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월경(月驚)에 관하여
“다들 퇴근하시죠. 오늘도 고생하셨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선 견이 웃는 눈으로 직원들을 둘러보았다.
다음 달 론칭을 앞둔 유아동복 브랜드 블랑아이(Blanc-I) 사무실은 같은 건물 안에 있는 다른 희명그룹 계열사들에 비하면 단출했다.
그러나 견은 자신했다. 3년 안에 업계 매출 톱3 안에 들 것이고, 시작을 함께한 이 직원들은 다른 계열사 직원들이 부러워할 만큼의 성과급을 받게 될 거라고.
“대표님, 다음 주에 휴가시죠?”
“네. 매달 죄송하네요.”
“대표님도 참. 죄송하긴요. 뭐니 뭐니 해도 건강부터 챙기셔야죠.”
기획전략팀에서 옮겨온 박은규 사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가장 연차가 오래된 김광남 과장이 끼어들었다.
“암요. 치료 잘 받으시고 푹 쉬고 오십쇼. 대표님께서 건강하셔야 저희도 든든하지 않겠습니까? 대표님 계실 때만큼이야 못 하겠지만은 제가 더 신경 쓸 테니까 걱정 마시고요. 어허허.”
채 서른도 안 된 아들뻘 상사가 고까울 만도 한데 김 과장은 과하게 깍듯했다. 직속 상사이자 회장님 손주이니 무조건 잘 보여야 한다는 애달픈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그래도 가장 연장자인 그가 깔보지 않으니 다른 직원들의 태도도 덩달아 좋아진 것에 대해서는 견도 내심 고마워하고 있었다.
“근데 우리 대표님, 대체 어디가 어떻게 아프시길래 한 달에 한 번씩 미국까지 가셔서 치료를 받으실까?”
재킷을 걸치고 단추를 잠그던 견의 손이 멈췄다.
“혹시 뱀술이나 개소주 한번 드셔보실 생각 없으십니까? 장인어른이 시골 사시는데 산에서 약초도 캐시고 술도 담그셔서 웬만한 보약은 다 구할 수 있거든요. 나이도 젊으시니까 금방 효과 보실 거…….”
“김광남 과장님.”
김 과장의 말이 길어진다 싶었을 때, 견이 낮은 목소리로 딱 잘랐다.
“환자 취급은 거기까지만 하시죠.”
사무실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김 과장과 직원들은 물론, 말을 내뱉은 견의 얼굴에도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회사에서는 필사적으로 억누르고 있던 모습이 튀어나와 버렸다. ‘그날’이 다가오고 있는지라 예민과 짜증이 극에 달한 상태였다.
어제는 견디다 못한 비서 섭호가 ‘백견은 무슨, 광견’이라는 말을 흘렸다가 진짜로 물릴 뻔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가족 같은 비서 앞에서나 보일 수 있는 거고, 직원들 앞에서는 안 됐다.
“꾸준히 관리만 잘 받으면 되는 가벼운 병입니다. 아픈 게 자랑도 아니고 민망해서요. 그것 때문에 여러분께도 폐를 끼치고 있지 않습니까.”
어느새 견의 목소리는 사르르 녹아 있었다. 보는 이로 하여금 ‘뭔지 몰라도 내가 잘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아련한 미소까지 보탰다.
“항상 뒤에서 애쓰시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저 챙겨주시는 것도요. 감사합니다, 김 과장님.”
“에이, 이 정도 가지고 뭘요.”
잔뜩 굳었던 김 과장의 어깨도, 다른 직원들의 얼굴도 덩달아 풀어졌다.
“말 나온 김에, 다른 약속들 없으시면 다 같이 저녁이나 먹을까요? 제가 살게요.”
“와아!”
부산스레 일어서는 직원들을 보는 견의 눈매가 부드러워졌다.
사흘 전부터 징글징글하게 붙어 있는 편두통과 요통, 닿기만 해도 아픈 가슴과 불편한 속까지도 잠시나마 잊었다.
회사 근처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마친 후, 2차 가자는 직원들의 유혹을 정중히 거절한 견은 섭호가 모는 차에 올랐다.
