 간신히 돌아보았다. 기묘하게 번져 흔들리는 얼굴에서 놀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어어, 코피……!”
갑자기 코 밑이 뜨듯해졌다.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문지르자 피가 묻어났다.
터질 듯 벌컥대던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져 내렸다.
“월경…….”
홀린 듯 중얼거렸던 견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리 없어. 다른 때처럼 조금 있으면 멎을 거야. 그리고 작아질 거고, 일주일 있으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거야. 그러니까…….’
하나 그런 바람을 비웃기라도 하듯, 평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양의 피가 쏟아졌다. 미처 코로 다 새어 나오지 못한 피는 목으로 치밀었다. 검붉은 피가 입을 막은 손 사이로 넘쳐흘렀다.
‘왜 이러지? 설마 정말로…….’
막연히 짐작했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어두컴컴하고 찐득거리는 감각이 온몸을 조였다.
안 믿는다고, 안 죽는다고 발버둥을 쳤지만, 사실은 본능적으로 각오하고 있던 죽음의 공포가.
‘살았으면.’
간신히 한 걸음 내딛고, 팔을 뻗었다.
‘이대로 괴상한 존재라는 걸 들켜서 영영 숨어 살아야 한대도 좋으니까, 살기만 했으면……!’
흐릿해진 시야에 그 여자만 보였다. 그마저도 놓치면 정말 죽을 것 같았다.
“살려…….”
손에 닿은 것을 필사적으로 움켜쥐고, 견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