보름달이 가장 높이 뜨기 전에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있었다.
“거슬려.”
섭호가 곧바로 오디오 볼륨을 낮췄다.
견은 멀쩡히 운전 잘하는 데다 눈치까지 빠른 비서에게 괜한 시비를 걸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막상 ‘그것’이 시작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질 증상들이고, 자책과 자괴감만 남을 테니까.
‘빌어먹을 호르몬 새끼. 고작 호르몬 따위가 뭐라고 내 인생의 질을 이렇게나 떨어뜨리느냔 말이야.’
한껏 미간을 구긴 견이 중얼거렸다.
“……차라리 빨리 시작해 버려라.”
***
희명그룹 상속자이자 떠오르는 경영천재, 백견.
와인잔을 내려놓는 그를 빤히 보던 맞은편의 여자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저 피부에도 수염이 올라와서 아침마다 면도를 하나?’
그만큼 미려하고 해사한 얼굴이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살짝 올라간 눈매며, 보일 듯 말 듯 자리한 눈 밑의 매력점에선 묘한 퇴폐미가 흘렀다. 거기에 말끔하면서도 딱딱하지 않은 슈트의 조합은 완벽했다.
“그때 뵙고 두 번째네요. 잘 지내셨어요?”
“네.”
여자가 백견을 처음 만난 건 모 패션 브랜드의 행사장에서였다. 연예인과 모델들이 바글바글한 곳에서도 그는 특유의 귀티와 존재감으로 단연 돋보였다.
힐끔대며 다가간 끝에 겨우 눈이 마주쳤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인사를 건네자, 그는 코끝의 점이 귀엽다는 뜬금없는 칭찬을 던졌다.
얼마간 얘기를 나누다가 아버지가 호텔 체인 대표라 어렸을 때부터 국내외 웬만한 호텔이며 리조트는 다 가봤다는 말을 꺼냈을 때, 백견은 나른하게 눈꼬리를 접으며 웃었다.
다음에 조용한 데서 따로 보면 더 좋겠다는 말과 함께.
그렇게 오늘, 예약하기도 힘든 와인 바의 프라이빗 룸에서 마주 앉게 된 거였다.
“얼마 전에 뉴스에서 봤어요. 부도난 유아동복 회사를 인수해서 재론칭하신다면서요?”
“네.”
“업계의 기대가 큰 것 같더라고요. 젊은 나이에 능력이 남다르세요.”
“이제 시작인데요, 뭘.”
짧게 답한 그가 긴 손가락으로 이마 옆을 누르며 희미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 않아도 아까부터 컨디션이 별로 안 좋아 보였음을 떠올린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견은 낮게 덧붙였다.
“죄송합니다. 두통이 좀.”
“정말요? 제 가방에 진통제가 있었던 것 같은데…….”
“약은 됐어요. 다만 제가 이럴 때 나쁜 말을 하기도 해서 미리 말해두는 겁니다.”
“나쁜 말이요? 호호.”
완벽한 피지컬과 섹시한 아우라만으로도 충분한데, 뜻밖의 병약미에 귀엽기까지.
흐뭇해하던 여자는 뭔가를 떠올렸다. 얼핏 들은 적이 있었다.
지병이 있어 한 달에 며칠씩 출근을 하지 않고 쉴 때가 있다고.
“아, 혹시 그날이세요?”
그 말이 떨어진 순간, 견이 내리깔고 있던 눈을 들었다.
“그날이요?”
“네?”
“남자한테 그날이냐고 물어보는 건 무슨 뜻입니까?”
“아, 그게…….”
“생리 하냐고 묻는 겁니까? 자궁 있냐고 물어보시는 건가?”
“저는 그런 뜻이 아니라…….”
“예민해 보인다고 해서 무조건 그날이냐고 물어보는 거, 아주 무례한 일인 거 모릅니까? 하물며 그날이라 그랬다 칩시다. 지 멋대로 분비돼서 날뛰는 호르몬을 뭐 어쩌란 말입니까?”
얼결에 두 손을 무릎 위로 모은 여자가 어물거렸다.
“갑자기 왜 이러세요…….”
“왜 이러냐니, 내가 왜 화났는지 모르겠어요? 정말?”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인데?’
여자가 갸웃했다. 생각해 보니 ‘내가 왜 화났는지 몰라?’는 제가 걸핏하면 남자들에게 하던 말이 아닌가.
여자는 급한 대로 그때 남자들이 했던 말을 똑같이 읊었다.
“미안해요.”
“뭐가 미안한데요?”
“그…… 글쎄요.”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면서 미안하긴 뭐가 미안합니까?”
“아, 알겠어요! 제가 이상한 소릴 해서 기분 나빴던 거죠?”
“알면 하지를 말았어야죠.”
그 순간, 여자는 지금과 똑같은 패턴의 대화 끝에 ‘시X, 뭐 어쩌라고!’를 외치던 전 남친의 심정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잘생긴 재벌만 아니었으면 귀싸대기 각인데. 외모지상주의와 물질만능주의의 가장 큰 수혜자 같으니.’
하지만 여기서 포기할 순 없다.
어떤 여자도 사적으로 두 번 이상 안 만난다는 백견에게 목줄을 채울 여자는 제가 되어야 했다.
고만고만한 재벌집 딸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암묵적인 내기에서 승리하는 것만이 여기서 뭉개진 자존심을 세울 유일한 길이다.
주먹을 꽉 쥐었다 편 여자가 몸을 일으켰다. 견의 옆으로 옮겨 앉으며 몸을 붙였다.
“제가 실수한 것 같네요. 기분 푸세요.”
콧소리와 향수 냄새가 가뜩이나 곤두선 감각들을 툭툭 건드렸다.
견은 한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백씨 가문의 남자들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은밀한 병이 있다.
월경(月驚)이라 이름 붙여진 이 병은 200년에 한 명 꼴로 나타나며, 한 달에 한 번씩 일련의 특이 증상을 동반한다.
보름이 되기 전, 48∼72시간 동안 월경전증후군을 겪는다. 증상은 예민함, 우울함, 공격성, 컨디션 난조, 편두통, 불면증, 식욕 및 성욕 극대화 등 매우 다양하고 복합적이다.]
“백견 씨.”
차게 날 선 눈매를 얼마간 풀어낸 견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저 마음에 안 드세요? 저 정도면 백견 씨 취향 아닌가요?”
여자가 팔짱을 꼈다. 팔뚝 위를 짓누르는 물컹한 감촉이 노골적이었다.
“제가 본의 아니게 기분을 상하게 했으니까, 다시 좋아지게 해드릴게요.”
대답하기도 전에 여자가 불쑥 다가들었다. 제법 진하게 견의 입술을 잡아먹은 그녀는 도발적인 눈빛을 흘리며 몸을 뺐다.
야릇한 침묵이 흘렀다. 여자의 코끝에 있는 점을 빤히 내려다보던 견이 젖은 입술을 움직였다.
“기습키스 좋아하세요?”
내리깐 눈매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묘했다. 침침한 조명과 감도는 와인 향, 읊조리듯 낮은 목소리가 은밀한 무엇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홀딱 빠진 여자가 더한 것도 좋다고 답하려는데, 견이 툭 던졌다.
“전 싫어합니다. 특히 당하는 건.”
“네?”
분위기도 망상도 파삭 깨부숴 버린 그가 잡혀 있던 팔을 스윽 빼내고는 입술을 문질렀다.
손등 위에 새빨간 흔적이 번진 것을 보자마자 짜증스레 인상을 구겼다.
“발색과 지속력은 좋으면서 묻어나지 않는 립 제품이 분명 있을 텐데, 하필 이런 피 같은…….”
“어머머! 피!”
립스틱이 아니라 진짜 피다. 요상한 타이밍에 잘생긴 얼굴 한복판에서 코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견은 다른 손으로 재킷에 꽂혀 있던 행커치프를 뽑아 능숙하게 코를 막았다.
“갑자기 웬 코피가……. 괜찮아요?”
여자의 눈동자에 당황과 걱정이 뒤섞였다. 한 손을 들어 보인 견은 그대로 손목을 틀어 시계를 확인하더니 몸을 일으켰다.
“어, 어디 가세요?”
“손 씻으러.”
“아, 네.”
견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여자는, 문이 닫히자마자 뻣뻣해진 뒷목을 부여잡았다.
“뭐 저런 놈이 다 있지? 견차반이라는 말이 괜히 나도는 게 아니었어!”
옆에 놓아두었던 핸드백에서 거울을 꺼내 얼굴을 살핀 여자가 옷매무새까지 가다듬었다. 그러나 손 씻고 온다던 견은 나타나지 않았다.
“왜 이렇게 안 와? 나간 지 30분은 된 것 같은데?”
[월경전증후군을 겪고 나면 출혈이 발생한다.
30분 후에 출혈이 멈추면 신체가 변화한다.]
“처음 뵙겠습니다. 백견 도련님 비서, 위섭호라고 합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이국적인 미남자였다. 그래서 여자는 당연히 그의 이름을 영어로 알아들었다.
“위스퍼요? 미스터 위스퍼? 한국말 되게 잘하시네.”
“그야 당연히 토종 한국인이니까요. 그리고 위스퍼가 아니라 위섭호입니다. 위 비서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예? 외국인 아니면 혼혈인 줄 알았는데. 뭐, 어쨌든. 백견 씨 어디 갔어요?”
“피곤하다고 집에 가셨습니다. 물론 계산은 모두 마치셨고요.”
“뭐라고요?”
“대신 댁까지 모셔다 드리라 하셨습니다.”
여자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섭호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명함을 내밀었다.
“앞으로 도련님께서 아가씨께 연락드릴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러니 혹시 용건이 있으시다면 여기 있는 제 번호로 연락 주시면 됩니다.”
정황상 욕이 분명한 몇 마디를 씹어뱉은 여자가 벌떡 일어섰다.
“기가 막혀서……! 치워요! 어쩐지 이름부터 개새끼 같더라!”
그녀가 찬바람을 일으키며 나가 버렸다. 명함을 다시 안주머니에 넣은 섭호는 잠시 기다렸다가 가게 앞에 세워둔 차로 향했다.
그가 운전석에 앉자마자 뒤에서 누군가 물었다.
“여자는?”
“갔슈.”
조금 전까지 아나운서 뺨치는 표준어를 구사하던 섭호의 입에서 얼굴과는 심하게 안 어울리는 충청도 사투리가 튀어나왔다.
“매번 미안해, 섭호야.”
“됐슈.”
불퉁하니 대꾸한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 전까지 견이 입고 있던, 슬림하고 세련된 라인을 자랑하는 D브랜드의 2017 S/S 신상 슈트가 볼품없이 헐렁해져 있었다.
그 안에 일곱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파묻혀 있는 게 보였다.
해사한 얼굴에, 눈 아래 작은 점이 있는 아이가.
“콧구녕에 휴지는 여태 안 뺐슈?”
“깜박했어.”
손을 올렸던 아이는 와이셔츠와 재킷 소매에 파묻혀 손이 보이지 않음을 깨닫고 턱짓을 했다.
“이것 좀 처리해 봐.”
섭호가 손을 뻗으며 구시렁거렸다.
“아무리 봐도 적응이 안 된다니께. 고망쥐(생쥐) 난닝구만 한 게 반말을 찍찍…….”
“고망쥐 난닝구건 고망쥐 빤쓰건 내가 니 형이고 월급 주는 상사인데 말 까는 게 불만이야?”
앙칼지게 내뱉은 아이가 동그란 이마에 힘을 주고 인상을 썼다. 과연, 누가 보면 될성부른 갑질이라며 기함할 광경이긴 했다.
“조그만 게 반말해서 불만이면, 응? 평소에도 불만 많았겠다? 네가 나보다 키 크니까!”
“아, 알겠슈. 계속 까유. 까면 될 거 아뉴?”
코피를 막고 있던 휴지를 빼준 섭호는 심드렁한 대꾸를 던지고는 차를 출발시켰다.
“차라리 다행이구먼유. 눈코입 어디 하나 지 것인 게 없드만은. 그 여자가 진짜 호르몬시터였으면 어쩔 뻔했슈?”
“뭘 어째? 내 취향 아니더라도 진짜 호르몬시터면 평생 끼고 살아야지.”
“그 얼굴에 그 목소리로 취향이니 끼고 사니 그런 말 하지 말어유. 하여간, 팔자 한번 더럽게 기구하다니께.”
“더러울 것도 기구할 것도 없어. 못 가진 것보다 가진 게 훨씬 많고 더 가질 거니까.”
수긍인지 반항인지, 대답하지 않는 섭호의 뒤통수를 쳐다보던 아이가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젠 그만 찾자.”
여전히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아이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등을 기댔다.
“지금껏 호르몬시터 없어도 잘 살아왔어. 앞으로도 그럴 거고.”
그럴 거라고 믿었다.
다른 사람들은 알아서도 안 되고 믿지도 않을 결정적인 하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나 잘 살 정도면 대단히 완벽한 놈인 거라고, 그러니 앞으로도 이렇게만 살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 ‘앞으로’가 고작 1년 남짓밖에 남지 않았음을 알아버리기 전까지는.
[1년 후]
“저기요.”
아무 생각 없이 걷던 모단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 희명그룹 본사가 어디 있어요?”
평범해 보이는 남자와 여자가 옆으로 따라붙었다. 바로 앞에 있는 건물을 두고 물어보는 게, 전형적인 ‘도를 아십니까?’의 말 걸기 수법이다.
교복 입던 시절부터 희한하게 이런 사람들이 곧잘 꼬이곤 했다. 이골이 난지라 세상 모든 짜증과 울화를 긁어모은 상을 하고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인상이 참 좋으시네요.”
‘그래, 자네가 보기엔 내가 왕이 될 상인가?’
모단은 근엄하게 앞만 보며 마저 걸었다.
저보고 인상이 좋다 하는 이들은 이런 사람들뿐이다. 안 웃으면 쌀쌀맞아 보인다는 말을 지겹도록 들었다. 물론 10분만 같이 있어 보면 하나같이 말을 바꾸긴 했지만.
“영이 참 맑으신 것 같아요.”
모단은 속으로 비웃었다. 유아교사로 살아온 지 8년째, 5세 때만 해도 맑디맑던 영혼이 7세만 돼도 슬슬 흐려지곤 하는데 무슨.
‘애들도 그럴진대 영이 맑은 어른이 길 가다 채일 정도로 많을 리가 있냐? 기껏해야 조금 덜 더러운 정도겠지. 영이 너무 맑아도 세상 살기 힘들다고.’
남녀는 횡단보도 앞까지 따라오며 끈질기게 말을 붙였다.
“기운이 어두워 보여요. 집안에 우환 같은 거 있으시죠?”
‘우환은 무슨. 서른 맞아 인생 필 조짐이 보이고 있는데.’
다음 주부터 희명그룹 본사 2층에 있는 사내어린이집으로 출근하게 된지라, 좀 전에 들러 인수인계를 받고 사원증도 받아 나온 참이다.
몇 안 되는 친구분들께 전화해 ‘우리 딸 희명그룹 다니게 됐어’ 하며 연신 웃으시던 엄마를 떠올린 모단의 어깨가 슬며시 올라갔다.
“코에 있는 점이 복점이네. 그런 말 들어보셨죠?”
복점은커녕 레이저로 빼버릴까 심각하게 고민했던 점이다. 몇몇 미녀 연예인들을 따라 코 끝에
점을 찍는 게 유행이 된 이후 적잖은 오해와 스트레스를 받았었다.
보통 이 정도 무시하면 다른 사람을 찾아가게 마련인데, 오늘은 끈질겼다.
남자가 팔까지 붙들었다.
“그러지 말고 얘기 한 번만 들어보세요. 아가씨한테서 뭐가 보여서 그래요.”
비로소 고개를 돌린 모단이 그를 노려보았다.
눈이 마주친 남자는 물론, 옆에 있던 여자까지 움찔했다. 방금 전에 인상 좋다고 했던 걸 후회하는 눈치였다.
깨갱 하며 눈을 깔았던 남자가 민망했는지 얼른 얼버무렸다.
“바, 발치를 맴도는 게 있는데…… 개인가? 고양이인가?”
여자가 냉큼 말을 받았다.
“동물령이 붙었어요. 키우다 죽은 애인지 길 가다 죽은 동물을 봐서 붙은 건진 몰라도 아무튼 달고 다니면 아주 안 좋아요. 제사를 지내줘야 하는데…….”
“저기요.”
모단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우리 애가 보여요……?”
일부러 게슴츠레하게 뜬 눈은 영이 탁해 보이다 못해 음산하기까지 했다. 모단은 스윽 몸을 들이밀고 목소리를 깔았다.
“보여도 보인다고 하지 마세요. 얘는 자기 보이는 줄 알면 따라가거든.”
안색이 창백해진 여자가 주춤주춤 물러났다. 모단과 여자를 번갈아 살피던 남자도 뒷걸음질을 쳤다.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모단은 아무것도 없는 제 발치를 내려다보며 손짓했다.
“가자, 애기야.”
어느새 여자는 저 멀리 도망치고 있었고, 남자도 허겁지겁 뒤따라갔다.
가소롭다는 웃음을 흘려준 모단은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늦게 횡단보도로 발을 내디뎠다.
‘이거 괜찮네. 다음에 또 걸리면 한 번 더 써먹어야지.’
바로 버스가 오겠다 싶어 차가 오는 방향을 돌아보았을 때였다.
검은색 차 한 대가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는 게 보였다. 저 차가 아슬아슬하게 멈추려고 그러는 건지, 아니면 저를 아예 못 본 건지 순간 가늠이 되지 않았다.
끼이이이이익.
날카로운 브레이크 소리가 귀를 찔렀다. 모단은 한 박자 늦게 손을 올려 귀를 틀어막고 눈을 감았다.
드라마 같은 데서 차에 치일 때 눈 부릅뜨고 헤드라이트만 쳐다보는 주인공이 나오면 그럴 시간에 피하라고 욕을 했었다. 그런데 막상 당해보니 알 것 같았다. 비명은커녕 발도 움직이지 않았다.
먹먹해진 귀에 제 심장이 쿵쿵대는 소리만 들리다가, 조금씩 정신이 돌아왔다. 팔을 떨어뜨리자 주위의 웅성거림이 귀로 들어왔다.
바로 앞에 멈춰 선 차의 범퍼가 다리에 닿을 듯 말 듯했다.
모단은 가까스로 고개를 돌렸다. 차종도 모르고 가격도 모르지만 딱 봐도 비싸 보이는 차다. 옅게 선팅된 앞 유리 너머로 젊은 남자의 실루엣이 보였다.
‘사람을 칠 뻔했는데 내다보지도 않아?’
한 발 내딛는데 무릎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간신히 힘을 주고 걸음을 옮겼다.
“저기요.”
운전석 옆에 서서 똑똑 두드리자, 창문이 내려갔다.
눈이 부시다 못해 시릴 만큼 새하얀 남자의 옆모습이 드러났다.
“사고 날 뻔했잖아요. 분명 신호가 바뀌었는데 그렇게 밟으면…….”
귀신처럼 창백한 게, 저 사람도 어지간히 놀랐나 보다 싶어진 모단이 말투를 조금 누그러뜨렸다.
그런데 돌아온 건 뜻밖의 배은망덕이었다.
“비켜.”
누군가의 눈을 보고 가슴이 철렁해 보긴 처음이었다.
소름 돋을 만큼 강렬한데, 동시에 엉망으로 흐렸다.
“나 죽으면 네가 책임질래?”
차에 치인 것과 버금가는 충격에 정신이 또렷해졌다.
‘이런 허여멀건한 개자식을 봤나. 사람을 길에 떨어져 있다가 사고 유발할 뻔한 낙하물 취급을 해?’
심장이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벌컥대기 시작했다. 모단은 창문 안으로 손을 넣었다.
“져야지, 책임.”
잠금장치를 따고, 직접 문을 열어젖혔다.
“아무래도 내가 너 죽일 것 같으니까.”